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 무슨 일들이 있었는가?
사람들은 ‘주님의교회’하면 먼저 자기 예배당을 소유하지 않는 교회, 혹은 헌금의 50%로 선교하고 구제하는 교회를 연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여기에서 ‘우리’란 주님의교회 교우들과 나 자신을 뜻한다) 추구하게 하신 정신에 입각한 원칙이었을 뿐, 그것 자체가 주님 안에서 우리가 지녀 왔던 정신은 아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교회를 ‘개혁’이라는 시각에서 바라본다. 마치 주님의교회를 개혁의 기수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 사실일 수는 없다. 우리는 단 한번도 개혁 그 자체를 우리의 목적으로 삼았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주님의교회가 개혁적으로 보였다면 그것은 결과일 뿐, 목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주님의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일깨워 주신 것은 ‘자유’와‘회복’이다. 복음의 핵심은 구원이요, 구원이란 바로 자유다.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는 당신이 오신 까닭을 다음과 같이 밝히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여기에서 말하는 ‘은혜의 해’란 레위기 25장에 나타나 있는 희년을 의미한다. 희년이란, 50년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선포되는 자유의 해였다. 이 해가 되면 모든 종되었던 자들이 완전무결한 자유를 얻었다. 그래서 그 해는 하나님에 의한 ‘은혜의 해’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은혜의 해를 선포하시기 위하여, 그 희년의 완전 무결한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을 주님께서 친히 밝히셨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이란 곧 자유임을 주님께서 직접 천명하신 것이다.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 모든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의 자유가 바로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이다.
주님의 구원이 자유를 뜻함은 이미 출애굽기에서부터 확인되고 있다. 애굽에서 노예생활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였으니, 곧 애굽의 노예 된 상태로부터의 자유였다. 성경에서 애굽이란 언제나 죄와 죽음과 절망과 욕망의 상징이다. 하나님이 구원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로 나타났다. 그렇기에 출애굽기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자유의 경전이다. 이처럼 복음이 말하는 구원이란 언제나 자유와 동의어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자유를 상실한 구원이 있을 수 없고, 구원과 무관한 자유가 성립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 자유는 결코 방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분명한 목표를 향한 자유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향한, 혹은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그 해답은 출애굽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출애굽은 무엇을 위한 자유였던가?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하셨던 가나안의 회복을 위한 자유였다. 그것은 절대로 방향 없는 자유가 아니었다. 출애굽이 하나님의 구원이요 그 구원이 자유를 뜻한다면, 그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은 회복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갈 5:13)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벧전 2:16)
자유는 향방 없는 방종이 아니라, 반드시 분명한 목표를 향한 회복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렇기에 구원과 자유 그리고 회복은 복음 안에서 한 의미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난 10년 동안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주님의 몸 된 교회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추구해 온 것이 있다면 바로 자유와 회복이었다. 다시 말해 목회를 자유와 회복으로 이해하고 또 정의했던 것이다. 비성경적이고 그릇된 모든 인습이나 구습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고 계시는 교회로의 회복―이것이 바로 우리의 목표였던 것이다.
자유와 회복을 위한 목회란, 실은 오래 전부터 추구되어 오던 것이다. 구약에 등장하는 모든 선지자들은 인간을 구속하는 그릇됨으로부터의 자유와, 진리를 향한 회복을 위해 자신의 삶을 걸었던 자들이다. 중세 개혁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타락한 카톨릭 교회의 노예상태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참된 교회로의 회복이 그들의 지상목표였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목회 또한 자유와 회복으로 표현된 수 있으니, 곧 강도의 굴혈처럼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성전으로부터 인간을 자유케 하시어, 주님이 주인 되신 진정한 교회를 회복케 하신 것이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에 동의한다면, 자유와 회복이란 과거에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목회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유와 회복을 위한 목회―그러나 이것을 압축하여 ‘회복의 목회’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한 그리고 무엇을 향한 회복인지를 규명한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지를 이미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회복의 목회라 할 때, 그 회복은 총제적으로 무엇을 향한 회복이어야 하겠는가? 두말 할 것도 없이 말씀의 회복이다. 교회가 말씀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은 얼른 이해하기 힘든 말일 수 있다. 교회의 터는 말씀이기에, 말씀을 떠나서는 교회의 존립 자체가 불가능한 까닭이다. 그러나 옛날 선지자들이 외친 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으로의 회복이었다. 중세 개혁자들의 구호 또한 ‘오직 말씀으로’(sola scriptura)였다.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곧 말씀이셨다. 눈에 보이는 말씀이셨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말씀 가운데 있어야 할 교회가 자주 말씀을 벗어나 있었음을 웅변해 주고 있다.
모든 인간 조직은 일단 조직되고 나며, 조직 그 자체의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 조직이 만들어질때의 취지나 정신에서 멀어지고 만다. 이것이 인간 조직의 생리다. 어떤 조직이든지 끊인없는 자기성찰이 수반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기성철을 다른 용어로 표현한다면 근본정신의 회복이 될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 무리를 가리켜 교회라 부르고 있다. 사람이 교회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 역시 인간 조직일 수밖에 없다. 단지 다른 인간 조직과 차이가 있다면, 교회라는 조직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교회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한, 교회가 주님의 말씀보다는 조직 그 차제의 생명력에 의해 지배당한 적이 더 많았음을 성경과 교회의 역하는 교훈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늘 말씀으로의 회복을 지향해야 하는 것은 교회의 지상과제가 아닐 수 없다.
주님의교회가 말씀을 회복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는, 말씀을 순서대로 보게 하신 것이다. 새벽기도회, 주일 저녁예배, 수요예배, 구역 성경공부는 물론이고, 주일 낮예배 시간에도 순서대로 묵상하여 나갔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시작한 일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얼마나 크나큰 주님의 은총인지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지난 10년 동안 주일 낮예배 시간에 성경을 순서대로 설교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매주일 나의 취향에 따라 본문 말씀을 선택하였을 것이고, 당연한 결과로 주님의교회 교인들은 내 취향의 울속에 갇혀 하나님의 말씀을 편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0년이 아니라 20년을 그렇게 설교한다 한들, 어찌 그처럼 편향된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전해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말씀을 순서대로 살폈기에 누구보다 나 자신이 먼저 성숙해질 수 있었다. 말씀을 순서대로 묵상한다는 것은 나의 취향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나의 취향데 따라 말씀을 취사선택하여 나의 기호에 맞는 또 하나님 경전을 스스로 만드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모든 말씀에 의해 내가 먼저 바르게 빚어져 가는 은혜를 체험한 것이다.
특히 주일 낮예배 시간을 통하여 마태복음을 순서대로 설교하는데는 3년 10개월, 요한복음 전체의 설교를 위해서는 무려 6년 2개월이 소요되었다. 말하자면 마태복음 28장과 요한복음 21장을 합친 총 49장을 설교하기 위해 만 10년, 정확하게 510주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다 보니 단 한 구절, 단 한 단어도 무심코 지나칠 수가 없었다. 모든 구절, 모든 단어가 예외 없이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하여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연결된 진리의 광맥 속에 감추어진 보석들이었다. 그 과정을 거치게 하시면서 평소에는 알지 못했던 진리의 비밀들을 얼마나 깨닫게 해 주셨던지, 주님의 은혜는 이루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다.
이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말씀이 회복되어 가는 가운데, 주님의교회는 말씀에 의해 오늘의 모습으로 가꾸어져 왔다. 바꾸어 말하면, 주님의교회가 행하고 있는 일들은 이처럼 말씀을 회복해 가는 과정 속에서 실행되었다는 말이다. 말씀의 회복 속에서 회복의 목회는 구체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10년 동안 주님의교회에서는 말씀의 회복을 추구하면서 어떤 회복들이 구체적으로 일어났는가? 아니, 주님께서 무엇을 회복시켜 주셨던가?
1. 교회 본질의 회복
고린도전서 1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은 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성경은 ‘하나님의 교회’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 그리고‘각처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라 정의하고 있다. 즉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진 성도들의 모임이란 말이다. 본래 교회란 용어를 제일 먼저 사용하신 분은 주님이시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주님께서 마태복음 16장 18절을 통하여 최초로 교회를 언급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엑클레시아’( )는 ‘부르심을 입은 사람’이란 뜻이다. 주님께서도 교회가 사람임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히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 자신이다. 만약 교회가 부패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교회 건물이 노후했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인 우리 자신이 교회답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2,000년 교회 역사를 살펴보건대, 교회가 좀더 웅장한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하여 진력한 때일수록 교회가 실은 가장 내적으로 부패했을 때임을 감안한다면, 교회의 본질인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세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예배당을 소유하지 않기로 한 이유이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 어떤 형태로든 소위 예배당이 필요한 것이다. 그 동안 한국 교회는 좀더 많은, 그리고 좀더 좋은 예배당을 세우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 땅에 세워져 있는 모든 예배당 건축에 소요된 비용만도 천문학적인 금액일 것이다. 그처럼 시간적, 경제적 노력을 아끼지 않고 전국적으로 수만 개의 예배당이 건립되었기에, 오늘과 같이 많은 사람들을 교회가 수용할 수 있었다. 이것은 분명 예배당 건축의 긍정적인 면이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 되는 부정적인 면이 있으니, 그 와중에서 마치 예배당이 교회인 것처럼 그릇된 인식을 심어 준 것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교회는 땅을 사고 집을 짓는 일을 교회의 최대 과제로 삼았다. 예배공간의 부족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목적 자체로서의 예배당 건축이 교회의 주된 일이 되어 왔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교회의 본질이 사람에서 건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이처럼 교회의 목표가 잘못 설정됨으로 인하여, 교회 된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세우는 본질적인 과제는 어쩔 수 없이 소홀해지게 되었다. 몇 사람 건너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 있을 정도로 기독교의 교세가 이 땅에 두드러짐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쉬임없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음은, 그리고 각종 대형 비리사건의 한가운데에 늘 그리스도인들이 포진하고 있음은 여러 가지 연유에 기인하겠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교회의 본질을 사람이 아닌 건물로 오인하고 있는 탓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예배당 소유하기를 포기하였다.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 바로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 우리 자신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충실해지기 위해서는, 예배당을 소유하지 않는 교회도 이제는 있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개혁 혹은 새로운 운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 때문이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벽돌 한 장 쌓은 적이 없으셨다. 예배당을 위하여 단 한 평의 땅을 구입한 적도 없으셨다. 어디든지 주님이 계시는 곳, 바로 그 곳이 예배당이었다.
