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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의 설교 적용 방법
정근두 목사 / 울산교회
설교는 설명의 요소를 가져야 하는 동시에 반드시 적용의 요소를 가져야만 한다. 로이드 존스에 따르면 강해에다가 적용을 더한 것이 설교이다. 그러므로 적용과 권면은 설교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그는 진리를 우리의 생활에 적용하지 않고 단지 설명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 설교사역은 실패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폭행이며(1982A:200) 성경과 모순된다고 본다(1982A:16~17). 참된 설교자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실천하도록 요청해야한다.
교리와 지식을 설명하는 목적은 청중들로 하여금 그 삶이 진리에 부합되도록 인도하는데 있다. "지식은 절대적으로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이론적이거나 학문적인 지식에 멈추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모르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일 수도 있습니다." (1982A : 201) 그러므로 설교자는 반드시 말씀을 청중들의 삶과 연관시켜야만 한다. 강해설교의 기본 요소인 적용을 로이드 존스는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자.
연역적 적용
교리와 적용은 분리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로이드 존스는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리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실제적인 문제들에만 마음을 쏟는다. 그들의 위험은 자신의 경험이라는 울타리를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며, 또 설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적용부분에만 관심을 갖고 듣게 된다.
수적으로는 적지만 두 번째 그룹의 사람들은 교리에만 관심을 갖고 실제적인 문제에는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너무 교리에 관심을 치중한 나머지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는 되돌아보지 않는다. 이들의 위험은 구원을 이론적으로만 생각하고 교리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그들의 설교는 때때로 너무 현실로부터 유리되며 지적이고, 신학적이고, 학적이고, 정통적이지만 마음에는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거나 행동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감정도 없고 느낌도 없고 권면도 없는 설교다.
로이드 존스는 두 부류 모두 다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둘 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단어 '그러므로'를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이드존스는 교리와 그 교리의 적용사이에는 불가분해적인 결합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개혁주의 전통에 속한 자로서 로이드 존스는 "우리의 설교에 보다 더 예언적(권면적) 요소가 있어야 하지 않는지" 의문을 제기한다(1977B:100). 일반적으로 말해서 개혁주의 설교의 문제점은 교리의 설명부분보다는 그 적용부분에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점은 개혁주의 설교에 있어서 설명의 양과 적용의 양을 대비해서 측정해보면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교리와 적용 사이에 바꿀 수 없는 순서
로이드 존스는, 균형 있는 강단사역은 교리 일변도나 적용 일변도가 되어서는 안 되고 둘 다를 포함해야 하며 또한 바른 순서가 있다고 본다. 즉 교리가 항상 먼저 와야 하고 교리의 적용이 뒤따라야 한다.
적용에 앞서 교리가 먼저 나오는 것은 신약서신에 있어서 불변하는 법칙이라고 그는 확신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논리의 문제요 연역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은 교리에 대해서 분명해지기 전에는 적용이나 실천이나 행동이나 경험을 논할 수 없습니다."(1979A:111).
달리 말해 로이드 존스는 항상 명령법 앞에 서술법을 둔다. 서술법이 분명해진 다음에 명령법으로 진행한다. 서술법의 기초로부터 명령법을 이끌어낸다." 먼저는 서술법이고 그 다음이 명령법이다."(Coetzee, 1985:23). 그래서 그의 특징적인 적용방법의 첫째는 '연역적 적용'이라 할 수 있다.
범주적 적용
두 가지 범주에 똑같이 적용하라
앞서 언급한 바대로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에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범주만이 있을 따름이다. "이 세상에는 항상 두 종류의 사람들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들입니다"(1983A:164). 더욱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두 가지 범주가 있다고 그는 확신한다. 참된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인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이다(1981C:295).
결과적으로 그는 항상 이 두 범주의 사람들을 향해서 적용한다. "만약 우리들이 신앙인이라면 마지막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불신자들이라면 우리는 그 심판 아래 빠져들 것입니다"(1983A:164). 이러한 범주적인 적용의 목적은 청중들로 하여금 보다 나은 선택을 하도록 돕는 데 있다. 그는 청중들을 두 가지 가능성에 직면토록 한다.
