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새롭게
헨리 나우웬 지음/윤종석 옮김
두란노/2000년1월/85쪽
▣ 저 자 헨리 나우웬
헨리 나우웬(Henry J. Nouwen, 1932~1996)은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예수회 사제이며 심리학자이다. 1932년 네덜란드의 네이께르끄(Nijkerk) 출생으로 1957년 예수회 사제로 서품을 받았으며 다시 6년 간 심리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2년간 신학과 심리학을 통합하여 연구하였고, 마침내 30대에 노틀담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1971년부터는 예일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81년 그는 자신의 풍요로움에 대한 죄책감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여 강단을 떠나 페루의 빈민가로 가서 민중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으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하버드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러나 영혼의 안식을 느끼지 못한 그는 마침내 다시 강단을 떠나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정신박약 장애자 공동체 라르쉬의 캐나다 토론토 공동체인 데이브레이크로 들어가 1996년 9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간결한 문장과 언어로 영혼을 맑게 울리는 그의 저서들은 세계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의 큰 호응을 얻어왔다. 또한 그의 책들이 세속적인 명예를 멀리한 채 그리스도적 사명감에 충실했던 삶의 과정에서 쓰여졌기에 물량적 팽창주의 속에 세속화된 현대 교회에 근본적인 도전을 주고 있다.
▣ Short Summary
과연 염려 없는 삶이 가능한가? 영적 자유를 향한 갈망을 느끼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며, 알맹이 없는 분주함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향하여 나우웬은 염려 없는 삶, 모든 것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묵상하고 이를 선포한다.
나우웬은 진정한 영적인 삶이란 염려가 없는 삶이라고 정의하며, 이는 바로 염려로 가득 찬 실존의 한복판에 성령이 활발하게 운행하시면서 우리를 진정한 자유인으로 재창조해 가시는 삶이라고 밝힌다. 따라서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하며 어떻게 이런 삶을 훈련하는지가 이 책의 구성을 이루고 있다. 구체적으로 먼저, 염려가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에 대응하여 예수님이 우리에게 제시해 주신 새로운 삶, 즉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삶은 무엇인지와 더불어 그 구체적인 훈련은 어떻게 하는가에 대해서 안내한다. 또한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사역의 구체적인 훈련의 길로 고독의 훈련과 공동체 훈련을 제시한 것이 이 책의 특징이며 나우웬의 필생의 주제이기도 하다.
▣ 차 례
머리말
1. "이 모든 것을"
서론/가득 차면서도/못다 찬 삶/결론
2. "먼저 그의 나라를"
서론/예수님의 삶/우리의 삶/결론
3. "구하라"
서론/고독/공동체/결론
맺음말
머리말
정신없이 어지럽게 돌아가는 삶의 한가운데서 우리는 때로 이런 의문에 부딪힙니다. “우리 삶의 진정한 소명은 무엇일까?” “어디로 가야 마음의 평안을 찾아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 “온갖 생각과 정서와 기분이 한데 얽힌 내면의 미로에서 우리를 인도해 줄 이는 누구일까?” 이런 의문들 속에는 영적인 삶을 살고 싶은 깊은 열망과 아울러 그런 삶의 의미와 실천에 대해 모호하기만 한 마음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무엇보다도 영적인 삶으로 좀더 깊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을 늘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서입니다. 진정으로 영적인 삶은 인간 조건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 인간 조건이란 모든 사람 -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 이 공통으로 지닌 것입니다
나는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첫발을 뗐습니다. 염려 없는 삶이란 불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뭔가 비정상으로 보일 정도로 염려는 우리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렸습니다. 걱정하지 않는 삶은 비현실적이며 - 더 심하게 말해 - 위험하다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염려는 우리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게 하고 미래를 준비하게 하며 임박한 위험에 대비하게 합니다.
1. “이 모든 것”
서론
영적인 삶이란 일상의 존재 이전의 삶도 그 너머의 삶도 아닙니다. 영적인 삶이란 지금 여기 아픔과 기쁨의 한복판의 삶입니다. 현재의 생활 방식에 대한 내면의 불만 및 ‘영적인 것’에 대한 갈망이 애매하고 모호한 상태에 머무는 한 우리의 삶은 전반적으로 우울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이런 모호하고 암울한 불만을 몰아내고 자신의 현 생활을 꼼꼼히 따져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정직과 용기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정직하게 가면을 벗고 숱한 자기 기만의 놀음을 용기 있게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정직과 용기가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해 줄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나 자신을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의 삶을 냉정하게 살펴본 결과 우리 상황을 묘사하는 말로서 두 가지가 떠오릅니다. 바로, 찬 듯하면서도 못다 찬(filled and unfilled) 삶이라는 것입니다.
