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요약

[스크랩] 예수님과 함께 걷는 삶

강인철 2009. 9. 29. 08:23

▣ 저 자  헨리 나우웬

예수회 사제이며 캐나다 토론토의 라르쉬(L'Arche) 데이브레이크(Daybreak)공동체에서 정신 박약 장애인들을 섬겼다. 그는 또한 우리 시대에 가장 인기 있고 존경받는, 영성에 관한 저술가이기도 하다. 예일, 노틀담, 하버드 대학교에서 가르쳤으며, 저서는 20여 권이 넘는다. 『제네시 일기』『상처받은 치유자』『죽음, 가장 큰 선물』『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등이 있다.


▣ 역 자  김명희

연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IVP 편집부장으로 활동중이다. 역서로는『결혼과 사랑의 미학』『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 저자 헨리 나우웬은 세계 전역에서 고통스럽지만 믿음의 여정을 이어가는 우리의 형제자매들의 모습을 우리 가운데서 매일 일어나는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로 이해하게 되었고, 고통당하고 있지만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예수님의 마음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음을 힘주어 말한다. 한편, 저자는 고통당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일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우리 자신의 염려하는 마음을 예수님께 맡겨드릴 때만이 우리를 감싸 안고 우리를 치유하고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에게 위안이 되려하시는 조건 없는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헨리 나우웬이 들려주는 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는 가운데 당신은 2000년 전의 십자가 사건을 오늘날 바로 지금 생생하고도 의미 있게 적용케 될 것이다. 


▣ 차 례

감사의 말

서문

서론 나는 예수님과 함께 걷는다

1. 예수님이 사형선고를 받으시다

2.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다

3. 예수님이 처음으로 쓰러지시다

4. 예수님이 마리아를 만나시다

5.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돕다

6. 예수님이 베로니카를 만나시다

7. 예수님이 두 번째로 쓰러지시다

8. 예수님이 예루살렘 여인들을 만나시다

9. 예수님이 세 번째로 쓰러지시다

10. 예수님의 옷이 벗겨지다

11.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다

12.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다

13.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내리다

14. 예수님을 무덤 속에 두다

15. 예수님이 부활하시다


 

감사의 말

이 묵상집은 헬렌 데이비드 수녀가 그린 '십자가의 길'(Station of the Cross)에 답하여 쓴 것이며, 대부분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리치몬드 힐에 있는 요크 센트럴 병원에서 3주 반 동안 입원해 있는 동안에 썼다. 매우 쌀쌀한 어느 이른 아침 나는 일하러 가기 위해 차를 얻어 타려고 서 있다가 지나가는 트럭의 백미러에 치여 갈비뼈 다섯 대가 부러졌고 비장을 절단해야 했다. 당시에는 모두 불행한 사건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위장된 축복이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나는 그토록 바쁘게 하던 모든 일을 그만두고 예수님과 친구들에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이 묵상집을 쓴 것도 병원에 있는 동안 예기치 않게 얻은 열매 중 하나다.


서문

나는 헬렌 데이비드 수녀가 그린 '십자가의 길' 15점을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우리는 동일한 십자가 형태의 창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의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고통스럽지만 소망 있는 여정을 이어가시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날마다 세계 전역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납치되고 굶주리고 버림받고 고문당하고 죽임당하는 우리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말이다. 우리는 또한 이 동일한 창을 통해 암흑 가운데서 믿음, 소망, 사랑의 표현들을 볼 수 있다. 나는 오랫동안 집중하여 이 그림들을 바라보면서 점점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아주 많은 나라에서 목격하는 고통과 기쁨은 성 금요일, 성 토요일, 부활 주일의 그 심오한 신비가 계속 계시되고 있는 것이었다.



서론 나는 예수님과 함께 걷는다

예수님은 걸어다니셨고, 지금도 걷고 계신다. 예수님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걷고 계시며, 또한 걸어다니시며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신다. 거지, 소경, 병자, 애통하는 자, 소망을 잃은 자를 만나신다. 그분은 아직도 이 땅에 아주 가까이 계시며 낮의 열기와 밤의 추위를 느끼신다. 그분은 시들어 사라져 가는 풀과 돌밭과 가시나무 숲, 앙상한 나무, 들에 핀 꽃, 풍성한 수확이 어떤 것인지 아신다. 그분은 아주 많이 걸으시며 몸소 각 계절의 혹독함과 생명력을 느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함께 걷는 사람들에게 세심하게 귀기울이시며, 길에서 진정한 동료가 되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분은 자연의 힘들을 관찰하셔서 그것들로부터 배우시고 그것들에 대해 가르치신다. 또한 창조 세계의 하나님이 곧 그분을 보내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고 눈먼 자를 보게 하시고 포로된 자를 자유케하신 그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다.