주님께서 산 위에 계시면 산 위가 예배당이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 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1-3)
저 유명한 산상수훈은 건물 속에서 설교된 것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산 위에서 선포된 주님의 말씀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말씀의 가치가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다. 주님께서 그 날 산 위에 서셨을 때, 그 곳이 예배당이었던 까닭이다. 그런가 하면 주님께서 바닷가에 계시면 그 바닷가가 예배당이 되었다.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마 13:1-3).
무리들이 서 있는 바닷가가 교인석이라면, 주님께서 앉아 계신 배는 강단이요 강대상이었다. 그 자체로서 이미 훌륭한 예배당이었다. 그 예배당에서 ‘씨뿌리는 비유’는 설교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님께서 마가의 다락방에 계시면 그 곳이 예배당이었고, 불의한 삭개오의 집에 계시면 그 곳이 또한 예배당이었다. 바리새인들이 돌로 쳐죽이려 했던 간음한 여인 앞에 주님께서 서셨을 때, 예배당은 그 곳에 있었다. 이처럼 어느 곳이든 주님께서 계시기만 하면 그 곳이 곧 예배당이었기에, 주님께서 어디에 계시든 거기에서 사람들이 회개하고 거듭나는 생명에 역사가 일어났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예배당을 소유하지 않기로 했다. 이것은 건물 밖에서, 산 위에서나 혹은 바닷가에서 예배드리려 했다는 말이 아니다. 현대는 옛날과 같은 농경시대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도시의 예배는 건물 속에서 드려질 수밖에 없다. 어떤 형태로든 예배당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예배당의 참됨은 규모나 소유 여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 곳에 주님께서 계시는가 아닌가에 따라 판가름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계시는 예배당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님께서 어떻게 건물 속에 계실 수 있는가?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이 주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일 때, 그 예배당은 형태나 소유의 여부에 상관없이 주님께서 계신 예배당인 것이다. 다시 말해 교회 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본질에 충실할 때, 그들이 있는 곳은 어떤 곳이든 아름다운 예배당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예배당을 소유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은, 우리가 언제나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교회의 바른 본질로 우리 자신을 회복시켜 가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가장 우선시했다는 말이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욕망이 판을 치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굴혈이라 말씀하셨다. 그 성전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긍지요 자부심이었는데도 말이다. 반면에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죠?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
성경은 우리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거하실 성전이므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회복시켜 갈 것을 명령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건물이 아닌 우리 자신을 요구하고 계신다는 뜻이다. 강도의 굴혈과도 같던 위를‘움직이는 하나님의 성전’(portable temple)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 일을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성전으로 회복되기만 하면, 설령 우리가 판잣집에서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그 곳은 지극히 아름다운 예배당이 될 것이요, 우리의 수가 아무리 적다 할지라도 우리는 향기로운 주님의 교회가 될 것이다. 성전 된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 그 곳에 주님께서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땅을 사고 건물을 지어 예배당을 소유할 겨를이 없었다. 우리자신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던 것이다. 그거만이 이 혼란한 시대 속에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길임을 확신하면서 말이다. 주님의교회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주님의 크나큰 은총이었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선한 생각을 주셨던 분이 주님이셨다. 만약 주님께서 우리에게 처음부터 이 은총을 베풀어 주시지 않았던들, 오늘의 주님의교회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고, 내가 주님의 은총을 증언하기 위하여 이 책을 쓸 이유도, 독자가 이 책을 읽을 까닭도 없을 것이다.
2. 교회 주인의 회복
나는 모태신자로 태어났다. 그리고 비록 선데이 크리스천이었을 망정, 25세 때에 서리 집사로 임명을 받았다. 약 300여 명이 출석하던 작은 교회에서였다. 29세가 되어서는 이사 간 동네의 교회로 교적을 옮겼고, 당시 1,500여 명이 출석하던 그 교회에서는 여러해 동안 제직으로 많은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37세 때 신대원에 입학하여 2학년 되던 해부터 3년 동안, 교인 수가 20,000명이 넘는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봉사하였다. 말하자면 내가 목회를 시작하기 전 나는 한국의 소형·중형·대형 교회를 모두 경험했던 것이다.
그 세 교회 사이에는 규모와 수준, 위치와 여건상 엄청난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교인석과 커튼 너머의 뒤쪽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교인석에 앉아 예배드릴 때는 은혜로웠다. 어김없이 주님의 교회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일단 커튼을 열고 교회 뒤쪽으로 가면, 그 곳은 교인석과는 너무나 판이하였다. 그 곳으 주인은 목사나 장로 혹은 그 교회의 유력자였다. 교회라기보다는 대기업의 중역실과 흡사하였다. 은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참된 교회의 모습일 수가 없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 교회의 실상을 알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역사란, 분열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단 없는 분열로 점철되어 왔다. 교단은 교단대로 지교회는 지교회대로 끊임없이 분열해 왔다. 그 분열의 주된 원인은 사람이 교단이나 교회의 주인 되려 하기 때문이었다. 주님께서는 성경에서 최초로 교회라는 단어를 언급하실 때, 교회의 주인이 누구이어야 하는지를 아무도 오해할 수 없는 분명한 말씀으로 밝혀 주셨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니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5-18).
주님께서는,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세주로 믿는다는 인간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지는 모든 교회를 ‘내 교회’, 즉‘주님의 교회’임을 명확히 하셨다. 다시 말해 이 땅의 모든 교회의 주인은 오직 주님뿐이심을 천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사람이 주인 노릇 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의 명칭이 어떠하건 상관없이, 그것은 단순한 인간의 집단일 뿐 결코 주님의 교회일 수가 없다. 스스로 주인 되려는 사람들로 인하여 이 땅의 교회에 분란이 그치지 않음은, 주님만이 교회의 주인이실 수 있다는 이 단순한 원칙이 망각되고 있음이다. 어쩌면 그것은 한국 교회 제도가 낳은 부작용일 것이다.
이 땅에 세워진 교회치고 어떤 교회가 사람을 주인으로 삼기 위하여 세워졌겠는가?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되기 위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졌을 것이다. 교회 창립의 도구로 쓰임 받은 자들은 목사 장로 할 것 없이 모두, 오직 주님만을 주인으로 섬기려는 진실되고 겸손한 마음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70세가 될 때까지 한 교회에서 목사나 장로로 시무한 다음에도, 죽을 때까지 원로목사 원로장로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현 제도하에서는, 교회는 어쩔 수 없이 특정인간의 교회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미의 교회들이 원로목사나 원로장로를 인정치 않고, 일정한 기간마다 오히려 목사와 장로의 재신임을 묻거나, 퇴임한 목사로 하여금 교회와 일정한 거리 밖에서 살도록 제도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교회는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특정인간에 의해 지배당하는 인간의 교회가 될 수밖에 없을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개신교가 카톨릭의 도그마 중에서 수용할 수 없는 거 중의 하나가 교황의 무오류성이다. 카톨릭의 교황으로 한번 선출되기만 하면, 그의 임기는 그가 죽어야만 끝난다. 한 마디로 교황은 종신제인 것이다. 그런데 교황으로 선출된 자는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카톨릭은 절대신조로 삼고 있다. 그가 내리는 결정, 그의 모든 말은 언제나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이다. 이 도그마에 대한 비판이나 새로운 해석은 절대 금기사항이다. 지난 2,000년 동안 교황이 얼마나 많은 실수와 독선과 잘못을 범해 왔는지, 이미 역사적으로 밝히 드러났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독일 신부 한스 큉은, 교황의 무오류성을 비판했다는 죄목으로 1979년 카톨릭으로부터 파문당하고 말았다.
한 인간이 단지 교황이란 직책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의 오류도 범치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엄청난 오류인가? 그렇기에 카톨릭의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개신교도들의 눈에 카톨릭은 주님의 교회이기보다는 교황의 교회로 더 많이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 교회에서 목사나 장로가 죽을 때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한국 교회 역시 똑같은 오류를 범치 않을 수 없다. 목사나 장로가 죽을 때까지 한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얼마나 많은 오류를 범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류를 교회제도가 정당화시켜 주고 있다면, 그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건 인간의 교회 이상일 수가 없다. 주님의 교회가 될래야 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교회가 이처럼 인간의 교회화될 수밖에 없는 제도 속에서, 주님께서 주인 되신 진정한 주님의 교회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제도를 바르게 잡아야만 했다. 주님의교회가 목사를 비롯한 임직자들의 임기제를 실행하게 된 것은 이런 연유에서였다.
전혀 뜻하지 않게 교회를 개척하는 임무를 주님께로부터 받았을 때, 이미 위에서 설명한 이유로 인해, ‘내가 주님을 위햐여 감당해야 할 최선의 임무는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교회의 주인 되시게 하는 것’이라 규정하였다. 주님께서 주인 되시지 않는 교회라면 그런 교회를 위해 내 인생을 바칠 까닭도 없고, 또 그것은 나 자신의 파멸을 의미하기도 했다. 먼저 교회의 이름을, 주위에서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교회’라 지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주님께서 주인 되심을 잊지 말자는 취지였다. 그 다음 실행한 것이 임기제였다. 내가 목회하는 교회라고 해서 사람의 교회로 전락치 말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겠는가? 더욱이 나 자신이 누구보다 허물 많은 사람임에야 두말 해 무엇 하겠는가? 나처럼 부족한 사람이 단지 개척목사라는 이유만으로 인간적인 야망을 이기지 못하여 죽을 때가지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도대체 교회의 꼴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나는 제일 먼저 나 자신의 임기를 스스로 정하였다.
