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는 이름의 별
카렌 수산 페셀 지음/유혜자 옮김
뜨인돌/2003년 11월/208쪽
▣ 저 자 카렌 수산 페셀
1964년 독일 뤼벡에서 태어났다.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여러 편의 소설과 단편을 썼다. 특히 잘 알려지지 않은 불치병을 가진 환자들에게 관심이 많아 최근 'HIV'라는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 환자들을 위한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 Short Summary
죽음을 앞두고 인생의 기쁨을 어린 딸에게 알려주고 싶어하는 엄마와, 얼마 안 남은 엄마와의 시간을 씩씩하게 견뎌내는 가족들의 심정을 그린 성장소설. 11살 소녀 루이제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긴 이별인 죽음을 마주한 가족들의 모습을 통해 죽음과 가정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책.
루이제가 9살 생일을 맞은 여름방학, 엄마가 유방암에 걸리고 만다. 엄마의 병은 점점 악화되어 가고, 가족들은 엄마가 곧 죽을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상한 행동을 한다. 동생 루벤은 소중한 인형을 갈기갈기 찢는가 하면 아빠는 무기력에 빠져 신문만 탐독한다. 하지만 대화를 통해 서로의 슬픔을 공유하면서 가족들은 조금씩 두려움을 이겨나가고 긴 이별을 준비한다.
▣ 차 례
엄마, 아프지 마세요
엄마에게 힘을 실어 주자
엄마는 죽지 않아, 절대로!
아직은 작별할 때가 아니야
엄마 안녕!
엄마, 아프지 마세요
오늘 아침 깨자마자 침대 옆에 걸려 있는 달력부터 쳐다보았다. 앞으로 여덟 밤만 자면 내 생일이다. 그럼 난 만 열한 살이 된다. 내 열한 번째 생일이 무척 중요한 날이라고 한 야니 삼촌의 말이 올해는 정말 맞는 말인 것 같다. 엄마 없이 처음으로 맞이하는 생일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석 달 전에 돌아가셨다. 이제 더 이상 우리 곁에 계시지 않고, 하늘나라에 올라가 별님이 되었다. 엄마별. 물론 난 별이 태양의 광선을 받는 작은 행성이라는 것쯤은 안다. 그렇지만 하늘의 별이 되겠다고 한 말은 엄마가 한 약속이었다. 그리고 아직 우주에 대한 연구가 다 끝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엄마가 말한 것처럼 사람이 죽어서 하늘의 별이 된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암에 걸리기 전까지는 무척 건강했다. 사실 엄마보다 아빠가 더 자주 아팠다. 아빠는 자주 머리가 아프다고 했고, 감기에도 잘 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병원에 다녀왔고 며칠 후 병원에 입원하러 가기 전에 의사가 엄마의 가슴에서 덩어리를 발견했다는 말을 내게 해주었다. 난 그게 무슨 말인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는 내게 더 자세히 설명했다. 몸에 덩어리가 있다는 것은 나쁜 것으로 뭉친 살덩어리가 점점 자라면서 사람을 아프게 하는 거라고 했다. 엄마는 검사를 받기 위해 병원을 자주 찾았고,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가 받는 검사들이 말처럼 그렇게 단순한 건강검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며칠만 지나면 여름방학이 시작될 즈음이었다. 우리는 스페인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방학이 시작된 첫날 엄마는 우리에게 여행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왜요? 그것만큼은 꼭 하기로 했잖아요! 광고에 나와 있는 집을 빌리기로 약속까지 했잖아요!” “그래, 그랬었지. 잘 들어. 루이제. 난 다음주에 입원해야 해. 2주일 간. 처음에는 내가 못 가더라도 너희들을 스페인에 보낼까 생각했었어. 그렇지만 결국 우리 모두 함께 집에 있기로 결정했단다.” “암에 걸린 거예요, 엄마? 그럼 엄만 죽는 거예요?” “아냐, 꼭 그렇게 되는 것은 아냐. 암에 걸리면 죽는 사람도 많지만 암에 걸렸다고 다 죽는 것은 아냐. 어쨌든 난 죽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어,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뭐든지 다 할 생각이니까.” 저녁에 퇴근한 아빠는 내가 엄마에게서 사정을 들어 다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내 어깨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너무 무서워하지 마, 루이제. 엄마는 꼭 다시 건강해질 거야. 엄마는 암을 초기에 발견했어. 그래서 지금은 그것을 없앨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할 수 있단다. 그러니 올해는 집에서 방학을 신나게 보내자. 알았지?
