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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존경하는 박윤선 목사, 박도삼 목사"

강인철 2009. 6. 27. 09:48

"내가 존경하는 박윤선 목사, 박도삼 목사"
한복협 5월 조찬발표회 박삼열 목사 발제문
 
박삼열
           
1. 한국교회 성도들의 손에 성경을 들려주신 박윤선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여기서 다 말하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왜 그분을 잊을 수 없는지’를 중심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박윤선 목사님이 교장으로 계시던 합동신학교에서 신학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와 박윤선 목사님과의 개인적 만남은 합동신학교 3학년에 재학하던 시절인 1983년 가을입니다. 박목사님은 당시 합동신학교를 세우고 몇 분의 교수님들과 함께 남서울교회 지하 교육관에서 불편함을 개의치 않고 신학생들을 가르치던 때입니다. 하루는 바울서신을 강해하던 시간이었습니다. 박목사님은 저를 가리키며 일어나 그 다음부분을 읽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에 끝났을 때 박목사님은 저를 복도에서 좀 보자고 했습니다. 지금 어디서 사역하고 있느냐고 물어오셨습니다. 인천의 어느 교회에서 일한고 대답했습니다. 그 분은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내년부터 내가 봉사하는 교회에서 일해 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목사님은 노량진 삼거리 장승백이에서 몇 분의 장로님들과 그분을 종경하며 따르던 몇몇 성도님들을 중심으로 새워진 장안교회에서 설교봉사를 하시던 때였습니다. 생각해 보고 말씀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가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평일에는 그 분 밑에서 공부하고 있었지만 주일만큼은 그 분 밑에서 또 야단맞으면서 조심스럽게 지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당시의 합동신학교는 서영일 박사가 표현한대로 출정직전의 특이한 군인들처럼 보였던 시절이었습니다. 매 채플 시간마다 박목사님은 단에서 삯군이 되지 말라고 큰 음성으로 야단을 치셨고, 고난이 유익이라고 거듭 강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주일만큼은 지금 봉사하는 교회의 사랑하는 교우들과 함께 사랑하고 격려하면서 지내고 싶었습니다. 다음날 저는 목사님께 아무래도 지금 있는 교회에 더 있어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고 목사님은 좀 더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음에 만났을 때 생각해 보았느냐고 물어오셨습니다. 저는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은 다시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몇 차례 하다가 저는 ‘목사님이 저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니 순종해야 하는 것 아닐까...’ 생각이 들어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그 다음 해부터 장안교회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목사님을 옆에서 뵈며 신학교를 졸업했고, 교육전도사, 전도사, 강도사 부목사를 거치면서 만 4년을 지내며 여러 가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무엇보다도 진실하고 뜨거운 분이셨습니다. 그런 그의 지도력에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장안교회의 경우 주일마다 성도들은 그 분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종종 저는 그 분 옆에서 사회를 보았고 목사님은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목사님은 이미 80을 넘은 연세였기 때문에 단에 오르시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곤 했습니다. 저렇게 숨을 가빠하시면서 어떻게 설교하실까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설교순서가 될 때까지 목사님은 의자에 앉아 고개를 깊이 숙이고 몸을 흔들면서 “주여! 주여!” 기도하시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불쌍히 여기어 달라’고 입 밖에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한참 어린 제가 생각할 때 당시 유명한 대부분의 부흥사들은 단에 오르면 이미 여유만만하고 당당해서 그것이 성도들에게 든든함과 함께 권위를 느끼게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목사님은 전 성경을 다 주석하신 분이시고 일평생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신 분이신데 무엇이 저토록 부족하게 만들고 또 간절하게 할까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찬양대의 찬양이 끝나고 목사님이 설교하실 시간이 되면 목사님은 주저함 없이 달려 나오듯 단에 이르러서는 몇 마디는 숨차게 시작하시지만 어느덧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며 간절하게 성도들을 다그치곤 하셨습니다. 아마도 생전의 목사님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 분의 설교 시간의 그 특유의 찡그린 모습과 일그러진 입모양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렇게 온 몸을 다해 외치곤 했습니다. 그 모든 힘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었고, 그 말씀을 전할 때의 목사님은 어느덧 뜨거운 영육의 소유자로 바뀌어 있곤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었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말씀을 잘 전하기 위해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구하다가 정작 단에 서면 뜨거운 영력에 쌓여서 전하곤 했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성경에서 비롯된 진실하고도 뜨거운 영력의 목사님이셨습니다.
   