5년, 10년, 15년―이 세 안을 놓고 오래도록 생각하였다. 개척교회라는 특수성을 감안할 때 5년은 너무 짧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칫 교회가 교회로서 뿌리도 내리기 전에 목사가 교체된다면, 교회에 득보다는 실이 더 많으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반면에 15년은 너무 길었다. 15년이란 기간은, 인간이 무의식중에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고도 남을 만큼 과한 기간으로 여겨졌다. 결국 남은 것은 10년이었다. 나는 나의 임기를 10년이 되는 1998년 6월 셋째 주일 사임키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나 자신의 결정을 밝혔다. 목사인 내가 내 자신은 임기를 먼저 정하고 발표하였기에, 아무 거리낌 없이 장로 임기 제정도 제안할 수사 있었다.
1990년 10월 둘째 주일에는, 주님의교회 창립 이후 처음으로 장로 임직식이 예정된 날이었다. 소망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았던 이재원 장로님은 취임식을, 그리고 주님의교회에서 피택된 김도묵·홍근용 집사님은 장립식을 갖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그 한 달전인 9월 초 예비 당회를 열었다. 그리고 주님의교회 제1기 장로가 될 세 분에게 장로 임기 제정을 제안하였다. 그것은 그분들에 대한 내 사랑의 발로이기도 했다. 주님의 신비스런 섭리 속에서 서로 만나 주님의 교회를 개척하는 도구로 더불어 쓰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특별한 인연인가? 그렇다면 그분들이 부지중에라도 교회의 주인 되려는 우를 범치 않도록 도와야 할 의무가 내게 있었다. 그분들이나 나나, 모두 변함없이 주님의 종으로만 존재해야 했다. 나는 세 분에게 장로의 임기를, 안식년을 포함하여 13년으로 할 것을 제의하였다. 장로의 임기를 목사인 나의 임기 10년보다 3년이나 길게 잡은 것은, 목사와 장로의 임기가 같이 끝날 경우에 있을 수 있는 혼란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처음부터 쉽게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몇 번의 과정을 거듭한 후에, 세 분은 나의 제안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제1기 장로 세 분과 초대목사인 나 자신에게만 임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교회가 존속하는 한 모든 당회원들에 대하여 임기제를 실시할 것을 1991년 8월 제직회에서 공식적으로 결의하였다. 즉 담임목사의 임기는 안식년을 포함하여 10년, 장로의 임기는 안식년을 포함하여 13년, 부목사의 임기는 안식년을 포함하여 7년으로 제정하였다. 담임목사와 부목사는 임기가 끝남과 동시에 교회를 떠나며, 장로는 이기 후에는 백의종군키로 하였다. 임기도중 정년이 되어 은퇴하는 장로는 ‘은퇴장로’,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는 장로는 ‘퇴임장로’로 호칭키로 했다. 이로써 주님의교회에는 원로목사나 원로장로가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장로들에게도 13년 임기 중 반드시 1년의 안식년을 의무적으로 갖도록 한 것은, 1년 동안 다른 교회도 탐방해 보면서 자기충전과 자기성찰의 기회를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
근자에 와서 장로의 임기가 너무 길다는 비판적인 이야기를 가끔 듣곤 했다. 지금으로서는 얼마든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 8년 전 목사와 장로의 임기를 스스로 정한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그 당시 한국 교회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그 결정 자체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만약 그분들이 끝내 자신들의 임기 제정을 반대하고, 주님의교회 제1기 장로로서 원로장로로 남기를 탐했다면, 다른 교회 교인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임기제 실시를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고, 주님의교회는 이미 사람의 교회로 추락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그 때 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었던 1기 장로님 세 분께 지금도 감사를 드린다.
교회의 연륜이 쌓여 가면서 당회원들에 대한 임기제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당회원들에게 임기가 있음에 반하여, 똑같이 교인들에 의하여 선출되는 안수 집사와 권사에게 임기가 없음은 합당하지 않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당회는 6개월 동안의 거듭된 숙고 끝에 1996년 5월, 안수 집사와 권사의 임기를 안식년 유무에 상관없이 각각 10년과 12년으로 제정하고 소급 적용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주님의교회에서는 선출직인 모든 항존직 임직자에 대하여 임기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적어도 제도상으로는 인간이 부지중에 교회의 주인 되는 우를 평생 범치 않을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이미 10년의 임기를 끝내고 퇴임한 이 시점에서 되돌아보건대, 이것 역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었다. 이 임기제야말로 주님을 언제나 주인으로 모셔야 할 우리 스스로를 지켜 주는 주님의 손길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 한, 주님의교회가 설령 한순간 실족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곧 주님의 교회로 회복될 것이다.
인간이 교회의 주인 되신 주님의 자리에 부지중에라도 앉지 않기 위하여, 장로와 목사의 이름을 매주 주보 앞면에 게재하지 않기로 했다. 주보에는 순서 맡은 사람의 이름만 밝혔다. 주보를 통해서도 주님만 주인이심을 고백하기 위함었다.
90년 안수를 받고 첫 당회를 가지기 직전이었다. 당회에서 가장 어른인 이재원 장로님이, 가능하면 당회에서는 가부를 표결에 붙이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당회가 모든 것을 표결에 의존하면 은혜를 상실하고 분열되기 쉽다는 것이었다. 이 장로님의 그 말은 여러 면에서 내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 당회를 주재하면서 그 어떤 안건이든 단 한 번도 표결에 붙여 본 적이 없다. 당회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으면 결정을 그 다음으로 미루었다. 그래서 당회원의 뜻이 한데 모아지기를 기다렸다. 당회의 주인은 주님이시기에, 주인이신 주님께서 어느 당회원을 통하여 무슨 뜻을 펼치실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2. 교회 주인의 회복
나는 모태신자로 태어났다. 그리고 비록 선데이 크리스천이었을 망정, 25세 때에 서리 집사로 임명을 받았다. 약 300여 명이 출석하던 작은 교회에서였다. 29세가 되어서는 이사 간 동네의 교회로 교적을 옮겼고, 당시 1,500여 명이 출석하던 그 교회에서는 여러해 동안 제직으로 많은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37세 때 신대원에 입학하여 2학년 되던 해부터 3년 동안, 교인 수가 20,000명이 넘는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봉사하였다. 말하자면 내가 목회를 시작하기 전 나는 한국의 소형·중형·대형 교회를 모두 경험했던 것이다.
그 세 교회 사이에는 규모와 수준, 위치와 여건상 엄청난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교인석과 커튼 너머의 뒤쪽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교인석에 앉아 예배드릴 때는 은혜로웠다. 어김없이 주님의 교회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일단 커튼을 열고 교회 뒤쪽으로 가면, 그 곳은 교인석과는 너무나 판이하였다. 그 곳으 주인은 목사나 장로 혹은 그 교회의 유력자였다. 교회라기보다는 대기업의 중역실과 흡사하였다. 은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참된 교회의 모습일 수가 없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 교회의 실상을 알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역사란, 분열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단 없는 분열로 점철되어 왔다. 교단은 교단대로 지교회는 지교회대로 끊임없이 분열해 왔다. 그 분열의 주된 원인은 사람이 교단이나 교회의 주인 되려 하기 때문이었다. 주님께서는 성경에서 최초로 교회라는 단어를 언급하실 때, 교회의 주인이 누구이어야 하는지를 아무도 오해할 수 없는 분명한 말씀으로 밝혀 주셨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니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5-18).
주님께서는,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세주로 믿는다는 인간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지는 모든 교회를 ‘내 교회’, 즉‘주님의 교회’임을 명확히 하셨다. 다시 말해 이 땅의 모든 교회의 주인은 오직 주님뿐이심을 천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사람이 주인 노릇 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의 명칭이 어떠하건 상관없이, 그것은 단순한 인간의 집단일 뿐 결코 주님의 교회일 수가 없다. 스스로 주인 되려는 사람들로 인하여 이 땅의 교회에 분란이 그치지 않음은, 주님만이 교회의 주인이실 수 있다는 이 단순한 원칙이 망각되고 있음이다. 어쩌면 그것은 한국 교회 제도가 낳은 부작용일 것이다.
이 땅에 세워진 교회치고 어떤 교회가 사람을 주인으로 삼기 위하여 세워졌겠는가?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되기 위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졌을 것이다. 교회 창립의 도구로 쓰임 받은 자들은 목사 장로 할 것 없이 모두, 오직 주님만을 주인으로 섬기려는 진실되고 겸손한 마음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70세가 될 때까지 한 교회에서 목사나 장로로 시무한 다음에도, 죽을 때까지 원로목사 원로장로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현 제도하에서는, 교회는 어쩔 수 없이 특정인간의 교회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미의 교회들이 원로목사나 원로장로를 인정치 않고, 일정한 기간마다 오히려 목사와 장로의 재신임을 묻거나, 퇴임한 목사로 하여금 교회와 일정한 거리 밖에서 살도록 제도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교회는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특정인간에 의해 지배당하는 인간의 교회가 될 수밖에 없을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개신교가 카톨릭의 도그마 중에서 수용할 수 없는 거 중의 하나가 교황의 무오류성이다. 카톨릭의 교황으로 한번 선출되기만 하면, 그의 임기는 그가 죽어야만 끝난다. 한 마디로 교황은 종신제인 것이다. 그런데 교황으로 선출된 자는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카톨릭은 절대신조로 삼고 있다. 그가 내리는 결정, 그의 모든 말은 언제나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이다. 이 도그마에 대한 비판이나 새로운 해석은 절대 금기사항이다. 지난 2,000년 동안 교황이 얼마나 많은 실수와 독선과 잘못을 범해 왔는지, 이미 역사적으로 밝히 드러났음에도 말이다. 그래서 독일 신부 한스 큉은, 교황의 무오류성을 비판했다는 죄목으로 1979년 카톨릭으로부터 파문당하고 말았다.