나는 종종 구름 사이를 바라보며 더 나은 세상에 대해 꿈꾼다. 그러나 내가 시선을 다시금 이 땅으로 돌리지 않는다면, 함께 걷자고 나를 초대하며 길고 고된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면, 내 꿈들은 결코 열매 맺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나 자신의 가난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면 깊은 곳의 상처, 피곤함, 무력함,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바로 거기서 나는 땅과 관련을 맺으며, 바로 거기서 진정 겸손해진다.

 

제1장  예수님이 사형 선고를 받으시다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 서 계신다. 그분은 잠잠하다. 그분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비난에 방어하지도 않으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는 어떤 명제나 교리 혹은 실재에 대한 지적인 설명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과 성부 하나님의 관계, 두 분 사이의 생명력 있는 친밀한 관계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도 그 친밀한 사귐에 동참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과의 사귐에 들어가는 사람은 진리의 영을 받을 것이다. 그 진리 - 진정한 관계, 진정한 소속 -가 우리에게 어둠의 권세가 빼앗을 수 없는 자유를 가져다준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었으므로 이 세상에서 살았던 가장 자유로운 인간이시다. 빌라도는 그분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그분을 저주받은 자 가운데 하나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사형집행이 아니라 온전한 자유에 이르게 하는, 온전한 진리로 가는 길이 되었다.


나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세상의 정죄가 거세지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세상의 정죄는 진리를 드러낼 것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 나는 이 말을 신뢰해야 한다. 세상이 나를 미워하는 그 곳에서, 세상의 권세들이 나를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 그 곳에서, 비웃음을 당하며 주변으로 밀려나는 그 곳에서, 정확히 그 곳에서 나는 내가 세계 공동체, 즉 빗장과 담장으로 막혀서 고립된 지역에 갇혀 있는 그 공동체의 일원임을 발견하게 된다.


제2장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넘겨주어 고통당하게 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고통을 견디셨다. 이제 그분은 더 이상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항변하지도, 비난하거나 꾸짖지도 않으신다. 그분은 이제 수난에 들어가셨다. 예수님은 인간의 삶 대부분이 수난임을 아신다. 사람들이 굶주리고 납치되고 고문당하고 살해당한다. 투옥되고 집에서 끌려나와 가족과 격리되고 수용소로 보내져 강제 노동에 이용된다. 그들은 이유를 모른다. 그들은 그 모든 일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들은 가난하다. 예수님은 십자가가 어깨에 놓이는 것을 느끼셨을 때, 장래 모든 세대의 고통이 자신을 내리누르는 것을 느끼셨다.


나는 무력함을 절감한다. 나는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다. 아니,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최소한 폭력, 영양실조, 억압, 착취에 대해 무슨 말인가 해야 한다. 또한 그것을 넘어서 눈에 보이는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는 무슨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더 힘든 과제가 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것은 외로움과 고립의 십자가, 내가 경험하는 거절의 십자가, 우울함과 내적인 고뇌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하며, 그리하여 우리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으로부터 배우는 진정한 형제임을 발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인류가 탄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제3장  예수님이 처음으로 쓰러지시다

예수님은 십자가 아래로 쓰러지셨다. 그리고 아직도 쓰러져 계신다. 예수님은 확고한 결단력과 강철 같은 의지로 고통을 견뎌낸 정복자 영웅이 아니다. 그분은 항상 어린아이인 채로 계시며 제자들에게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인류의 고통의 십자가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가 쓰러지신 무죄한 어린아이시다. 그분은 무력하고 약하고 아주 상처받기 쉬우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어린아이와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어린아이를 감싸 안으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신 마음의 신비에 다가갈 수 있다.

나는 내가 어린아이임을 안다. 나는 내가 이룬 모든 업적과 성공의 이면에서 계속해서 안전을 갈망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아이다. 나는 또한 내 속의 아이에게 다가가지 못하면 예수님과 그분에게 속한 모든 이에게 다가가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예수님은 내가 내 속의 아이를 잘 키우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 밑에 쓰러지신다. 예수님이 쓰러지신 내 마음 속의 자리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곳이며, 높이 들어올려지고 확신을 얻고자 하는 욕구가 절실해지는 곳이다. 세상의 버려진 아이들이 내 속에 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마음속에서 그들과 대면하고 그들과 더불어 고투하라고 내게 말씀하신다. 그분은 내가 모든 거부감과 버려졌다는 느낌 너머에 사랑이 있음을 발견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 지속되는 사랑으로 육체가 되셨으며 자녀들을 결코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실 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다.



