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폴 투르니에 "치 유"
폴 투르니에의 치유
폴 투르니에 지음
CUP / 2007년 2월 / 301쪽 / 11,000원
▣ 저자 폴 투르니에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모두 잃고 거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고아처럼 자랐던 투르니에는 아무도 자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인격적으로 대접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그러던 중 열여섯 살에 그를 인격적으로 이끌어준 디브아 선생을 만나 인격에 눈뜨게 되었다. 그 후 제네바와 파리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였고, 1차대전 후 1921년 국제 적십자사 대표로 오스트리아에서 전쟁 포로의 귀국을 알선하고, 아동 복지를 위해서도 활동하였다. 1947년 이후 ‘인격의학’을 탐구하는 보세이 그룹을 주도하였으며, 수많은 환자들을 대화로 치료하였고, 현대 심리학과 기독교를 통합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의 심오하고도 실제적인 사상은 여러 저서들과 강연을 통해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주요 저서로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하여』, 『여성, 그대의 사명은』, 『모험으로 사는 인생』, 『비밀』, 『고독』, 『고통보다 깊은』 등이 있다.
▣ 역자
정동섭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에서 상담심리석사와 가정사역을 전공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대전 침례신학교에서 18년간 상담심리학 교수를 역임했다. 역서로 『서로를 이해하기 위하여』, 『모험으로 사는 인생』등 50여 권이 있다.
정지훈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인터넷 웹 번역사와 토익 강사, 국제교육문화교류재단(IECEF) 과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변역, 통역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 역서로 『부부가 꼭 알아야 할 결혼문제 100가지』, 『내면적 행복이 이끄는 삶』, 『영적 성장의 사다리』 등 10여 권이 있다.
▣ Short Summary
이 책은 정신과 의사이자, 내과 의사이며, 상담가, 심리 치료사였던 폴 투르니에의 환자들을 통한 실제적인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되었다. 그러므로 심리적, 육체적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비결을 보여 주는 동시에 육신을 지니고 사는 인간들에게 있어 심리적, 영적 영향력이 육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를 다양한 예들을 통해 분명히 보여 준다. 폴 투르니에는 의사이면서도, 신학자이며 철학자로서도 손색이 없는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 하나님의 창조와 타락으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본질과 의미를 깊이 깨닫게 하며, 전인 치유의 기쁨을 누리게 한다. 한편 우리의 일상과 신앙 속에 미묘하게 숨어 있는 마술적 신앙의 속임수를 깨닫게 하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과 사물과 사건의 의미를 여러 장에 걸쳐서 분명하게 보여 줌으로서 성경적 세계관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한다. 치유에 대한 감성적 영적 측면뿐 아니라 이성적 측면을 보여 주는 독특한 책인 것이다.
이 책은 우리의 생각을 뒤집어 보게 하는 폴 투르니에의 책들 중 가장 임상적이며 가장 실제적인 책으로서 의사들에게는 의학적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보여줄 것이며, 사역자를 위해서는 목회 상담과 설교를 위한 보배로운 조력자가 될 것이고, 독자들에게는 죽음이 주는 무거운 부담감을 신앙의 정신세계로 옮겨주는 영감 있고 교육적인 책이다.
▣ 차례
1부 : 성경에서 인간을 만나다
두 가지 진단, 인간 이해의 길잡이 / 평신도 의사, 성경에서 길을 찾다 / 과학은 하나님의 선물 / 의미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 / 창조는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표현 / 의술과 자연, 적인가 동지인가? /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삶 / 성본능은 자발적 내어드림의 상징 / 꿈은 영혼의 열망이며 성령의 부르심/ 모든 사건에는 의미가 있다
2부 : 마술 신앙과 치유
마술적 신앙의 미묘한 속임수 / 과학은 마술 신앙에서 인간을 해방했나? / 좋은 마술, 하나님과의 사귐 / 마술은 쉬지 않고 우리를 유혹한다 / 성경과 인간은 하나의 인격 / 성경과 인간은 하나의 인격 / 인격에 대한 영적 세계관을 회복하자
3부 : 생명, 죽음, 질병 그리고 치유
생명,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깨어나다 / 치유의 힘, 생명력 / 생명, 하나님의 축복 / 죽음, 하나님과의 분리 / 질병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문 / 치유에 있어서 의사의 소명 / 질병은 죄로 인한 결과인가? / 고난, 신앙 훈련을 위한 학교 / 치유는 하나님의 인내를 나타내는 기적 / 의사는 하나님의 거룩한 동역자이다
4부 : 선택
삶이내, 죽음이냐? / 최상의 축복, 예수님과의 사귐
폴 투르니에의 치유
폴 투르니에 지음
CUP / 2007년 2월 / 301쪽 / 11,000원
1부 성경에서 인간을 만나다
두 가지 진단, 인간 이해의 길잡이
어느 날 동료 의사의 부인이 제네바까지 나를 만나러 왔다. 제발 남편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무언가 두렵고 이상한 고민에 빠져 고통 받고 있으며, 얼마 전 패혈증으로 몇 달 간 입원했을 때는 그를 치료하던 의사들이 왜 치료가 잘 되지 않는지 의아해 했고, 간신히 병이 호전되자마자 이전보다 더 심하게 일에 몰두하고 있다고 했다. 이대로 간다면 또 재발될 거라고 호소하는 부인에게, 내가 그에게 편지를 쓰겠다 약속했고, 며칠 후 다행히 그 친구는 매우 반가운 마음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자기 인생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학창 시절 저질렀던 한 실수를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으면서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게 되었고, 결국 일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그것으로 인해 결혼 후에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는데, 아내에게 말할 수가 없어 항상 쉬지 않고 일에 몰두함으로써 곤란한 상황을 회피하려 했다. 그가 환자에게 합당한 치료비를 받으려 하지 않는 것도 어떤 의미로 보면 잘못된 속죄 행위이며, 혹은 자기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입원했을 당시의 이야기도 해주었다. 별로 심각하지 않은 질환이 급속하게 악화되어 심각한 패혈증이 된 것으로, 이 질병은 마치 그가 치러야 할 빚과 같은 의미로 다가왔다. 또한 이 사건으로 그때까지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지옥의 고통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질병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회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주치의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회진할 때마다 궁극적인 치료에 도움이 안 되는 혈액 배양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다가 나갔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해주었고, 나는 아무 말 없이 들었다. 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과학에 관한 문제라면 우리는 가르치고, 충고하며, 지도해야 한다. 그러나 영적 삶에 대한 문제라면 우리는 귀 기울여 주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기도하면 된다. 응답하실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긴 침묵 후에 나의 친구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질서가 회복되기 위해 자신이 고쳐야 할 것들을 간단하고 분명하게 얘기했다.