한 인간이 단지 교황이란 직책에 앉았다는 이유만으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의 오류도 범치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엄청난 오류인가? 그렇기에 카톨릭의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개신교도들의 눈에 카톨릭은 주님의 교회이기보다는 교황의 교회로 더 많이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 교회에서 목사나 장로가 죽을 때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한국 교회 역시 똑같은 오류를 범치 않을 수 없다. 목사나 장로가 죽을 때까지 한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얼마나 많은 오류를 범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오류를 교회제도가 정당화시켜 주고 있다면, 그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건 인간의 교회 이상일 수가 없다. 주님의 교회가 될래야 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교회가 이처럼 인간의 교회화될 수밖에 없는 제도 속에서, 주님께서 주인 되신 진정한 주님의 교회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제도를 바르게 잡아야만 했다. 주님의교회가 목사를 비롯한 임직자들의 임기제를 실행하게 된 것은 이런 연유에서였다.
전혀 뜻하지 않게 교회를 개척하는 임무를 주님께로부터 받았을 때, 이미 위에서 설명한 이유로 인해, ‘내가 주님을 위햐여 감당해야 할 최선의 임무는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교회의 주인 되시게 하는 것’이라 규정하였다. 주님께서 주인 되시지 않는 교회라면 그런 교회를 위해 내 인생을 바칠 까닭도 없고, 또 그것은 나 자신의 파멸을 의미하기도 했다. 먼저 교회의 이름을, 주위에서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교회’라 지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주님께서 주인 되심을 잊지 말자는 취지였다. 그 다음 실행한 것이 임기제였다. 내가 목회하는 교회라고 해서 사람의 교회로 전락치 말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겠는가? 더욱이 나 자신이 누구보다 허물 많은 사람임에야 두말 해 무엇 하겠는가? 나처럼 부족한 사람이 단지 개척목사라는 이유만으로 인간적인 야망을 이기지 못하여 죽을 때가지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도대체 교회의 꼴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나는 제일 먼저 나 자신의 임기를 스스로 정하였다.
5년, 10년, 15년―이 세 안을 놓고 오래도록 생각하였다. 개척교회라는 특수성을 감안할 때 5년은 너무 짧다는 결론을 내렸다. 자칫 교회가 교회로서 뿌리도 내리기 전에 목사가 교체된다면, 교회에 득보다는 실이 더 많으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반면에 15년은 너무 길었다. 15년이란 기간은, 인간이 무의식중에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고도 남을 만큼 과한 기간으로 여겨졌다. 결국 남은 것은 10년이었다. 나는 나의 임기를 10년이 되는 1998년 6월 셋째 주일 사임키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나 자신의 결정을 밝혔다. 목사인 내가 내 자신은 임기를 먼저 정하고 발표하였기에, 아무 거리낌 없이 장로 임기 제정도 제안할 수사 있었다.
1990년 10월 둘째 주일에는, 주님의교회 창립 이후 처음으로 장로 임직식이 예정된 날이었다. 소망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았던 이재원 장로님은 취임식을, 그리고 주님의교회에서 피택된 김도묵·홍근용 집사님은 장립식을 갖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그 한 달전인 9월 초 예비 당회를 열었다. 그리고 주님의교회 제1기 장로가 될 세 분에게 장로 임기 제정을 제안하였다. 그것은 그분들에 대한 내 사랑의 발로이기도 했다. 주님의 신비스런 섭리 속에서 서로 만나 주님의 교회를 개척하는 도구로 더불어 쓰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특별한 인연인가? 그렇다면 그분들이 부지중에라도 교회의 주인 되려는 우를 범치 않도록 도와야 할 의무가 내게 있었다. 그분들이나 나나, 모두 변함없이 주님의 종으로만 존재해야 했다. 나는 세 분에게 장로의 임기를, 안식년을 포함하여 13년으로 할 것을 제의하였다. 장로의 임기를 목사인 나의 임기 10년보다 3년이나 길게 잡은 것은, 목사와 장로의 임기가 같이 끝날 경우에 있을 수 있는 혼란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처음부터 쉽게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몇 번의 과정을 거듭한 후에, 세 분은 나의 제안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제1기 장로 세 분과 초대목사인 나 자신에게만 임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교회가 존속하는 한 모든 당회원들에 대하여 임기제를 실시할 것을 1991년 8월 제직회에서 공식적으로 결의하였다. 즉 담임목사의 임기는 안식년을 포함하여 10년, 장로의 임기는 안식년을 포함하여 13년, 부목사의 임기는 안식년을 포함하여 7년으로 제정하였다. 담임목사와 부목사는 임기가 끝남과 동시에 교회를 떠나며, 장로는 이기 후에는 백의종군키로 하였다. 임기도중 정년이 되어 은퇴하는 장로는 ‘은퇴장로’,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는 장로는 ‘퇴임장로’로 호칭키로 했다. 이로써 주님의교회에는 원로목사나 원로장로가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장로들에게도 13년 임기 중 반드시 1년의 안식년을 의무적으로 갖도록 한 것은, 1년 동안 다른 교회도 탐방해 보면서 자기충전과 자기성찰의 기회를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
근자에 와서 장로의 임기가 너무 길다는 비판적인 이야기를 가끔 듣곤 했다. 지금으로서는 얼마든지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 8년 전 목사와 장로의 임기를 스스로 정한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그 당시 한국 교회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그 결정 자체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만약 그분들이 끝내 자신들의 임기 제정을 반대하고, 주님의교회 제1기 장로로서 원로장로로 남기를 탐했다면, 다른 교회 교인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임기제 실시를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고, 주님의교회는 이미 사람의 교회로 추락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그 때 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었던 1기 장로님 세 분께 지금도 감사를 드린다.
교회의 연륜이 쌓여 가면서 당회원들에 대한 임기제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당회원들에게 임기가 있음에 반하여, 똑같이 교인들에 의하여 선출되는 안수 집사와 권사에게 임기가 없음은 합당하지 않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당회는 6개월 동안의 거듭된 숙고 끝에 1996년 5월, 안수 집사와 권사의 임기를 안식년 유무에 상관없이 각각 10년과 12년으로 제정하고 소급 적용하기로 하였다. 이로써 주님의교회에서는 선출직인 모든 항존직 임직자에 대하여 임기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적어도 제도상으로는 인간이 부지중에 교회의 주인 되는 우를 평생 범치 않을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이미 10년의 임기를 끝내고 퇴임한 이 시점에서 되돌아보건대, 이것 역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었다. 이 임기제야말로 주님을 언제나 주인으로 모셔야 할 우리 스스로를 지켜 주는 주님의 손길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 한, 주님의교회가 설령 한순간 실족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곧 주님의 교회로 회복될 것이다.
인간이 교회의 주인 되신 주님의 자리에 부지중에라도 앉지 않기 위하여, 장로와 목사의 이름을 매주 주보 앞면에 게재하지 않기로 했다. 주보에는 순서 맡은 사람의 이름만 밝혔다. 주보를 통해서도 주님만 주인이심을 고백하기 위함었다.
90년 안수를 받고 첫 당회를 가지기 직전이었다. 당회에서 가장 어른인 이재원 장로님이, 가능하면 당회에서는 가부를 표결에 붙이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당회가 모든 것을 표결에 의존하면 은혜를 상실하고 분열되기 쉽다는 것이었다. 이 장로님의 그 말은 여러 면에서 내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 당회를 주재하면서 그 어떤 안건이든 단 한 번도 표결에 붙여 본 적이 없다. 당회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으면 결정을 그 다음으로 미루었다. 그래서 당회원의 뜻이 한데 모아지기를 기다렸다. 당회의 주인은 주님이시기에, 주인이신 주님께서 어느 당회원을 통하여 무슨 뜻을 펼치실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3. 헌금의 회복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는 두 종류였다는 사실을 신학교에 가서야 처음 알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는 <톰슨Ⅱ 주석성경>(기독지혜사간)이 아주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십일조는 레위인들을 봉양하거나 혹은 사회적인 구제사업을 목적으로 매년 토지 소산이나 가축의 십분의 일(1/10)을 바쳐야 하는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의무다(레27:30).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에 나타난 여러 십일조 규례(신 12:5-19; 레27:30-33; 민18:21-24)를 근거로 십일조 헌납을 세 단계로 구분했다.
첫째 십일조 한해의 추수가 끝나면 백성들은 먼저 모든 소출의 1/10을 구별하여 자기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들에게 주어야 했다.(민:18:21-24). 그러면 레위인들은 백성들로부터 받은 십일조에서 다시 10/1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거제로 바쳐야 했는데 이것은 곧 제사장들의 몫이 되었다(민18:26-29)이처럼 분배받은 기업 없이 성막에서 종교적 직무에만 전념하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생계를 보장해 주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쳐야 하는 십일조의 첫 단계를 '첫째 십일조'라 부른다.
둘째 십일조/축제 십일조 이것은 첫째 십일조를 바친 백성들이 그 나머지 소출(10/9) 가운데서 다시 1/10을 구별한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자신들이 직접 중앙 성소로 가지고 올라가는데, 한 해 동안 풍성한 축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감사 축제를 드리는 비용으로 사용되었다(신12:5-19). 이 때 중앙 성소가 너무 멀면 현물 대신 일단 현금으로 바꾸어 가지고 갔다가 성소 근처에서 다시 잔치에 필요한 예물들을 구입 할 수 있었다.(신14:24-26). 한편 이 감사잔치에는 가족과 친지는 물론 수하의 남녀 종들과 성중의 레위인들까지 모두 참여하였다.
셋째 십일조 안식년(제7년째인 이 때에는 토지를 경작하지 않기 때문에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다)을 기준으로 제3년과 제6년째에는 위의 '둘째 십일조'로 잔치를 베푸는 대신 각 처소에서 다 모아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 나그네, 가나한 자, 고아, 과부 등을 위한 구제비로 사용하였다.(신14:28-29;신26:12).
그리고 이 때 백성들은 자신들이 마련한 이 '둘째 십일조'를 율법대로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거짓없이 사용했노라고 하나님 앞에 맹세해야 했다 (신 26:13-15). 따라서 이 '셋째 십일조'는 따로 구별된 십일조가 아니라 '둘째 십일조'와 동일 한 것인데, 다만 용도에 있어서 다를 뿐이다. 즉 '둘째 십일조'는 안식년을 기준으로 매 1년과 2년, 그리고 4년과 5년째에 쓰는 '감사 축제용'이었고, '셋째 십일조'는 안식년을 기준으로 매 3년과 6년 째에 쓰는 '이웃 구제용' 이었다.
