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세자 교육
김문식․김정호 지음
김영사/2003년 8월/340쪽
▣ 저 자
김문식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5년 정조와 경기학인의 경학사상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규장각에 근무하면서 정조대왕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던 중 국왕 교육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근래에는 조선시대의 국가전례 및 왕실문화 전반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후기경학사상연구』 『정조시대의 사상과 문화』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이 있고, 「조선의 지도자 교육과 현대의 보편교육」 「소학과 아동교육」 「군사 정조의 교육정책 연구」 등 전통교육에 관한 다수의 논문이 있다.
김정호
충남 청양에서 태어났고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를 나왔다. 동화작가로 『양수리의 봄』외 몇 권의 동화를 썼고, 어린이 인성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중, 한 어린이의 교육에 가장 많은 인원과 예산을 투입한 ‘조선의 왕세자 교육’에 주목하여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현재 조선시대 어린이들의 생활과 교육방식을 인성 교육 중심으로 재조명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 Short Summary
3정승을 비롯하여 당대의 학자로 이름난 고위관리 20명의 개인교습을 받고 학습에 필요한 시중을 드는 데에만 39명의 하급관리들을 거느렸던 조선의 왕세자. 그밖에도 왕세자 교육에 필요한 서책들을 관리하는 장서각에는 13명의 관리들이 소속되어 있었고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라도 임시직 관리들이 투입되었다. 이 책은 단 한 명의 교육을 위해 유례 없이 많은 인력과 재정을 투입했던 조선시대 왕세자 교육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 위해 국왕의 비빈이 임신을 하는 순간부터 원자가 제왕이 되기까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순차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바른 심성을 배양하기 위한 왕실의 태교부터 까다로운 유모 선발, 갓난아기 때부터 시작하는 보양청 교육, 유아기에 시작하는 강학청 교육, 입학례․가례․관례 등 각종 통과의례, 세자 책봉 후 시작하는 세자시강원 교육까지, 단지 교육과정만이 아니라 왕세자의 여가생활과 스승과의 관계까지 입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 차 례
제1장 특별한 아기의 탄생
왕실의 태교
출산 전담 기관, 산실청과 호산청
원자의 탄생과 출산 풍속
제2장 원자의 교육
유아기의 원자 교육
원자의 교육방식과 교재
제3장 왕세자 책봉례와 통과의례
대신들의 기대
왕세자 책봉례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례
왕세자의 관례
왕세자의 가례
제4장 왕세자 교육기관, 세자시강원
조선시대 이전의 태자 교육
조선시대의 왕세자 교육
왕세자 경호기관, 세자익위사
세자 이외의 왕자를 위한 교육기관, 종학
제5장 세자시강원의 교육방법
왕세자의 일상생활
세자시강원의 교육방법
주자의 독서법
학습 평가와 실습교육
제6장 왕세자와 그 스승들
양녕대군과 뛰어난 문장가 변계량
세종을 가르친 행복한 스승 이수
문종을 가르친 두 명의 강호산인
연산군을 가르친 두 스승
도학을 정착시킨 3인의 스승
군사를 표방한 두 국왕
제1장 특별한 아기의 탄생
왕실의 태교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 교태전 : 넓은 구중궁궐에서 국왕과 왕비의 침전은 어디였을까? 바로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 - 교태전(交泰殿), 창덕궁의 희정당(熙政當) - 대조전(大造殿), 덕수궁의 함녕전(咸寧殿) 등이다. 강녕전과 희정당은 평상시 국왕의 거처이고, 교태전과 대조전은 왕비의 거처이다. 대조전은 희정당이 중전되기 전, 국왕과 왕비가 함께 침전으로 썼지만, 침실 내부는 나뉘어 있었다. 함녕전도 한 전각을 나누어 쓴 경우이다. 이와 같이 국왕과 왕비가 침전(침실)을 각각 쓴 이유는 ‘부부유별’이라는 유교적 윤리에 따른 것이었다. 국왕은 평소 자신의 침전에서 생활하다가, 합궁(合宮 : 동침)하는 날에는 왕비의 처소에 들었다.
궁궐에서 국왕과 왕비의 침전은 다른 전각들과 차이가 있다. 국왕과 왕비의 침전 지붕에는 용마루(지붕선을 따라 높이 쌓은 턱)가 없다. 교태전은 물론이고 그 앞의 강녕전, 창덕궁의 대조전, 창덕궁의 통명전에도 용마루가 없다. 그런데 국왕과 왕비의 침전에는 왜 용마루가 없을까? 그 이유에 대한 정확한 사료는 없지만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해석이 있다. 용은 국왕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국왕과 왕비의 침전은 용이 자신의 대를 이을 용을 생산하는 신성한 장소이다. 그런 곳을 감히 다른 용이 위에서 내리 눌러서는 안 되기 때문에 용마루를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는 약간 다르지만, 국왕과 왕비가 건실한 후예를 얻도록 하기 위해 하늘과 땅을 가로막는 용마루를 없앴다는 설도 있고, 왕비의 순산을 위해 무거운 용마루를 걷어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침실에서 국왕과 왕비는 아들이 들어설 길일(吉日)을 받아 합궁을 하였다. 길일은 대개 제조상궁이나 관상감(觀象監 : 천문을 관장하는 관청)에서 일진을 보아 뱀날이나 호랑이날을 피해서 택하여 올렸다. 그런데 이래저래 좋지 않은 날을 빼고 초하루․그믐․보름까지 피하여 그 전후의 날을 가리다 보면 길일은 한 달에 한 번 정도에 불과했다. 또한 길일을 정하였다 하더라도 당일에 비가 오고 천둥이 치거나, 안개가 끼었거나,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일식 또는 월식이 있는 날이거나, 국왕의 심기가 불편하거나, 신경을 써야 할 중대사가 있거나, 병을 앓고 난 후일 때는 합궁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국왕과 왕비가 합궁할 수 있는 날은 한 달에 고작 한 번 꼴이었다.
천재일우의 기회로 왕비나 후궁이 잉태를 하면 그것은 왕실을 넘어서 나라 전체의 크나큰 경사였다. 잉태 소식을 들은 국왕은 임신부의 공을 치하하고 그 처소의 내관, 상궁, 나인들에게까지 후한 상을 내렸다. 임신부를 잘 보좌해달라는 뜻에서였다. 이후 임신부는 왕실의 극진한 보호와 지원을 받으며 태교에 주력하였다. 이때 왕실의 바람은 왕자가 태어나는 것이었다. 임신부의 소망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의 일차적인 소임은 왕자를 생산하여 국왕의 자손을 번영시키는 것이었고, 그것은 그들의 운명이 뒤바뀔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러한 배경에서 행해진 왕실의 태교는 본래의 교육적 의미보다 ‘기자신앙(祈子信仰 : 아들 낳기를 기원하여 행하는 신앙)’에 가까웠다. 물론 왕실에서는 민간의 무속신앙을 용납하지 않았지만, 왕실의 법도도 그들의 아들에 대한 염원을 꺾을 수는 없었다. 왕실의 태교에 대한 기록으로는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聖學輯要)』를 들 수 있다. 이 책은 율곡이 선조에게 바친 ‘제왕학 교과서’로, 이후 국왕과 왕세자의 교육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책에서 그는 태교와 조기교육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옛날에는 부인이 아이를 임신하면 옆으로 누워 자지 않고, 비스듬히 앉지 않으며, 외발로 서지 않고, 맛이 야릇한 음식을 먹지 않았다. 사특한 색깔을 보지 않고,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으며, 밤이면 장님에게 시를 외우고 바른 일을 말하게 하였다.
