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공부9단 오기10단(박원희 지음)
공부9단 오기10단
김영사/2004년7월/267쪽
▣ 저 자 박원희
1986년에 태어나 대전의 중학교를 졸업한 뒤 민족사관고등학교에 들어갔다. 2004년 2월, 민사고를 2년 만에 수석으로 조기졸업하고 곧이어 하버드, 프린스턴, 스탠포드, 코넬, UC 버클리, 존스 홉킨스, 듀크, 미시건 주립대, 워싱턴대, 노스웨스턴대 등 미국의 명문대학 10곳에서 동시에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박원희는 미국 대학의 교양과정을 미리 고등학교에서 이수하는 11개AP(Advanced Placement 대학 학점 사전취득제) 과목에서 모두 5.0 만점을 받았다. 미국 대학 진학 적성검사인 SAT Ⅰ은 1600점 만점에 1560(99퍼센트)점을 받았고, 6개의 SAT Ⅱ 과목에서도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박원희는 최종적으로 하버드를 선택했다.
▣ Short Summary
전 일간지와 잡지를 동시에 장식한 기사가 있었다. 한국의 학생이 아이비리그를 비롯한 미국의 명문대학 10곳에 동시 합격했다는 이야기였다. 민족사관고등학교를 2년 만에 조기 졸업한 17살의 어린 소녀이고, 외국에 유학이나 어학연수 한 번 다녀오지 않은 순수토종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 학생의 이야기는 더욱 많은 화제를 모았다.
국내사상 초유의 미국 대학 합격기록을 세운 그녀는 이로써 명실공히 대한민국의 공부지존으로 등극하였다. 어떤 기사에서는 그녀를 보고 ‘천재소녀’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박원희는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천재들에 질리고 치인 사람이며, 그 천재들과 경쟁해서 이기려다 보니 더 열심히 했을 뿐이라고 한다. 자신은 단지 목표를 최고로 잡지 않은 적이 없었을 뿐이라고. 한마디로 최고가 되겠다는 ‘오기’와 ‘열정’이 박원희의 오늘을 만들어낸 것이다. 공부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한 사람으로서 그녀의 첫 번째 조언은 노트정리의 제왕이 되라는 것. 그 외에도 독특한 복습이론, 시간경영 노하우, 쪽지 이용법, 안 되는 공부 재미있게 하는 법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자신의 피눈물나는 영어 정복법을 알려주고 있다. 이 외에도 이 책에는 유학지망생을 위한 ‘한국토종의 SAT 시험 정복법과 미국대학 공략법’이 있으며, 학부모를 위한 페이지로 원희 엄마 이가희 씨의 특별기고 ‘우리 아이 공부 잘하게 만드는 법’이 담겨있다. 박원희는 중학교 입학 후 잠시 학원을 다닌 것을 제외하고는 내내 공부의 범위나 공부 방법을 혼자 힘으로 정하고, 틀린 문제는 혼자서 그 이유를 끈기 있게 추적함으로써 스스로 해법을 찾아간 것이다. 이를 통해 박원희는 ‘공부의 생존력’을 키웠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천재 아닌 사람이 천재들과의 생존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고 도전했는가를 보여주는 전투의 기록이기도 하다.
▣ 차 례
프롤로그
1. 왕따에서 하버드 입학까지
2. 꽃보다 아름다운 시절
3. 나의 피눈물 영어 정복기
4. 공부에 왕도는 없지만 정도正道는 있다
5. 한국 토종의 미국대학 공략법
특별기고 - 원희 엄마 이가희 씨의 ‘우리 아이 공부 잘하게 만드는 법’
특별부록 - 하버드․프린스턴대학 입학 원서에 첨부한 에세이
왕따에서 하버드 입학까지
왕따의 세계
내가 속칭 ‘왕따’가 된 건 중학교에 막 입학한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날은 반장 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초등학교 때 같은 영어학원을 다닌 친구가 나를 추천해서 반장 후보에 올랐고, 나는 당당한 목소리로 출마의 변을 밝혔다. “저를 뽑아주신다면 초등학교 때 전교 회장을 했던 경험을 살려서 우리 학급을 위해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자 어디선가 이렇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흥, 촌구석 초등학교에서 전교 회장한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촌에서 온 게 되게 잘난 척하네.” 그 날 나는 보이지 않는 비웃음 속에서 세 표 차이로 떨어지고 말았다. 대전에 있는 작은 중학교. 청주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 입학 직전 전학을 온 내게 이 곳은 왠지 낯설었다. 게다가 나는 전학 문제로 시기가 맞지 않아 입한 전에 배치고사를 치르지 못했다. 중학교 생활의 명함이자 나를 평가할 객관적 근거인 배치고사 점수가 없으니, 반 아이들 기준에서 ‘촌’ 출신인 내가 소시적 전교 회장 얘기를 해봐야 ‘잘난 척’ 밖에는 안 되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사건은 다음 날 일어났다. 영어시간이 끝나자 J라는 아이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야, 너 아까 ‘쏘리’ 발음을 되게 굴리더라? 미국에서 살다오기라도 했냐? 진짜 재수 없어!” J는 마치 내가 죄라도 지은 듯이 비아냥거렸다. 그것이 왕따의 시작이었다. J는 앞 번호 여자아이 7명을 규합해 자칭 ‘8공주’를 만들었다. J가 진두지휘를 하면 나머지 아이들이 파도에 휩쓸리듯 장단을 맞추는 격이었다. 교실 안에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갑자기 텃새들의 무리에 낀 한 마리 철새가 된 기분이었다. 부모님이 걱정하실까봐 학교 일은 입밖에도 낼 수 없었다.