    목사님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더욱 가까이 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한 번은 성탄절 전야 설교를 제가 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의 맨 앞자리에 목사님이 앉아 계셨던 것은 물론입니다. 그렇게 성탄절을 지낸 후 26일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신년 목회 계획을 의논하자고 당시 목사님이 사시던 개나리 아파트 사택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가서 내 놓으시는 차와 다과를 먹다가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제가 그만 “지난 성탄전야 저의 설교가 어땠나요?”라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목사님은 여러 번 헛기침만 하셨습니다. 사실 훌륭하지 못했던 설교였거든요. 목사님은 입을 여셨습니다. “젊은 사람이 설교 잘 하기 쉽지 않네!”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쭈었습니다. “목사님 설교,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랬을 때 목사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는 아주 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당신께서는 주일 설교를 위해 주초부터 하나님 앞에 계속 여쭌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하나요...?” 그러다보면 떠오르는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면서 하루 이틀 더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다른 본문이 더 이상 떠오르지 않고 그 본문이 점점 더 확실해 지면 그 말씀을 전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본문을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대하는데, 이미 목사님이 다 주석한 본문이지만 다시 더 깨닫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원문도 보고 다른 주석들이 있으면 또 참고하신다는 것입니다. 쉽지 않은 생활이라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어느 정도 연륜이 쌓이면 더 이상 주석을 보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성경은 해석이 되라고 주신 책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진실하게 대하면 다 해석할 수 있다. 그럼 해석은 어떻게 하는 것이냐? 분해가 곧 해석이다. 여러 번 본문을 읽다 보면 단락이 구분되는데 그 단락이 말씀하는 내용을 하나씩 정리하고 그것을 엮으면 그것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분해 = 해석’이라... 지금도 귀하게 간직하는 교훈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후 설교에 대해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설교는 성경공부와는 달라서 그 깨달음을 다 전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경우는 보통 3가지 정도로 대지를 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도 중요한데, “젊은 목회자는 그 말씀대로 살아본 경력이 짧기 때문에 그 말씀을 실감 있게 전하기 어려운데, 그러므로 좋은 실제적인 예가 있으면 토요일 저녁 부산까지라도 다녀올 생각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살면 반드시 꿀이 있는데 그것을 살아본 사람의 실제적인 예를 알아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목회를 아주 소중한 일로 생각합니다. 목회가 소중한 것은 그것이 성경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을 목사님을 통하여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전도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셨던 분입니다. 이 이야기도 어느 년말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이 부르셔서 갔습니다. 시중에 전도 교재 어떤 것이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왜 그러시느냐고 답하면서 당시 많이 쓰이던 학생신앙운동단체들의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이 하나 쓰시면 어떠냐고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은 먼데를 바라보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신은 그동안 한국교회 신학정립을 위해 달려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목회자들을 배출하려고 했고, 많은 신학자들도 배출된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쯤 정말 보고 싶은 것은 열심히 전도하면서 점점 성장해 나가는 성도들의 교회를 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부교역자로 있던 제가 새 해에 그런 점을 힘쓰기를 부탁하시는 말씀이기도 하셨습니다만, ‘그동안의 신학교육이 진정 교회로 하여금 생동적으로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이었나...’를 돌아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한철하 박사님이 당신은 목회자들을 존경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당신 같은 신학자들도 귀하지만, 그러나 강의실에서 칭의라는 한 주제를 한 학기를 사용하면서 강의하는 동안에 목회자들은 치열한 전방에서 이미도 그 칭의에 감격하며 영혼들을 건져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김명혁 목사님의 말씀 중에도 신학은 동이라면, 목회는 은이고, 성도들의 신앙의 삶은 금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분 모두 비슷한 말씀을 하셨구나...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저는 그 이후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전도를 위한 제2의 천성을 주시옵소서!”. 저는 지금 전도를 강조하는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박목사님의 노년의 안타까운 권면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목사님의 생애의 마지막 기간에 대해서는 전국교회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80세 후반에 하나님 나라에 갔습니다. 하늘나라 가시던 그 해도 설악산에서 전국의 교직자들을 모아놓고 간절히 하나님의 뜻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식사를 잘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수박물을 조금 드시고는 그 다음시간 설교하시곤 했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돌아오신 후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당시 목사님의 아들 박성은 교수가 의사로 있던 병원이었습니다. 목사님을 검진한 결과 간이 극도로 약해져있었습니다. 간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주초를 하신 분도 아니신데 간이 없었습니다. 다 닳도록 사용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온 힘을 다하신 것입니다. 목사님은 “주여! 주여!”를 계속하시면서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서영일 박사는 말하기를 박윤선 목사님은 박형용 박사님과 함께 하나님께서 한국교회 형성기에 세우신 두 거봉 중의 한 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를 세우실 때 목사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성경사랑함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저는 저로 하여금 그 분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부족한 목사이지만 그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려도 다짐하곤 합니다.