왕실의 태교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임신부는 성현의 교훈을 새긴 옥판을 보고 그 말씀을 외우는 것으로 아침을 맞았다. 옥판이 사용된 이유는 옥 자체의 성질이 몸에 이롭거니와, 그 빛깔도 정서적으로 편안하게 해준다는 생각에서였다. 임신부의 처소는 늘 정숙을 유지하고 궁중악사들을 처소 주변에 배치하여 가야금과 거문고를 연주하도록 하였다. 다만 피리의 독주는 임신부의 감정을 격하게 자극할 우려가 있어 피했다고 한다. 그런 환경에서 임신부는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몸치장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동백기름․꿀․살구씨․계란 등으로 머리와 피부를 가꾸었고, 얼굴을 씻을 때에는 팥․녹두․콩을 만들어 비누 대신 사용하였다.
7개월에 접어들면 육선(肉饍 : 고기반찬)을 피하고 아침 식전에 순두부를 먹었다. 콩으로 된 음식이 태아의 두뇌 발달에 좋다는 정설에 따랐던 것이다. 그리고 각종 채소와 김․미역․새우․흰살 생선 등 해산물이 상에 올랐다. 이때 게와 문어는 피해야 하는 음식이었다. 게는 옆으로 걷는 습성 때문이었고, 문어는 ‘뼈 없는 생물’이라는 선입견 때문인 듯하다. 임신부의 특별 영양식으로는 용봉탕(잉어, 오골계, 쇠고기, 전복, 해삼이 주재료)이 올랐다고 한다. 특히 ‘임금의 물고기’라 불리는 잉어는 왕자를 생산하려는 임신부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담긴 영양식이었다.
그러나 왕실의 태교가 항상 기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 생활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태교방식 외에 민간에서 유행하던 태교법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그 이유는 왕비와 후궁은 애초 민간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민간에서 회자되던 태교법으로 ‘칠태도(七胎道)’라는 것이 있다. 그 칠태도의 금기사항이 왕실의 태교에도 고스란히 지켜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해산달에 머리를 감거나 발을 씻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나 ‘모로 눕거나 엎드려서는 안 된다’, ‘서러운 울음소리나 떠들썩한 소리, 애처로운 벌레소리, 잡스러운 노래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다. 이런 금기사항들은 비록 오랜 세월에 걸친 경험의 산물이라 해도 현실과 맞지 않는 과도한 구석이 많았다. 태교의 본질은 임신부의 바른 행동과 마음가짐에 있는 것이다.
출산 전담 기관, 산실청과 호산청
산월(産月)이 다가오면 대신들이 ‘산실청(産室廳 : 왕실의 출산을 전담하는 기관)’을 설치할 때가 되었음을 아뢰고 윤허를 청하였다. 실록에서 산실청에 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603년(선조 36)인데, 당시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출산을 위해 설치되었다. 그런데 왕실의 출산에서 왕비와 후궁의 대우는 엄연히 달랐다. 궁궐 안에서 해산할 수 있는 사람은 국왕과 세자의 정실(正室)로 제한되었고, ‘산실청’이란 이름도 중전과 세자빈의 출산에만 붙여졌다. 후궁 이하 부실(副室)들의 출산기관은 ‘호산청(護産廳)’이라 불렀다. 호산청이 생기기 전에는 후궁 이하 부실들은 궁궐 밖으로 나가 친정에서 해산을 하였다. 산실청의 설치 문제는 조정 대신들에게도 큰 관심사였다. 왕손이 탄생하는 나라의 경사인데다 왕자가 탄생하면 조정의 세력관계에도 변화가 생기고, 만일 출산 중에 새로운 생명이 위험에 처하면 추궁이 뒤따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산실청의 설치 시기는 중전의 경우 3개월 전, 빈궁의 경우 1개월 전이었다. 출산이 임박하여 산모에게 산기(産氣)가 있으면 산실청에서 산실을 꾸몄다. 이때 산실청의 경우를 보면, 출산 준비물을 배치할 때도 길일을 택하여 왕에게 보고한 후 허락을 받았고, 필요한 물품은 산실청에서 관련 관청에 공문을 발송해 충당하였다. 다음은 1871년(고종 8) 11월, 명성황후가 출산할 때 설치한 산실 물품이다. 맨 먼저 고초(藁草 : 볏집), 고석(藁席 : 가마니), 백문석(白紋席 : 돗자리), 양모전(羊毛氈 : 양털로 짠 자리), 유둔(油芚 : 기름종이), 백마피(白馬皮), 세고석(細藁席 : 고운 짚자리)을 순서대로 깐다. 백마피가 사용된 이유는 백마는 양기를 상징하고, 흰색도 상서로운 색으로 출산의 안전과 신속함을 기원하는 의미에서였다. 이때 백마피는 양 귀가 온전하게 달린 것을 썼다. 그리고 백마 가죽의 머리 밑에는 삼실을 깔고, 그 위에 다남(多男)을 기원하는 의미로 쥐 가죽이나 족제비 가죽을 깔았다. 산 자리를 깐 후에는 태의(胎衣 : 태를 받아놓을 옷)를 둘 방향에 주사로 쓴 부적을 붙였다. 그 다음에는 사슴 가죽으로 만든 말고삐를 방 벽에 걸어 분만 중의 산모가 힘을 쓸 때 붙잡도록 하였다. 산실 밖 대청의 추녀 끝에는 구리 종을 걸어두고 위급한 상황에서 의관을 부를 때 사용했고, 출산 후에는 국왕이 직접 이 종을 울려서 출산 소식을 알렸다. 종을 건 다음에는 의관들이 산실 문 밖에 세 치 길이의 못을 3개 박고, 그 못에 붉은색 끈을 묶어서 늘어뜨려 두었다. 못을 박아두는 이유는 출산 후 현초(懸草 : 해산할 때 깔았던 자리를 말아서 걸어두는 것)를 하기 위해서였다.