악바리, 필기의 여왕 그리고 전교 1등 굳히기
어느 토요일 저녁, 나는 아버지에게 짜증을 부렸다. 며칠 후 체육시간에 ‘도움닫기 멀리뛰기’ 시험을 볼 텐데 영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80점 만점인 실기점수에서 70점도 못 받을 것 같았다. “그럼 아빠랑 같이 연습하러 갈까? 연습해서 안 되는 것은 없단다.” 집 앞 놀이터 모래판에는 아무도 없었다. 두 팔을 힘껏 휘두르며 뛰어가 모래판과 경계를 이룬 디딤판을 딛고 뛰어올랐다. 꽤 멀리 날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디딤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주저앉아 있었다. “원희야, 너는 땅에 떨어지는 순간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것밖에 못 뛰는 거야. 일단 두려움을 없애야 해. 땅을 보지말고 하늘을 보고 한 마리 새라고 생각하며 뛰어봐.” 마침 별이 많이 뜬 밤이었다. 아버지 말씀대로 힘차게 뛰어가 도움닫기를 하는 순간 별이 빛나는 하늘을 향해 ‘점프’했다. 용기가 하늘로 치솟는다는 말이 아마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 날 밤 나는 수십 번이나 모래판 위로 뛰어 오르는 연습을 했다. 드디어 체육시간. 심호흡을 하고 하나, 둘, 셋! 앞으로 쏜살같이 튀어나가 디딤판을 딛고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정말로 내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2미터 40센티미터! 75점!” 이 일을 계기로 체육 실기시험에 좀 더 자신감이 생겼다.
100미터 달리기나 던지기 같은 종목은 연습을 해도 잘 되지 않았지만, 줄넘기는 연습 덕을 톡톡히 봤다. 학교 앞에서 학원 차를 기다리는 자투리 시간 10분.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루에 단 10분씩만 연습해도 줄넘기 실력이 늘어가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2학년 때는 장애물 사이로 축구공을 몰고 반환지점까지 갔다오는 시험이 있었다. 이 시험을 위해 며칠 동안 밤마다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몰고 다녔다. “야, 너 그렇게 연습하더니 결국 만점을 맞는구나? 정말 악바리야!” 내가 밤마다 그렇게 연습하는 걸 본 친구 하나는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 때부터 친구들은 나를 ‘악바리’라고 불렀다. 내가 이렇게 악바리처럼 체육 실기시험에 매달린 것은 ‘전교 1등’ 타이틀을 단 한 번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단 한 번은 제외하고 계속 전교 1등을 하자, 많은 친구들이 물었다. “원희야, 너 공부 잘하는 비결이 뭐니? 무슨 과목을 과외하니?” 나는 그 질문에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글쎄, 공부에는 왕도가 없는 것 같애. 그리고 특별히 개인 과외는 받지 않았어.” 그러면 아이들은 뭔가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서곤 했다. 공부에는 관심이 없지만 공부의 ‘비법’에는 관심이 많은 아이들이 참 많았다. 하지만 어떻게 공부에 비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농부가 씨를 뿌리고 밭을 일구듯 그저 정직하고 우직하게 해야 하는 게 공부인데.
수학을 못하는 아이, 혼자 공부하는 아이
어머니는 내 성적표를 보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국어․영어․사회․과학 등의 다른 과목은 거의 100점을 맞았는데, 수학만 아슬아슬하게 91점을 맞아온 것이다. 91점이면 비교적 괜찮은 점수였지만, 전교 1등에게 ‘아슬아슬한 91점’은 약간 문제가 있었다. 나는 솔직히 수학에 자신이 없었다.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 되자 어머니는 내 손을 끌고 수학경시학원으로 갔다. 수학경시반에서 하루를 공부하고 나자 더욱더 수학에 자신이 없어졌다. 수학 문제가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수학경시반에서 함께 공부하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대단해 보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학경시를 공부해서 고등학교 수학 문제도 척척 푸는 아이, 벌써 경시대회 메달을 몇 개씩 딴 아이,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어려운 기하문제를 술술 푸는 ‘천재형’ 아이까지 있었다. 수학 경시반에서 본 첫 시험점수를 잊을 수가 없다. 나는 100점 만점에 겨우 38점이었다. 내가 속한 반에서 최하위 점수였다. 고등학교 과정의 수학 문제들은 내게 넘기 힘든 벽 같았다. 하루는 앞에 나가서 문제를 못 푸는 내게 선생님이 대놓고 질책을 하셨다. “넌 경시반에서 공부하면서 이런 것도 못푸냐?” 칠판 앞에서 분필을 들고 진땀을 흘리던 나는 선생님의 말 한 마디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 때부터 내 생활의 무게중심을 수학에 맞췄다. 수학 경시반에서 내주는 숙제는 무조건 ‘그 날의 할 일 1순위’로 정했다. 잘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를 다 풀고 학교 숙제까지 하다 보면 새벽 3시를 넘기기 일쑤였다. 문제가 아무리 어려워도 답이나 풀이과정을 보지 않고 끝까지 내 힘으로 풀었다. 끝까지 풀리지 않는 문제는 풀이과정을 보며 꼼꼼하게 이해한 후 다시 풀어보았다. 혼자서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체크해두었다가 선생님에게 달려가 물어보고 또 물어봤다. 근 1년간 수학에 매달린 결과 내게도 기록적인 일이 생겼다. 2학년 말에 열린 대전시 과학교육원 주최 수학과학교실에 참가해 9등을 한 것이다. 9등이면 ‘금상’ 메달 수상권이었다. 더욱 믿을 수 없는 사실은 수상자들 중 2학년은 나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다 3학년이라는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수학 때문에 의기소침해지는 일은 이제 없을 것 같았다.