신앙고백을 점검하는 시금석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는 그의 설교에서 청중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신앙고백을 살펴볼 수 있는 많은 시금석들을 제공한다. 이것은 그의 적용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이 세상 삶에 대한 이해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삶이란 무엇이며 삶에는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인지를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좋은 시험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계십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지식의 한부분입니다(1979B:71).
그는 다음과 같이 계속한다.
그것은 창세전에 세워진 계획입니다. 시간이 창조되기 전에 마련된 계획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계획입니다. 만약 이 진리의 빛 속에서 여러분이 '만세반석' 위에 서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나는 여러분이 참 신자인지를 의심할 것입니다(1979B:72).
결론에 가서 그는 범주적 적용을 분명히 한다.
만약 여러분이 이 메시지에 실망했다고 말하고 싶습니까? 여러분을 낙심시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까? 이 세상을 위한 어떤 즉각적인 소망을 듣고 싶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더 이상 기독교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여러분에게 두 가지를 말해두고 싶습니다. 첫째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인 위로에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거룩한 이름의 위대함에 대해서 관심을 둡니다. 여러분이 찾고 있는 그러한 위로는 이단종교에 의해서 주어지며 기독교 메시지의 여러 가지 모조품에 의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그러한 설교가 비현실적이고 현재의 상황에 있는 사람을 돕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나는 이 메시지가 오늘날 상황에 대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유일한 메시지라고 말하겠습니다. 이것만이 오늘날 세상이 왜 이런지를 설명해줍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까? 만약 그렇다면 계속해서 그런 생각을 갖고 무덤까지 그 입장을 견지한다면 어느 날 갑자기 그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1979B:79).
그리스도인만을 위한 윤리적인 호소
로이드 존스는 기독교의 교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야 하지만 윤리적인 호소는 성령에 의해서 내적인 수용 능력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적용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 기독교적 윤리를 실천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엄밀히 말해서 중생하지 않은 사람에게 윤리적인 실천을 기대하는 것은 이단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사람이 스스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는 한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이 분명하게 확인되기 전에는 그 사람에게 성경의 교훈에 대해서 논의하지 않는다. 이 명백한 문제 가 오늘날은 주로 무시되고 있다. 개혁 강단의 심각한 문제들은 이 문제와 상당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많은 설교자들은 자기 앞에 앉아있는 청중들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점검하지 않고 자기 청중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호소하는 실정이다. 그리하여 직설법의 기초가 없는 명령법으로써 자기 청중을 그리스도인 대신 도덕주의자로 만들고 있는 실정이다(cf. Van der Walt, JJ. 1985B:50).
보편적인 적용
혼합된 청중을 향한 적용
설교자가 청중들에게 참으로 설교하기 전에 청중의 정확한 상태를 알기 위해서 공장 노동자에게 효과적으로 설교하기 위해서는 6개월 동안 공장에 가서 일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보다 더 잘못된 주장은 없다고 로이드 존스는 생각한다(l982C:132f).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는 청중들에게 특정 한 충고를 하는 것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한다(cf. Pietersma, 1973:64). 로이드존스는 그 생각이 전적으로 잘못됐다고 본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 논리적인 결론을 따르고자 한다면 어떤 설교자도 결코 혼합된 청중에게 설교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1982C:132).