〈톰슨Ⅱ 주석성경>의
신명기 14장 22-29절에 대한 주석 전재.
이것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런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일조를 두 번 바쳐야 했다. 의무적으로 드려지는 첫 번째 십일조는 성전의 직무를 전담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위한 경비, 요즈음의 용어를 빌린다면 교회 유지 경비로 쓰여졌다. 그 다음 감사의 의미로 드려지는 두 번째(혹은 세 번째) 십일조(요즈음 용어로 감사헌금)는 성전 유지 목적이 아닌, 이웃과의 나눔이나 구제를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을 간추려 말하면, 성전에 바쳐지는 헌금 중 50%는 반드시 이웃을 위하여 사용되어야만 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바쳐지는 헌금 가운데 50%는 성전 자체를 위하여, 나머지 50% 성전 밖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명령하셨던 것이다.
주님의 교회가 처음부터 헌금의 50%로 선교와 구제를 행하기로 한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으로 인간이 허세를 부리거나 인심을 쓰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저 좋아 보여서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헌금을 자기 교회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그릇된 풍토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헌금을 바르게 사용하는 헌금의 회복을 위함이었다. 헌금의 반을 이웃에게 주고도 나머지만으로 과연 교회가 유지될 수 있느냐고 회의를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인 이상, 우리가 그 법칙을 따르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결과를 책임져 주실 것을 우리는 굳게 믿었고, 지난 1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 믿음을 한 번도 저버리지 않으심으로써 당신의 말씀에 대하여 당신 자신이 신실하심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셨다.
헌금의 50%를 이웃과 나눔에 있어서 누구와 나누어야 할 것이지, 다시 말해 선교와 구제의 대상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만약 그 대상을 일일이 우리가 찾아다녀야 했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헌금의 50%는 적은 금액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비스럽게도 처음부터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다. 주님의 교회는 막 생긴 교회이기에 외부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에게 얼마를 나누어주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여러 과정을 거친 후에 당회에서는. 요청해 오는 순서대로 요청한 만큼 나누어주기로 하였다. 오직 당회원들의 인간적인 판단만으로 구제의 대상을 선정하고 금액을 결정하는 것은, 그 헌금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헌금의 50%를 순서대로 나누어주다 보면, 자칫 거짓된 자들이 우리를 속일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전혀 대두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헌금의 주인이신 주님께 맡기기로 하였다. 우리 역시 주님 앞에서 늘 거짓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 보기에 비록 문제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통하여 그 사람을 책임져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가로막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오히려 순서대로 나눔을 행하면서 당회원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매달 확보된 금액만큼만 요청이 온다는 것이었다. 그서 또한 헌금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교인 수와 헌금 액수가 계속 증가되면서 더 이상 당회가 이웃과의 나눔을 직접 주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제직회의 각 부서에 그 일을 일임하였다. 그러나 헌금의 주인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망각치 않도록 서로 노력하였다. 뒤에 가서 상세히 언급하겠지만, 97년부터는 헌금 50%의 거의 대부분을 정신여고 대강당 건축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 정신여고에 대강당을 지어 드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님의교회에 맡기신 또 다른 이웃과의 나눔이기 때문이다.
지난 10년 동안 주님의 교회는 연말 연시에, 교회의 이름으로 예산을 공식적으로 편성해 본적이 없다. 있다면 지난달 혹은 지난해에 대한 결산서만 있을 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교회는 기업이 아니요, 헌금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의 헌금을 허락하실지 아무도 모르는 판에 어떻게 예산을 짤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순전히 인간의 추정에 의해 예산을 편성하고 그 예산에 따라 헌금을 독려하고 집행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헌금의 주인 되었음을 뜻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얼마를 주시든,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려고 애썼을 뿐이었다. 따라서 공식적인 예산서는 없었지만, 결산만은 기업수준으로 철저하게 하였다. 그리고 투명성을 위하여 매년 세 달마다 분기별로 전 교인들에게 결산보고서를 공개하였다. 그것이 헌금의 주인 되신 하나님과, 하나님께 헌금을 바친 교인들에 대한 의무라 생각했다.
나는 지난 10년 동안 하나님께 바친 헌금을 내가 직접 관리하거나, 전표에 사인을 하거나, 혹은 재정관련 서류에 결재를 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헌금을 단돈 1원이라도 만져 본 적도 없다. 재정관리에 문외한이어서가 아니다. 작지 않은 사업을 해 보았기에 회계에 관하여는 내게도 일가견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금에 관한 한 철저하게 거리를 두었던 것은 성경말씀 때문이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 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 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6:1∼6).
성경은 목회자의 역할을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기를 전적으로 담당하는 것' 이라 정의하고 있다. 헌금관리는 목회자의 몫이 아니다. 목회자가 헌금과 거리를 둘수록, 주님께서 주인이신 헌금의 진전한 의미는 회복된다.
한국 교회는 헌금봉투에 헌금자의 이름을 쓰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것도 모자라 주보에 이름을 게재하기까지 한다. 어떤 교회는 예배시간에 헌금자의 이름을 호명하기도 한다. 우리도 처음에는 헌금봉투에 이름을 썼고 주보에도 올렸다. 그러나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름을 밝힌다는 것은 사람에게 확인받기 위한 의미 이상일 수는 없어 보였다. 단지 헌금봉투에 이름을 기록치 않는 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헌금이 누구의 헌금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런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일 수도 없고, 귀한 물질과 시간을 쏟아 가며 그런 무능한 하나님을 믿을 이유도 없다. 하지만 그저 내게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 이름 쓰기를 중단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성경 속에서 헌금의 참된 의미를 밝혀 주는 말씀을 만나게 되었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이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 29:12∼14).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면서 드린 기도이다. 다윗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것임을 믿는 신앙고백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제서야 우리가 봉헌 때마다 부르는 찬송가 70장의 가사가, 다윗의 이 신앙고백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으니 이 예물을 주께 바치나이다. 아멘."
모를 때는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일단 헌금의 의미를 바르게 안 다음에야 더 이상 헌금봉투에 이름을 쓸 수는 없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면서 인간의 이름을 쓴다면, 그것이야말로 헌금의 의미를 왜곡하는 짓이었다. 그래서 당회의 결의를 거쳐 1991년 1월1일부터 헌금봉투에 헌금자의 이름 쓰는 난을 아예 없애 버렸다. 전교인이 무명으로 헌금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울러 그 때부터 예배당 입구에 헌금함을 비치하고 들어가면서 봉헌토록 하였다. 그 이후로 주님의교회 모든 헌금과 헌물 그리고 헌납은 완전 익명으로만 행해지고 있다. 누가 얼마를 하나님께 바치는지는, 그야말로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소수의 우려와는 달리 헌금은 조금도 불지 않았다. 단 한 해의 예외도 없이 매년 증가하였다. 헌금의 주인은 역시 하나님이신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헌금을 강요하거나 독려하는 설교를 해 본 적이 없다. 자발성과 순수성을 결여한 헌금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봉헌일 수가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거의 모든 교회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장로나 안수 집사 혹은 권사로 임직자들에게 의무적으로 특별 헌금을 하게 한 적도 없었다. 그것은 헌금의 왜곡일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의미의 성직 매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교회의 헌금으로 성가대 지휘자나 반주자에게 사례비를 지급한 적도 없었다. 구약에서 레위인들이 생계를 보장받았던 것은, 그들은 성전 임무 외에는 세속 직업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성전에 관한 한 파트타임이 아니라 풀타임 사명자들이었던 것이다. 만약 성전이 그들의 생계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그들에게는 달리 살아갈 방도가 있을 수 없는, 전업 사명자들이었다. 이와 같은 전업 사명자들 이외의 사람들에게 헌금으로, 봉사와 관련하여 사례비를 지급한 경우를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대가를 요구하는 봉사는 봉사일 수가 없고, 봉사를 사기 위해 지급되는 것이라면 헌금일 수가 없기에, 그것은 헌금과 봉사의 참된 의미를 동시에 지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주님의교회 모든 성가대 지휘자와 반주자들이 자원 봉사자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봉사는 참된 봉사일 수가 있고, 교인들이 바치는 헌금은 진정한 봉헌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주님이셨다.
4. 예배의 회복
만인제사장설은 중세 개혁자들이 역설한 핵심사상이었다. 성경이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4-5).
더 이상 레위인만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만을 통하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만을 통하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성경은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께 직접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명령하고 있다.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데에는 특별한 조건이 따로 없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서전 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구원의 빛 속에 거하기만 하면 다시 말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그는 이미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주님 안에서는 모든 만민이 구별 없이 제사장임을 성경이 직접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해 주시는 통로가 되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제물 되어 돌아가셨을 때에,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임이 증명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갈릴리의 비천한 어부들도 왕 같은 제사장이 될 수 있었고, 바울 같은 살인자도 거룩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중세 개혁자들이 유독 이 만인제사장설을 강조했던 것은, 카톨릭 교회에서는 서품 받은 사제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제가 없으면 예배가 성립될 수 없다. 당연한 결과로 사제가 없으면 교회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비 성경적인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이전 구약시대로의 회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개혁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만인이 제사장이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든 직접 예배드릴 수 있음을 역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만인제사장 사상은 개신교의 기본정신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의 예배를 보면, 만인제사장이라는 성경 말씀은 대부분의 경우 부인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공식적인 주일 낮예배의 인도와 설교는 언제나 목사가, 그리고 대표기도는 장로가 거의 전담하고 있다. 왜 그들만이 독점하고 있는가? 이유는 단 한 가지, 목사나 장로는 안수 받은 자이기 때문일 터이다. 서리 집사가 주일 낮예배 시간에 기도를 한다든가 혹은 목사와 설교를 나누어서 한다는 것은, 적어도 미 조직 교회가 아니고서는 언감생심 상상치도 못할 일이다. 그렇다면 개신교 역시 안수 받은 사제가 있어야만 예배가 가능하다는 카톨릭이나, 레위 제사장을 통해서나 제사를 드릴 수 있던 구약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무엇보다 이것은 성경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예배는, 그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이가 제사장이 될 수 있도록 회복되어야만 했다.