제4장  예수님이 마리아를 만나시다

예수님은 사형 집행장으로 끌려가면서 어머니를 만나셨다. 마리아는 기절하지 않았다. 분노나 절망으로 인해 울부짖지도 않았다. 군인들이 예수님을 고문하지 못하도록 막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분의 눈을 바라보았고 이 때가 그분의 때임을 알았다. 이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되는 때를 아는 가운데 그분의 슬픔과 그녀의 슬픔이 하나가 되었다. 마리아는 그 슬픔으로 인해 예수님의 어머니이자 고통당하는 모든 자녀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녀는 십자가 아래 서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거기 서서 고통에 대해 복수, 보복, 절망으로 대응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눈을 바라본다. 그녀는 그 슬픔으로 인해 어디에 있는 아이들이든 그들을 자신의 자녀로 포용하고 그들에게 어머니의 위로와 편안함을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마리아와 슬픔에 잠긴 모든 어머니를 볼 때마다 내 존재의 중심으로부터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너는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마음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는가?” 나는 상처받는다. 배신당하고 버림받은 것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자기 거부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또 주위에 있는 이들의 고통을 경감시킬 수 없는 내 모습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한편 나는 이 모든 것에서 도망가고 싶은 유혹을 끊임없이 받는다. 그러나 나의 진정한 소명은 고난받으시는 예수님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다. 인간의 깊은 슬픔이 상처받은 나의 마음과 인류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 준다. 고통 가운데 하나 되는 이 신비에 소망이 숨겨져 있다. 예수님의 길은 고통당하는 인간의 마음으로 가는 길이다. 그것은 마리아가 선택한 길이며 많은 마리아가 계속 선택하는 길이다.



제5장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돕다

예수님이 골고다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군병들은 우연히 구레네 시몬과 마주쳤고 그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 했다. 그것은 예수님 혼자 지시기에는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처형장소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실 수 없었다.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분은 너무 연약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 고되고 고통스러운 구원 사역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존해서 이루시는 사역이다. 물론 하나님은 능력과 영광과 위엄이 충만하신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하나가 되셔서, 의존하는 인간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살기로 작정하셨다. 예수님의 길은 무력함의 길, 의존의 길, 수난의 길이다. 예수님이 세상의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서는 기꺼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나는 내 안에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 있음을 느낀다. 나는 영적 성숙이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기꺼이 나를 인도하도록, 내가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나를〕데려가도록(요21:18)"하는 것임을 믿기가 너무 힘들다. 그러나 다른 사람 없이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는 거짓된 욕구에서 벗어나 감히 도움을 구할 때마다, 새로운 공동체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연약한 이들의 모임이지만 깨어진 세상에 함께 소망의 사람들이 될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강해지는 공동체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의 연약함을 어루만지게 하고,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내 여정에서 신실하게 나를 도와주도록 한다면 우리는 모두가 자신에게 은사가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제6장 예수님이 베로니카를 만나시다

베로니카는 예수님이 가르침을 베푸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 그분과 함께 있었다. 예수님은 그녀의 삶의 중심이 되셨다. 그러나 그녀는 그분이 잔인하게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슬픔과 고통을 주체할 수 없어 무슨 일이든 하고 싶었다. 그녀는 그분이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았을 때 군중을 헤치고 나와, 땀과 피로 얼룩진 그분의 얼굴을 베일로 덮었다. 예수님은 그 베일에 얼굴 형상을 남기심으로써 이 사랑과 애통의 행위에 반응하셨다. 그것은 바로 제자리를 잃고 뒤죽박죽된 인류의 얼굴이다. 베로니카는 슬픔의 여인이다. 그 슬픔은 심한 고통으로 마음에 사무친 슬픔이다. 그것은 세상 전역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나라, 민족, 사회의 여성들이 겪고 있는 슬픔이다. “왜 그들은 우리 아이와 남편과 친구를 데려가는 겁니까?” 이 고통스런 질문은 우리 세계의 구석구석에서 울려나는 절규다.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도 그 외침을 들을 수 있을까? 내 마음 깊은 곳에는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 그것은 부재(absence)로 인한 아픔이다. 나는 사귐, 소속감, 친밀감을 갈망한다. 그러나 나는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부재, 단절, 고립을 경험한다. 마치 어떤 칼 하나가 모든 사람을 꿰찌르고 모든 친밀감에 고통을 더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의 얼굴과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얼굴이 새겨진 베로니카의 베일을 볼 때마다 사귐을 향한 갈증이 생겨난다...그리고 늙어가면서 그 고통은 깊어진다.