인생의 근본적인 필요
복음은 사람의 자연적인 차이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고 로이드 존스는 믿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자에게는 자기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성격을 알든지 모르든지 그것은 큰 차이를 만들지 못한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그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 하는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에 의사와 설교자의 사역 차이에 뚜렷한 대조점이 있다고 본다. 구원은 특정 문제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인'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두는 것이다(1982C:134). 그러므로 모든 청중들을 공통분모로 축소시키고 인간의 근본적인 필요에 대해 메시지를 적용하는 것이 설교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여기에 다시 한 번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진리의 중요성을 파악하는"(Murray,1982:198) 로이드 존스의 능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만약 로이드 존스의 이 장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의 적용이 특정한 현대적인 경우보다도 사람의 일반적인 상황을 너무 자주 언급하는, 너무 일반적인 것"(Gardner, 1984 :315)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자기 메시지를 청중에게 적용시키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청중과 그들의 필요는 늘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의 경우에는 "문화와 교육의 정도를 초월한"(Anon. 1981B:20) 호소이고 "생의 영적인 문제를 분명하게 밝혀서 어떤 사람이 들어도 오해하지 않도록"(Robinson, D.W.R. 1960:62)하는 목적이 성취되고 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가능한 적용 로이드 존스는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영속적인 교훈을 자유롭게 발견한다. 로이드 존스의 보편적인 적용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가변적인, 인생 문제의 표면적 차원에 기초하지 않고 불변하는 인간의 심층 상황에 기초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에덴동산에서 타락했던 순간만큼이나 부패되어 있습니다."(1981A:222)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것은 시편 저자가 살던 시대의 사람들에게만 사실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동일한 종류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1982B:15). 이런 공통적인 인간성은 골드베르그에 의해서도 강조되고 있다(Goldberg, 1984:14). 그리하여 인간의 기본적인 상황이 적용의 대상으로 등장한다(Kraft, 1978:34; Marshall, 1980:10).
게다가 로이드 존스에게는 오늘날 사람들은 신약의 가르침을 맨 처음 듣던 청중들의 상황과 구속사적인 관점으로부터 볼 때 동일하다(cf. Gaffin,1969:143). 마지막으로 그의 보편적인 적용은 하나님 자신의 불변하는 성품과 그의 백성을 다루시는 불변하는 방법에 기초하고 있다.
칼빈 역시 에베소서 설교에서 동일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여러 지역에 보낸 편지들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그 편지들이 한 시대의 특정한 사람들만을 섬기도록 의도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하나님의 교회 전부를 섬기도록 하셨으며 이 편지에 담겨져 있는 교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고 하나님께서 미리 그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서 남기신 것임을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Calvin, 1979:7, 8).
만약 이러한 불변하는 교리 위에다가 적용의 근거를 찾는다면 로이드 존스가 했던 것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 이 시간에도 동등하게 중요한 것입니다"(1981F:4). 한 사람의 적용은 그가 자기 청중이 속한 상황과 정황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궁극적으로 관계되어 있다.
정황적 적용
동일한 원리, 상이한 적용
많은 성경적인 가르침은 아무런 변화 없이 현대 상황에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근본적인 메시지는 오늘날 어떤 문화적인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그들이 당면한 근본적인 문제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Kraft, 1978:34;Marshall, 1980:11, Goldberg, 1984:14).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재적용의 필요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재적용의 필요는 원독자의 정황이 현대 청중의 정황과 다를 때에 일어난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는, 원리는 언제나 동일하지만 적용은 정황이 다를 때에 다르게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1981A:368).
예를 들면, 에베소서 2장 19절의 본문으로부터 로이드 존스는 자기 청중의 실제적인 영적 상태를 평가한 다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되는 특권을 논한다(1981A:367).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그 입장에 있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입장이 주는 특권을 계속 고려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981A:367, 본래적인 강조).