찬 듯하면서도
우리 일상생활의 가장 분명한 특징 중 하나는 우리가 바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해야 할 일, 만나야 할 사람, 끝내야 할 과제, 써야 할 편지, 걸어야 할 전화, 지켜야 할 약속 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솔기가 터질 정도로 짐을 잔뜩 쑤셔 박은 가방 꼴일 때가 많습니다. 사실 우리는 거의 언제나 일정에 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바쁘지 않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바쁘다는 것은 지위의 상징이 되어 버렸습니다. 바쁘게 산다는 것과 중요한 존재라는 것이 아예 같은 뜻처럼 쓰일 때도 많습니다.
결과 지향적인 우리 사회에서 바쁘다는 것, 직업이 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정체(identity)를 찾는 주된 방법 중 하나입니다. 직업 없이는 경제적 안정뿐 아니라 정체감 자체마저 위기에 몰립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은퇴를 앞두고 커다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직업보다 우리를 더 구속하는 것은 염려입니다. 염려한다는 것은 아직 내 앞에 오지도 않은 시간과 장소를 뭔가로 잔뜩 채운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염려라는 단어의 구체적인 의미입니다. 사회가 이런 가공의 염려 유지에 아예 중독된 것 같아 보일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염려를 중단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비참한 사실은 우리가 거짓된 기대와 인위적 필요의 덫에 끼여 꼼짝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외면 생활과 내면 생활은 일과 염려로 철철 넘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을 가로막아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호흡하며 우리 삶을 재창조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못다 찬 삶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많은 일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렇게 자신과 남들이 부과한 기대에 어떻게 부응해야 할지 골몰하는 중에도 우리 속에는 깊은 불만족이 있습니다. 많은 일로 염려하며 분주하지만 진정으로 만족이나 평안이나 안정을 느끼는 일은 드뭅니다. 찬 듯한 삶 뒤에서 못다 찬 기분에 시달립니다.
이런 불만족의 경험을 좀더 묵상하면 여러 가지 다른 감정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권태, 적개심, 우울입니다. 권태, 적개심, 우울은 다 단절의 감정입니다. 그런 감정이 있을 때 우리는 연결이 끊어진 삶을 삽니다. 어디에 속해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대인 관계에서 이런 단절은 외로움으로 표현됩니다. 외로움은 두말할 것 없이 우리 시대에 가장 만연한 질병 중 하나입니다. 인간의 많은 고통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바로 이 무력한 단절의식입니다. 고통을 통해 이 세상 공존의 삶에 진정 한 부분이 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육체적 고통은 물론 정신적 고통도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가족으로부터 분리된 기분일 때는 금방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최근 과거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라곤 몹시 바빴다는 것, 모든 일이 매우 급해 보였다는 것, 그 일을 다 처리할 수는 없었다는 것, 그뿐이라고 솔직히 말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는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단절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결론
오늘날 염려란 많은 일에 매달리고 걱정하는 동시에 권태와 적개심과 우울과 심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을 뜻합니다. 모든 사람이 항상 그렇게 극단적인 방식으로 염려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이 어느 때, 어느 만큼은 그렇게 찬 듯하면서도 못다 찬 상태를 경험한다는 데는 전혀 의심이 없습니다.
염려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이 우리 삶을 조각조각 분열시킨다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계획하고 수행해야 할 많은 일들, 기억하고 찾아가고 대화해야 할 많은 사람들, 공격하거나 변호해야 할 많은 주장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사방으로 잡아당겨 중심을 잃게 합니다.
예수님은 찬 듯하면서도 못다 차 있고, 바쁘지만 단절되어 있고, 모든 곳에 다 있되 집에만은 없는 이런 상태에 해답을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본래 속한 곳으로 데려다 주기 원하십니다.