원자의 탄생과 출산 풍속
마침내 임신부에게 산기가 있으면 산실에 삼신상을 차려놓고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기를 빌었다. 삼신상에는 해산쌀(産米 : 산모가 먹을 밥을 지을 쌀)과 미역을 꺾지 않고 그대로 놓고 깨끗한 물도 함께 놓는다. 아기가 태어나면 삼신상의 해산쌀로 밥을 지어 세 그릇을 담고 미역국도 끓여서 세 그릇을 담은 다음 삼신에게 감사하고 산모에게 첫 국밥을 먹였다. 특이한 것은 출산을 돕는 도구로 해마(海馬)와 석연(石燕)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의하면 해마는 말 모양으로 생긴 흰색 물건으로 손바닥보다 크며, 석연은 제비 모양으로 생긴 청색 물건으로 밥톨만한 것이었다고 한다. 진통이 시작되면 해마와 석연 1쌍을 붉은 끈으로 묶어서 산모가 손에 쥐고 힘을 주다가 분만하는 즉시 놓았다. 이때 만일 늦게 놓으면 산모가 불편을 겪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새로 태어난 아기를 궁중에서는 ‘阿只’라 쓰고 ‘아기’로 읽었다. 거기다가 ‘氏’를 붙여 ‘왕자 아기씨, 공주 아기씨’라고 불렀다. ‘아기씨(阿只氏)’란 호칭은 결혼하기 전의 왕자와 공주를 부르는 범칭이었다. 그런데 ‘阿只’는 아기씨들이 보모상궁이나 유모를 일컫는 말이기도 했는데, 그때는 문자 그대로 ‘아지’로 불렀다. 출산 직후에는 산실청에서 권초(捲草 : 현초)를 하고 벽에 붙여둔 최생부를 떼어 불사르는데, 이때 최생부의 재가 날아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태웠다. 그리고 그 재는 잘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따뜻한 물에 타서 산모에게 먹였다. 그 이유는 다음 번 출산에서도 순산하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였다. 왕비나 세자빈이 원자나 원손을 출산하면 이것은 온 나라의 경사로 즉시 전국에 탄생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원자(원손)를 출산한 산모나, 이를 관리한 산실청 관원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특전을 베풀었다.
복을 기원하는 개복신초례 : 조선 개국 초기의 출산 풍속으로 출산 즉시 행하는 ‘현초(懸草)’와 탄생한 지 3일째에 올리는 ‘개복신초례(開福神醮禮)’가 있었다. 현초는 ‘산 자리를 건다’는 의미로 아기의 순산을 알리는 의식이다. 즉, 산실에 깔았던 짚자리를 붉은색 끈으로 묶어서 문 위의 못에 매다는 의식으로, 민간에서 행하는 금줄과 같은 것이다. 민간에서는 왼쪽으로 꼰 새끼줄에 아들이면 숯과 고추를 끼우고, 딸이면 숯과 소나무 가지를 끼워 금줄을 쳐서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았지만 궁궐은 임금이 계신 곳으로 부정한 사람의 출입은 용인되지 않았으므로 다만 순산의 표시로 짚자리를 매달았다.
장수를 기원하는 권초례 : 조선 후기의 권초례(捲草禮)는 문 위에 매어둔 산 자리를 걷는 의식으로서, 권초관이 산실 대청에 은(돈)․쌀․명주․실 등을 진열해놓고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이 제사는 아기씨의 장수를 비는 의미에서 제물의 이름에도 ‘목숨 명(命)’자를 붙여 쌀을 명백미(命白米), 은을 명정은(命正銀)이라 하였다. 권초관이었던 성현(成俔)이 쓴 『용재총화』에 의하면 출산 당일에 쑥으로 꼰 새끼줄을 산실 문 위에 걸어놓고, 이어서 권초관은 사흘간 초제(醮祭)를 지내게 하였다. 초제는 노자상(老子像) 앞에 물건을 진열해놓고 신생아의 만복을 빌었다.
태를 씻고 안치하는 의식, 세태와 안태 : 궁중에서는 산후 3~7일 사이에 길한 날을 잡아 행하는 ‘세태(洗胎)’ 의식이 있었다. 세태란 말 그대로 태를 깨끗이 씻는 의식이다.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태를 태의에 싸서 백자 항아리에 넣어 산실 안에 두었다가 세태의식을 거행하였다. 세태하는 날이 되면 의녀가 산실의 태항아리를 들고 나와서 질자배기에 옮겨 담고, 월덕(月德) 방향에 있는 샘물을 떠다가 100번 씻은 다음 술로 다시 씻어서 태항아리에 넣었다. 태를 넣을 때는 먼저 작은 백자 항아리의 바닥에 동전 한 닢을 글자 면이 밑으로 향하게 놓고, 그 위에 태를 놓은 다음 기름종이와 남색 비단으로 항아리 입구를 덮고 빨간 끈으로 묶어서 밀봉하였다. 다음으로 이 항아리를 더 큰 항아리에 담고 흔들리지 않도록 빈 공간을 솜으로 채우고 엿을 녹여서 밀봉하였다. 이 태항아리는 5개월 이내에 태실(胎室)을 선정하여 정중하게 봉안하였다. 태를 매장하는 관습은 중국에도 없는 조선 왕실의 독특한 풍습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태를 ‘생명선’으로 여겼다. 그래서 이를 함부로 처리하지 않고 동물이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땅속 깊이 파묻거나 태웠던 것이다.
초유보다 먼저 먹인 황연감초탕 : 산모가 출산 후에 처음으로 먹는 음식은 삼신상에 차렸던 미역국과 밥이다. 머리맡에 미역국과 쌀밥을 세 그릇씩 놓고 먼저 삼신께 감사드린 후에 산모가 먹었다. 원자의 탄생과 더불어 가장 시급한 일은 젖을 먹일 ‘유모’를 선발하는 일이었다. 유모를 고르는 기준에는 건강뿐 아니라 마음씨도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심사숙고하여 선발된 유모에게는 특별한 음식을 제공했는데, 미역국은 물론이고 콩죽․콩떡․두부 등 주로 콩으로 된 음식을 먹게 하였다. 그리고 민간에서는 유모에게 돼지족을 고아서 먹였던 것과 달리 궁중에서는 노루․사슴의 다리를 고아서 먹게 하였다고 한다. 이는 물론 젖먹이 원자의 건강을 고려해서였다. 생후 3일간은 우선 황연감초탕(황연꽃과 감초를 달인 물)이나 밀주사(蜜朱砂 : 꿀과 주사를 섞은 것)로 아기씨의 입안을 닦아내고, 부드러운 천을 따뜻한 물에 적셔서 온몸을 닦아주었다. 3일째 되는 날, 산모는 쑥탕 목욕을 했고, 아기씨는 복숭아 씨앗, 매화 뿌리, 호두 껍질 1부를 함께 끓인 물에다 돼지쓸개즙 1부를 섞어 목욕을 시켰다. 산모의 쑥탕 목욕은 백마 꼬리로 만든 채로 약쑥 달인 물을 쳐 올려 온몸을 살살 두드려주는 방식이었다.