몇 주 후, 그 친구는 매우 감명 깊은 한 통의 편지를 내게 보냈다. 그가 받은 축복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찬송의 시였다. 친구는 내 연구실에서 한 결심을 실행에 옮겨 고해성사를 했고, 아내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휴가를 보낼 예정인데, 마치 두 번째 신혼여행과 같은 설렘을 느낀다는 감격을 전했다.
모든 질병은 두 가지 진단을 요구하는데, 하나는 과학적이고 질병 분류학적이며 병리학적인 진단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영적이며 질병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진단이다. 사물의 의미, 질병과 치료의 의미, 삶과 죽음, 세계와 인간과 역사의 의미에 관해 과학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설명해 주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은 바로 성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과학을 연구하는 것만큼이나 가치 있는 일이다.
평신도 의사, 성경에서 길을 찾다
우리는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성경으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다.“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삶과 죽음을 알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명과 죽음,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본성에 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의사는 실질적인 사람이다. 만약 의사에게 성경을 연구해 보라고 권하면, 아마 그는 이런 연구가 환자를 잘 돌보는 데 도움이 되느냐고 물을 것이다. 나는 날마다 그런 실제적인 사례와 씨름하는 사람이다. 환자들의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강하게 느낀다. 그래서 나는 성경 전체를 읽으면서 의학과 심리학, 질병, 그리고 삶의 처신과 관련된 모든 성경 구절을 노트에 적어 놓기로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성경 내용이 놀랄 만큼 풍부하다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 삶의 드라마이며, 열광할 만큼 흥미로운 책이다. 그리고 성경은 대단히 인간적이다.
성경의 두드러진 또 하나의 특징은 사실성이다. 성경은 인간이 지닌 온갖 고민과 위대함, 모든 확신과 의심, 고상한 뜻과 비열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성경의 극단적인 사실성은 종종 우리를 매우 난처하게 만든다. 인간의 모순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사실상 성경은 인간의 마음을 비춰주는 거울이며, 인간의 마음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은 모든 종류의 인간을 그분의 드라마에서 제외시키지 않으시며, 그 드라마 속에 거하신다. 성경은 아무것도 회피하지 않는다.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죽지 았었던가?”하는 욥의 고통스런 탄식에서부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십자가상에서 부르짖으신 예수님의 죽음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모든 감정과 공포와 열망을 표현하며, 또한 갈피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라는 선언이 들어있다.
보세이의 에큐메니칼 협회에서 국제적인 의사 회의가 조직되었을 때, 우리는 그곳에서 의사에게 적합한 성경 연구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의사로서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들을 일일이 성경에 비추어서 검토하였다. 즉 인격, 삶과 죽음, 질병과 죄, 치유의 의미와 목적, 신유의 은사, 환자와의 관계, 공동체 의식, 성, 사랑, 결혼과 독신, 건강법 등의 문제들을 다루었다. 나는 변호사나 예술인, 사회학자, 실업가, 농부, 교사, 주부들도 각각 자기 분야에 대해 성경에서 해답을 탐구하려는 의욕을 느끼게 되기를 기대한다.
과학은 하나님의 선물
많은 사람들이 성경과 과학이 근본적으로 대립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성경은 과학과 인간의 능력을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묘사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으로 이 선물을 다루어야 한다. 실상 과학 때문에 생겨나는 큰 재난은 과학의 산물이 아니라, 자기 능력을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여 사용하는 길들여지지 않은 인간 마음의 산물이다. 하나님의 선물인 과학 그 자체를 신격화할 때, 과학이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킬 때, 성경은 크게 책망한다.
과학은 환자를 더 잘 돌보라고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그러나 진정한 겸손 없이 과학과 의학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한다. 첫 번째는 표면적인 마음으로. 듣고 이해하며 자기 견해를 바꾸기보다는 자신의 한정된 지식으로 조언하기를 더 좋아한다. 한편 또 하나의 마음은 신비감을 느끼는 마음으로, 이러한 마음은 자신이 가진 지식의 결함과 한계를 의식하며 모든 사람들을 결코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로 본다. 이 두 가지 마음 중 보다 과학적인 것은 두 번째 마음이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교만하게 만드는 지식’의 위험에서 자유롭다고 우쭐댈 수 없다. 성경은 아무리 박식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 대면하여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성경적인 관점은 ‘신앙’을 실제적인 세계로부터 단절된 것이 아니라 인간 생활과 사회생활을 형성하며 구체화시키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율법을 그 문구 자체보다 전체적인 흐름에 놓여 있는 원리를 적용한다. 오늘날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지 찾아보고, 하나님이 주신 보편적인 영감으로 건강하게 사는 법, 결혼, 성, 심리에 대해 배우게 된다. 예를 들어 시편 32편은 정신 분석의 시편이라고 부른다. “내가 입을 다물고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온종일 끊임없는 신음으로 내 뼈가 녹아 내렸습니다”(시 32:3). 또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우리 삶에 필요한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는 말씀에서 ‘의’라는 말은 신과의 바른 관계와 사람과의 바른 관계, 자연과의 바른 관계, 즉 신의 목적과 일치하는 관계를 뜻한다. 행복의 법칙이 담긴 이러한 구절들은 정신 상담실에서 지속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의미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사건들의 맹목적인 연쇄가 있을 뿐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성경적 관점으로 보면 모든 일은 의미를 지닌다. 무의미하게 발생하는 사건은 없다. 세계의 창조와 그 종말도, 역사 속에서 일어난 가장 작은 사건과 인간의 삶에서 발생하는 어떤 일도 의미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일어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 또는 “아니오”로 반드시 대답해야 하는 질문을 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모든 상황에서 영적 투쟁을 하게 하신다.