2. 사랑의 씨를 뿌린 농부 박도삼 목사님

    고 박도삼 목사님은 1957년부터 1992년까지 인천송월교회를 목회한 목사님으로 저의 선친입니다. 그는 황해도 선천 출신으로 6.25때 월남해 충청도, 경상북도에서 목회를 한 후, 1955년부터 인천제2교회에서 독립투사 고 이승길 목사님을 부목사로 보필한 후 송월교회를 36년 목회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2년 전 하늘나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사랑을 심은 농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영어권에서의 공부도 필요했지만 당시 한국교회 안에는 부자간의 목회를 잇는 문제에 대한 부정적인 염려들이 강하던 시절이어서 “제가 없을 때 목회를 마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씀 드린 후 영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선친께서도 그것을 좋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장로님들에게 “여러분들께서 자유롭게 많은 분들을 접촉하면서 후임자를 택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로님들은 여러가지 시도를 한 후 저의 선친을 원래 존경하며 좋아했던 터라 저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였는지 저를 불렀습니다. 그래서 제가 송월교회의 목회를 이은 지 17년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송월교회는 인천의 구도심지 자유공원 서북쪽 기슭에 위치해 있습니다. 6.25전쟁인 한창이던 1953년 4월 2째 주일 피난 중이던 몇 사람이 주일 아침에 같이 모여 기도한 것이 오늘의 송월교회가 되었습니다. 멀지않은 곳에 있던 부두가 있고 그 곳을 생활의 근거지로 사는 이들, 가까운 곳에 있는 시장에서 상업하는 이들, 그리고 만석동 일원의 공장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이들이 많았던 교회입니다. 그 곳에서의 박도삼 목사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정말 사랑하며 사신 목사님이셨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 목사님들이 그렇게 사셨겠지만 휴식이나 쉼이란 것을 모른 채 성도들을 계속 돌본 목회자이셨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성도들의 가정을 정말 사랑과 격려로 돌본 목회였습니다.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그를 회고하려고 합니다.
 
    그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에 그냥 들어오지 않았던 목회자이십니다. 제가 부임하면서 저는 열심히 심방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선친이 쉬지 않고 심방을 하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곧 뒤좇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많은 가정이 박도삼 목사님의 새벽심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새벽기도를 마친 후 골목골목 그 가정이 믿는 가정이든, 아직 믿지 않는 가정이든 상관 않고 방문했습니다. “이 집은 아침 뭘 해서 먹나?”라고 들여다보고는 “기도합시다!”라고 하면서 기도해 주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들은 가랑비에 속옷 젖듯이 모종의 신앙이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인 성도들이었고, 그렇게 하면서 신앙이 배양된 성도들이었기에 방금 신학을 마친 초보 목회자인 저로서는 따라가기 멀기만 한 사랑의 농부였습니다.
 