로이드존스는, 에베소 성도의 경우에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설명한다. 소위 '제 1세대 기독교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에게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언제나 사실이지만 오늘날 교인들을 그렇게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에 따르면 본래 편지가 쓰여 진 정황 뿐 아니라 오늘날 특정한 정황에서 이것을 해석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로이드 존스는 두 영적 정황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원리를 적용하기에 앞서서 자기 청중들에게 이 질문을 먼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정황의 차이는 동일한 원리를 상이하게 적용하도록 요청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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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등식 설정을 피하라
"누가 적용을 하든지 그 사람은 그때와 지금 사이에 등식을 설정해야 한다."고 홀베르다(Holwerda, 1953:112)가 말한 것처럼 이 과정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잘못 된 등식 설정을 피해야 한다. 로이드 존스의 정황적 적용은 손쉬운 적용을 하기 위해서 역사적인 공백이 있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과거와 현재가 동일하다는 등식을 설정하여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동일시하는 것을 꾀하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잘못된 등식 설정을 피하기 위해서 원독자의 정황과 현 청중의 정황 모두를 잘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설교자의 의무라고 여긴다. 설교자는 반드시 양자의 정황에 충분한 고려를 해야 한다. 이 말을 그때 누구에게 했는가? 이것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가? 만약 설교자가 이것을 소홀히 한다면 모범적 설교의 위험 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Greidanus, 1970:70ff). 동시에 그런 설교자는 기독론적 설교를 오용하고 청중들에게 단순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혹은 약속과 위로만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믿음과 순종으로 언약의 주님 앞에서 오늘을 능력 있게 살도록 하는 일에 실패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죄의 잠에 빠져들게 할 수도 있다(Stek, 1971:112, 115).
두 범주에 대한 강조
그러므로 정황적 적용은 설교자로 하여금 두 정황 모두에 대해서 민감하도록 요구한다. 성경적 메시지를 설명하고 적용하는 것은 이 두 정황이 계속적으로 서로 주고받는 과정 속에서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용의 목적이 구체적인 정황 속에서 청중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때 설교자로 하여금 과거의 역사적인 정황에 대한 이해에 못지않게 오늘날 구체적인 정황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결과적으로 이 정황적 적용은 옛날의 독자들의 정황과 현대의 청중들의 정황 양자에 대해 적절한 무게를 두도록 요구한다. 여기에 전통적이고 복음주의적인 해석학으로부터 유래한 통찰력과 현대적 해석학 논의로부터 연유한 통찰력이 서로 결합되어 있다(cf.Conn, 1978:44; Padilla, 1981B:19; Stott,1982:137f).
정황에 대한 현대적 강조에 뒤따르는 문제점은 두 부류 사람들의 영적 정황을 완전히 무시하고 두 문화적 정황에 대한거의 배타적인 관심을 쏟는 데에 있다(Goldberg, 1984:13-14).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문화적인 정황이 아니라 양자의 영적 상태에 밀접히 관련된 정황을 강조하고 있다. 신해석학과 상황화 신학이 현대 신학계에 공헌을 하기 전에 로이드 존스는 두 문화적인 정황에 대해서 적절한 관심을 표명함으로 그들의 통찰력을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두 부류 사람들의 영적 정황에 관심을 쏟음으로써 문화적인 정황에만 집착되어져 있는 그들의 잘못을 극복하고 있다(cf. 4.4.4.1).
실제적인 적용
'어떻게' 측면의 강조
주어진 교리에 포함된 성경적인 원리를 고찰한 다음에 로이드 존스는 그 원리를 실제적으로 적용한다. '실제적'이라는 말은 정치적인 혹은 사회 경제적인 상황을 의미하지 않고 보통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로이드 존스는 본문이 그것을 다루든지 (1980:259) 다루지 않든지 (1980:245; 1975C:40;1975B:64)간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떻게'의 측면을 항상 강조한다. 자주 이와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실제적으로 살펴봅시다(1979A:264;cf. 1979A:126;1981B:286).
어떻게 이것은 실제에 있어서 작용합니까?(l981B:124;cf.1981B:244 293;1981C:84 301)
그것을 마음에 두고 지금 실제적으로 살펴봅시다(1981B:165;1981C:81,168,171).
이점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예를 들면, 죄를 억제하는 일의 중요성을 다룬 다음에 '우리는 육체의 먹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제목 아래 로이드 존스는 어떻게 이것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실제적인 충고를 하고 있다. 그의 충고는 다음과 같다. "여러분에게 항상 해를 끼치도록 충동질하고 속삭이는 신문에 나오는 기사들을 읽지 마십시오."(1981B:249)
아담스는 복음주의 강단의 전형적인 문제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전형적으로 성경을 믿는 설교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해서는 안 되는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실제적인 충고를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청중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말해주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1982:138;cf. 126-129).