일단 이러한 사고방식에 눈뜨게 되면, 사람은 인생의 참맛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것이 가슴이 뛸 정도로 흥미롭게 느껴진다. 어떤 환자가 누군가에게 선물받은 책인데,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며 모리악의 『예수의 생애』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이 책을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아요. 부모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에 안정감을 느꼈지만, 그분들이 돌아가신 지금 많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제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그런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기 위함인 것 같아요.” 이처럼 모든 것은 하나님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부르심을 찾는 기회가 된다.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계신 접근하기 어려운 우주의 지배자가 아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말씀하시며, 또한 적어도 우리의 모든 상황을 이야기할 때 들으시는 그런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물론 우리가 사물의 참된 의미를 찾아내는 데 있어 결코 실수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좁고, 지혜는 우둔하며, 우리의 시각도 어둡다. 또한 우리의 귀조차 너무 어두워서 하나님은 종종 집중적인 징표를 통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시기도 한다. 심지어 그럴 때에도 우리가 이 징표를 이해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므로 사물의 의미를 탐구하려면 경각심이 요구된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겸손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큰 실수를 하는 위험에 빠지는 때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그 순간이다. 사물의 의미나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우리의 실수나 의심을 막아주는 것은 아니며, 우리 운명의 신비나 창조주의 섭리, 또는 삶 속에서 생겨나는 모든 사건들을 해결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 삶에 새로운 의미를 준다. 비록 잘못되었다 해도,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노력한다면 보다 더 하나님과 가까워진다고 성경은 말해준다.
나는 환자들에게서 이것을 분명히 느낀다. 회의적인 환자들은 삼중의 고통을 받는다. 질병의 고통과 그 질병이 그들에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으로 고통스러워한다. 게다가 그들은 질병 때문에 죽을까봐 괴로워한다. 그러나 반대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의 신앙이 비록 그를 질병에서 해방시키지 못하고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감소시켜 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열심히 살아간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하나님을 찾고 그의 음성을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에게 매우 풍요로운 경험이 되기 때문에 자신의 질병을 감사하게 된다. 회의론자들은 질문할 것이다. “만일 이 질병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왜 내게 그 질병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기를 원하는 겁니까?” 그의 논박에는 비난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무익하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의 비통함은 그의 회복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창조는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표현
사물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을 회복할 때 비로소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순전히 과학적인 관점에서만 자연을 본다면 세계는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비합리적인 세계는 우리의 적처럼 느껴진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더위, 바람, 비, 태양, 세균, 독극물, 인간, 사회, 심리적 콤플렉스 따위로 마치 적의 군세에 쫓기는 것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짜증을 내고, 불평하며, 자신들을 방어하고 두려워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곤혹스러운 상황과 계속되는 위협 아래에서 산다는 말이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영향으로 육체적 건강과 정신 건강에 초래된 비참한 결과를 보게 되었다.
현대인들은 대부분 자기 운명에 대한 책임감을 잃어버리고 있다. 다시 말해, 외부의 적 앞에서 부득이하게 도망치거나, 그렇지 않으면 외부로부터의 도움을 소극적으로 기다린다. 그가 갖고 있는 이런 잘못된 태도는 주로 과학으로부터 얻은 세계관의 영향이다. 과학은 현대인에게 메커니즘만을 보여 주고, 내적 의미를 보여주지 못한다. 과학은 중력, 화학적 관계, 박테리아, 유전, 그리고 심리적인 합성물을 현대인을 둘러싸고 있거나 현대인 안에서 끊임없이 배회하는 맹목적이고 불변하며, 자동적인 에너지라고 본다. 이러한 일반화된 결정론은 비록 그것이 자신의 몸 안에서 작용될 때조차도 비인격적이고, 외적이며,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끝없는 원인과 결과의 고리일 뿐이다.
그러나 사물의 의미를 탐구하려는 사람들은 이러한 부정적인 모습 배후에 있는 위대한 긍정적 영감, 즉 정의와 사랑, 이해, 그리고 참된 삶에 대한 영감을 느낀다. 그것이 바로 요점이다. 의사인 친구가 어느 날 죽어가는 노부인이 누워있는 병상으로 나를 불렀다. 그녀는 눈에 초점이 없었고 이미 움직이지 않는 사물처럼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태까지 여러 의사들의 손을 거쳤으며 그녀의 심장은 여러 가지 강력한 강심제로 치료를 받아왔다. 동료 의사는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부드럽게 말했다. “부인, 당신은 의학만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부인 자신이 있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의사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그에게서 진실로 인간다운 모습을 보았다. 의학의 모든 기술적인 진보에도 불구하고 위대하며 언제나 변하지 않는 근본적 진리로 그녀를 불러들였다. 그 부인은 놀란 모습으로 이 의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를 심장병 환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 대해 준 최초의 의사였다. 그녀는 자신의 수동적인 태도에서 깨어나기 시작했고, 다시 한번 질병과의 싸움에서 자기가 맡은 역할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 말 한마디로 한 사람의 인간이 된 것이다.
카렐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과학은 일상생활의 어려움과 불편함을 기적적으로 없애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한계가 요구하였던 창조적이고 인격적인 노력도 함께 사라지게 했다.” 청년 의사 시절에 나는 치료학 교수 위키 박사의 조수였는데, 그분은 늘상 이렇게 말했다. ”만일 그 약이 해가 없다는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또한 아무런 치료효과도 없다는 말로 생각해도 좋다.“
의술과 자연, 적인가 동지인가?
처방이나 주사, 수술 등 여러 가지 기술 의학에 반대하는 자연주의자, 동종요법파, 신히포크라테스 학파가 있다. 기술 의학은 자연을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 생각하여 공격하고 지배해야 하는 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이 학파들은 인간을 자연과 유기적으로 결부시키는 감각을 지녔는데, 이들은 자연 법칙에 순응하는 지혜를 강조하며 공격적인 치료요법 너머의 예방 위생과 올바른 생활을 우선시한다. 많은 점에서 그들의 관점은 성경적 관점과 유사하다.