제7장 예수님이 두 번째로 쓰러지시다

예수님이 두 번째로 쓰러지신 것은 이제 지고 가는 십자가가 무거워서가 아니라, 전신이 완전 탈진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분은 에너지를 전부 소모하셨다. 그분은 생명의 위협,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변절, 유다의 배반, 베드로의 부인, 채찍질, 조롱, 헤롯과 빌라도의 철저한 이해 부족, 적대적인 무리의 외침 같은 저항을 견뎌내셔야 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지기에는 너무 많은 짐이다. 그래서 그분은 비틀거리다 넘어지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더 이상 나아가고 싶어하지 않는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파괴적인 절망에 빠져들고 싶은 순간을 너무나 잘 아신다. 가난에 찌든 브라질 곳곳뿐 아니라 다른 개발 도상국에서도 사람들이 그런 감정으로 괴로워한다. 부유하고 성공한 사람들도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만큼 절망에 빠지려는 유혹을 받는다. 나 역시 경제적으로 내 미래가 안전해 보일 때조차도 갑자기 죄책감과 수치심, 두려움과 절망감 같은 혼란스런 감정에 빠져든다. 그러나 예수님은 쓰러지셨을 때 우리와 함께 그런 고통을 겪으셨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에게 그분의 쓰러짐과 우리의 쓰러짐은 모두 십자가의 길을 가는 과정임을 믿으라고 하신다. 우리가 쓰러질 때 할 수 있는 일은, 예수님이 쓰러지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쓰러지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기억은 소망이 있다는 첫 번째 예감이 될 것이다.



제8장 예수님이 예루살렘 여인들을 만나시다

예수님이 처형 장소로 끌려가실 때, 여인들은 그분을 위해 애통하고 슬퍼했다. 이 여인들은 관습적으로 범죄자를 위해 울고 그들에게 진정제를 가져다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직업적으로 애도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애곡은 자비의 행위로 여겨졌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눈물은 상처받아 고통스러운 인간의 상황을 보여 준다. 눈물은 인간이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한다. 그 눈물은 긍휼을 행할 수 있는 온화한 여건을 만들어 준다. 우리는 눈물을 통해, 이 세상을 위해 우셨던 예수님의 마음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울 때 그분의 마음에 이르게 되고, 거기서 우리의 상실에 대한 가장 진정한 반응이 무엇인지 발견할 것이다. 세상 전역에서 죽음 때문에 애통하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흘린 눈물이 우리의 토양을 긍휼, 용서, 온화함, 치유의 열매로 풍성하게 할 수 있다. 우리 역시 울어야 한다. 그래서 더욱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제9장 예수님이 세 번째로 쓰러지시다

예수님은 세 번째로 쓰러지셨을 때, 그 몸으로 절망적인 인류의 고독을 담아내셨다. 그분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몸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러나 손을 내밀어 그분이 일어설 수 있도록 부축해 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채찍이 그분의 편 손을 후려쳤고, 잔인한 손들이 그분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쓰러지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로 몸을 숙여 우리의 사랑과 동정을 보이도록 하신다. 손으로 우주를 빚으시고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으며 고통당하는 모든 사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실 뿐 아니라 만물을 사랑으로 품고 계신 그 하나님이, 인간의 손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손을 가진 인간이 되셨다. 그러나 바로 그 손은 펼쳐진 채 못박혔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된 이후로 나의 손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내가 보는 하나님의 손은 역사의 운행을 주관하는 능력 많은 손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돌봄의 손길을 갈구하는 무력한 손이다. 나는 세상 모든 곳에서 나를 향해 뻗은 하나님의 무력한 손을 점점 더 보게 되었고, 그것을 좀더 분명하게 볼수록 그 손들은 더 가까워 보였다. 음식을 구하는 가난한 이들의 손, 그냥 같이 있어 주기를 요구하는 외로운 사람들의 손, 안아주기를 원하는 아이들의 손, 어루만져 주기를 바라는 병자들의 손, 훈련받기를 원하는 미숙한 이들의 손, 이 모든 손은 자신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기를 기다리며 쓰러져 계신 예수님의 손이다.