겨우 중학생이었지만 내게도 나름대로의 공부 철학과 공부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었다. 수학경시처럼 선행학습이 필요한 경우에는 학원을 다니는 것이 좋지만, 내신 과목은 나 혼자 공부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학교 내신은 늘 자신 있었다. 사실 처음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내신성적을 관리해주고 선행학습을 하는 T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 그 때 학교에서 배운 내용과 학원에서 배운 내용을 종합해 매일 복습하고 노트 정리하는 습관을 들였다. 굳이 내신성적 관리만을 위해 학원을 다닐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학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이 좋았다. 학교 내신성적을 올리는 데는 성실함이 최고다. 명성있는 학원이나 학벌 좋은 선생님에게 의탁하기보다 스스로 공부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배운 내용을 자기 스스로 소화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기 때문이다.
토플에 헤딩하고 민족사관고등학교로!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될 때까지 내 꿈은 국제 변호사였다. 나름대로 정해둔 진로가 있다면, 집에서 멀지 않은 대전외고 일본어과를 거쳐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치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생의 진로가 완전히 뒤바뀌는 사건이 생기고 말았다. 언제나 나보다 앞서서 목표를 높게 잡아주 시던 어머니가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신 것이다. “원희야, 너 민족사관고등학교에서 공부해보면 어떨까?” 특이한 이름의 학교에 들어가라는 것보다 ‘유학’이라는 단어가 더 충격적이었다. 강원도 횡성에 있는 민족사관고등학교(이하 민사고)는 전국의 수재들을 뽑아 영어로만 수업을 한다고 했다. 그러자 옆에서 신문을 읽고 계시던 아버지가 기발한 제안을 하셨다. “네가 민사고에 지원하면 아빠가 병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갓 쓰고 한복 입고 진료할게. 어때? 재밌을 것 같지 않니? 아버지는 청주에서 안과를 운영하고 계셨다. 아버지까지 이렇게 밀어주시는데 더 이상 고집부릴 여지가 없었다. 민사고 특별 전형에 보내야 할 서류로는 중학교 성적표, 선생님들의 추천서, 토플 성적, 그리고 영어로 쓴 자기소개서(에세이)가 있었다. 그 중 가장 자신 없던 것이 ‘토플 성적’이었다. 서류 마감 전까지 남은 기간은 두 달여. 시간이 없었다. 학원에서 이론을 배우기보다 나 혼자 실전 문제를 많이 풀어보는 편이 훨씬 나았다. 문제를 풀고 나서 채점을 할 때, 내가 왜 틀렸는지 반드시 체크했다.
토플 성적표가 배달되던 날, 나는 뜻밖의 점수에 너무 기쁜 나머지 집안이 떠나가라 토플 점수를 외쳤다. 에세이 5.5점에 총점 263점. 서류 전형은 의외로 쉽게 통과됐다. 2차 전형은 심층면접이었는데 영어와 수학, 그리고 선택과목을 하나 정한 후 면접관들 앞에서 테스트를 받는 형식이었다. 심층면접 대기실에는 쟁쟁한 아이들만 모인 것 같았다. 자기만의 영어공부법을 책으로 낸 아이, 각종 경시대회에서 수상한 아이, 특별활동으로 여러 번 신문지상에 오른 아이 등등. 약간 기가 죽어 있는 찰나 내 차례가 됐다. 수학 심층면접실에 들어간 나는 첫인사부터 씩씩하게 영어로 했다. 여긴 영어로만 공부하는 학교니까 수학 면접도 당연히 영어로 치르는 줄 알았던 것이다. 면접관에게 해당 번호의 문제가 적힌 종이를 받아 칠판에 풀기 시작했다. 면접관이 영어로 물어보면 나도 영어로 대답하면서 세 문제를 다 풀었다. 내 영어가 유창한 건 아니었다. ‘빼다’는 말이 ‘subtract'인데 순간적으로 헷갈리는 바람에 ’substract'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단어가 틀리건 말건 내 목소리는 경쾌한 톤을 유지했고, 내 표정도 끝까지 싱글벙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문제를 다 풀고 나자 면접관 한 분이 이렇게 물었다. ”박원희 양, 미국에서는 얼마나 살다왔죠?“ ”네? 저는 미국에서 살다온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면접관들 모두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그 날 수학 심층면접실에서 영어로 문제를 푼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토플 점수도 낮고 해외 거주 경험도 없으면서 씩씩하게 영어로 수학 문제를 풀다니 그 알량한 영어 실력으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빈 셈이었다. 다음 심층면접은 영어였다. 면접관은 미리 나눠준 지문 중 한 문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지문은 항공기 추락에 관한 기사였는데, 하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민사고에 가지 못하게 된다면 그건 아마도 영어 때문일 것이었다. 다른 지원자들에 비해 낮은 토플 점수와 영어 면접실에서의 긴장감이 떠올라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침내 최종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 아침부터 거의 10분 간격으로 민사고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오후가 되어 게시판에 합격자 명단이 뜨는 순간 난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건 분명 내 이름이었다. 미국으로 유학 가는 내 모습을 그려보았다. 막연한 설렘으로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한국 토종 거북이의 영어 따라잡기