그러나 확고한 성경적 기초가 결여되어 있으므로 거기에는 자연 그 자체를 신으로 만드는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하여 자연주의가 하나의 종교가 되어, 극단적으로 열중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모든 의사들은 그 독단적인 주장에 노예가 되어 버린 집단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의약과 주사, 외과 수술 등을 마치 중대한 범죄인 양 취급한다. 과학적 의학이 인간을 너무 수동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하여 자연주의는 인간을 너무 능동적으로 만들어 마치 인간이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식사에 대해 무서울 정도로 염려하며, 운동을 무슨 장엄한 의식처럼 생각하고, ‘호흡조정요법’을 만병통치약처럼 실행한다. 과학주의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약을 처방하고, 자연주의자는 약을 전혀 처방하지 않는다. 전자는 건강한 삶의 유익을 빼앗고, 후자는 과학의 의학적 유익을 빼앗는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극단적인 관점이 인간의 삶과 자유의 풍성함을 제한시키는 것을 본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삶
성경은 우리에게 자연과 인간에 대한 바른 개념을 주며, 그것만이 인간을 완전한 모습으로 인도할 수 있다. 성경적 관점을 가진 사람에게는 자연 전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다. 자연은 창조주로부터 건강한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교과서이다. 그러나 또한 창조주로부터 자연을 극복하는 능력을 부여받았으므로 자연에 속박되지 않고 자연에 속해 있다. 이러한 견해는 의학의 가장 훌륭한 전통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전통이 현대의 여러 발견에 따른 흥분으로 잊혀져 가고 있다. 각 세기에서 최고의 임상의로 칭송받았던 사람들은 이러한 전통으로부터 끊임없이 영감을 받았다. 주의 깊게 그들은 언제나 자연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처방은 신중하게 했으며,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언제나 하나님께 귀를 기울인다. 그들은 자연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우리는 몸으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환자들 중 높은 이상에 차 있고, 야심에 불타는 사람들은 육체가 자신들을 얽매는 상황이 오면 대개 분개한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지나치게 충동적인 자신의 성격을 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질병도 역시 많은 증세로 신호를 보낸다. 몸이 삐걱거리면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그 경고 신호에 정신을 차려야 한다. 성경은 육체를 경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육체를 성령의 전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최고의 증거, 즉 하나님의 가장 두드러진 ‘영적’ 행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것이라고 본다. 그분은 사람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과 형체’를 취하사 고난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동참하셨다.
이러한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과 영적인 사랑을 다 포용하는 포괄적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에로스와 아가페’를 차별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기를 바란다. 성경의 위대한 연애시 아가서는 남자를 여자에게 이끌어 주는 정열과 마음이 끌리는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의 초조함을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는 인류와 똑같이 고귀하게 본다.
우리는 자기의 육체를 멸시하고 영적인 것을 귀히 여긴다고 공언하는 환자들을 자주 만난다. 사도 바울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이라고 말한 구절은 육체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금욕적 고행을 행하는 이유로 인용될 수 있으나 나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좋은 기수가 말고삐를 꽉 잡고 있는 것과 같다. 기수가 말고삐를 잡는 것은 말을 격려하고 인도하기 위해서이지 말을 학대하거나 마비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자위행위나 성욕을 거슬러 싸우는 일에 강박관념을 느끼는 많은 젊은이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거의 미친 듯이 육체를 억압하려고 한다. 이 잘못된 금욕주의는 점점 더 힘들어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 삶의 방향과 평형감각마저도 상실하게 만든다.
여기서 사도 바울의 다른 말을 인용해 본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이 말씀은 쓸데없는 싸움에 힘을 탕진하지 말고, 성경의 명확한 태도를 취하라는 말이다. ‘복음’이란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악이나 죄, 질병, 죽음보다도 강하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은 모든 유혹으로부터 관심을 돌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이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자신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일이다.
성본능은 자발적인 내어드림의 상징
예수 그리스도는 결혼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서 본능을 억압할 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유아적 퇴행 증상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분은 놀라울 정도로 남성적인 모습을 보여 주신다. 본능적 충동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약한 사람들은 결코 남성답다고 말할 수 없다. 바리새인들 앞에서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을 공개적으로 변호하시면서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고 하신 말씀은 자기의 본능을 잠재의식 속에 억제하고 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실 때나, 시몬의 분노를 개의치 않고 창녀에게 입맞춤을 허락하셨던 때 보여 주신 것처럼, 성을 멸시하는 청교도들의 태도와는 매우 달랐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가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여기서의 ‘사랑’은 그녀가 울면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으며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은, 전혀 사심 없는 사랑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에게는 이 사랑의 충동이 바로 신앙과 다름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태도는 성본능의 진실한 성경적 의미를 보여준다.
나는 ‘리비도’라고 불리는 성본능을 생명력과 최고 수준의 사랑을 위한 요구라고 의미 규정하는 정신분석학자들의 이론이 성경과 모순된다고 생각지 않는다. 프로이드에게 있어서 리비도는 성본능의 승화에 불과하다. 융에게 있어서 성본능은 영적 사랑이 다른 형태로 구체화된 것이다. 그 둘은 서로 관련이 있으며, 성경적 견해와 유사하다는 데 동의한다. 성경은 성적인 사랑을 귀하게 여긴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본능은 세속적인 우발적 사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이다. 남자와 여자를 결속시키고 그들의 만남이 몸과 마음을 아울러 피차간에 소유하는 진실한 교제를 가짐으로써 성본능은 두 사람이 가장 근원적인 영적 진실을 발견하도록 인도해 준다.
성관계는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것을 요구하며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한 성관계는 사람들이 일부일처제의 신성한 법규를 실현하도록 인도해 주었다. 우리가 아무리 친밀하거나 밀접하다 하더라도, 또는 그리스도 형제와의 영적 사귐이 아무리 친밀하다고 하더라도, 결혼까지 유보해야 하는 마지막 장벽이 있는데, 그것은 육체적 사랑이다. 바울은 부부간의 육체적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하게 말하고 있다.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고전 7:4).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이처럼 결혼 관계에서 몸을 제공하는 일, 즉 유보했던 최후의 방벽을 깨뜨리는 일은 자신의 전부를 준다는 의미를 상징하며, 궁극적으로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맡긴다는 의미를 상징한다.
결혼제도에 대해서 성경은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성적 하나됨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지만, 동시에 육체와 정신의 전적인 하나됨을 명시하는 말이다. 사도 바울도 창녀와 연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이 된다는 것, 즉 그의 전인격이 창녀에게 맡겨져 버리는 것이 된다고 썼는데, 이것도 바로 육체와 정신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성교 행위는 결혼이며, 그것은 인간적 행위이면서 동시에 신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
이와 같은 견해는 영과 육이 서로 배치되는 것 같은 성경 구절들과 부딪힐 수 있다. 그러나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육신에 속한 것을 생각하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하나니”라는 구절에서 ‘육신’이라는 말은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가진, 전인격으로서의 자연적 인간을 의미한다. 타락 이야기에서도 죄로 말미암아 자신을 하나님에게서 단절시킨 것은 전인격의 인간이다. 또 여기서 ‘영’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세례로 거듭난 새로운 인간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육신의 일’을 열거할 때, 육체에 관한 것(음행, 더러움, 술주정, 환락)만이 아니라 영혼과 마음에 관한 것(방탕, 우상 숭배, 마술, 원수 맺기, 싸움, 시기, 분노, 당파심, 분열, 분파, 질투) 도 포함시키고 있다. 또한 육신과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성령의 열매’를 말할 때는 사랑과 기쁨, 화평, 인내, 친절, 선량, 신실, 온유 등과 함께 육체적인 것과 직접 관련되어 있는 ‘절제’를 덧붙이고 있다.