나는 처음부터 예배 시에 목사 가운, 즉 성의를 입지 않았다. 교회력에 따른 절기 때에 스톨 같은 것을 착용해 본 적도 없다. 강단 위에는 아예 의자를 두지 않았다. 인도자, 기도자, 설교자는 모두 자기 순서 때에만 강단에 오르고, 순서가 끝나면 강단 아래쪽 교인 석에 함께 앉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 똑같은 존재임을 시각적으로 서로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목사가 거룩한 성의를 입고 강단 위에 정좌한다는 것은 확실히 멋진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은연중에 목사와 교인을 구별 짓는 행위 일 수가 있다. 목사 홀로 성의를 입고 강단에 앉아 있는 한, 그 예배에 참여한 모든 교인이 만인제사장일 수는 없다. 그만 홀로 제사장인 것이다. 만인제사장의 회복은 성의를 벗고 강단 아래에 앉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했다. 단지 세례식이나 혼인 예배등 예식을 집례할 때에 한해서는 성의를 입었다. 예식은 의식인 만큼, 그 예식과 관련된 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은혜로운 봉사를 행하기 위함이었다.
주님의 교회 주일 낮예배 시간에는 서리 집사들도 돌아가면서 대표기도를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민이 제사장임을 믿는다면, 서리 집사 역시 공식적인 예배에 전교 인을 대표하여 기도드릴 수 있음이 마땅했다. 그래서 남자 서리 집사들은 3부로 드리는 주일 낮예배 시에, 그리고 여자 서리 집사들은 주일 저녁 찬양예배와 수요예배 시간에 등록 순서대로 기도를 하였다. 아무도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5년에 이르러서야 남자 서리 집사만 주일 낮예배 시간에 대표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또 다른 인위적인 구별임을 깨닫게 되었다. 주님께서 만인이 제사장이라고 말씀하실 때 여자를 제외하신 것이 아니라는 뒤늦은 자각이었다. 한국 교회가 여성 목사와 여성 장로를 세우는 바에야 두말 해 무엇하겠는가? 당회는 95년 11월, 4개월에 걸친 숙의 끝에 마침내 1996년 1월 1일부터 여자 서리 집사도 주일 낮예배 대표기도를 할 수 있도록 결의하였다. 장로, 안수 집사, 권사를 비롯하여 모든 서리 집사 역시 남녀를 불문하고 구별 없이 등록 순서대로, 주일 낮예배, 찬양예배, 수요예배 기도를 돌아가면서 맡게 되었다. 기도에 관한 한, 만인제사장 사상이 회복된 것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교인들과 더불어 설교하였다. 본문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체험을 한 사람이 있을 경우 그와 함께 설교한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간증 설교인 셈이었다. 순서는 내가 먼저 할 때도 있었고, 그 반대 경우도 있었다. 그 때의 상황에 따라 순서가 결정되었다. 단순히 간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시간에 설교를 함께 하는 것이니 만큼, 사전에 미리 원고를 받아 몇 번이고 수정하게 하였다. 설교 전에는 당사자와 함께 기도드렸다.
"하나님, ○○○집사님이 저와 함께 오늘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여 주옵소서"
교인과 함께 설교할 때마다 교우들은 언제나 더 큰 은혜를 체험하곤 했다. 94년 어버이 주일 낮예배 시간에는 가나안 농군학교 김범일 장로님을 모시고 효에 관한 설교를 들었다. 효에 관한 한 그분은 탁월한 설교자였기 때문이다. 그 날 모든 교인들이 내가 설교할 때보다 훨씬 더 큰 은혜를 경험했음은 두말 한 나위가 없다.
이와 같이 주일 낮예배 설교시간에 목사 아닌 분들을 강단에 서게 했던 것은, 그리스도인은 모두 주님 안에서 만인제사장임을 믿었던 까닭이다.
때로는 설교의 일부를 성극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특히 강남 YMCA 대강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는, 매년 고난주일마다 예수님의 고난을 성극으로 설교하였다. 탤런트 임동진 장로님이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성극은 더욱 은혜로워졌다. 성극에 참여하는 한 분 한 분이 모두 설교자였다.
또 설교 후에 성가나 악기연주로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시편이란 모두 하나님께 기도로 드려진 노래였다. 그래서 그 날의 설교 내용상, 인간의 그 어떤 말보다도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심령을 더 간절하게 표현해 주는 곡이 있을 때에는, 우리도 그렇게 했다. 그 때는 성가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곧 제사장이 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만인제사장의 회복, 성경적인 예배로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해 갈 때, 예배는 늘 새로울 수 있었다. 근래에 유행하는 바, 믿지 않는 자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서의 열린 예배가 아니라, 성경이 전하는 만인제사장의 회복을 위한 열린 예배는 주님의 교회가 그 효시일 것이다.
5.사고와 시야의 회복
이단이나 사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집단생활이요, 둘째는 교주에 대한 집중이다. 방안에 교주의 사진을 걸어 두게 한다든가 혹은 교주의 사진을 지갑 속에 지니고 다니게 하면서, 하루에 몇 번씩 사진 속의 교주와 눈을 맞추게 하는 것이다. 이단이나 사교가 이처럼 집단생활과 교주에 대한 집중을 의무화하는 이유는 대단히 간단하다. 사람들의 사고와 시야를 차단하기 위함이다. 바꾸어 말해 교주나 교주의 말 이외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함으로써 바른 판단의 능력을 박탈하기 위함이다. 그래야 교주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교주의 사병이 된다. 실제로 사교집단에 의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이 발생 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멀쩡한 사람들이 그처럼 어처구니없이 사교집단과 교주의 노리개로 농락 당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랜 기간 동안 사고와 시야를 철저하게 차단 당한 결과이다. 일단 사고와 시야가 차단 당하고 나면 교주의 모든 말은 지고의 선이 되고 만다. 이단과 사교를 경계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교회 역시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하기 쉽다. 만약 고의든 아니든 상관없이 교인들의 사고와 시야를 계속 차단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실은 이단이나 사교 에지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은 육체를 지닌 유한한 존재인 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는 영이시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하나님을 바로 알아 갈 수 있도록, 교회는 늘 사람들의 사고와 시야가 회복되지 않고서는 코끼리를 가리켜 기둥이라는 부르는 어리석음에서 절대로 탈피할 수가 없다. 그 어리석음을 당연한 것으로 착각하는 한, 교회는 이단이나 사교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노아는 600세 되던 해 2월 17일 방주에 들어갔다가(창 7:11), 그 다음 해 2월 27일 방주에서 나왔다(창 8:14). 노아는 만 1년 10일 동안 방주 안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시대로 건조된 그 방주에는 세상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이 없었다. 창이라고는 딱 하나뿐이었는데, 그 위치는 천장에 붙어 있었다. 말하자면 노아는 1년 열흘 동안 천장의 창을 통하여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렇다면 노아의 방주는 이단이나 사교와 동일해 보인다. 노아 역시 가족들과 집단생활 해야 했고, 하나님에 대하여 시선을 집중해야만 했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가 오히려 사교집단과 정반대 인 것은, 사교 교주에게는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시야가 차단되지만, 하나님을 향한 집중은 시야의 회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집중할수록 하나님의 시선으로 시야가 차단되지만, 하나님을 향한 집중은 시야의 회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집중할수록 하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나와 피부 색깔이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이요, 나와 생각이 상이한 사람도 하나님의 도구요, 내가 미워하는 사람 역시 하나님의 자녀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면 사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성숙되어 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고와 시야를 바르게 회복한 노아를, 하나님께서 인류의 중시 조로 삼으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사고 및 시야의 회복을 꾀하기 위하여 총론 적으로는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면서, 각론적으로는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원로 시인 구상 선생님을 보시고 카톨릭 신자가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 경건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들어보았다. 카톨릭 신학대학 오경환 신부님으로부터는 '카톨릭에서 본 개신 교회'에 대해, 그리고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승혜 수녀님에게서는 '수녀가 본 영성의 세계'란 제목의 가르침을 받았다. 서울대 종교학과 정진홍 교수님의 '교회 안에서 본 교회의 문제', 서강 대학 비교종교학과 길희성 교수님의 '비교종교학자가 본 기독교의 문제'에 대한 강연회도 가졌다.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이라고 알려져 있는, 향린 교회 홍근수 목사님을 모시고 그분의 복음관에 대한 설교도 들었다. 문학 평론가 이어령 교수님을 초청하여, 성경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존재를 믿고 있는 그가 왜 교회의 교인이 되기는 거부하는지 이유를 들어보기도 했다. 심지어는 동국대학교 불교과 윤호진 스님으로부터, 프랑스 유학 당시 수년 동안이나 수도원에서 기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무엇이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구세주로 만나지 못하게 했는지에 대해서도 들어보았다.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닌 장로의 눈에 비친 '한국 교회의 문제'와 장로가 바라는 '미래의 교회상'에 대하여, 이진우 장로님과 김도묵 장로님의 소신을 들어보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 면서, 편협하고 획일적이기만 하던 우리의 사고와 시야는 하나님을 향하여 회복되어 갔다.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이 얼마나 값진 선물인지를 절실히 깨달으면서, 이 세상 속에서 우리를 어떻게 경건하게 세워 가야 하는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사랑하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지 가자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와 다른 교리와 신조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면서 누구보다 득을 본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그것 또한 주님의 은총이었다. 만약 그런 과정을 거쳐 나의 시야와 사고가 회복되는 은혜를 얻지 못했다면, 나는 주님의 교회 교인들의 사고와 시야를 차단하는 걸림돌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주님의 교회가 시작되던 10년 전, 나는 우물 안의 개구리에 불과 했기 때문이다.