탁월한 강해와 실제적인 충고의 조화
이 실제적인 적용의 배후에는, "복음의 설교가 실제적이 아니라면 그것은 참된 설교가 아닙니다."(1981C:87)라는 로이드 존스의 신념이 담겨있다. 기독교는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서 할 말을 가지고 있으며,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또 그가 생각하는 모든 것에서 자동적으로 올바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1975C:88).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생의 모든 영역에 적용한다.
사도적인 규범을 따른 그의 교리적인 강해는 신앙의 지혜 속에서 성장하고 거룩해지는 실제적인 요청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그 실제적인 의미를 말하지 않고 교리를 강조하거나 아니면 교리를 말하지 않고 실제적인 삶에 대해서만 강조를 하는 다시 말해서 균형을 상실한 많은 설교자들과는 달리금세기에 비교할 만한 사람을 찾기 힘들 만큼 이 문제에 대해 균형있는 강조를 하는 있는 사람으로 로이드 존스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탁월한 강해와 실제적인 충고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이 점에 대해서 청교도의 전통을 일반적으로 따르고 있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칼빈을 특별히 추종하고 있다."…교리는 …이 시대를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 교리로써 우리의 신앙은 날마다 자라서 완전함에 이를 때까지 나아갈 것입니다"(Calvin, 1979:8).
직접적 적용
앞에 있는 청중들을 향해 적용하라
로이드 존스는 참석하지 않은 죄인들에게 설교하지 않고 강대상 바로 앞에 앉아있는 청중들에게 설교했다. 칼빈이 제네바 사람들에게 했던 것처럼 자기 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적용했다(Peter, 1982:1).
오늘날 이 점은 중요하게 간주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개혁주의 강단에서는 이른바 '은사운동'을 비판하기에 바쁘며, 오순절 교회에서는 그들의 성도들의 문제를 다루는 대신에 기성교회를 비판하는 일에 열심히기 때문이다.
절박함을 가지고 적용하라
로이드 존스의 적용에는 긴박감이 내재되어 있다: “이 순간까지 지옥에 갈만한 죄를 여러분 자신이 지어왔다 손치더라도 이 메시지를 믿기만 하면 여러분의 죄는 용서 받습니다"(1978B:158).
로이드 존스는 죽어 가는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하듯이 설교를 한다. 그는 설교하는 순간에 영원한 문제가 결정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만약 설교자가 이 긴박감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참 설교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라고 생각한다(1982C:91).
징계의 경고
직접적 적용이란 제목 아래 포함시킬 또 하나의 측면은 청중들에게 하는 징계의 경고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생명의 원리를 두셨습니다. 이것은 의의 원리입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성령께서 그 위에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은 그 앞에 영광 가운데 흠이나 책망 받을 것이 없이 궁극적으로 서기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이루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서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으면 징계를 받고 처벌을 받으며 어려운 입장에 자신이 빠지게 될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당황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완전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안에서 그분이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도록 허용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다른 방편들을 사용하실 것입니다(1979A:227,cf.1981C:174).
적용의 방법
일련의 질문을 연속적으로 하라
지금까지는 로이드 존스의 특징적인 적용 방법을 일반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제 그의 적용 방법 자체를 살펴보자. 로이드 존스는 종종 질문하는 방식으로 청중들에게 진리를 적용한다.
여기서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조금이라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나는 에베소서를 모두 다 읽었는지를 질문하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을 개인적으로 아는지를 묻고 있습니다(1978B:174).
로이드 존스는 바울이 자주 사용한 것처럼(고전 1:12, 20, 2:4-5 16. 등) 일련의 질문을 연속적으로 하는 것이 진리를 전달하는 좋은 방법이며, 청중들의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기도록 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1975A:369~370).