제10장 예수님의 옷이 벗겨지다

그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겼다. 군인들은 그분의 옷을 나눠 갖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 그분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지금 그분은 모든 권세와 위엄을 빼앗긴 채 완벽하게 연약한 상태로 세상에 드러나셨다. 여기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신비가 계시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수치를 당함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모든 아름다움이 사라진 곳에서, 모든 웅변이 잠잠해진 곳에서, 모든 화려한 것이 자취를 감춘 곳에서, 모든 칭찬이 사라진 곳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내기로 작정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난을 담당하셨다. 벌거벗은 예수님의 몸은 모든 세계, 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인류가 겪고 있는 엄청난 격하를 보여 준다. 때로 나는 인생이 산꼭대기를 향해 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그 곳에 도착하면 마침내 주위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보게 될 것이고, 모든 감각을 통해 오로지 나 자신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방향을 가리키신다. 인생은 욕망과 성공과 업적을 내려놓고, 통제하려는 욕구를 포기하며, 위대해지려는 환상을 버리라는 부르심이다. 예수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안은 낮아지는 십자가의 길 속에 숨겨져 있다. 거기에는 소망, 승리, 새로운 삶이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잃는 곳에서 주어진다.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24)."



제11장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분은 거기서 세 시간동안 죽음을 향해 가셨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온전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셨다. 그분의 몸은 완전히 탈진되었고, 그분은 친구들과 하나님에게조차 버림 받으셨다. 이 모든 것을 통해 그분은 자신을 내어 주사 우리를 위한 선물이 되셨다. 그리고 그분이 완전히 무력한 상태로 나무에 못박혀서 돌아가실 때에도 비통함이나 복수심이나 분노가 없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주신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그분은 삶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어놓으셨기 때문에 그 삶이 풍성해졌다. 완벽하게 무죄하신 그분, 죄와 죄책과 수치심이 없으신 예수님은, 죽음이 무시되지 못하도록 극도로 고통스런 죽음을 맞이하셨지만, 생명으로 가는 문이자 새로운 사귐의 근원이 되실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홀로 죽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우리와 마지막 여정을 함께 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에서 떠나야 하고 우리가 헛되이 살지 않았음을 믿어야 한다. 어쨌든 죽는 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순간이다. 모든 것을 주어야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는 방식은 우리가 살아온 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우리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이 살아갈 방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12장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다

예수님이 죽으셨다. 죽음의 권세가 그분을 무너뜨렸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빌라도의 판결, 로마 군병들의 고문, 잔인한 십자가형뿐 아니라 이 세상의 권세와 정사들이 그렇게 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에 의해 무너지셨지만, 자신의 죽음으로 죽음의 독을 제거하셨다. 그분은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다시 말해 죽음의 세력이 이를 수 없는 생명에 참여하는 권세를 주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다. 그 빛은 우리를 죽음의 권세에 항복하게 만드는 우리 마음 속의 어두움, 우리를 폭력과 전쟁과 파괴의 희생자가 되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어두움을 내쫓으셨다. 그 빛은 자신의 삶을 생명의 하나님께 완전한 선물로 바친 그분에게서 비치는 빛이다.


강력한 죽음의 권세에 대면하여 생명을 주장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전쟁, 살인, 납치, 고문, 구타 그리고 질병과 죽음을 낳는 셀 수 없이 많은 비극이 담겨 있는 신문을 펼칠 때마다, 우리는 결국 죽음의 권세가 승리하리라고 믿으려 한다. 그러나 거룩하신 그분, 예수님의 죽음은 아직도 계속 우리에게 생명을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향한 엄청난 도전은 가장 사소한 것,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조차 생명을 주는 쪽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를 깊고도 깊은 흑암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려는 죽음의 힘을 저지하고 바른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