봄기운이 완연한 민사고 교정에서 두 명의 친구들과 나는 서로 ‘꼴찌’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1학년에 올라와 치른 두 번의 모의 SATⅠ시험에서 우리는 연속 ‘꼴찌 3인방’을 기록한 것이다. SATⅠ은 미국 고등학생들이 대학에 가기 위해 치르는 수학능력시험 같은 것이다. 나는 수학은 자신 있었지만, 언어(영어) 영역만은 시험지를 받아볼 때마다 모르는 문제가 너무 많았다. 다행인 것은 실제 SATⅠ시험은 2학년 때 본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까지는 모든 교과목과 자습을 통해 영어 실력을 다져야 했다. 예비과정을 마치고 1학년이 돼서도 나의 불쌍한 영어 행진은 계속됐다. 특히 유럽사 수업이 그랬다. 독일에서 오신 간제 선생님이 가르쳤는데,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지식뿐만 아니라 이해하고 분석하는 능력까지 겸비해야만 들을 수 있는 과목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분의 영국식 발음이 귀에 익숙지 않은 데다 말조차 빨라 수업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너는 영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계속 유학반에 있어도 좋은지 잘 생각해봐라.” 간제 선생님의 이 말 한 마디에 나는 말할 수 없이 큰 상처를 받았다. 유럽사를 ‘반드시 무찔러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이렇게 쓴 글귀를 책상 앞에 붙여두었다. 뭔가 풀리지 않는 문제나 어려움이 있으면 책상 앞에 크게 써서 붙여놓고 스스로 자극하며 마음을 다잡는 것이 나의 버릇이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선생님에게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하루에 2시간씩 영어 원서를 읽느라 늘 잠이 모자랐지만 유럽사 시간만큼은 절대로 조는 일이 없었다. 내가 나태해지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선생님의 덕분이 아니었을까. 1학년 1학기가 지나가면서 나의 영어 실력은 눈에 띄게 향상됐다. 영어로 하는 발표(presentation), 토론(debate) 수업 등을 하다 보니 말하기와 듣기 실력이 자연스럽게 좋아졌다. 민사고에 처음 들어왔을 때, 나는 영어에 관한 한 해외파 토끼들 사이에서 느릿느릿 기어가는 토종 거북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비록 느린 거북이지만, 천천히 꾸준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경주에서 이길 거라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The Dooms S.A.T. 최후의 심판일
시험 날짜는 10월 11일로 잡혀 있고, 수시(early) 모집에 원서를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SATⅠ을 봐서 점수를 확보해야 했다. SATⅠ만 집중적으로 공부하기에는 이번 여름방학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괜한 ‘논문 사건’이 터져 하릴없이 집에서 방학 한 달을 보내게 됐다. 내가 학교 기숙사에 있을 때 걸려온 어머니의 전화. 유명 대학의 교수 한 분이 내가 실험을 해서 논문이나 페이퍼(가벼운 분량의 논문)를 쓸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미국 대학들은 지원하는 학생의 성적뿐만 아니라 각종 수상 경력이나 연구 결과를 입학 결정에 반영한다. 사실, 고등학생이 대학 실험실 기구를 이용해 논문을 쓸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었다. 운명의 여신이 내게 조금만 호의를 베풀었어도 평소 내가 관심 있던 ‘나노(Nano)'를 주제로 한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아이는 도움을 받을 자세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불성실해요.” 실험실에 나간 지 며칠 만에 그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통보였다. 교수님 집에서 첫 대면을 하던 날, 어머니와 나는 7분을 늦었다. 그리고 실험실에서 집에 조금 일찍 돌아간 적이 한 번 있다. 그 두 가지 이유로 나는 불성실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혔던 것이다. 첫 만남에서 7분을 늦은 건 차를 몰던 어머니가 아파트 동 위치를 찾느라 그랬고, 실험실에서 일찍 나간 이유는 아침에 식은땀을 흘리며 아파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어른거려 실험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만의 독특한 논문을 준비해서 대학에 지원하려던 꿈은 오명만 남긴 채 종지부를 찍었다. 안개 속을 헤매듯 보낸 여름방학도 끝나고, 학교로 돌아가니 정말 시험이 코앞에 다가온 느낌이었다. “T.h.e. D.o.o.m.s. S.A.T!" 16절지 한 장에 한 글자씩, 그것도 빨간색 펜으로 적어 책상 위에 붙여두었다. 꼭 피가 흐르는 것처럼 보여서 내 방에 놀러온 친구들이 ”앗, 이게 뭐야!“하고 흠칫 놀랄 정도였다. ’The Dooms SAT'는 ‘The Doomsday(최후의 심판일)’를 패러디한 것이다. ‘doom'은 ’운명의‘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데, 앞으로 다가올 10월 11일이야말로 바로 내 운명의 날이라고 믿었다. 미국 고등학생 SATⅠ평균은 1200점 내외이다. 하지만 나처럼 외국인 유학생이라면 훨씬 높은 점수를 받아야 입시에 유리하다. 이제 남은 기간은 겨우 두 달뿐이었다. 이번에도 나는 기출문제를 중심으로 시험 준비를 했다. 단기간에 시험 준비를 하려면 기출문제를 푸는 것이 출제 경향과 문제 유형을 파악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이건 내가 민사고 입학 전에 토플 시험을 볼 때도 효과를 봤던 방법이다. 운명의 SATⅠ시험일 아침이 밝았다. 성남에 위치한 SIS(Seoul International School)에서 시험을 봤다. 며칠 후 확인해본 시험 결과는 1560점. 언어 영역에서 네 문제를 틀리고 수학 영역은 만점을 받았다. 상대평가인 SATⅠ은 나는 99퍼센트를 얻었다. ’The Doomsday'는 내게 ‘최후의 심판일’이라기보다 ‘행운의 심판일’이었던 셈이다.
미국 명문대가 내게로 왔다
수시(early) 모집 원서는 한 군데만 지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예일대에만 원서를 냈다. 그런데 여기서 떨어졌으니 이제부터 정시(regular) 모집 대학은 10군데 이상 지원해야 한다는 얘기다. 미국 대학의 정시모집 원서 접수 마감은 대부분 12월 31일이다. 내가 원서를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이 보름도 채 안 남은 셈이었다. 미국 대학에 입학 지원서를 쓸 때 가장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것이 ‘에세이(작문)’다. 대학마다 요구하는 에세이가 다른데, 기본적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에세이와 주어진 주제를 가지고 쓰는 형식이다. 비슷한 조건의 지원자들이 많을 때는 에세이를 얼마나 잘 작성했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될 정도로 비중이 높은 항목이다. 그런데 대학은 11군데나 지원하다 보니 써야 할 에세이도 20편이 넘었다. 각 학교마다 에세이 한두 편씩은 요구하기 때문이다. 생각할수록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아 발부터 동동 굴렀다.