제2장 원자의 교육
유아기의 원자 교육
원자의 결정, 나면서부터 귀한 자는 없다 : ‘원자(元子)’라는 칭호는 국왕과 왕비가 세자로 책봉되기 전의 맏아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정비의 소생이 없을 경우 후궁의 소생이 원자가 되기도 하였다. 원자에 대한 왕실의 첫째 기대는 아무런 변고 없이 잘 자라서 왕권을 계승하는 것이다. 장자가 왕권을 계승하는 것은 종묘사직의 안정을 위해 가장 바람직한 길이자 역대 국왕들의 한결 같은 소망이었지만, 저간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조선 왕조에서 적장자가 왕위를 계승한 경우는 문종․단종․연산군․인종․현종․숙종․순종 등 7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부왕(父王)보다 단명했던 세자도 7명이나 되었다. 성종은 예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적통에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지명’된 경우이고, 중종과 인조는 반정을 통해 등극하였다. 그리고 영조는 대신들의 ‘옹립’으로 왕세자에 책봉되었다가 즉위하였다. 이처럼 왕실의 승계 구도가 안정되지 못하면 이는 바로 국정의 불안으로 이어졌다. 반정을 통해 왕권의 교체된 경우에는 반정 세력들 사이의 권력다툼으로 수많은 정쟁이 발생했다. 반면 후계 구도가 확실하게 정해진 경우에는 대신들의 부화뇌동을 막고 국정의 안정을 기할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 왕실은 원자가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왕위를 계승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후계 구도가 명확해짐에 따라 왕실과 대신들의 관심은 원자에게 집중되었고, 기대치도 높아졌다.
원자의 나이 3세가 되면 대신들이 상소를 통해 원자에게 유학의 정신을 가르칠 때가 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원자 보양관’이란 명칭이 등장하는 것은 중종 때이다. 1518년(중종 13) 중종은 의정부의 3정승을 보양관에 임명하여 원자(인종)에게 『소학』을 가르치게 하였고, 원자의 나이가 4세 정도가 되면 보양청은 강학청(講學廳)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원자의 나이에 맞게 교육의 강도를 점차 강화하였다. 강학청은 원자를 보양하는 실무 기관으로서 원자가 먹을 음식과 옷, 서책의 공급 등 모든 것을 관장했다. 강학청의 교재로는 『천자문』․『소학초록』․『동몽선습』․『격몽요결』․『대학』․『사략(史略)』등이 있었으며, 이외에 한글과 체조를 가르쳤다.
원자의 교육방식과 교재
조선 왕실의 원자 교육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키우기 위한 조기 교육이자 엘리트 교육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국가의 지도자가 될 아이를 가르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어떤 내용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그리고 원자에 대한 국왕의 기대와 배려, 가르치는 스승과 가르침을 받는 원자의 태도 등을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의 자녀교육에 시사하는 바가 크리라 생각된다.
원자 보양청을 설치하고 제일 먼저 하는 행사는 원자와 사부의 상견례였다. 원자는 한문 단자(單子)를 배우는 것으로 공부를 시작하였다. 대개는 『천자문』과 『유합』을 가지고 한 글자씩 배우되 항상 배운 글자를 복습하고 난 다음에 새로운 글자를 더하는 식이었다. 원자의 나이가 6세가 되면 보양관이 확충되어 좌․우 빈객(賓客)을 스승으로 모시게 되고, 더러는 성균관 대제학․직제학이 특강을 맡기도 했다. 특이한 것은 학습에 들어가기 전에 원자에게 조청(물엿) 두 숟갈을 먹였다는 것이다. 흡수가 빠른 당분을 섭취시켜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머리를 맑게 하려는 이유였다. 그런데 이것이 일반에 널리 알려지면서 공부하기 전에 조청을 먹는 풍습이 퍼졌다고 한다. 원자가 책 한 권을 떼면 왕과 왕비를 모시고 스승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배강(背講)이라고 하는 일종의 발표회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원자가 책을 다 외고 묻는 말에 답변을 잘하면 왕은 노고를 치하하면서 스승들에게 떡 벌어지게 다과상을 차려 주었다. 민간에서와 마찬가지로 책걸이를 했던 것이다.
왕세자 강학 교재 : 조선은 유교정신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국시로 삼고 있었으므로, 원자의 교육에 사용된 책들도 모두 유교의 기본 정신을 담은 책이었다. 원자의 학습 내용과 학습 성취도는 보양관이 『보양청일기』와 『강학청일기』에 날마다 기록하였다. 『숙종강학청일기』는 숙종이 5세이던 1665년(현종 6) 6월부터 12월까지 강학청에서 작성한 일기이다. 이 책에는 보양관과 원자가 주고받은 문답, 사정에 의해 강학을 중지한 일들이 날짜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을 통해 원자 교육에 사용된 강학 교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천자문(千字文)』과 『유합(類合)』
『천자문』은 한문 초학자를 위한 교과서 겸 습자교본으로 널리 알려진 책이다. 저자는 중국 남북조시대 양(梁)나라와 주흥사(周興嗣 : 470? ~ 521)이고, 사언고시(四言古時) 250구, 합해서 1천 자가 각각 다른 글자로 되어 있다. 글씨체는 동진(東晉) 왕희지(王羲之)의 필적 중에서 해당되는 글자를 모은 것으로 전해진다. 내용은 ‘천지현황(天地玄黃)’에서 시작하여 ‘언재호야(焉哉乎也)’로 끝난다. 『유합』은 성종 때의 거유(巨儒) 서거정(徐居正)이 지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조선에서 만들어진 한자 입문서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훈몽자회(訓蒙字會)』
이 책은 1527년(중종 22) 최세진(崔世珍)이 지은 한자 학습서이다. 종래 보급되었던 『천자문』과 『유합』에서는 일상생활과 거리가 먼 고사와 추상적인 내용이 많아 어린이들이 익히기에 부적당하다는 지적에 따라, 이를 보충하기 위하여 지은 책이다
․『소학(小學)』
전통 교육에서 ‘소학’은 몇 가지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 첫째는 중국 주나라의 초등교육기관으로, 여기에는 8세가 된 귀족 자제들만 입학할 수 있었다. 둘째는 그 소학에서 육예(六藝)를 가르치면서 이것을 통칭하여 ‘소학’이라 하였다. 하지만 한(漢)나라 이후로는 문자학, 훈고학, 음운학에 관한 서적, 문자 학습서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셋째는 유학 입문서를 말하는 것으로, 특히 주자와 그의 제자인 유자징이 아동용 윤리 학습서인 『소학』을 만든 이후에는 주로 이 책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이 책은 조선시대 아동 교육서로 널리 사용되었고, 원자의 교육에서도 필수 교재였다.