2. "먼저 그의 나라를"
서론
우리의 염려투성이 생활방식에 대하여 예수님은 세상일로 그렇게 바빠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염려투성이 삶에 대해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은 무게 중심을 옮기고, 관심의 초점을 고치고, 우선 순위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많은 것”에서 “한가지 꼭 필요한 것”으로 옮겨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복잡다단한 세상을 떠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되 모든 것의 참 중심에 확실히 뿌리를 두기 원하십니다. 그분은 마음을 바꿀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마음의 변화가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것 같아도, 실은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을 존재의 중심으로 옮기라 명하십니다. 다른 모든 것은 바로 거기에서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렇다면 이 중심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나라, 당신의 아버지의 나라라 부르십니다. 아버지의 나라를 구하는 마음은 또한 영적인 삶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 안에서나 성령의 삶을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삶이 대단히 바쁜 삶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예수님은 도무지 혼자 계실 시간을 내기 어려울 만큼 많은 활동에 몸담고 계셨습니다.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더라.”(막1:32~39)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사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하신 일은 아버지께서 하라고 보내신 일이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순종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의 삶의 중심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로서는 이해가 잘 안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순종이라는 말에 부정적인 의미가 많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의견을 짓밟고 자기 뜻만 강요하는 권위적인 인물을 생각나게 하는 말입니다. 어린 시절의 불행했던 사건이나 벌의 위협 때문에 해야 했던 고역스런 일이 기억나게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사랑 많으신 아버지의 말씀을 두려움없이 온전히 듣는 것을 뜻합니다. 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사랑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에 속한 모든 것을 아들에게 주시고(눅10:22) 아들은 자기가 받은 모든 것을 아버지께 돌려 드립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을 온전히 열어 보이며 모든 것을 - 모든 지식과(요12:50) 모든 영광과(요8:54) 모든 능력을(요5:19~21) - 그 손에 맡기십니다. 아들 또한 아버지에게 자신을 온전히 열어 보이며 모든 것을 아버지 손에 다시 돌려 드립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이 사랑 안에서 세상에 보내심을 입었고 아버지와의 그 사랑을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드렸습니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의 핵심인 이 총체적 사랑은 곧 성부, 성자와 동등한 분이신 또 하나의 거룩한 인격이기도 합니다. 그분에게는 인격으로서의 이름이 있습니다. 성령이라는 이름입니다. 성령은 사랑 자체이며 아버지와 아들을 영원히 감싸 안습니다. 이 영원한 사랑의 공동체가 예수님의 영적인 삶, 사랑의 성령 안에서 막힘 없이 아버지께로 향했던 그 삶의 중심이자 원천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바로 이 삶에서 자라난 것입니다.
우리의 삶
우리의 삶은 마땅히 예수님의 삶처럼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를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자유롭게 하기 위해 오셨을 뿐 아니라 또한 우리를 당신의 신성한 삶의 친밀함 속으로 이끌어 들이고자 오셨습니다. 그분이 오신 것은 아버지와의 사랑의 공동체 속으로 우리를 들어올리시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사역의 근본 목표를 인식할 때에만 영적인 삶의 의미를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삶이란 우리가 신성한 삶에 참예하는 자로 들어올려지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신성한 삶 속으로 들어올려진다는 것은 이 세상을 벗어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영적인 삶에 들어선 자들은 정확히 말해 예수님이 시작하신 일을 계속하여 완성하라고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영적인 삶은 우리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합니다. “세상에 있으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적인 삶을 잘 압축한 표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의 성령으로 완전히 변화되는 삶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모든 것이 종전과 똑같이 지속되는 듯한 삶입니다.
사실 영적인 삶을 살려면 심령의 변화, 즉 회심이 필요합니다. 회심은 내면의 갑작스런 변화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오랜 시간 고요한 변화의 과정을 통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기쁨의 자리든 슬픔의 자리든 그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가는 것입니다. 가난과 아픔과 고난과 고뇌와 심한 고통 그리고 내적 흑암마저 계속 우리 존재의 일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화시키시는 방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는 더 이상 권태, 적개심, 우울, 외로움이 없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우리 여정의 한 부분임을 알게 된 까닭입니다.