단언을 통한 진리의 적용
어떤 때는 질문 방식과는 별개로 하지만(1979B:74, 77) 대부분 이것과 함께 로이드 존스는 일련의 단언을 함으로써 진리를 적용한다(1978B:181;1981A:336,cf. 롬8:31-39). 바울이 로마서 8장 1-30절에서 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예를 들면 이와 같이 한다.
나로 하여금 그것을 독단적으로 주장하게 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이 세상에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외에 어떤 희망을 찾아본 적이 있습니까? 신문을 살펴보시고 역사와 철학과 시와 과학 서적을 샅샅이 살펴보십시오.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습니까? 거기에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회복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분만이 유일한 길입니다(1979B:74).
로이드 존스는 질문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질문의 결과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을 또한 지적할 수 있다.
설교 전편에 걸친 적용
진리를 설교 전체에 걸쳐서 적용하는 것을 특징적인 방법으로 말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설교 자체는 적용식 강해이다. 하지만 그는 강해 혹은 설명과 적용을 배합하고 있다. 어떤 때는 중심명제를 확립한 다음에 전적으로 적용하기도 한다.
이점과 관련해서 로이드 존스는 설교를 항상 적용의 논조로 끝을 맺고 있으며 한편의 설교 전체에 걸쳐서 호소가 내포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강해설교의 기본인 적용
적용과 권면은 설교의 기본 요소이다 로이드 존스에 따르면 강해에다가 적용을 더한 것이 설교이다. 그러므로 적용은 설교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방법은 모든 설교의 모형과 모범이어야 합니다. 그 메시지와 진리를 적용하기에 실패하면 참된 설교가 아닙니다. 본문을 설명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설교는 참된 강해 설교가 아닙니다. 진리는 삶속에 적용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권면과 적용은 설교의 필수적인 부분입니다(1981C:218).
로이드 존스 자신은 청중을 일깨우는 능력을 가진 권위자로서 인정을 받고 있다(Harrison, 1981B:45). 이점에서 로이드 존스는, "설교는 적용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말하는 스펄전과 같은 전통에 서 있다. 적용이 없는 설교는 병자에게 건강에 관한 강의만 하고 처방전을 주지 않고 병원에서 내보내는 의사와 같다(Perry, 1979:519).
진리는 반드시 적용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기본적으로 지성을 위해서 의도되었지만 동시에 전 인격에 영향을 주도록 의도되었다는 사실을 로이드 존스는 확신하고 있다(1978A:xii). 진리는 객관적으로 살피고 지적으로 즐기는 것이 아니다.
"…교리와 신학은 서로 분리해서 취급해서는 안되고 학문적인 주제처럼 여겨서도 안됩니다"(l975A:xi, cf.1982A:17). 진리는 적용되어야 한다. "적용이 없는 설교는 더 이상 참된 말씀의 봉사가 아닙니다."(Hoekstra, 1973:299,cfCoeztee, 1985:22-23; Labuscagne,1981:74; Pieterse,J.S. 1971:158).
로이드 존스의 설교학적 공헌
먼저, 로이드 존스의 설교 원리에 대한 연구를 마감하면서 그의 강해 설교를 관장하는 최소한 다섯 가지 근본적인 설교학적 원리가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1)설교는 특정 한 본문으로부터 반드시 시작해야 한다.
(2)설교는 설명의 요소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
(3)설교는 적용의 요소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
이 세 가지 원리는 강해 설교의 공리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들이다. 이 원리들은 로이드 존스의 성경관에 궁극적으로 기반을 두고 있다. 하지만 보다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두 가지 부가적인 원리가 있다. 이것은 로이드 존스의 일반적 공헌으로 간주할 수 있다.
(4)모든 설교는 하나의 완벽한 총체여야 한다.
(5)모든 설교는 진리를 분명하게 그리고 명백하게 선언해야 한다.