이튿날 엄마는 병원에 입원했다. 동생 루벤과 나는 엄마가 짐을 싸는 일을 도와드렸다. 루벤은 애지중지하는 작은 토끼 인형을 엄마 가방 안에 넣었고, 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쿠션을 넣어 주었다. 그 날이 엄마가 암 때문에 병원에 처음 입원했던 날이다. 그때만 해도 일이 별로 심각하지 않았다. 방학도 그럭저럭 재미있었다. 아니, 정말 재미있었다. 그 이유는 할머니가 우리 집에 와 계셨기 때문이다. 집안에 생기가 넘쳤고, 아빠는 휴가 기간 동안 정원을 가꾸며 집에서 지냈다. 할머니는 여기저기 다니며 물건들을 마구 꺼내놓고, 케이크도 만들어주고, 우리와 여러 게임들을 했다. 그리고 나는 야니 삼촌의 집에서 종종 놀기도 했다.
방학 중에 있었던 일들 중 가장 신나는 일을 꼽으라면 당연히 엄마의 건강이 좋아졌다는 점이다. 거의 이틀에 한 번씩 우리는 병원을 찾았고, 갈 때마다 엄마는 기분이 조금씩 좋아보였다. 입원한 지 이틀 만에 엄마는 가슴의 덩어리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았다. 입원한 지 1주일이 될 무렵 우리가 찾아갔을 때 엄마는 더 이상 침대에 누워 있지 않고 함께 산책을 했다. “엄마, 다시 건강해진 거 맞죠?” “그래, 다시 건강해졌어. 머지않아 집으로 가면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을 거야.” 2주일 후에 아빠와 함께 퇴원한 엄마의 얼굴이 밝았다. “야! 다시 집에 왔다!” 엄마가 소리치며 내 양쪽 볼에 입맞추고는 나를 꼭 끌어안았다.
1주일 후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갔고, 아빠의 휴가도 끝났다.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았고 방학을 보내는 동안 내 키가 2센티미터 크고 4학년이 되었다는 점만 달라졌다. 엄마는 건강과 기분이 다 좋아 보였다. 난 엄마와 아빠가 아래층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들으며 편안히 잠이 들었다.
엄마에게 힘을 실어 주자
난 암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엄마가 다시 건강해졌는데! 12월은 내가 일년 중 가장 좋아하는 달이다. 크리스마스도 있고, 파티 분위기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에서 과자를 만들어 먹는 것도 무척 재미있다. 우리 집은 대개 성탄절을 4주일 정도 남겨 놓고 과자를 굽기 시작하는데 올해 엄마는 웬일인지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글쎄 하기는 해야겠는데 너무 피곤하구나.” 엄마는 어느새 소파에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다음날 엄마는 여전히 피곤해했고,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일요일이 되자 겨우 기운을 차리고 우리와 함께 과자를 만들었다. 대부분의 일은 루벤과 내가 하고 엄마는 식탁 옆에 앉아 우리에게 설명하고 지켜보았다.