꿈은 영혼의 열망이며 성령의 부르심
꿈도 성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모든 꿈의 기록들을 현대 정신 분석학에 비추어 다시 읽어보도록 의사들에게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적 관점에서 프로이드 학파와 융 학파 사이에 있는 관점의 차이를 고찰할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프로이드와 그의 제자들은 인간의 인격을 기계론적으로 보며, 인과 개념에 충실하며, 꿈 안에서 표출되는 본능적 충동을 ‘억압된 욕구의 충족’으로 본다. 이와 반대로, 메데르에게 꿈이란 ‘꿈을 꾸는 사람의 상황의 예증’이다. 그리고 이 정의를 채택한 융은 그의 많은 연구에서 우리를 인격의 목적적, 영적 개념으로 인도해 주고 있다. 이 빛 안에서 보면 꿈이란, 충동만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향하는 영적인 열망까지도 보여 주는 것이다.
나는 이 두 학파 모두에게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프로이드의 꿈 해석은 영혼의 일면만을 밝혀주며, 한정된 부분적 설명만을 해준다. 취리히 학파는 프로이드 학파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로 남겨두었던 새로운 사고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이 이론이 성경과 일치한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다. 예컨대, 야곱의 사다리 꿈은 메데르 박사의 정의에 꼭 맞는 해답이다. 그러나 특히 성경은, 꿈이 인간 영혼의 열망의 표현이며 또한 인간의 영혼을 향한 성령의 부르심이라고 보는 꿈의 목적론적 본질에 있어 융의 연구를 확증해 준다. 간단히 말해서 꿈은 자연 현상을 통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말씀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어떤 꿈에든지 프로이드 학파와 융 학파의 해석을 둘 다 적용해도 무방하다. 이것은 내가 가끔 적용하는 방법인데, 어느 쪽의 해석도 환자가 자신을 이해하는 데 분명한 도움을 준다는 것을 발견했다. 언젠가 내 환자 중 한 사람이 그녀가 벌거벗고 내 앞에 서 있는 꿈을 꾸었다고 털어놓았다. 그 꿈에 대해 프로이드 학파가 어떻게 해석할 지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그 꿈을 내게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벌거벗은 것이 섹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벌거벗은 진실’이라는 말을 쓴다. 자신의 벗은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아무런 꾸밈도 없이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완전한 신뢰로 모든 방어 태세를 벗어 던지고 자신을 맡긴다는 말도 된다. 나는 이 사실을 그녀에게 설명했고, 그녀는 즉시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요! 저는 지난번 상담 이후 줄곧 마음에 거리낌이 있었는데, 제가 선생님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어떤 자동차는 뒷바퀴로 구동(후륜 구동)하지만 어떤 자동차는 앞바퀴로 구동(전륜 구동)한다. 프로이드의 본능 충동은 후륜 구동 자동차와 같은 것이며, 융의 영혼의 영적 열망은 전륜 구동 자동차에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 묘사된 인간의 영혼은 사륜 구동 자동차와 같은 것이다.(이런 차도 실제로 존재한다!)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살아 있는 영혼이라는 단일 엔진이 뒤에서 미는 프로이드의 본능과 앞에서 끄는 융의 열망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본질적으로 행동하고 말하는 인간에게 본능을 부여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또 인간을 하나님 앞으로 부르시고 그들 안에 소명 의식을 환기시키는 분도 역시 하나님이시다. 전륜 구동 차와 같은 동물이나 천사와는 달리, 인간은 완전히 함께 연합된 두 힘이 동시에 움직인다. 그 힘을 함께 움직이시는 분이 유일한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사건에는 의미가 있다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3), “기한이 찼을 때에”(갈 4:4), “때가 왔사옵니다”(요 17:1) 등 성경에는 표징이나 그 비슷한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이러한 표현들은 사건들이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계시며, 역사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수님은 모든 사건을 이 역사의 의미와 연결시킨다. 자연에 의미가 있다면 세계도 의미가 있고, 세계의 역사도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의 역사에 의미를 주며, 또한 민족과 개인의 역사에 의미를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이런 개념은 성경 전체에 일관성 있게 흐르고 있다.
성경에서는 정치적인 역사도 의미를 지니며 전쟁에도, 승리에도, 패배에도, 혁명에도, 평화에도 의미가 있다. 내게 상담하러 오는 모든 사람은 그에게 일어난 일, 즉 질병, 불안, 슬픔, 감당할 수 없는 문제 등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런 사건들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신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먼저 행동하시고, 그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가 순종하며 하나님의 목적에 협력하기를 요구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법은 ‘율법주의적’ 의미를 다 벗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현재 겪게 되는 질병은 인류가 타락한 이래 세계에 군림하는 무질서의 증상으로, 하나님의 질서의 은혜로만 바르게 회복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들에게 성경이 그처럼 중요한 것이다. 의학은 사람들의 삶을 건강하게 유지하도록 돕기 위해 존재하며, 환자들이 자연의 근본적인 조화를 파괴한 결과로 당하는 손상을 최대한 치료해 주려고 노력한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사건과 질병은 중립적이고, 단순히 유쾌하거나 불쾌할 뿐이며, 무의미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구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아셨을 때, 하나님께서 나사로를 살려서 보여 주시려는 일을 믿음으로 이미 깨달으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2부 마술 신앙과 치유
과학은 마술 신앙에서 인간을 해방했나?