이 두 원리의 배후에는 청중에 대한 그의 특별한 관심이 자리 잡고 있다.
둘째로, 청중의 정황에 대한 일관적인 강조를 로이드 존스의 설교학적 공헌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이 강조는 다섯 가지 원리와 그 관련된 방법들을 관통하고 있다. 세 가지 유형의 설교도 청중의 상태와 수용 능력을 현실적으로 분석 평가한 것 위에 기초하고 있다. 설교의 형태에 관한 그의 피나는 관심도 청중들로 하여금 메시지를 쉽게 수용하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여러 가지 설명 방식과 적용 방식 역시 청중을 위해서 의도된 것들이다.
로이드 존스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설교자의 근본적 자질의 하나는 이러한 흐름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설교자)는 인간을 이해하고 사람의 본성을 파악한 자여야 한다."(1982C:110) 이런 로이드 존스의특별한 공헌은 설교에 있어서 사람의 본성과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할 때에 충분히 그 가치가 인식된다.
청중의 정황에 대한 현실적인 이해 없이는 설교를 효과적으로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로이드 존스의 강점은 청중의 표면적인 정황보다 심층적인 정황 즉 변한 적도 없고 변하지도 않을 청중의 영적 정황을 강조한 점이다.
"설교자는 자기가 말하는 대상 즉 사람을 잘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토의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가끔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 인간과 그들의 문제를 참으로 이해하기 전에는 설교를 통해 사람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지 결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셋째로, 로이드 존스의 불변하는 공헌의 비결은 그의 목회자적인 마음으로부터만 추적 될 수 있다. 카이저가 간결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옳다. "그 의사의 설교의 능력과 축복은 형태나 의도에 있어서 항상 목회적이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Caiger,1981:14). 드용은 동일한 진리를 설교자 로이드 존스와 관련해서 말할 때 확인한다. 성실하고 타인을 수용하는 목회자가 되기 전에는 아무도 좋은 설교자가 될 수 없다(DeJong,1966:149).
그의 설교를 살펴볼 때 분명한 점은, 로이드 존스의 기본적인 목회적 관심은 청중을 그 이해 능력과 수용 정도에 따라서 도우려는 데 있다. 로이드 존스가 바울에 대해 말한 것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다. "그는 전도자인 동시에 설교자였습니다. 신학자인 동시에 교사였습니다. 동시에 부드러운 마음과 동정하는 마음을 지닌 목회자였습니다.”(1975C:11)
그러므로 강해 설교의 참된 비결은 몇몇 설교학적인 원리를 통달하는데 있지 않고 그가 설교하는 사람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 의해서 통제되는데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설교는, 배울 것은 많지만 가르칠 것은 별로 없는 학문이라는 점을 수긍해야 한다(Smith 1958:152). 로이드 존스의 말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설교는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만약 한 사람이 설교자로 태어났다면 여러분은 그를 조금은 도와줄 수 있습니다. 여기저기 조금씩 개선시킬 수 있습니다.”(1982C:119)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역설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설교자는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1982C:119)라는 말은 사실이다. 그의 목회적 마음은 다시 한 번 이 기본적인 진리를 우리에게 생각나게 한다.
참된 설교자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Darbney, 1979:250, 260) 위대한 진리는 이와 같은 전문가들의 시대에 다시 한 번 선포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자는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1982C:119). 왜냐하면 로이드 존스의 설교학적인 방법을 흉내 내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지만 그가 가진 정열과 동기의 순수함을 나타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개혁주의 교계에서 이와 같은 설교의 유형이 결여되어 있다면² 그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몇가지 기교를 혁신시킴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목회적 임무에 관한 영적 자각이 있어야만 된다.
주(註)
1. 적용이란 용어를 로이드 존스가 사용할 때는 권면, 호소, 책망, 간구, 설득 등이 다 포함되어 있다(1980:19).
2. 메카트니(McCartney 1980:203)는 개혁주의 교계 전반에 걸쳐서 참된 종교적인 경향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