내가 써야 할 부분은 성적(academic records), 특별활동과 봉사활동(extracurricular activities), 수상경력(honors or awards received) 등이었다. 에세이 주제는 학교마다 달랐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유로운 주제로 쓰라는 데도 있었지만, ‘만약 지금 10달러가 있다면 어떻게 하루를 보낼 것인가?’, ‘나의 새로운 룸메이트에게 하고 싶은 말’, ‘내가 무서워하는 것들’등 매우 구체적인 주제들이 많았다. 밤이면 밤마다 에세이를 쓰다 지쳐 책상에 엎드린 채 잠들곤 했다. ‘나’를 글로 표현한다는 게 그토록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인생에서 대학입시는 ‘올인’해야 하는 그 무엇이었다. 조기 졸업으로 학교를 떠나는 마당에 좋은 결과가 있어야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지 않겠는가. 게다가 나는 2004년 2기 삼성 이건희 장학재단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2004년에 대학에 합격해야만 했다. 12월 29일까지 모든 원서를 다 마무리하고 기숙사를 나섰다. 다음해 3월초가 되자 많은 친구들이 미국 대학으로부터 일지감치 합격 통지서를 받기 시작했다. 졸업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있는 내게 원서를 낸 대학들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드디어 희소식이 날아온 건 3월 18일 아침이었다. 집으로 날아든 우편물은 워싱턴 대학교에서 온 것이었다. 봉투를 뜯어 안에 있는 편지를 꺼내는 순간 ‘Congratulations!'라는 단어가 보였다. 그 날부터 환희의 헹가래가 시작됐다. 워싱턴 대학교에서 온 희소식에 이어 그 날 오후에는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합격 통지가 왔다. 4월 1일 아침에 스탠퍼드 대학으로부터 ’Admission Decision(입학허가결정)‘이란 제목의 이메일을 받았을 때는 너무 기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엉엉 울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듀크 대학과 하버드 대학에서 합격 소식을 알리는 이메일이 오고, 존스 홉킨스, 코넬, 미시건 주립대, 프린스턴까지 줄줄이 합격 소식을 알려왔다. UC 버클리에서는 4년 간의 장학금 지급까지 제시해왔다. 지원한 11개 대학 중 컬럼비아 대학은 제외하고는 모두 합격을 한 것이었다. “원희 양, 당신의 열정에 감동했습니다.” 미국 대학들이 보낸 이메일에는 한결같이 이런 말이 씌어 있었다. 그걸 보고서야 새삼 깨달았다. 그동안 나를 지탱해주었던 힘이 바로 ’열정‘이었다는 사실을. 세계의 석학들이 모인다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생물학을 공부한 후 인류의 건강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매일 아침 민사고 교훈을 외쳤듯이 자신의 출세와 명예만을 위해 공부하지 말고 내일의 밝은 조국을 위해 공부하자는 각오를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새기며 지금 나는 달리기 선상에 서 있다.
나의 피눈물 영어정복기
Slow and steady wins the race
민사고에서 나를 압박한 것은 영어 에세이 쓰기였다. 영어 에세이를 잘 쓰려면 그 전에 영어를 수단으로 한 ‘듣기’와 ‘읽기’가 충분히 채워져야 했다. 민사고라는 ‘영어 특구’에서 나는 졸지에 미아가 된 꼴이었다. ‘내가 정말 영어를 못하는구나!’ 이런 자각이야말로 영어 공부의 출발점이 아닌가 싶다. 영어를 모국어처럼 잘하고 싶다면 지금 내 영어 실력이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냉정하게 파악하라는 것이다. ‘영어는 재미있게 배워야 한다.’ 이것이 내 지론이다. 물론 학년이 높아질수록 단순한 재미보다는 피나는 노력이 따라야겠지만, 적어도 영어를 처음 접하는 어린 시절엔 ‘재미’와 ‘흥미’가 중요하다. 놀면서, 춤추면서, 요리를 만들면서 배웠던 어린 시절의 영어는 일부러 암기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기억에 남았다.
Phonics & Pattern English
‘파닉스(phonics)'란 영어 철자(spelling)와 발음과의 관계를 말한다. 영어의 80퍼센트가 규칙에 따라 발음되기 때문에, 파닉스를 공부해두면 영어 공부에 상당히 효과적이다. 내가 파닉스를 배운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어머니는 파닉스 교재 복사본과 카세트 테이프 복사본을 구해온 것이었다. 6개월 과정의 카세트 테이프 50여 개를 단 두 달만에 끝내버렸다. 어머니 말씀대로 나는 무엇이든 양껏 해야만 기분이 좋아졌다. 파닉스를 공부하고 나자 처음 보는 단어도 쉽게 읽혔다. 각각의 스펠링이 갖는 음가를 기억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는 학원에 가서 배운 것이 ’패턴 잉글리시(pattern english)'였다. 같은 패턴에 단어만 바꿔넣어 연습하는 것이었다. 이 패턴을 배우고 나서부터 ‘Can you ―?'로 시작하는 문장은 입에서 쉽게 나왔고, 그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하는지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회화의 간단한 패턴을 배우고 나니. 길에서 외국인을 만나도 저절로 영어가 튀어나왔다. 기초가 닦이면 응용은 시간문제다.