    그는 모든 성도를 일일이 격려할 거리를 찾았던 분이셨습니다. 부임 초기 저는 하루에 10~12가정을 심방을 했습니다. 가정들을 알아야 하겠기에 그렇게 했지만,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성장해 온 성도들인지라 저도 흉내라도 내야 하겠기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수없이 들은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박도삼 목사님은 저의 가정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정말 특별히 사랑했습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목회자의 사랑은 모든 이들에게 다 각별하겠지만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인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넉넉지 못한 동네, 배움의 기회 역시 많지 않았던 이들이어서 사회에서도 대접 받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이들이기 때문에 삶의 애환이 많았습니다. 그런 남편, 그런 아내, 그런 자녀들을 붙잡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며 그들을 격려할 때 정말 그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했으며 일어서도록 격려했던 것입니다. 그런 후에 같이 고개를 숙이고 드리는 기도는 그들로 하여금 눈물까지도 자아내게 했던 것입니다. 저는 암만 열심히 해도 목사님의 개개인을 위한 사랑만큼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는 개개인은 특별한 심정으로 사랑한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불평이란 것은 거의 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 칭찬을 많이 한 분이셨습니다. 목사님은 하늘나라 가시기 전 자리에 누워계신 기간이 있었습니다. 저와 제 아내는 아버님을 잘 모셔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 동안 느끼며 배운 것이 또 있습니다. 저는 가끔 밖에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면서 불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님, 아무개 장로님 왜 그렇지요? 아무개 목사님 왜 그렇지요?”그러면서 그들에 대해 불만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아버님은 다 들으신 후 “그래, 오늘 날씨는 좋든...? 다 감사하다!”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푸념을 하기 어려웠던 것이 당연합니다. 다른 이들에 대해 결코 비방을 하지 않았던 분이라고 선친을 알던 이들마다 말하는데 저는 그것을 가까이서 늘 확인하곤 했던 사람입니다. 아버님이 더 약해진 때의 일들입니다. 거의 기력은 쇄했고, 본능에 가까운 정도의 기력만이 남아있던 기간입니다. 가끔씩 예전의 알던 목사님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아무개 목사님은 좋은 분이었어! 참 고마운 분이었어!” 라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제가 “아버님, 다른 분들이 아버님이야 말로 훌륭한 분이였다고 말해요!”라고 말씀드리면 “아니야! 아니야! 나는 그렇지 못해!”라고 하시면서 손사래를 흔들곤 했습니다. 거의 본능적인 기력만 남아있을 때 나도 그런 인격을 보전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한 분이셨습니다. 2007년 4월 1일 오전 9시 경 아버님은 소천하셨습니다. 교회는 정성껏 장례를 치렀습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빈소를 찾았습니다. 쓰러져서 우는 분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한참 가난하던 시절에 자기 아이들도 먹이지 않고 우리에게 가져와 저는 그가 입에 넣어주시는 곶감을 먹었던 사람인데... 생전에 찾아뵙지 못했군요...”라고 흐느끼는 사람, “가난해서 결혼식을 못 올리겠다고 하니까 사모님을 시켜서 국수를 삶으라고 해서 저의 부부는 결혼식이란 것 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 “가난하던 때 저희 부부는 아이를 낳았지요. 그 때 목사님은 미역을 손에 들고 저의 집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그만큼 목사님을 찾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울던 사람 등등 많은 분들이 선친의 세상 떠남을 슬퍼했습니다. 장례식 때 교회의 장로님들과 청년들이 함께 추모 동영상을 마련했습니다. 배경음악으로는 ‘천국에서 만나보자’라는 찬송이 들리도록 했건 그 동영상의 제목은 “사랑을 심은 농부”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는 사랑을 씨앗을 우직하게 심어 나갔던 목회자였습니다.
 
    아버님이 소천하신 지 몇 달 뒤 우리교회는 새 교회당에 입당했습니다. 새 교회당의 머릿돌에 아버님이 가정마다 들려주었던 성경 구절을 새겨 놓았습니다. 시편 126:5~6절의 말씀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반드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넉넉지 못했던 인천의 이 지역 주님들은 이 말씀을 통해 소망을 보았고, 그러면서 점점 훌륭한 성도가 되어갔던 것입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이 글을 정리하면서 ‘금번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이 기획이 아주 유익하구나’ 느껴보았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미국에 가서 "The Call of Korea"라는 연설을 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엔 “내 눈에 새로운 조선의 모습이 보입니다. 장차 동네마다 기독교 정신으로 가르치는 교사들이 있는 학교가 보입니다. 지역마다 스스로 돕는 기독병원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입니다. 또 장차 조선인들 중에 훌륭한 목회자들이 배출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조선이 감화력있는 두 팔을 벌려 한 쪽으로는 일본을 껴안고 다른 한 쪽으로는 중국을 껴안고 저들 세 나라가 같이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환호하는 모습이 보입니다!”라는 연설입니다. 믿음의 연설이었고, 하나님께서 감화하셔서 발하게 했던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이 정말 미약하던 당시 드려졌던 그 기도의 내용처럼 우리에게는 귀한 목회자들이 있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선배들을 기리며...”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의 발표들이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도움이 될 줄로 믿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