․『동몽선습(童蒙先習)』
조선 중종 때 학자 박세무(朴世茂)가 저술하여 1666년(현종 3) 3월에 원자의 정규 강의인 진강(進講) 교재로 사용되었다. 『천자문』을 익힌 학동들에게 가르친 초급 교재로, 주요 내용은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륜(五倫)에 대한 설명이었다.
․『효경(孝經)』
공자가 제자인 증자(曾子)에게 전한 효도에 관한 논설이 주요 내용이며, 훗날 제자들이 편저한 것이다. 효가 덕의 근본임을 밝히고, 천자(天子)․제후(諸侯)․대부(大夫)․사(士)․서인(庶人) 등 신분에 따라 효도의 내용을 구분하였다.
․『격몽요결(擊蒙要訣)』
1577년(선조 10) 율곡 이이(李珥)가 아동들에게 읽히기 위해서 쓴 책이다. 이 책은 이이가 해주에서 학생들을 직접 가르친 경험을 바탕으로 기초 교육에 대해 정리한 것이다. 처음 학문을 시작하는 사람이 지켜야 할 ‘학문의 방법’을 10개 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독서의 방법과 순서’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제3장 왕세자 책봉례와 통과의례
세자를 책봉할 때에는 미리 살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라의 경제 사정도 감안해야 하고, 또 책봉되기 전에 치러야 할 통과의례도 있었다. 원자의 관례(冠禮 : 성인식)가 그것이다. 관례란 머리를 올려 상투를 들고 관(갓)을 쓰는 것에서 유래된 의식이다.
왕세자 책봉례
왕실에서 큰 행사를 치를 때는 행사를 주관할 부서로 도감을 설치한다. 그러한 행사에는 ‘오례(五禮)’라 하여 국가의 제사에 관한 길례(吉禮), 장례에 관한 흉례(凶禮), 군사에 관한 군례(軍禮), 국빈 영접에 관한 빈례(賓禮), 책봉 및 혼례에 관한 가례(嘉禮)가 있었다. 왕세자를 책봉할 때에는 책례도감(冊禮都監)이 설치된다. 조선 초에는 일시적이나마 세자의 책봉을 위하여 봉숭도감이 설치된 적이 있었다. 봉숭(封崇)이란 ‘받들어 높인다’는 뜻으로 상왕이나 대비에게 존호를 올리는 것과 같이 왕실의 어른을 우대하는 행사를 할 때에 사용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책례도감의 역할은 왕세자를 책봉하는 전례 절차에 필요한 의장과 품목을 준비하며, 행사가 끝난 후에는 의궤를 제작하여 행사의 전모와 의전 절차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었다.
왕세자로서 달라진 위상 : 책봉식을 거행하는 동안 왕세자는 대례복(大禮服)인 면복을 착용하게 된다. 여기서 대례복이란 원래 국왕이 하늘과 지상의 신을 영접하기 위해 입는 최고의 예복을 말하며, 면복이란 국왕의 면류관과 구장복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조선의 국왕이 면류관과 구장복을 갖추어 입는 경우는 중국의 칙사를 영접하거나, 종묘와 사직의 제사를 지낼 때, 국왕의 즉위식이나 혼인식 등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처럼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가 있는 경우 국왕만이 입을 수 있었던 면복을 왕세자가 착용한 것은 왕세자의 지위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봉식이 끝난 이후에도 왕세자는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대례복을 착용했다. 또한 왕세자는 이제 공식적으로 자신의 관속과 호위병들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세자시강원은 왕세자의 교육을, 세자익위사는 왕세자의 호위를 전담하는 관청이었다.
왕세자의 관례
혼례보다 더 중요한 관례 : 관례(冠禮)란 오늘날의 성년식을 말한다. 관례를 치르면 남자는 상투를 틀고 관을 썼기 때문에 관례라 했고, 여자는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았기 때문에 계례(笄禮)라 했다. 전통 시대의 어린이와 성인은 머리 모양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사대부가의 자녀인 경우, 결혼하기 전 15세에서 20세 사이에 관례를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관례를 치르는 사람은 『효경』이나 『논어』에 능통하고 기본적인 예의를 익히고 있어야 했으며, 그 부모가 기년(1년을 말함) 이상의 상복(喪服)이 없는 경우에만 거행할 수 있었다. 옛날 사람들은 관례를 혼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 비록 미혼이더라도 관례를 마치면 성인으로서의 대접을 받았다. 성인 대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말씨인데, 낮춤말인 ‘~해라’에서 보통말인 ‘~하게’로 격상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 전에는 이름이 없거나 함부로 불렀지만, 관례 후 남자는 자(字), 여자는 당호(堂號)를 불렀다.
삼간택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후보자들 : 왕실의 혼사는 삼간택(三揀擇), 즉 세 차례의 간택 절차를 거쳤는데, 1차에서 6~10명 정도로 후보자를 압축하고, 2차에서 3명 정도, 3차에서 최종 1명을 선발하였다. 심사 방법은 30명 내외의 처녀들을 한 줄로 세우고 그 앞에 발을 친 다음 국왕을 포함한 왕족들이 발 건너편에서 처녀들을 심사하는 방법이었다. 이때 혼례의 당사자인 신랑은 참여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재간택은 초간택이 있은 지 2주일 정도 지난 뒤에 실시되었다. 간택자는 대개 이 단계에서 내정되었으며, 비록 내정자를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눈에 띄게 특별 대우를 했다. 삼간택은 그로부터 15~20일 사이에 있었다. 삼간택에서는 복장과 화장에 대한 제약이 없어져 금박 저고리와 귀고리, 반지, 노리개 따위를 착용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최종 간택된 처녀는 그 자리에서 왕비 또는 빈궁 대우를 받아 다른 후보자들로부터 큰절을 받았다. 그리고 간택자의 복장은 완전히 대례복(大禮服) 차림으로 견마기 대신 원삼으로 금사를 박고, 칠보 족두리에 스란치마를 입었다. 간택된 처녀는 국왕, 왕비, 왕대비를 뵙고 인사를 올렸으며, 자신의 집이 아닌 별궁(別宮)에 가서 머물렀다. 삼간택이 끝나면 금혼령이 해제되었다. 한편 삼간택에까지 올랐다가 탈락한 처녀는 출가를 금했기 때문에 후궁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제4장 왕세자 교육기관 세자시강원
조선시대의 왕세자 교육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은 성균관이었다. 성균관은 고려 충숙왕이 국자감을 개칭하여 부르기 시작했으며, 조선은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대부분 그대로 유지했다. 최고 책임자는 정3품인 대사성(大司成)이었고 그 외에 악정(樂正)․직강(直講)․박사(博士)․학정(學正)․학록(學錄)․학유(學諭) 등의 관직을 두었다. 학생들은 150명에서 200명 사이였고, 초시인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한 유생들에게 우선적으로 입학 자격을 부여했다. 유생들의 활동은 엄격한 규율로 통제되었지만, ‘재회(齋會)’라는 학생자치활동기구도 있었다. 그러나 성균관은 왕세자가 입학을 하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일반인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왕실을 위한, 특히 국왕과 왕세자를 위한 교육기관은 별도로 있었다. 왕세자를 위한 교육기관은 ‘서연(書筵)’이라 하고, 국왕을 위한 교육기관을 ‘경연(經筵)’이라 하였는데, 서연과 경연은 연속성을 가지고 진행되는 제왕학 교육이었다. 서연의 서(書)는 서책(書冊)을, 연(筵)은 대나무로 만든 자리를 뜻하므로, 두 글자를 합친 서연이란 ‘책을 가지고 공부하기 위해 모인 자리’를 의미한다. 그렇게 왕세자 시절부터 시작된 제왕 교육은 국왕이 된 이후에도 계속된다. 유교의 덕목은 성현의 가르침을 통해 끊임없이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궁극적으로 하늘의 이치인 도를 깨우치는 데 있었기 때문에, 비록 국왕이라 할지라도, 아니 국왕이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학문을 닦아야 했다. 문제는 왕세자를 누가 가르치며,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였다. 왕세자를 양반 자제와 같이 성균관에서 공부하도록 할 수는 없었다. 즉, 왕세자의 위상이 높았던 만큼 그에 걸맞은 교육기관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왕세자의 학문을 ‘예학(睿學)’이라 부르고, 왕세자 교육을 전담할 기관으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을 설치하였다.