그 해의 성탄절은 여느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겉에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정상이었는데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우리가 직접 만든 장식 모형을 창문에 걸어두어야 한다는 것도 내가 말해서 엄마는 겨우 기억해냈다. 그리고 엄마는 루벤과 내게 저녁마다 읽어주던 동화책도 읽어 주지 않고, 아빠가 대신 책을 읽어주었다.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른다. 난 그냥 걱정이 많이 되었던 것 같다. 성탄절이 지난 이틀 후 아빠와 엄마가 시내에 나갔고 점심 때 아빠가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얼굴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아빠를 보자 난 덜컥 겁부터 났다. “엄마가 아파. 엄마가… 엄마가 다시 암에 걸렸대.” “말도 안 돼! 거짓말이죠, 아빠? 거짓말이죠?”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암에 대해 나에게 자세히 설명해 준 사람은 야니 삼촌이었다. “암은 몸 속 어딘가에 또아리를 틀고 자라나는 혹 같은 것이거든. 암 덩어리는 세포로 되어 있거든. 너 세포가 뭔지 아니?” “대충은요.” “세포는 서로 나누어지면서 숫자가 많아지는 성질을 갖고 있어. 엄마의 암세포가 혈관을 따라 움직이다가 겨드랑이에서 커져 버렸어. 네 엄마의 경우처럼 새로운 덩어리가 생긴 것을 사람들은 독이 전이되었다고 말해.” “야니 삼촌, 엄마가 많이 아픈 건 아니죠? 그러니까 내 말은 암이 엄마를 많이 아프게 하지는 않겠지요?” 야니 삼촌은 내 얼굴은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아니, 별로 아프지는 않아.” 내가 병원에 가서 물어보았을 때 엄마가 말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내가 물었다. “우선 내일 아침 일찍 수술을 받게 될 거야. 의사가 겨드랑이에서 암세포를 긁어내게 되지. 그런 다음 약물치료를 받는 거야.” “시간은 얼마나 걸려요?” “약 3, 4주쯤. 아빠와 상의를 해보았는데 아빠가 일주일은 휴가를 낼 수 있대. 그 다음에는 할머니가 루벤과 함께 올 거야. 혹시 네가 베키네 집에서 일주일 정도 지내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을까? 나드야 아줌마가 너를 돌봐줄 거야.”
엄마는 3, 4주일을 지나 무려 5주일 동안이나 병원에 있어야 했다. 그 기간 동안 독한 약물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그 치료를 받고 나면 엄마가 너무 힘들어해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시간이 자꾸 길어졌다. 엄마와 오래 떨어져 지내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 힘든 시간이었는데 그것보다 더한 건 루벤과 내가 일주일 간 엄마를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모처럼 엄마를 다시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왠지 엄마가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침대 가에 걸터앉아 엄마를 가까이 쳐다보았을 때 엄마의 얼굴이 진짜로 변했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의 눈썹이 없어졌던 것이다. “엄마, 눈썹이 어떻게 된 거예요?” “그냥 다 빠져서 그래. 약 때문에 그런 거야. 다시 나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 눈썹이 없는 것도 재미있지 않니?” “머리카락도 다 빠졌어요?” 엄마가 쓰고있던 모자를 살짝 벗었다. 정말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카락은 다 빠졌지만 내 건강은 많이 회복됐어. 다음주면 퇴원할 거야.”
며칠 후 엄마가 병원에서 퇴원했다. 동네 사람들도 우리를 보면 전보다 더 반갑게 인사했다. 엄마는 전에는 검은 갈색 머리를 어깨까지 치렁치렁 내려뜨렸다. 그런데 이제는 약 때문에 곱슬머리가 자라났다. “난 이게 오히려 좋아. 곱슬머리 원래 좋아했거든.” 내가 보기에도 엄마는 곱슬머리가 잘 어울렸다. 물론 코 주변은 여전히 창백했고, 눈가에는 주름이 많았지만.
엄마는 피곤해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어떤 날은 생기에 넘쳐 보였지만 다음날은 우리가 아침 식사를 할 때부터 몹시 지쳐보였다. 내 열 번째 생일이 되기 며칠 전부터 엄마와 아빠의 행동이 이상했다. 엄마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고, 아빠는 뭔가에 화가 잔뜩 나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루벤이 잠들었을 때 엄마는 내게 엄마의 몸 속에 암이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이 폐에 생겨 수술도 하지 못하고 약물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거였다. 엄마는 내게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고, 난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으로는 과연 엄마가 다시 건강해질 수 있을지 의심이 들었다.