하나님은 우리 뜻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꿰뚫어 보고, 징조를 알아보며 그의 능력을 우리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마술이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인간의 구원을 과학에서 찾고자 하는 의사들의 안목으로 본다면 종교는 단순히 위로를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며 역사적으로 보면 원시인의 마술 신앙으로 설명될 것이다. 과학자들은 과학이 그 원시인들을 거기서 해방시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기독교도 단순히 종교라는 견해를 과학자들에게 확신하도록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기독교적 경험은 마술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만 한다. 성경의 모든 사건, 즉 이집트로부터의 탈출, 시내산에서의 하나님과 모세와의 대화,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적 탄생, 그의 치료 행위, 그의 죽음과 부활이 현대적 의미에서는 단지 신화와 같은 이미지로 존재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만약 신화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학에 의하여 인간이 해방된다는 주장일 것이다. 그 주장은 객관적으로 검토하면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분명 과학은 인간을 공포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한다. 현대인들은 그의 미개한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마음에 공포가 가득하다. 이 점에 있어서는 모든 심리학자들이 동의하며, 심층심리를 특별히 연구하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과학이 마술 신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했다고 말할 수 없음을 인정할 것이다. 그것은 이론이 아닌 증거이다. 공신력 있는 일간신문이나 가장 건전한 월간지를 보라. 주술이나 점성술에 대한 광고가 지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무신론자들은 ‘과학의 기적’을 만족스럽게 이야기할 것이나, 과학이 구세주라는 생각은 그 분명한 합리주의에도 불구하고, 마술에 대한 인간적 갈망의 결과에 불과하며, 신기한 것에 대한 인간의 염원, 구원을 요구하는 인간의 목마름에 불과하다. 과학은 질병, 생명, 죽음 등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인간들의 마음으로부터 없애지 못했다. 오히려 과학적 의학은 사물에 대한 이러한 생각들을 단호히 추방함으로써 환자들을 더욱 고독하게 만들고 그들을 의문 앞에 무방비 상태로 방치해 두었다.
좋은 마술, 하나님과의 사귐
오디에 박사는 “하나의 마술은 또 하나의 마술로만 대적할 수 있다”라는 결론을 끌어낸다. 마술적 심리상태는 처음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고통의 짐이었다. 단순히 사물의 의미를 부정한다고 해서 과학이 인간을 그 짐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그러므로 다른 치료 방법이 필요하게 된다. 오디에 박사의 말대로, 우리는 ‘또 하나의 마술’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좋은 마술’이 존재할 수 있을까? 존재한다면 이 ‘좋은 마술’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원시적 심리상태의 터무니없는 해석으로 잘못 표현된 답을 대신하는, 사물의 의미에 대한 진실한 답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해답이다!
우리는 종종 성경과 마술적 편견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성경과 마술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두 가지는 가장 첨예하게 서로 대립되어 있다. 이 문제를 놓고 성경 전체를 다시 읽어 보라. 당신은 거기서 원시적인 마술의 태도가 계시를 통해 주어진 진정한 믿음의 태도와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전 역사는 그 민족이 끊임없이 빠져 들어간 마술적 행위에 반대하는, 참 하나님을 섬기는 예언자들의 위대한 투쟁으로 가득 차 있다. 마술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일이요,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닌 다른 것을 구하는 일이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선량한 마술이 있고 우리가 그것을 ‘좋은 마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일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성경적 대답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이며 하나님과의 현실적인 사귐이다. 바울은 이 사귐이 이교도적 마술과 공존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선언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체화를 생생하게 설명한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이것은 합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단순한 시적 상징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을 살찌우는 살아 있는 실재이다. 합리주의는 인간의 이러한 신비한 갈망을 채워주지 못하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간을 합리주의라는 마술로부터 시작된, 그리고 그것을 포함하는 여러 가지 거짓된 마술로 몰아넣고 있다.
마술은 쉬지 않고 우리를 유혹한다
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거짓 신으로부터 다른 거짓 신으로 계속 전전할 뿐이다. 성경은 언제나 심리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치는 거짓 신들, 즉 돈, 사랑, 과학, 국가, 본능, 예술, 사업, 도덕, 또는 자기 자신과 같은 것들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라고 명시하고 있으며, 그런 것을 하나님이 계셔야 할 우리 마음의 중심에 두는 것은 금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이러한 거짓 신들을 만드는 일은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마술의 유혹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좀 더 교묘한 유혹도 있다.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받은 유혹의 이야기는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았음을 느끼셨다. 그렇다면 그분은 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셨나?
예수님은 광야로 가서 금식하고 묵상하셨다. 그러나 사람이 묵상에 잠길 때,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탄도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두 음성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특히 사탄이 자기의 유혹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인용할 때, 그 음성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자기의 신성한 사명을 성취하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악마적 방법을 사용하여 마술적 성공을 거두게 하려는 사탄의 가장 교묘한 유혹이다. 예수님은 이를 거부하고 그 유혹자에게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하셨다.
이처럼 마술은 이중의 유혹, 즉 노골적인 유혹과 교묘한 유혹을 사용하고 있음을 본다. 후자의 경우는 하나님 자신의 선물, 하나님 자신의 약속, 그가 우리에게 주신 신앙, 그가 우리에게 허락하신 여러 가지 경험, 하나님이 영감을 주신 성경,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교리 등을 마술적으로 사용하려는 데서 생긴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녕되이 일컫지 말라”는 말씀은 마술의 교묘한 유혹,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마술을 행하고자 하는 유혹을 막아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도, 틀림없이 자기를 십자가로 인도할 신앙의 길을 선택하고, 마술을 거부하신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가 잡히시던 밤, 베드로가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오른편 귀를 쳤을 때 예수님은 그 사람을 치료해 주시고 베드로를 꾸짖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술이란 본질적으로 영적인 힘을 지배하려는 욕망이요, 하늘과 땅과의 불순한 혼합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의 뜻조차 마술적으로 사용하려는 욕망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자기 자신을 두는 대신 하나님을 자기를 위해 부리려는 일이다. 마술은 하나님의 비밀을 꿰뚫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언제나 이 유혹을 거부하셨다. 그분은 여러 가지 기적에서, 병 치료에서, 죽은 자를 살리는 놀라운 사건에서 초자연적인 능력의 사용을 주저하지 않으셨으며, 더구나 공공연하게 이러한 일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로 하나님께 요청까지 하셨으나, 군중이 이러한 기적에 열광하게 되고 마술적인 힘에 들떠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그들을 피하여 홀로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몇몇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표적을 구했을 때 이를 거절하셨다.