제13장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내리

빌라도는 예수님의 죽음을 확인한 후에 그 시체를 아리마대 요셉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다(막 15:43)." 요셉은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쌌다(막 15:46)." 그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거기 있었다. 예수님은 고통당하시다 돌아가셨다. 이제 어머니로서 그를 사랑한 그녀의 슬픔은 이전에 어떤 사람도 겪어보지 못한 아픔을 낳았다. 마리아의 슬픔은 그녀의 사랑만큼이나 깊었다. 자신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끌어안은 그녀가 이제 자신의 슬픔으로 인류 전체를 끌어안았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를 받아서 극심한 고독 가운데 그분을 안고 있었다. 그녀가 아들을 품에 안고 있었을 때 사랑과 슬픔은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사랑과 슬픔의 결합은 하나님의 마음 가까이에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슬픔까지도 기꺼이 포용하는 것이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 아는 가장 심한 슬픔에 자신의 마음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슬픔이 없는 사랑이나 고통이 없는 헌신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잃지 않은 채 어떤 일에 개입할 수 없으며, 아무런 고난도 받지 않고 베풀 수 없다. 또 많은 죽음이 없이는 생명을 주장할 수 없다. 슬픔을 피하려 할 때마다 사랑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사랑하고자 한다면 거기에는 많은 눈물이 있을 것이다. 십자가에 정적이 감돌고 모든 것이 성취되었을 때 마리아의 슬픔은 세상 끝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자기 마음속의 슬픔을 알게 되는 모든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임을 알게 될 것이며 그것을 인생의 숨겨진 신비로 소중히 여길 것이다.



제14장 예수님을 무덤 속에 두다

예수님의 무덤 주변에는 깊은 안식이 있었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보내사 하라고 하신 모든 일을 완수하시고, 우리의 구속이 이루어지는 그 주간의 일곱째 날에 무덤에서 쉬셨다. 역사의 모든 날 중 이 성(聖) 토요일은 하나님의 고독의 날이었다. 그 날은 모든 피조물이 내면의 깊은 안식 가운데 기다린 날이다. 어떤 말이나 선언도 없던 날이다. 이 성 토요일은 모든 날 중 가장 적막한 날이다. 이 적막함은 첫 언약과 둘째 언약을, 이스라엘 백성과 아직 알지 못하는 세계를 연결시킨다. 그리고 성전과 성령 안에서 드리는 새로운 예배를, 피의 희생과 떡과 포도주의 희생을, 율법과 복음을 연결시킨다. 이 신적인 침묵은 이 세상에 존재했던 침묵 가운데 열매가 가장 많은 침묵이다. 침묵으로부터, 그 말씀은 다시 말씀하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침묵과 고독 가운데서 안식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안식은 우리가 죽음의 세력에 둘러싸여 있을 때조차도 지속될 수 있는 마음 깊은 곳의 안식이다. 우리가 그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을지라도, 그것은 우리 안에 숨겨진 존재, 대개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존재가 열매를 맺으리라는 소망을 준다. 그것은 상황이 좋아지지 않거나 고통스런 상황이 해결되지 않거나 폭동과 전쟁이 우리 일상생활의 리듬을 계속 파괴할 때조차도 평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살 수 있게 하는 믿음의 평안이다.



제15장 예수님이 부활하시다

그 주의 첫날 아침,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는 무덤이 비어있음을 발견했고 흰 옷을 입은 청년이 “그가 여기 계시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두 제자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에 들어가 거기 있는 세마포와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을 보았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분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고, 글로바와 그의 친구는 엠마오에서 예수님이 떡을 떼어 주실 때 그분을 알아보았다. 같은 날 저녁, 그분은 제자들 가운데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이런 일이 일어남에 따라 성 토요일의 침묵으로부터 새로운 말들이 터져 나와서 예수님을 알고 사랑했던 남녀의 마음과 심령을 어루만졌다. 그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정말 살아나셨다.” 이 말은 옥상에서 외쳐지지도 않았고 도시 곳곳에 계시되지도 않았다. 그 소식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귓속말로 전해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열망하던 심령들, 곧 나사렛에서 난 이의 말과 행동에서 그 첫 징조를 인식했던 심령들만이 진정 이해할 수 있고 들을 수 있었던 깊은 메시지였다.


여러 세대를 거쳐 세상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으로 조용히 전해진 그 소식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똑같지만 모든 것이 다르다. 나무도 그대로이고, 강도 산도 그대로이며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과 두려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통해 높이 올리워져서 하나님의 우편에 놓여 있다.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이 가득한 품 안에 있으며, 작은 아이는 그 어머니의 팔에 안겨 있다. 진정한 상속자는 가장 좋은 옷과 귀한 반지를 받을 것이며 형제자매가 같은 식탁에 초대될 것이다. 모든 것이 똑같지만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면 우리 짐은 가벼워지고 우리 멍에는 쉬워진다. 영원토록 아버지에게 속하신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에서 참된 안식을 찾았기 때문이다.


출처 : 상운교회
글쓴이 : 강인철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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