세자 교육 전담기관으로 세자시강원이 설립된 것은 세조 대였다. 세자시강원을 설립한 목적은 시강경사(侍講經史)와 규풍도의(規風道義), 즉 세자에게 유교 경전과 역사를 강의하고 유교 도덕을 가르치는 데 있었다. 시강원은 유학교육을 통해서 미래의 왕인 세자에게 국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학문적 지식과 도덕적 자질을 함양시키기 위해 설립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시강관들은 모두 당대의 실력자들이 임명되었다. 세자의 사부는 가장 고위직인 영의정과 좌․우의정이 담당하였는데 이들은 공무로 바빴기 때문에 겸직을 하였고, 실제로 왕세자에게 교육을 시키는 사람들은 빈객 이하의 전임 관료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문과 출신의 30~40대 참상관(參上官 : 정3품에서 종6품의 관료)으로 당상관 승진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었다. 말하자면 왕세자를 가르치던 시강관은 그 세자가 국왕으로 즉위할 때쯤이면 국가의 요직을 담당하게 될 중진 그룹의 관리들이었던 것이다.
시강관의 자격과 의무 : 세자시강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시강관이다. 시강관은 세자의 학습뿐만 아니라, 인격 형성에 대해서도 전적인 책임을 지고 있었다. 따라서 시강관을 선발할 때에는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시강관은 다른 관리와 마찬가지로 삼망제(三望制)를 실시하였다. 이는 시강원의 사․부․빈객이 합석하여 권점(圈點 : 자신이 추천하는 후보자의 이름에 둥근 점을 찍는 것)을 친 다음 권점이 가장 많은 세 명의 후보자를 재추천하여, 국왕이 최종 임명자를 선발하는 방식으로 선발하였다. 시강관의 임무가 막중했으므로 시강관에 임명되는 사람에게는 엄격한 자격 규정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부패한 관리의 자손은 시강관이 될 수 없었으며, 관리로 임명될 때에는 처의 사조(四祖 : 부․조부․증조부․외조부를 말함)까지 신원조회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시강관의 일차적인 임무는 세자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다. 시강원의 강의는 진강(進講) 혹은 법강(法講)이라 하여 하루에 세 번 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한 달에 두 번씩 배운 내용을 복습하는 회강(會講)이 있었다. 세자의 학습에 있어 사․부와 이사는 세자를 직접 가르치기보다 세자의 스승이라는 상징적 존재에 가까웠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회강에 나아가 진행 상황과 세자의 학습 정도를 살피는 감독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빈객과 부빈객은 강의의 실무 책임자로서 직접 강의를 하였다. 그리고 강의의 대부분은 당하관인 보덕․필선․문학․사서․설서 등 약 10여 명이 전담하였다. 시강관의 또 다른 임무는 세자의 인격 형성을 돕는 일이다. 세자가 생활하는 공간에는 항상 시강원 관리가 직숙(直宿)하였는데, 그 이유는 세자가 환관이나 궁인들과 어울려 헛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왕세자 경호기관, 세자익위사
조선시대에는 왕세자의 경호를 담당하는 기관이 별도로 있었는데, 이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혹은 ‘계방(桂坊)’이라 불렀다. 대상자가 왕세손일 경우에는 ‘세자익위사’와 구분하여 ‘세손위종사(世孫衛從司)’라 하였다. 세자익위사의 주임무는 왕세자를 호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왕세자가 행차하는 곳이면 어디에나 수행하였다. 세자익위사가 처음 설치된 것은 1418년(태종 18)이었다. 세자익위사는 병조에 소속되어 주로 왕세자의 호위를 담당했으므로, 익위사의 관리는 무예에 능하고 활과 화살, 혹은 칼로 무장하는 것이 관례였다. 세자익위사나 세손위종사의 관리는 무신이 다수였지만 문신이 임명되는 경우도 많았다. 호위가 주된 임무일지라도, 익위사나 위종사의 관리는 세자나 세손을 항상 수행하는 관원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왕세자를 바르게 이끌 만한 학문적 소양을 요구했던 것이다.
제5장 세자시강원의 교육방법
왕세자의 일상생활
왕세자의 일상생활을 알아보기 위해서 그 모범이 되는 국왕의 일상생활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국왕의 일과는, 처리해야 할 일이 만 가지나 될 정도로 많다고 하여 ‘만기(萬機)’라 불렀다. 국왕의 하루는 사시(四時)라고 하여 아침, 낮, 저녁, 밤의 네 범주로 구분된다. 아침에는 신료로부터 정치를 듣고, 낮에는 찾아오는 방문객을 맞으며, 저녁에는 조정의 법령을 검토하고, 밤에는 자신의 마음을 닦는다. 일년에 사계절이 있는 것처럼 국왕의 하루는 네 범주로 나뉘어 바쁘게 돌아갔다. 국왕의 일상생활이 바쁜 반면에 왕세자의 일상생활은 단순했다. 궁중에서 왕세자의 거처는 자선당(資善堂)이다. 자선당은 궁궐의 중심 건물 근정전의 동쪽 문인 건춘문 안에 있었는데, 세자를 동궁(東宮)이라 한 것은 그 거처가 국왕이 거처하는 곳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왕세자에게 제일 강조하는 덕목은 ‘효’이다. 왕세자는 문안을 올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국왕의 수라상을 살피는 ‘시선(視膳)’과 부모의 약을 먼저 맛보는 ‘시탕(侍湯)’을 해야 했다. 시선이나 시탕은 국왕의 자식 중 대표로서 왕세자가 해야 할 일이었다. 문안을 다녀오면 아침식사를 하고 바로 조강(朝講)에 들어갔다. 낮과 저녁에는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이 있었으며, 석강이 끝난 다음에는 저녁식사를 하고 문안을 하는 것으로 공식적인 일과가 끝났다. 그러나 이외에도 낮 시간 중 수시로 시강관을 불러 공부하는 소대(召對)와 밤중에 침실로 불러 공부하는 야대(夜對)가 있었다. 이와 같은 왕세자의 일상생활은 대부분 공부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견디기 힘든 생활이었다.