이와 같은 성경의 기사와 그 밖의 다른 많은 사건을 상고해 보면서 우리는 마술 문제의 해결책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상반된 오류가 있는데, 하나는 마술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모든 종류의 대담하고 놀라운 행위를, 하나님이 그것을 요구하시는 때에도 멀리하는 것이다. 그러한 추세는 요즘 교회 안에 너무 흔하게 되어, 그것 때문에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이 매우 빈약해졌다. 반면 또 다른 오류는 하나님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열심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지 않으시는 때에도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그 결과 마술에 빠진다. 이러한 오류는 흔히 나타난다. 이들은 양쪽 다 자신의 체계를 지지하기 위해 그 체계의 기초가 되고 있는 산 체험을 의지하고 있는데, 체험과 체계 사이에 한 파장에서 다른 파장으로, 즉 신앙에서 마술로 가는 미묘한 스위치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그가 미신적 요소를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미신에 발 담그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스스로 느끼지 못하면서도 진정한 신앙과 마술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진정한 신앙과 마술을 동일시하여 그것들이 함께 합리주의적인 과학적 세계관에 대적하는 것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과 진정한 과학은 완전하게 조화되는 것이며, 그 둘은 인간을 마술의 유혹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힘을 합해야 한다.
인간이 이성을 택할 것인가, 혹은 마술과 신앙의 혼합을 택할 것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딜레마에 빠져버리게 된다. 즉 신비주의적인 갈망을 억누르고 합리주의자가 되든, 그의 이성의 소리를 지워버리고 신비주의자가 되든,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억제해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연역적 기능과 귀납적 기능이 조화롭게 결합되려면 진정한 딜레마, 즉 마술이든 유일한 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인간의 마음은 놀랍도록 크신 하나님을 다 알기에는 너무도 작은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한 가지 혹은 하나님의 선물 가운데 한 가지에 매달려 그것의 중요성이 전부인 것처럼 확대 해석하고 그 위에 삶의 체계를 세우려고 한다. 성경과 교회, 교리, 경험, 명상, 의식, 영적 선물, 그리고 자연의 선물, 이러한 모든 것들은 가치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틀 안에 하나님을 제한시킬 수 없다. 모리악은 말했다. “나는 결코 그리스도를 독점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성경과 인간은 하나의 인격
나의 환자들은 내가 가진 종교의 힘으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말해 줄 것을 기대한다. 또 내가 그들의 어려운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여 그들이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멍에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며, 인간 생활에 언제나 따라 다니는 오류나 걸림돌이나 고통이나 어두움으로부터 그들의 어려움을 말끔히 해결해줄 것이라고 상상한다. 유아적 태도, 즉 원시적 심상이 현대인 속에, 그리고 그리스도인 속에까지도 뿌리 깊이 남아 있음을 본다. 그러나 의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사람들로 하여금 운명을 받아들이도록 돕는 일이다. 즉 자기들의 역할을 수행하는 인격이 되는 것을 돕는 일이다. 그렇다면 인격이란 무엇인가? 인격이란 하나님께 의존함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책임을 지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으므로 영과 혼, 그리고 육체를 지닌 존재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다른 모든 종교의 신들과 구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인격적인 신이어서 인간에게 친히 말씀하시고 인간을 부르시는 분이라는 점이다. 성경 전체를 통해 우리는 인간을 부르시고, 그들이 빠져 있는 원시적 정신세계로부터 그들을 끌어내시는 하나님을 발견한다. 자기가 속한 종족이나 혹은 자연과 동일시하는 비인격적 실존으로부터 이끌어내어 인격적 명령에 인격적으로 복종하게 함으로써 그를 한 인격자로 만드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관점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유대 관계는 인격과 인격의 관계이다. 이 유대 관계야말로 인간을 완전한 존재로 만들고,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책임을 지는 존재로 만든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동물과 같은 습관적인 삶을 살지 않고 인격이 되며, 예언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사물의 참된 의미를 분별해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죄로부터 자유롭고 성숙하며, 창조적인 인간이 되게 하는 일이다.
내게 오는 환자들은 친절하게 하나의 인격으로 대우받고 싶어하며, 단순한 카드 번호로 취급받기를 원치 않는다. 고유한 이름은 한 인격의 상징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또 고레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이러한 말씀들은 성경의 인격주의의 본질을 표현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중요시되고 있음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에게 이름을 지어 주도록 하셨는데, 그것은 과학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또한 인간의 창조적 능력을 보여준다. 즉 인간이 각각의 사물에 고유한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 사물은 실재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매우 감명적인 이야기가 하나 있다. 동료 의사인 플래트너 박사가 최근 자신의 경험을 내게 말해 준 것이다. 어떤 한 임산부가 낙태하기 위해 그에게 동의를 요청해 왔는데, 그녀는 자기 뱃속에 있는 아이를 ‘세포들의 작은 집단’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개념은 과학이 우리에게 준 것이다. 어느 날 플래트너 박사가 이 부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만일 그 아기가 태어난다면 아이의 이름을 무엇이라 지을 겁니까?” 그랬더니 대화의 분위기가 즉시 바뀌었다. 그 부인은 입을 다물었다. 마음속으로 그 아기에게 이름을 주게 되자 그 아기는 더 이상 ‘세포의 작은 집단’이 아닌 한 인격이 되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것은 매우 놀라운 사건이었지. 나는 마치 창조의 대업에 관여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네”라고 플래트너 박사는 말을 맺었다.
인격에 대한 영적 세계관을 회복하자
이렇게 성경적 관점에서 성경적 인간관을 받아들인 의사는 결과적으로 인격적인 의사가 된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을 세포 집단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부름 받은, 무한한 가치가 부여된 영적 존재로 인간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격의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두 차원을 가진 의학이다. 우리가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과학적, 기술적 방법을 모두 사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동시에, 그 사람 안에 조화롭게 발달된 하나의 인격을 창조해 내려는 의학을 말한다. 나는 환자들이 스스로 어떤 창조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자신감을 가지게 된 후에 병세가 호전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 인간이란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만 참 인격이 되는 것이므로 인격의학을 하고자 하는 의사들은 그들이 성경적 계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진정으로 통합된 의학의 열쇠는 기독교 교리에서 발견된다.
오히려 세 차원의 의학을 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인간의 성장과 인격의 탄생 사이에는 융이 ‘통합’이라는 용어로 묘사한 또 하나의 다른 점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알려지지 않은 힘을 암시하는 성령의 힘이다. 사실 나는 ‘인격의 탄생’이란 예수께서 말씀하신 ‘물과 성령에 의한’ 새로운 탄생이라고 믿는다. 물은 화학적 혼합물로, 물질의 상징이다. 인격의 통합으로서의 새로운 탄생은 단순히 영적인 것뿐 아니라, 육체적 또는 심리적으로 다시 태어남을 의미한다. 인격의학은 ‘영적 의학’이 아니라, 세 가지 차원, 즉 육체적, 심리적, 영적 차원을 가진 의학이다.