꾸준히 오래오래, 성실하게
우리 어머니의 교육철학 중 하나는 ‘어떤 공부든 한번 시작했으면 꾸준히 투자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학원을 그만둔 다음에도 영어 일기를 꾸준히 썼고, 학교 숙제와 상관없이 영어 동화책을 읽었다. 중학교 때는 교과서 한도 내에서 시험 점수가 잘 나오는 것에 만족했기 때문에 실력이 그다지 향상되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꾸준히 영어경시대회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영어경시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음이 많이 좋아졌고, 영어 문장력도 어느 정도 기르게 되었다. ‘Slow and steady wins the race(천천히, 꾸준히 하는 사람이 결국 승자가 된다)’라는 말처럼, 영어는 그런 마음으로 해야 한다.
영어단어를 외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세 가지
유학을 가려면 SAT와 토플을 봐야 한다. 이런 시험의 기본은 많은 단어를 외우는 것이다. 영어단어를 많이 알고 있으면 시험뿐만 아니라 영어 원서를 보며 공부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 접두어(a prefix)와 어근(a radix)을 활용한 단어 외우기 : 쉬운 예를 들어보자. 접두어 ‘de-'는 ’down from, down to'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increase'가 ’위로 올라가다‘의 의미라면 ’decrease'는 ‘아래로 내려가다’, 즉 ‘감소하다’라는 뜻이 된다. 어근을 예로 들어보자. ‘polyonymous'라는 단어는 ’poly'와 ‘onymous'로 구분할 수 있다. ’poly'는 ‘many(여러 개의, 많은)’의 뜻이고, ‘onymous'는 그리스어의 ’onoma 또는 onyma'에서 기원한 ‘name(이름)’의 뜻이다. 그래서 ‘polyonymous'는 ’여러 이름으로 알려진‘이라고 쉽게 외울 수 있다. 또 ’onymous'가 이름을 뜻한다는 걸 알고 있다면 ‘anonymous'역시 이름과 관련된 단어라는 걸 생각해낼 수 있다. 그리스어에서 온 접두어 ’an-‘은 ’un-'과도 일맥상통하는데, ‘not, without(없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고로 ‘anonymous'는 ’이름이 없는, 익명의‘라고 쉽게 외울 수 있다. 사실 모든 단어를 이런 식으로 외울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 방법을 맹목적으로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단어의 의미를 유추해내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다.
․ 연상법으로 외우기 : 나는 영어에 우리말 의성어나 의태어를 접목시키기도 하고, 단어의 이미지에 맞게 희한한 말들을 덧붙이기도 하며 외웠다. 이런 방법을 ‘연상법’이라고 부른다는데, 그런 거창한 이름을 갖다붙이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이다. ‘pugnacious'라는 단어는 몇 번을 외우고 또 외워도 생소하기만 했다. 한참을 입으로 중얼거리다 보니 문득 우리말의 ’퍽!‘이라는 의성어가 떠올랐다. 이 단어의 뜻은 ’싸움하기 좋아하는‘이다. 그래서 단어장을 들고 다니면서 “퍽! 퍽! pugnacious, 때리기 좋아하는, 싸움하기 좋아하는”이라고 소리를 내며 머리에 입력시켰다.
․ 주변 사람들과 함께 외우기 :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더니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경우에는 사람들과 함께 외우는 방법을 써봤다. 실생활에서, 그것도 장난을 섞어 단어를 외우다 보면 공부의 지루함도 날려버리고 기억력의 한계도 넘어설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짧은 시간 안에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 단어를 외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외워야 할 단어의 양이 많을 때에는 일일이 손으로 적으면서 외울 시간이 없다. 그럴 땐 30분이나 1시간 정도 시간을 정한 후, 눈으로 단어들을 보면 서너 번 소리내어 읽는 것이다. 눈으로 단어의 스펠링을 훑고 뜻 부분을 소리내어 읽는다. 그 단어의 유의어도 같이 소리내어 읽은 다음 시간이 허락하면 예문까지 읽는다. 중요한 건 입으로 반드시 소리내어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눈으로 스펠링을 훑으며 입으로 단어를 소리내어 읽는 방법으로 두 페이지 가량 진도를 나간 후, 다시 처음 지점으로 돌아간다. 단어의 뜻풀이와 유의어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고 자신이 맞히는지 못 맞히는지 테스트를 해본다. 틀린 단어는 그 자리에서 세 번 정도 읽고, 그래도 잘 외워지지 않으면 형광펜이나 색연필로 표시해둔다. 외우지 못해 표시해둔 단어들은 일주일 후에 다시 한번 읽어본다. 결과적으로는 단시간 안에 최대한의 단어를 외우는 효과를 거두었다.
영어 소설 속에 기꺼이 파묻혀라
민사고에서 영어로 된 문학 작품을 들이대며 읽으라고 했을 때, 거의 절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던 기억이 난다. 민사고 예비과정에 입학했을 때 나는 무조건 제2 자습시간인 밤 10시부터 12시까지는 영어로 된 작품들을 읽는 데 할애했다. 책마다 다르지만, 그 때는 1시간에 평균 10페이지 정도밖에 읽지 못했다. 그런데 매일 정해진 시간 동안 책을 읽어나갔더니, 1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에는 시간당 20페이지쯤 읽게 되었다. 갑자기 책 읽는 속도가 빨라진 건 2학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부터였다. 찰스 디킨스의〈Great Expectations(위대한 유산)〉은 문장이 복잡한데도 1시간에 30페이지 정도로 읽어나갔다. 책 읽는 속도가 부쩍 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날아갈 듯이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영어 독서를 꾸준히 한 결과는 여러 군데에서 빛을 발했다. SATⅠ시험의 ‘Reading' 섹션의 긴 지문들을 속독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책 속에 나오는 단어들 중 모르는 단어의 의미를 문맥 속에서 유추해낼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영어 에세이 쓰는 것이 수월해졌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그건 아마도 영어에 대한 독서를 통해 ’언어적 감각‘을 터득했기 때문이 아닐까. 진짜로 영어를 잘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영어 독서는 필수다.