간혹 왕세자가 답답한 궁중 생활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능행(陵幸)과 강무(講武 : 사냥을 겸한 군사훈련)를 할 때였다. 왕세자는 명절이나 기일에 국왕을 수행하여 성묘를 가면서 모처럼 바깥바람을 쐬었고, 단오쯤에는 강무를 나가 사냥으로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궁중의 일상생활에서는 다른 형제들과 어울려 격구를 하거나 매사냥, 활쏘기를 소일거리로 삼았으며, 가끔 국왕을 모시고 적전(籍田 : 임금이 몸소 농사를 짓던 토지)에 나가 곡식을 살피기도 하였다. 궁중 유희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활쏘기와 격구(擊毬 : 또는 ‘타구’)였다. 활쏘기는 유교의 소학교육에서 강조하는 육례 중의 하나로, 왕세자의 교육에서도 이를 매우 중시하였다. 태종이 활쏘기를 강조한 이유는 학문과 무예를 두루 갖춘 국왕을 이상적인 군주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활쏘기와 말타기는 국왕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기능이었다. 가령 능행과 같이 국왕이 도성을 벗어나는 거국적 행사에서는 국왕도 군복을 착용하고 말을 달리며 군대를 통솔하였다. 또한 궁중에서 국왕이 신하와 활쏘기 모임인 대사례(大射禮)를 갖는 것은 일상적인 국가 전례에 속했다. 게다가 활쏘기는 남자의 일이자 인격 수양과 관련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국왕들의 활 솜씨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기도 했다.
세자시강원의 교육방법
왕세자의 학문, 예학 : 국왕의 학문은 ‘성학(聖學)’이라고 하고, 왕세자의 학문은 ‘예학(睿學)’이라고 한다. ‘예(睿)’자는 원래 ‘성(聖)’자와 통하는 글자로서, 예은(睿恩 : 국왕의 은혜), 예재(叡裁 : 국왕의 결재), 예택(睿澤 : 국왕의 은택)의 예에서 보듯 국왕과 관련이 있는 표현에 사용되는 글자였다. 예학은 학문을 닦는 데 국한된 것이 아니라 왕세자로서 갖추어야 할 품성과 행실을 배우는 것도 포함되었다. 예학을 닦는 도리에 대해서는 세조가 왕세자(예종)에게 내린 「훈사(訓辭)」10장에 잘 나타나 있다.
1. 항덕(恒德 : 한결같은 덕을 가져라) 배필을 중하게 여기고, 대신을 공경하며, 어진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 하라.
2. 경신(敬神 : 신을 공경하여 섬겨라) 신을 업신여기고 백성을 학대하면, 복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진다.
3. 납간(納諫 : 간언을 받아들여라) 바른 말로 간언하는 사람이 없으면 세상일에 어두워져 아는 것이 전혀 없고, 폐단을 알 수 없게 되어 나라가 망한다.
4. 두참(杜讒 : 참소를 막아라) 백성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항상 너그럽게 용서하고, 원통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백성들의 뜻을 살피면 참소가 없어진다.
5. 용인(用人 : 사람을 가려서 써라) 사람을 쓸 때는 그 마음을 취해야지 재주에서 취하지 말라. 부모에게 화목하고, 자상하며 은혜로운 사람을 써라.
6. 물치(勿侈 : 사치하지 말라) 군주가 귀하게 되고 나라가 부유해지면 사치하려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너는 백성을 위하여 정사를 부지런히 할 뿐이다.
7. 사환(使宦 : 환관을 조심해서 부려라) 국왕이 궁중에 있으면서 환관이 명령을 전하거나 분명한 신념이 없이 소문만 들으면 큰일이다. 항상 신하들을 직접 만나 정사를 듣거나 편지를 이용하라.
8. 신형(愼形 : 형벌을 신중히 해라) 사람을 지나치게 벌주는 일이 없게 하라.
9. 문무(文武 : 학문을 일으키고 무예를 익혀라) 술을 좋아하지 말고 대신을 자주 만나며, 사냥을 폐지하지 말고 군대 조련을 엄하게 하라.
10. 선술(善述 : 부모의 뜻을 잘 계승하라) 옛말에 선왕의 법을 준수하면 잘못되는 일이 없다고 한 것을 명심하라.
정규강의 법강과 공개강의 회강 : 시강원의 강의 방식은 법강(法講)과 회강(會講)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외에도 국왕이 강의에 참석하는 친림청강(親臨聽講)이나 학업을 평가하는 고강(考講)이 있지만 이는 법강과 회강에 부가된 부차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법강은 평상시에 거행하는 정규적인 강의로 원래는 국왕이 학문과 덕망이 높은 사람을 궁중에 불러 경서와 역사서를 강론하게 하던 일에서 유래하였다. 법강에서는 주로 경서를 가르쳐 덕성을 함양하게 하고, 소대나 야대에서는 중국과 조선의 역사서를 가르쳐 국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역사적 지식과 안목을 습득하게 하는 데 주력했다. 왕세자가 공부를 할 때에는 배강(背講) 혹은 배송(背誦)이라 하여 책을 덮고 외우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일반적으로 경서의 본문은 전부 암기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해석은 책을 보면서 번역해나가는 임강(臨講)을 활용하였다. 회강은 사부를 비롯한 시강원의 관원이 참석한 가운데 회강례를 거행하고, 왕세자가 그동안 배운 경서와 역사서를 복습하고 평가하는 강의를 말한다. 회강은면 세종대에는 매월 1일, 11일, 21일, 그리고 경서를 처음 읽는 날 거행했다. 회강을 주도하는 사람은 왕세자의 사부였다. 그 날의 성적을 사부가 매겼기 때문이다.