결론
“먼저 그의 나라를” 이 말에 새로운 의미가 더해졌기를 바랍니다. 이 말은 우리를 부릅니다. 예수님의 본을 좇아 순종하라고, 전부를 요구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세워진 공동체에 예수님과 함께 들어서라고, 그리고 모든 삶을 거기서 살라고 우리를 부릅니다. “그 나라를 구하는” 것은 무슨 상을 얻는 방법이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이 우리의 전 존재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3. "구하라"
서론
영적인 삶은 선물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들어올리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뭔가를 구한다는 것은 간절한 열망뿐 아니라 단호한 결의를 수반합니다.
영적인 삶은 인간의 노력을 요구합니다. 훈련 없는 영적인 삶은 불가능합니다. 훈련은 제자도의 다른 측면입니다. 영적 훈련의 실천은 우리를 하나님의 세미하고 부드러운 음성에 더욱 민감하게 해줍니다. 영적 훈련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그 세미한 음성에 더 귀기울이게 되며, 그 말씀이 들려 올 때 더욱 기꺼이 반응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안팎으로 너무나 많은 소음에 둘러싸여 있어 정작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그 음성을 제대로 듣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귀머거리가 되어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부르시는지도 모르고 어느 방향으로 부르시는지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영적인 삶에 훈련이 필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말씀하시건만 우리는 좀처럼 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듣는 법을 배우면 우리의 삶은 순종하는 삶이 됩니다. 어리석은 삶에서 순종하는 삶으로, 번잡한 염려로 가득 찬 삶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인도를 따를만한 자유로운 내적 공간이 있는 삶으로 서서히 옮겨가기 위해서는 영적 훈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지금부터 ‘하나님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두 가지 훈련을 소개하려 합니다. 둘 다 기도의 훈련으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하나는 고독의 훈련이요, 또 하나는 공동체 훈련입니다.
고독
고독 없이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고독이란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한 시간과 장소에서 시작됩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다고 해서 내면의 회의, 불안, 두려움, 나쁜 기억, 풀리지 않는 갈등, 분노의 감정, 충동적 욕구가 그 즉시 닫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 방해 세력을 제거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내적 방해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흔히 내적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외적 방해 세력을 이용하곤 합니다. 그러니 혼자 있기가 어렵다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닙니다. 자신의 내적 갈등을 대면하는 일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일 수 있습니다.
일단 홀로 시간을 보내는 일에 꾸준히 자신을 드리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민감함이 생겨납니다. 처음에는 온갖 잡념이 고개를 쳐듭니다. 그러나 점점 관심을 덜 받는 사이 그런 잡념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춥니다. 고독의 훈련을 위해 방이나 방의 한구석을 따로 정해두면 아주 유익합니다. 이런 준비된 장소가 있으면 따로 시간을 들여 준비할 것 없이 그의 나라를 구하기에 아주 좋습니다.
성경 말씀을 고독의 중심에 놓으면 그 말씀이 - 짧은 표현이든 문장 몇 개이든 긴 본문이든 - 우리가 딴 방향으로 빗나갈 때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기준점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과 단둘이 보내는 시간을 훈련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공동체
고독의 훈련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동체 훈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여기서 공동체 훈련이란 사람들 사이에 함께 진정한 순종을 실천할 수 있는 자유롭고 빈 공간을 만들려는 노력입니다. 공동체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서 서로에게 매달리는 오류를 피하고 하나님의 자유케 하는 음성을 들을 공간을 확보하게 됩니다. 이 공동체 훈련의 구체적인 형태를 한 가지 소개하고 싶습니다. 함께 듣는 연습입니다. 말 많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함께하는 시간을 대개 말하는 데 소비합니다.
공동체 훈련은 그런 우리에게 함께 침묵하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이 훈련된 침묵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침묵이 아니라 우리를 나란히 부르신 주님에게로 함께 시선을 모으는 침묵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를 인간이 만들어 낸 정체에 초조히 매달리는 자들로서 아는 것이 아니라 같은 하나님께 아주 친밀하고 독특한 사랑을 입은 자들로 알게 됩니다. 공동체 훈련은 언제나 우리로 인종, 성별, 국적, 성격, 나이의 벽을 뛰어 넘게 하며,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서로 앞에서 우리의 참 존재를 보게 해 줍니다.
공동체 훈련은 우리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우리 힘으로 깨달을 수 없는 크고 깊고 풍성한 진리, 아름다움, 사랑의 소리를 서로에게 전해 주는 통로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결론
고독의 훈련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공간을 발견하게 됩니다. 공동체 훈련을 통해 우리는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