내 생일이 지난 바로 다음 월요일에 엄마는 새로운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병원에 가서 약을 타고, 방사선 치료도 받았다. 치료를 시작한 지 2주일째부터 엄마의 상태가 좋아졌다. 다시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을 정도가 되더니 웬일인지 머리카락이 다시 빠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몇 가닥씩 빠지더니 나중에는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결국 엄마는 지난번처럼 야구 모자를 쓰고 있어야만 했다.
엄마는 죽지 않아, 절대로!
6주일이 지나자 엄마의 치료가 일단락되었다. 그렇지만 엄마의 건강이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피곤에 지쳐 있고, 몸도 많이 야위었다. 너무 말라서 엄마를 껴안으면 엄마의 뼈마디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어느 날 내가 엄마에게 암이 완전히 제거되었느냐고 물어보자 “아니!”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주 없어진 것은 아냐. 그냥 지금은 잠을 자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지.” 암이 다 나은 것도 아닌데 엄마가 약물 치료나 방사선 치료를 받지 않는 것이 나는 또 이상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침착해, 루이제.” 엄마가 낮게 속삭였다. “하나님은 인내심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신다는 말도 있잖니.” “앞으로 다시 건강해질 수 있는 거예요?” “글쎄. 나도 정말 그렇게 되고 싶어.” 그렇게 말한 다음 엄마는 내게 살짝 윙크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생각을 야니 삼촌에게 털어놓았다. “엄마가 돌아가실 것 같아요. 야니 삼촌?” “사람은 누구나 다 죽어.” “그건 나도 알아요.” 나는 약간 짜증이 났다. “그렇지만 엄마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다시 건강해질 수도 있지. 그렇지만 다시 건강해지지 않을 수도 있어.” “다시 건강해지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이에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 그런 말을 듣는 건 끔찍했지만 그래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게 한편으로 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엄마가 다시 건강해질 거라는 듣기 좋은 말만 했다. 어느 누구도 죽음에 대해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나를 두렵게 만든 것은 엄마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네 엄마는 의지가 아주 강한 사람이야.” “엄마도 두려울까요?” 야니 삼촌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은 누구나 두려워하지. 죽은 후 어떤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니까. 하지만 궁금한 것은 네가 엄마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좋겠다.” “아빠도 두려워하는 것 같아요. 요즘 이상하거든요.” “그래, 내가 보기에도 그렇더라. 혼자서 감당하기에 너무 힘들어서 그럴 거야.” “아빠도 엄마가 죽을 거라는 예상을 하고 있을까요?” “그럴 수 있지.” 야니 삼촌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누구도 죽음에 대해 직접 말하진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말하면 불길한 일을 재촉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러는 거겠지. 그렇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어차피 그 시간이 되면 받아들여야지. 그래야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거든.” 난 뒤로 벌렁 드러누워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난 병상의 엄마를 생각하면서 내 마음속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아 눈을 꼭 감았다.
병실에 들어올 때 나는 엄마가 물 잔이 놓인 쟁반을 옆으로 치우는 것도 무척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엄마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난 좀체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엄마는 앞으로 몸을 숙이고 나를 꼭 안아주었다. 이게 정말 얼마 만의 일인가! “내가 죽을 거라고 야니가 말하든?” 엄마가 조용히 물었다. “야니의 말이 맞아. 내가 다시 건강해지기는 어려울 것 같아. 암세포가 다시 자라고 있거든. 내 몸 구석구석에 다 퍼져서 이제는 수술도 할 수 없게 되었단다. 그리고 이제는 어떤 약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해.” 난 엄마의 품속을 더 깊이 파고들며 눈을 꼭 감았다. “사람들은 모두 엄마가 다시 건강해질 거라는 말만 해요! 아빠까지도요.” “나도 알아.” 