오렐리 박사는 우리가 제 3기의 과도기에 서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첫 번째 시기를 신비적 참여의 시기, 두 번째 시기를 과학적 세계상의 시기, 세 번째 시기를 영적 세계관의 시기라고 부른다. 원시인은 아직 자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세계와 융합되어 있고, 세계의 힘이 자기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종족이나 자연 속에 신비주의적 경험으로 참여하는 상태이다. 두 번째의 시기에서 자의식이 생겨난 인간은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는 한 관찰자가 되고 자연은 그가 관찰하는 외부 대상이 된다. 그 자신이 관찰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제 세계는 인간이 멀리서부터 응시하는 그림이 된다. 즉 거대한 비인격적인 메커니즘으로서의 과학적 세상이 된다. 이리하여 인간은 자연 또는 공동체와 결부시켰던 유대 의식을 상실하고 한 개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진보는 르네상스와 그 뒤를 계승한 위대한 과학적 발전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진보는 현대인을 고독하고 고뇌에 빠지게 했다. 즉 인간의 마술적 기능에 대한 억압으로 생긴 내적 부조화로 인하여 고민하고, 공동체 의식을 다시 한번 되찾으려는 간절한 열망으로 인한 고뇌 때문에 고독하다. 세 번째 시기는 인격 통합의 시기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두 개의 기본적 기능, 즉 귀납과 연역, 사물에 대한 의미의 자각과 사회와 자연에 우리를 묶어 주는 연결 고리, 자신에 대한 자각과 사물의 메커니즘에 대한 자각 등이 통합되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미개한 원시적 정신세계로 퇴행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영적 비전으로 이끄는 인격의 보다 완전하고 조화로운 발달이다. 자연적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힘에 의지하여 마술적 기능이든 합리적 기능이든 자유롭게 통제해야 한다. 인간은 신비적 참여를 하거나 비인격적인 세계상에 의존하게 된다. 이 두 개념은 서로 환원될 수 없고 서로 용납되지 않아서 통합이 불가능하다. 인간은 전자든 후자든 어느 한 쪽을 억누름으로, 그 두 가지를 함께 충족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영적인 비전은 이미 단순한 세계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계상이라는 것은 관찰자인 인간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고 그에게 있어서 외적인 것이지만, 영적 비전은 인간이 인격적으로 그 안에 몸담고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영적 비전’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며, 과학과 종교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즉 우리가 사물의 메커니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과 사물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이것을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이제까지 우리는 이 두 기능을 별도로 발전시켜 왔으며, 이제 겨우 전인적인 인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탐구가 절박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의 인격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찾아내는 것이 오늘날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확실한 지침이 없이는 이 탐구에 착수할 수 없다는 것도 느끼고 있다.
영적이라는 것은 이 통합이 인간 스스로 성취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즉 인간은 통합하는 원동력인 성령을 필요로 하며 초자연적 인도와 성경적 계시를 필요로 한다. 사실상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나쁜 마술과 좋은 마술을 구분하는 문제로 다시 돌아왔다. 나쁜 마술은 원시인과 같은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상상하여 붙인, 사물의 의미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이루어지며, 좋은 마술은 하나님의 목적으로서, 하나님에 의한 계시가 그에게 있을 때에만 발견될 수 있는 사물의 참된 의미이다. 융의 말처럼,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원시적 인간은 억압하는 대신 그것을 다시 일깨워야만 한다. 그러나 융은 우리 안에 있는 원시인을 어떻게 야만인이나 현대의 신경증 환자들이 하는 것 같은 잘못된 해석에 빠지지 않고 다시 일깨울 것이냐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우리 안에 이런 통합을 가져오도록 하나님께 구하는 일 외에 다른 해법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것은 우리 의사들에게 우리 자신의 인격을 통합해야 함을 알려줄 뿐이다. 오직 우리가 예수님과의 사귐 속에 있을 때에만 세계와 사물에 대한 진정한 영적 세계관에 접근할 수 있다. 인격의학이 무엇보다도 의사의 인격과 연관되어 있다고 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체험하고, 그의 영감을 열심히 추구함으로만 도달할 수 있다. 우리를 인격적인 의사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환자에게 말하는 내용도 아니고,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며, 함께 기도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며, 우리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의 인격을 통합하는 것이다. 아픈 사람에게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도록 간곡하게 권고하는 것보다 우리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의사와 환자 모두를 위한 인격의 통합은 묵상에서 달성된다. 왜냐하면 묵상하는 일은 하나님에 의해 우리 자신을 발견하도록 인도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묵상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므로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우리의 삶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일을 위해서는 시간을 할애한다. 우리 자신의 문제들, 그리고 우리가 관심을 갖고 이해해 준다고 느끼게 될 때 우리에게 털어놓는 그들의 문제들, 그런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나님의 목적을 성실하게 추구하는 시간처럼 우리 삶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은 없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할 때 자기 혼자서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성경을 연구하고 같이 묵상하며 그들과 더불어 기도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하려면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반항적인 불평과 불복종의 결과로 길고 고난에 가득 찬 광야의 방랑 생활을 계속해야만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 내가 내 마음대로 말하는 것인지를 알 것이다.” 지성인들은 복종하기 전에 먼저 알려고 하며 확인하려고 하지만 성경의 관점은 그 반대이다. 먼저 자신의 삶 속으로 명령을 받아들여,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는 주님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실제로 완전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굳게 결심하고 노력할 때 그만큼 자유로운 인간, 한 인격이 되는 것이다.
크레스만 박사는 “의학의 목적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계속해서 말한다. “그것은 사람들을 외로움과 염려, 양심의 가책과 반항, 그리고 그들의 육체적, 심리적, 또는 영적 건강을 위태롭게 하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룩 박사는 이사야서의 성경 구절을 의사의 전적인 소명으로 본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 이러한 자유는 의사로서의 자신의 인격, 그리고 환자들의 인격의 통합으로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모든 거짓된 신앙과 모든 종류의 유아적 퇴행, 자기 삶과 책임으로부터의 도피 등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생명과 죽음, 그리고 질병과 치료의 참된 의미를 성경 안에서 찾아내기 위해 성경 연구를 계속해 나가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