회강의 학습방법은 먼저 왕세자가 이전에 공부한 내용을 외우고 책을 보면서 해석을 한다. 그 다음 시강관이 새로 공부할 내용을 한 차례 읽으면, 왕세자가 따라서 읽고, 시강관이 해석을 한 차례 하면 세자가 이를 따라서 해석한다. 끝으로 왕세자가 그 날 배운 것을 다시 한 번 읽고 해석한다. 시강원 교육은 법강과 회강으로 채워져 있었지만 강의를 중단할 때도 있었다. 이를 정연(停筵)이라고 하는데, ‘서연을 정지한다’는 의미이다. 조선시대에는 왕세자가 참석해야 하는 국가적 행사가 많았고, 서연관이 국왕을 수행하거나 회합에 참석하여 강의를 할 수 없을 때도 있었다. 국왕과 왕비의 생일에 강의를 중단한 것은 효를 중시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왕세자는 스승이 돌아가셨거나 사형을 집행한 날에는 휴강을 하였는데, 이는 인간의 인격과 생명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왕세자는 시강원 강의를 중단할 때에도 효와 인을 체험하는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학습평가와 실습교육
왕세자가 제대로 학습을 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일은 법강이나 회강을 하는 과정에서 항상 이루어졌다. 수업을 시작할 때마다 이전에 배운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수시로 학습 정도를 평가하는 것 외에 미리 정해진 날에 공식적으로 학생의 성적을 평가하는 것을 ‘고강(考講)’이라고 한다. 공식적인 평가는 모두 고강이라고 하였으나 구체적인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고강의 방법으로는 배강과 임강이 있었다. 배강은 배문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책장을 덮어놓고 암송을 하는 것이며, 임강 혹은 임문은 책을 펼쳐놓고 보면서 음을 읽거나 문장의 뜻을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문장을 외울 때는 배강을 하고 뜻을 해석할 때는 임강을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지만, 학문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임강의 비율이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고강을 할 때에는 고생(告栍)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생(栍)이란 경서의 글귀를 기록한 대나무 쪽을 말하며, 고생이란 생을 추첨하여 선정된 것을 알린다는 뜻이다. 고생을 하는 방법은 서로 다른 경전 글귀가 씌어있는 생을 원통에 가득 넣어두고 수험생이 그중 하나를 뽑은 다음 거기에 적힌 글귀를 읽고 스승의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을 쓰면 수험생은 자신이 어느 부분을 읽어야 할 지 알 수 없으므로, 범위 안에 있는 모든 내용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왕세자 역시 이런 방법으로 학습 정도를 평가받았다. 시강관이 성적을 매길 때에도 생을 사용하였다. 평가는 주로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4단계로 매겨졌는데, 이때의 생은 통․약․조․불자 중에 한 글자를 써 놓은 목패를 말한다. 시험이 끝나면 스승이 성적을 통고하는데, 성적이 우등인 학생에게는 ‘통’자 생을, 그 다음은 ‘약’자 생을, 그 다음은 ‘조’자 생을, 아주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에게는 ‘불’자 생을 내려 우열을 구분하였다. 낙제점이라 할 수 있는 ‘불’자 생은 가장 아래 등급의 생이라 하여 ‘하생’이라고도 했다. 세종 때에 예조에서는 문과 시험 중 경전을 시험하는 절목을 정하여 올렸는데, 여기에 생에 대한 기준이 나온다.
․ 조통(粗通)
읽기와 해석에 모두 착오가 없고 강론하는 것이 해박하게 통하지는 못하지만 문장의 대의를 잃지 않은 사람
․ 약통(略通)
읽기와 해석이 모두 익숙하고 강론하는 것이 자세하고 분명하며, 대강의 뜻은 통하지만 두루 통하지 못하는 사람
․ 통(通)
읽기에 능하고 해석이 명백하며, 변설하는 것에 미심쩍은 것이 없고 의리를 분석하여 대의에 통하는 사람.
․ 대통(大通)
읽기와 해석, 의리와 대의를 모두 분명하게 해석하며, 아래위로 연결시키고 이리저리 통하여, 문장의 대의에 통하고 글자 밖의 뜻까지 터득한 사람.
국정의 실습, 대리청정 : 왕세자나 왕세손이 국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는 것을 대리청정(代理聽政)이라고 한다. 이와는 별도로 국왕의 나이가 너무 어려 정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경우에는 왕대비가 국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는 경우가 있는 데 이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이라고 한다. 수렴청정이란 국왕의 뒤에 주렴을 드리우고 앉아 정사를 돌본다는 뜻이다.
왕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경우는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는 왕권에 위협을 느낀 국왕이 마지못해 대리청정을 명하는 경우이다. 계속해서 흉년이 들거나 전쟁이 발발하면 흉흉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했다. 이런 경우는 국왕이 원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대리청정을 하는 왕세자로서도 심리적인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국왕이 너무 늙거나 중병을 앓고 있어 부득이 왕세자가 대행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왕세자로서 미리 정치를 경험하는 셈이 되고 국왕도 굳이 세자의 허물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대리청정은 왕세자가 조정에 나가 국왕이 하는 일을 대행하는 실습교육의 의미가 있었다. 애초부터 훌륭한 국왕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왕세자 교육인지라 어떤 의미에서는 왕세자 교육이 대리청정에 의해 완성된다고도 볼 수 있다. 왕세자는 직접 국왕의 정사를 처리해봄으로써 그 동안 받아온 교육을 실습하고 평가를 받았으며, 이 날을 위해 수많은 시강관들이 정열을 바쳤던 것이다. 대리청정을 할 때 왕세자가 국왕의 모든 권한을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인사권, 사법권, 군 통수권과 같이 중요한 권한은 여전히 국왕의 전결사항이었다. 비록 왕세자가 국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처리하지만, 현실적으로 최고의 권력자는 엄연히 국왕이었기 때문이다. 대리청정이란 처결하기 어렵고 중요한 사항은 국왕이 직접 판단하여 왕세자에게 명을 내리고, 그 외의 일반 사무는 왕세자에게 처리를 맡겨 경험을 쌓도록 하는 제도였다.
농경 실습, 친경례와 관예례 : 조선은 농업을 하는 국가였으므로 농업을 장려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시행하였다. 농사의 신을 모신 선농단이나 양잠의 신을 모신 선잠단에서 국왕이 제례를 올린 것도 농업을 장려하기 위한 조치의 하나였다. 선농단은 신농씨(神農氏 : 농사의 신)와 후직씨(后稷氏 : 곡식의 신)의 신주를 모신 제단으로 현재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다. 조선의 국왕은 정월에 선농단에 나가 제례를 올리고 적전(籍田 : 국왕이 경작하는 토지)에서 소를 몰고 밭을 간 다음, 씨를 뿌리는 친경례(親耕禮)를 거행했다. 그러다 수확기가 되면 다시 선농단에 나가 농작물을 수확하는 것을 관람하는 관예례(觀刈禮)를 거행했다. 친경례나 관예례는 국왕이 솔선하여 농사짓는 시범을 보임으로써 백성들에게 농업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친경례나 관예례는 국왕이 주관하는 행사였고, 왕세자는 국왕을 수행하여 이 행사에 참여했다. 이 행사는 장차 이 나라를 다스릴 왕세자에게 농사의 중요성과 어려움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즉, 궁중에서만 자라나 일반 백성의 생활을 모르던 왕세자에게 농경 실습의 기회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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