6. 성경공부의 회복
1988년 6월 26일 한남동에 있는 여성청년교육원에서 주님의교회가 창립되었을 때, 주일 낮예배와 저녁 찬양예배 그리고 수요예배밖에 드릴 수가 없었다. 그 이외의 시간에는 여성청년교육원을 사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그 해 11월 1일, 예배 처소를 강남 YMCA의 배려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 20평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 중 10평은 교회 사무실로 그리고 나머지 10평은 세미나실로 꾸몄다. 주님의교회 전용공간이 생겼다는 것은 주중에도 성경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나는 주님의교회에서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영락교회에서 교사 성경공부, 홍성사 쿰선교회 성경공부 그리고 여성문인 선교회 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성경공부가 갖는 영적인 힘을 익히 경험하였다. 따라서 내가 처음부터 가장 이상적이고, 구역만큼 모이기 쉬운 소그룹은 없다고 생각했다. 성경공부 교재는 내가 직접 만들었다. 서점에 출간되어 있는 교재 중에서 내 영혼을 끌어당기는 것을 찾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한 번 교재를 만드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평균 여덟 시간 정도였다. 내가 구역장을 가르치고, 구역장이 구역원을 가르치게 하는 일반적인 방법을 취하였다. 그러나 1989년부터 시작된 구역 성경공부는 처음부터 낭패였다. 각 구역의 구역장은 남자 , 권찰은 여자로 하여 구역을 편성했는데, 구역장인 남자들이 구역장 공부에 참여하지를 않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구역 성경공부란 여성도들끼리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우리 교회에도 팽배해 있었다. 궁여지책으로 여자인 권찰로 하여금 구역장 역할을 대행하게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구역원들이 모이지를 않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초기였는지라, 교인 수가 적어 몇 구역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역 성경공부가 제대로 되는 구역은 없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독려도 해 보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구역 성경공부에 참여하기 원하는 교인들을 한데모아 내가 인도하였다. 각 구역 권찰 외에 참여하는 인원은 손꼽을 정도였다. 말이 구역 성경공부이지 실제로는 구역 성경공부가 아니었다. 구역 성경공부는 실패한 셈이었다.
그 해 여름 ‘제1회 전교인 여름수련회’가 대전중앙교회 연수원에서 있었다. 당시 주님의교회를 출석하던 장년 120명과 교회학교어린이 60명 거의 전원 및 다른 교회 교인을 합하여 200여 명이 참여한, 주님의교회로서는 창립 1년만에 갖는 최대의 행사였다. 우리는 모두 40일 동안 릴레이로 금식기도하면서 수련회를 준비했다. 마침내 수련회가 시작되었을 때, 성령님께서는 2박 3일의 수련회 기간동안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만져 주셨으며, 고요한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는 당신의 실체를 각자 경험케 해주셨다. 상상치도 못할 만큼 은혜로운 수련회가 끝나자 세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첫 번째 변화는 주일 저녁 찬양예배에서 일어났다. 악기를 다룰 줄 알거나 음악적인 은사를 지닌 자들이 자원하여 찬양리더가 되어, 찬양예배가 명실공히 찬양예배가 되었다. 두 번째는 성경읽기였다. 교인들 사이에 남녀를 불문하고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그때부터 시작하여 9년이 지난 지금까지 성경을 통독한 사람의 숫자가 1200명을 넘는다. 세 번째 변화가 구역 성경공부였다. 각 구역의 남자 구역장들이 2학기 때부터 구역 성경공부를 직접 인도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선 것이었다. 구역장 거의가 수련회에서 조장이었는데, 조장으로 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본인들이 먼저 주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름방학이 끝난 9월 첫째 주부터, 매주 금요일 새벽기도회가 끝난 다음에 구역장들을 위한 성경공부를 인도하였다. 시간을 새벽으로 정한 것은 남자들의 출근시간을 고려해서였다. 남자 구역장들을 상대로 성경공부를 처음으로 인도할 때의 감격을 나는 필설로 표현해 낼 재간이 없다. 성령님 아니시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자 구역장이 명실공히 구역장 역할을 감당하자 구역 성경공부가 활성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금요일 저녁이면 부부가 함께 모여 성경공부 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구역 성경공부는 여성도들의 전유물이란 그릇된 인식이 불식된 것이다. 새로 등록하는 교인들 역시/ 주님의교회 교인은 으레 부부가 함께 구역 성경공부에 참여해야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리고 9년이 지난 지금까지 출석교인의 약 70%가 매주 구역 성경공부에 참여하고 있다. 성경공부와 친교를 포함하여 짧아야 두시간, 길면 세 시간 이상의 구역모임을 통하여, 주님의교회 교인들은 날로 성숙하게 변화되어 갔다. 주님의교회가 오늘의 주님의교회일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구역 성경공부였고, 그것은 구역 성경공부를 회복시켜 주신 주님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 역사가‘새신자반’,‘성숙자반’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경공부에 파급되었음은 물론이다.
7.선교의 회복
1991년 교구를 담당하고 있던 이인호 목사님이 중국 선교를 자청하고 나서, 당회는 이를 공식적으로 결의하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 입국 및 체류가 쉽지 않았을 때였다. 이 목사님은 92년부터 중국과 한국을 왕래하는 방식으로 중국 선교를 시작하였다. 주로 조선족들이 많이 있는 길림성 등 동북삼성을 다니면서 가정교회를 지원하였다. 이목사님이 동북삼성을 누비고 다니면서 뿌린 복음의 씨앗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로부터 체류 허가를 받을 수 없는 이 목사님으로서는, 계속 그런 식으로 선교를 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이 목사님은 94년 교구 담당으로 복귀했고, 직접 선교는 후일을 기약해야만 했다.
그런데 95년 5월, 중미에 있는 코스타리카 시온 한인교회 김재만 장로님으로부터 목회자를 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내가 먼저 현지를 찾아가 확인한 다음, 본인의 의사에 따라 당회는 금상호 목사님을 파송하였다. 10월이 되어서는 뉴질랜드 한종배 장로님으로부터 역시 목회자 파송 요청을 받았다. 이번에도 먼저 현지를 확인한 뒤, 당회는 본인의 뜻에 따라 이동규 목사님을 파송하였다. 이 목사님이 부임하기 전에 그 곳 교인들은 교회 이름을 미리‘오클랜드 주님의교회’라 지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해 봄에는 미국 이정식 집사님이 변용진 목사님과 함께 ‘남가좌주 주님의교회’를 개척하였다. 변 목사님이 방한하여 우리교회를 견학한 뒤였다. 그 후 남가주 주님의교회에 의해 방송선교가 시작되게 되었다. 그 전해에는 중국에 진출한 홍근용 장로님의 공장에서 천진 한인교회가 창립되었다. 그 해 5월에 양동훈 장로님과 함께 나는 중국을 방문했는데, 그때를 맞추어 천진 한인교회 창립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었다. 그 다음 해에는 이성민 집사님이 기아대책본부에 의해 평신도 선교사로 캄보디아에 파송되었다. 주님의교회가 배출한 최초의 평신도 선교사였다. 이 선교사님은 그 곳에서 캄보디아 주님의 사랑교회를 세웠다. 그런가 하면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김만조 선교사님은 블라가웨신스크 주님의교회를 또 그곳에서 세웠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계획한 일이 전혀 아니었다. 주님께서 주님의교회로 하여금 태평양을 중심으로 선교하게 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96년이 되어서였다. 그래서 위에 언급한 교회들과 형제 관계를 맺고, 96년 10월 7일 부터 9일까지 ‘제1회 환태평양 선교대회’를 개최하였다. 97년에는 베트남 하노이 한인교회와 호주시드니 체스우드 한인연합교회와도 형제 교회가 되었다. 선교학에서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 말한다. 선교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것이요, 인간은 단지 도구에 불과할 뿐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주님의교회에 선교가 회복토록 하신 분도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8.중단 없는 회복의 은혜들
늘 아름다운 일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실수도 있었고 잘못도 많았다. 그러나 언제나 주님께서 주인 되시는 교회를 이루어가기 위하여 깨어 있기를 힘쓸 때, 우리의 중심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의 치명적인 실수나 잘못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끔 회복시켜 주시곤 했다.
가장 큰 잘못은 1992년 8월 4일 오후, 제4회 전교인 여름수련회장에서 일어났다. 소년부 어린이였던 정민홍 군이 생명을 잃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일종의 안전사고였다 전혀 사고가 날 장소가 아닌 연수실 내에서의 사고사였기에 충격은 더했다. 황급히 달려간 병원 응급실에서 이미 절명했다는 의사의 사망확인이 내려졌을 때,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겪어야만 했다. 그것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수련회를 총지휘한 나의 실책이요, 책임일 수밖에 없었다. 전교인들이 참여한 수련회장에서의 사고인만큼 교회가 큰 시험에 빠질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교인들은 그 일로 인하여 다섯 번을 놀라야 했다. 뜻하지 않았던 민홍이의 죽음, 그것도 수련회장에서의 죽음으로 인하여 놀란 것이 첫 번째였고, 사고 이후 민홍이의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의 의연한 모습으로 인하여 놀란 것이 두 번째였다. 그리고 교회 예배당에서 드려진 민홍이의 장례예배 시, 민홍이의 아버지인 정성기 집사님의 인사말로 인하여 세 번째 놀라야만 했다. 정집사님은 교인들 앞에 서서 다섯 가지를 감사드리는 것이었다.