공부에 왕도는 없지만 정도正道는 있다
노트 정리의 제왕이 돼라
공부하기가 갑자기 까다로워지는 것은 중학교 때부터다. 상식 수준에서 배우는 초등학교 때와 달리 중학교에 들어가면 과목별로 깊이 있는 공부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중학교 공부야말로 대학 공부까지 이어지는 기본이다. 내가 중학교 시절에 가장 열심히 했던 것은 노트정리가 아닐까 싶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칠판에 적은 내용은 물론 말로 짚어주신 내용까지 빠짐없이 연습노트에 적었다. 집에 돌아가면 각종 참고서나 문제집에 나와있는 내용까지 첨가해서 완벽한 나만의 노트를 만들곤 했다. 노트 정리를 할 때는 대단원의 제목을 네임펜으로 크게 쓰고, 소제목은 빨간색이나 파란색 펜을 이용해서 썼다. 본문 내용은 검은색 펜을, 아주 세세한 내용들은 0.3밀리미터 짜리 가는 펜을 사용했다. 그리고 중요한 부분에는 빨간 색연필로 밑줄을 긋거나 별표를 쳐놓았다. 공부를 하다가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포스트잇’에 메모를 해서 노트에 붙여두었다. 노트 필기는 단순히 ‘적는다’는 의미 그 이상이다. 예습한 내용, 수업시간에 들은 내용, 복습하면서 참고하게 된 내용, 새롭게 알게 된 내용들과 잘 모르는 의문사항 등이 모두 노트에 기록될 수 있다. 이제부터 자기만의 노트를 만들어보라. 자신의 정성이 들어간 노트를 만들다 보면 금세 공부에 재미를 붙일 수 있다.
복습은 빠를수록 좋다
지금도 기억나는 일화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식탁에 앉아 동생에게 공부법을 ‘강의’했던 일이다. “우리가 수업시간에 배운 지식은 우리의 머리 표면에 붙어 있게 돼, 수학시간에 배운 공식, 영어단어, 시의 주제 등이 그냥 표면에 붙어 있는 거야. 그런데 우리가 복습을 하는 순간, 머리 표면에 붙어 있던 지식들이 머릿속으로 쏙쏙 들어오게 된단다. 복습을 하지 않으면 머리 표면에 붙어 있는 지식들이 다 날아가버려. 그러니까 복습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나는 연습장에 사람의 얼굴과 화살표를 그려가며 설명을 해주었다. 어머니마저도 나의 ‘복습효과 일러스트’에 대해 감탄하셨다.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매일 복습하는 습관이 중요하다. 한두 번 미루다보면, 결국 중요한 지식들은 다 머리 위로 날아가버리고 말 것이다.
눈에 쏙쏙 들어오는 쪽지 퍼레이드
민사고 시절, 나는 쪽지의 여왕이었다. 내가 즐겨 쓰던 쪽지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표어 쪽지와 각종 단어나 공식을 외우기 위한 학습 쪽지로 나뉜다. 어떤 시험이든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는 반드시 특정 표어를 적어 책상 앞에 붙여두었다. 가장 대표적인 표어 중 하나가 바로 ‘The Dooms SAT'였다. 지금 기억나는 또 다른 표어는 ’경제․화학 다 죽었어!‘라는 것이다. 2학년초 AP 공부를 할 때, 수학에 비해 경제와 화학이 상대적으로 어려웠다. 그래서 반드시 이 두 과목에서 5점 만점을 받겠다는 의미로 써 붙여놓았다. 이런 표어가 공부에 직접적인 도움을 준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다잡는 데는 그만이었다. 진정한 쪽지 퍼레이드는 과목별로 부족한 공부를 메울 때 사용됐다. 잘 외워지지 않는 영어단어, 수학 공식, 그리고 물리 공식 등을 포스트잇에 적어서, 그걸 이층침대의 난간이나 화장실, 옷장 앞에 붙여놓았다. 그러면 아침에 침대에서 내려올 때 한 번, 검도복으로 갈아입을 때 한 번, 화장실에 갔을 때 또 한 번 쪽지를 쳐다보게 된다. 쪽지를 쳐다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기억은 점점 선명해졌다. 공부가 잘 되지 않는다면 이런 식으로 쪽지 활용법을 시도해보라.
공부의 기초는 ‘공부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내가 4살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옆집 아이가 벌써 두 자리 수 더하기를 한다는 소식에, 어머니는 내게도 숫자 쓰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내가 쓴 3자는 거울에 비친 것처럼 왼쪽 오른쪽이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몇 번을 다시 써도 여전히 3자는 왼쪽 오른쪽이 바뀐 모양이었다. “아이구! 암만 해도 안 되는구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더니 안방으로 들어가버리셨다. 그리고 두세 시간이나 흘렀을까? 나는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 동생과 함께 낮잠을 주무시던 어머니를 흔들어 깨웠다. 내가 기뻐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어머니에게 내민 공책에는 3자만 여섯 페이지가 씌어 있었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제대로 된 3자가 자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어머니에게 전해들은 것이다. 그때 몇 시간 동안 혼자서 3자를 써낸 것은 아마도 ‘꼭 하고야 말리라’는 의지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공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공부를 잘하겠다는 의지’이다. 그 의지가 없다면 아무리 좋은 비법이 있다고 해도 적용할 수가 없다.
한국 토종의 미국 대학 공략법
진짜 실력은 SATⅡ에서 판가름난다
SAT Ⅱ는 영문학이나 작문, 역사, 과학 등 특정 과목에 대한 지식과 학습 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인데, SATⅠ과 같은 날 실시하지만 한 사람이 SATⅠ과 Ⅱ를 같은 날 응시할 수는 없다. 하루 최대 3과목까지 응시할 수 있으며, 필수 시험인 영작문(Writing)과 두 개의 선택 과목을 본다. 명문대의 경우 3과목 정도의 SATⅡ점수를 요구하지만, 모든 대학이 SAT Ⅱ점수를 요구하는 건 아니다. 자신이 가려는 대학에서 어떤 과목을 요구하는지 미리 알아보고 응시하는 것이 좋다. 내가 가려는 대학들은 대부분 SAT Ⅱ과목들 중에서 수학 ⅡC와 작문, 그리고 한 개의 선택 과목 점수를 원했다.