첫째 주님께서 민홍이를 모태에서부터 믿게 하시고, 어릴 때 유아세례 받게 해 주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둘째 이세상의 죄악과 탐욕에 오염되기전, 순결한 영혼의 상태로 아들을 하나님 나라로 불러 주셨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셋째 교통사고나 세상의 궂은 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여 말씀을 배우던 수련회장에서 불러 주셨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넷째로 그 동안 민홍이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가 당장은 공허하게 보이겠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감당할 시험밖에는 주지 않는다 하셨으매, 그 빈 자리를 하나님의 은총으로 반드시 채워 주실 것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고 이후 교인들은 모두 깊은 깨달음과 함께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다음 주일 교인들은 정집사님 가족이 하나님께 감사드리기 위해서는 강단에 꽃을 바치고, 교인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는 전교인이 먹을 분량의 떡을 준비한 것을 보고 네 번째로 놀랐다. 그리고 그 사고로 인하여 교회가 시험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은혜 속에서 더욱 굳게 세워짐으로 인해 놀란 것이 마지막 다섯 번째였다 . 슬픔을 초월한 정 집사님 가족들의 성숙한 신앙적 모습이 모든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이어야 함을 깊이 깨닫게 해 주었던 것이다. 민홍이의 장례식이 끝난 뒤, 나는 당회에 사표를 제출하였다. 비록 모든 것이 은혜롭게 마무리되었다 할지라도 사고는 엄연한 사고요 사람이 목숨을 잃는 사고보다 더 큰 사고는 있을 수 없기에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마땅하고, 그 책임은 전적으로 담임목사인 나의 몫이라 판단한 까닭이었다. 나의 사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8월 9일 다음과 같은 책벌을 결의하였다.
·이재철 목사 : 8월 셋째주 부터 11월 셋째 주까지 3개월 근신-이 기간 중 설교 시간을 제외하고는 집에서 근신
·이재원·김도묵·홍근용 장로 : 3개월 근신-이 기간 동안 당회원 직무를 정지하며 모든 예배 시 기도를 금함
·황기언 교육부장·이성우 소년부장 : 한 달 간 정직
·이진호 소년부 전도사 : 한 달간 설교 정지 (민홍 군은 소년부 어린이였다.)
3개월 동안 설교 시간과 민홍이의 무덤을 찾는 일 외에는 두문불출하면서 나는 나의 부덕함을 하나님 앞에서 속죄하였다. 그러나 하찮은 인간에 불과한 나의 근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직 만물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교회도 가정도 회복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이 사고는 오히려 주님의교회의 결속력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
그 이후 하나님께서는 정 집사님 부부에게 딸 한 명과 아들 한명을 선물로 주셨다. 애진이와 세홍이_모두 두 눈이 보석처럼 빛나는 아이들이다. 그 모든 것이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1995년으로 접어들면서 또 다른 위기가 있었다. 어느 집사님에 의하여 선교비와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외부의 사람들이 거짓으로 선교비를 타내는 것은 혹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교회 내부 사람에 의하여, 그것도 기름 부음 받은 안수 집사에 의하여 교회의 헌금이 의도적으로 그릇되이 사용되었다면 그것은 교회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교회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본질이어야 할 교회 내에서 교회 내부의 사람에 의해 불미스러운 일이 자의로 행해지고 있다면, 그것은 참된 의미의 교회일 수가 없었다. 정체성의 위기였던 것이다. 당회에서는 심사숙고 끝에, 당사자가 서리 집사도 아닌 안수 집사인 만큼, 재발방지와 교회의 거룩성 및 순결성을 지키기 위하여 먼저 진상을 규명한 다음, 그 집사님을 주님의 사랑으로 포용하여 바로 세워 드리기로 하였다. 그것이 공의의 주님이신 동시에 사랑의 주님이신 하나님의 방법이라 믿으면서 말이다. 당회에서 구성된 진상조사 위원회에 의한 조사가 끝날 즈음 그 집사님은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사고가 난 금액은 물론 변제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당회는 그것으로 모든 것을 종결지었다. 이미 떠나 버린 집사님에게 법의 힘을 빌려 변제를 요구한다는 것은 덕스럽지 않다는 중론에 의해서였다. 당회는 제직회를 열어 진상을 설명한 다음 교회 재정관리를 잘못한 데 대하여 사과를 구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엄밀히 따지고 보면 나의 책임이었다. 내가 좀더 말씀을 잘 전했더라면, 내가 그 영혼을 좀더 바르게 인도했더라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그 집사님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안수를 집례�던 나로서는 참으로 괴로웠다. 그분이 앞으로 어느 교회를 다니든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신뢰하시는 멋진 주님의 종이 되기를, 나는 오래도록 기도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우리는 이심전심으로 우리의 선교 구제에 대해 재고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이제 요청이 오는 대로 나누어주는 소극적인 방법을 탈피하여, 뭔가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찾아 나설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생각이 뒤에서 언급할 정신여고 강당 건축의 한 동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주님의교회에서 안수 받은 한 집사님을 제대로 인도하지도 못했던 나의 잘못을 , 주님께서는 또다시 회복의 은총으로 반전시켜 주신 것이었다.
1995년 가을, 전혀 예상치 않았던 위기가 한 번 더 닥쳤다. 9월에 실시되었던 장로 피택선거가 문제의 발단이었다. 사전 선거운동이 있었던 것이다. 사전 선거운동이라고해서 금품 같은 것을 돌리는 등의 행위가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문제는 특정인을 놓고 당선시키려는 측과 낙선시키려는 축이 서로 충돌한 것이었다. 서로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은밀하게 부탁의 전화를 했는데, 적지않은 사람들이 양측으로부터 상반된 전화를 동시에 받음으로써 문제가 표면화되었던 것이다. 선가가 끝남과 동시에 누가 누구에게 누구를 찍지 말라는 부탁을 했다느니, 누구는 누구에게 누구를 찍지 말라는 부탁을 했다느니, 누구는 누구에게 누구를 찍지 말라는 부탁을 했다느니 하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양측으로부터 모두 부탁을 받았던 사람 가운데는 ,교회에서 행하는 선거에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면 어찌 주님의교회일 수 있느냐며 항의 전화를 하거나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와중에 전혀 사실무근인 헛소문이 난무하였고, 그로 인하여 마침내 당회까지 분열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 주님의교회 창립 7년만에 찾아온 최대의 위기였다.
나의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92년 여름 수련회에서 민홍이가 세상을 떠난 이래, 나는 두 번째로 교회를 떠날 것을 생각하였다. 92년 사고 때에는 나의 책임감으로 인하여 사표를 제출하였으나, 이번에는 인간에 대한 절망감 때문에 떠나려 했다. 주님의 교회는 오직 주님만이 주인이심을 망각치 않기 위하여 담임목사 스스로 임기를 정하여 둔 교회이다. 부지중에라도 인간이 주님의 자리에 앉는 우를 범치 않기 위하여 장로들도 자신들의 임기를 정하여 둔 교회이다. 지난 7년 동안 나는 주님만이 교회의 주인이심을 역설하여 왔다. 임직자 선거가 있을 때마다 모든 임직은 결코 명예직이 아니라 헌신직임을, 그러므로 누구든지 임직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려는 자에게는 오히려 임직이 화가 될 수 있음을 누누이 강조해 왔다. 이것이 지난 7년 동안의 주님의교회였다. 이런 교회라면 적어도 임직자 선거시 사전 선거운동이 있을 수 없음이 마땅했다. 교회의 주인 되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주님에 의해 피택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한 표만을 은밀하게 행사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투표의 의미 자체가 없어지고 만다.
주님의교회에서는 임직자 선거가 있을 때마다 인간의 투표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선거인 명부를 만들고 칸막이가 쳐진 기표소에 한사람씩 들어가 철저하게 비밀투표를 한다. 신성한 교회에서 행해지는 투표에 어떤 경우에도 사람의 입김이나 부정이 작용치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이름만이 주님의교회가 아니라 모든 면에 걸쳐 진정한 주님의교회가 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만 7년 만에 주님이 주인 되신 주님의교회에서 주님의 종을 선출하는 투표로 인하여 주님의 교회에 심각한 분란이 일어났으니, 나의 심정은 참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참담한 만큼 인간에 대한 절망은 더 깊기만 했다. 지난 7년 동안 밤잠을 설치며 전념해 온 나의 목회가 내 속에서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내가 이 곳에서 할 일이란 더 이상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나의 임기를 앞당겨 교회를 떠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기도하는 가운데 인간-이것은 타인을 의미한다-에 대한 절망은 곧 나 자신에 대한 절망으로 바뀌어 갔다. 그 모든 분란의 책임이 나에게 있음을 주님께서 통감토록 해 주신 것이었다. 내가 7년이나 목회한 주님의교회에서 투표로 인한 분란이 빚어졌다면, 그것은 그 때까지 내가 교인들에게 주님이 주인 되신 교회의 형식만 보여 주었을 뿐, 주님의교회의 참된 본질을 아직까지 그들에게 심어 주지 못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주님 앞에서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전혀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다. 나의 역량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나 자신에 대해 절망치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썩 목회를 잘하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 착각했던 나 자신의 교만함과 우둔함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나 자신에 대한 절망은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로 이어졌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절망했던 대상들에 매한 사랑을 회복시켜 주셨다. 그들은 모두 내가 사랑해야 할 주님의교회 교인들이었고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들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임기를 앞당겨 교회를 떠날 수가 없었다. 아니 떠나서는 안 되었다. 만약 떠난다면, 그것은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분열을 의미할 따름이었다. 오히려 주님 안에서 나 자신을 더욱 바로 세워 감으로써 모두와 더불어, 주님께서 주님의교회를 진정 주님의교회로 가꾸시는 데 필요한 도구가 되어야만 했다. 그 이후에,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가 있거니와, 6개월간의 심사숙고 끝에 당회는 목사와 장로를 제외한 모든 임직자의 임기도 제정하게 되었다. 그것은 주님만을 주인으로 모신다는 우리의 재다짐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가면 모든 사람들은, 주님의 종을 선출하는 교회의 투표에서 표대결을 벌인다는 것이 주님 앞에서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를 절감하게 되었다. 모르긴 하지만 적어도 내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주님의교회에서 그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는 않으리라 믿고 있다. 그만큼 그 사건은 모두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이것 역시 회복케 하시는 주님의 은총이 아니었던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거듭하여 잘못을 저질렀고,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수많은 위기를 당하곤 하였지만, 그러나 우리의 중심이 주님을 향하여 있을 때, 우리의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때마다 회복의 은혜로 더욱 굳건하게 회복시켜 주셨다. 그래 서 주님의교회는 변함없는 주님의 회복의 은총 속에서, 오늘도 주님의교회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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