AP로 가산점을 노려라
AP(Advanced Placement, 대학 학점 사전취득제)는 고등학생이 대학 1학년 수준의 교과 과정을 배우고 시험을 봐서 미리 학점을 얻는 제도이다. 각 과목 시험 점수가 3.0에서 5.0 사이면 대학에 입학했을 때 학점으로 인정된다. 고등학생이 AP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으면 미국 대학에 지원할 때 약간의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배우는 동안 과제물도 많고 내용도 어렵기 때문에 공부하기가 만만치 않다.
특별활동과 봉사활동으로 돋보이기
미국 대학 입시 전형에서 중요한 포인트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특별활동(Extra curricular activities)'이다. 미국의 명문대학들은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십과 예술적인 활동, 적극적인 성향 등을 두루 갖춘 학생을 우선 선발하려는 경향이 있다. 나는 연극클럽 ’L.I.D.(Life Is Drama)'와 만화 클럽 ‘경국지화’에서 특별활동을 했다. 연극클럽에서는 2학년 때 장을 맡았고, 전국대회를 비롯한 각종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만화클럽 ‘경국지화’는 ‘나라가 기울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그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선배들 때부터 내려오던 클럽인데, 클럽 활동이 특별히 수상 경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나의 학창시절을 풍성하게 해주었다는 면에서는 아주 괜찮았다. 이 클럽에서도 2학년 때 장을 맡았고, 그 해 민족제에서는 각종 만화 캐릭터로 책갈피, 부채 같은 팬시 제품을 만들어 팔았다. 축제 화폐 단위로 10만 원을 벌었는데, 이때의 경험을 존스 홉킨스 대학 입학 원서의 에세이 소재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 에세이의 토픽이 ‘만약 당신에게 10달러가 생기면 어떻게 하겠는가’하는 것이었다. 특별활동은 어떤 분야에서 활동했는지도 중요하다. 특히 학생회장이나 학교 신문사 편집장 경험은 입시 전형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 하지만 경쟁률이 치열하기 때문에 누구나 다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주어진 상황과 자기 취향에 맞는 특별활동을 선택하되, 중요한 것은 ‘꾸준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특별활동을 몇 학년 때 했는지도 원서에 다 기록하기 때문에 수시로 활동 부서가 바뀌면 ‘끈기가 없는 학생’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대학 입시에서 봉사활동은 그야말로 ‘기본’이다. 의대에 지망하는 학생에게는 ‘헌혈’ 경험이 기본이고, 사회학을 전공하려는 학생에게는 복지시설 봉사활동이 기본이다. 그 분야의 공부를 할 자세가 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 바로 봉사활동 경험인 것이다.
좋은 에세이는 합격의 ‘화룡점정’
에세이는 자기 자신을 포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똑같은 경험, 똑같은 성적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어떤 식으로 포장하느냐에 따라 이미지는 달라진다. 예를 들어 1학년 때 내신성적이 좋지 않고 2, 3학년 때 성적이 더 낫다면 ‘나는 1학년 때 개인적인 사정으로 공부를 많이 할 수 없었다’는 것보다 ‘내 성적은 지금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고 쓴 학생이 훨씬 좋은 이미지를 준다. 대학 원서에 첨부하는 에세이는 상당히 개인적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묘사나 수식, 경험담을 모두 동원할 수 있다. 원서마감 때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여러 번 고쳐서 산뜻하게 완성된 글을 첨부하는 것이 좋다. 보통 8월부터는 어떤 내용으로 에세이를 쓸 것인지 준비해두어야 하는데,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아직 학교에서 조기 졸업 허락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10월에 있을 SATⅠ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불합격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정시 모집 마감까지는 겨우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 안에 11개 대학에 낼 에세이 20여 편을 쓰느라 정말 고생했다.
내가 보낸 에세이 중 그나마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버드에 냈던〈Race〉다.〈Race〉는 내가 조기 졸업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변명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조기 졸업자를 아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본다. 그런 의심의 눈초리를 확실히 거두기 위한 에세이가 바로〈Race〉였다.〈Race〉의 첫 부분은 내가 어린 시절 달리기를 하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내가 다섯 살쯤 되었을 때, 아버지는 전북 완주군 어느 마을의 공중보건의로 근무하셨다. 그 마을 체육대회가 열리던 날, 사람들이 나를 ‘이 동네에 한 분밖에 없는 의사 선생님 딸’이라며 달리기에 출연시켰다. 유치원 선생님이 내 앞쪽에 앉아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렸고, 나는 선생님을 향해 아장아장 걸어갔다. 그런데 내가 다가갈수록 선생님은 자꾸만 뒤로 멀어지셨다. 아마도 결승 지점까지 나를 그렇게 유인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선생님과의 거리가 절대 가까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운동장 트랙의 중간에 서서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AP, SAT 등 짧은 기간에 많은 시험을 보면서 내가 느꼈던 기분을 그 때 내 앞에서 멀어지던 유치원 선생님을 따라가는 기분과 연결시켰다. 에세이의 끝은 이렇게 맺었다. “나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안다.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고교 시절을 거의 끝마친 것 같다. 물론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지쳐 있긴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정해놓은 선까지 뛰어가는 어린 아이가 아니다.” 사실 나 스스로는 글솜씨가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소재를 특이하게 끌어내 읽는 사람의 머리에 나를 각인시키고자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