엄마가 말했다. “아빠는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아. 아빠에게는 시간이 더 필요하단다.” “엄마, 무서워요?” 엄마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처음에는 무척 무서웠지.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익숙해졌어. 그리고 생각해 보니 죽음도 별 것 아닌 것 같아. 그 다음에 어떤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거든. 혹시 내가 하늘의 별이 되어 너희들을 비춰줄지도 모르잖아.” 그 말을 들으니 머릿속에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졌다. 별은 아름답다. 별은 영롱하게 빛을 발하고, 사람들이 쳐다보든 보지 않든 늘 제자리에 떠 있다. “그럼 난 혼자가 되잖아요.” “아냐. 넌 혼자가 아냐. 네게는 아빠도 있고, 루벤도 있고, 야니 삼촌과 베키도 있잖아.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넌 더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될 거야. 그러니 넌 절대 혼자가 아냐. 그리고 엄마하고도 헤어지는 게 아냐. 난 항상 거기에 있을 테니까. 네 마음과 생각 속에…. 그리고 별이 되어 하늘에서 너를 비추어 줄 거야.” 엄마가 다시 기침을 시작했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짧게 끝났다. “아직은 그때가 아냐. 아직 죽을 생각이 없거든. 나는 암세포와 맞서 열심히 싸울거야. 루이제, 잘 들어. 우리 약속 하나 하자. 너는 이제부터 더 이상 슬퍼하지 마. 그때가 다가오면 너에게 꼭 알려줄게. 그렇게 해서 우리 이별을 준비하자. 약속할 거지?” “약속해요.” 엄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엄마에겐 그것 말고 한 가지 소원이 더 있어.” “뭔데요?” “나와 함께 두려움을 물리치겠다고 약속하는 거야.” “어떻게요?” “그런 생각이 슬며시 들면 그냥 비웃어 버리는 거야. 어때?” “약속할게요.” 나와 엄마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로 도장을 찍었다. 난 엄마를 아프게 하지 않으려고 그 모든 동작을 아주 조심스럽게 했다.
그 날 이후부터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마음에 큰 걱정거리가 생길 때면 나는 엄마와 한 약속을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가 여름방학이 끝날 때까지 퇴원하지 못했는데도 크게 슬퍼하지는 않았다. 병원에서는 엄마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빠, 루벤과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으로 엄마를 찾아갔다. 갈 때마다 엄마의 몸은 더 야위었고, 얼굴빛은 창백했고, 기침도 더 심하게 했다. 그렇지만 엄마는 나만 보면 윙크하며 엄지손가락을 높이 세워 나를 안심시켰다. 그런데 아빠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한번은 내가 엄마의 죽음에 대해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자 아빠는 화를 내었다. “쓸데없는 소리! 엄마는 절대 죽지 않아!”
야니 삼촌이 엄마를 병원에서 모시고 왔다. 난 너무나 흥분되었다. 루벤과 나는 엄마의 품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안겼다. “병원에 있지 말고 너희들 곁에 있기로 결정했단다.” 잘하셨어요! 집에서도 병원에서와 똑같이 지내면 된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신 거죠?“ 내가 소리쳤고, 엄마는 기분 좋게 웃었다. 하지만 엄마는 아무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배도 고프지 않다고 했다. 엄마는 이제 정말 몸이 많이 아픈 환자가 되었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직은 작별할 때가 아니야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는 더 약해져만 갔고, 기침은 심해졌다. 엄마가 할 수 있는 일도 점점 더 줄어들었고 대개 소파에 누워 쉬었다. 그랬는데도 우리들은 엄마가 아프기 시작한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지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을까? 아마도 우리가 엄마의 질병에 대해 솔직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눠서 그랬던 것 같다. 두려움은 여전히 남았지만 마음속 부담감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 인생이 촛불과 같다고?” 루벤이 엄마가 누워 있는 소파에 앉아 엄마가 읽어주는 책 내용에 귀기울이고 있다가 물었다. “글쎄다, 촛불을 끄면 어떻게 되지?” “그럼 불이 꺼져!” “그런 다음에는?” 루벤이 이마를 잔뜩 찡그렸다. “이상한 냄새가 나.” 엄마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맞아. 냄새가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이야. 사람이 죽는 것도 그것과 똑같아. 몸은 죽고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지. 그래서 그곳에서 별이 되어 우리를 비춰주는 거야.” “그럼 하늘에 별이 잔뜩 떠 있어야 되잖아요.” 내가 말했다. “세상에서 죽은 사람 숫자만큼요. 죽은 사람이 모두 별이 되면 하늘에 별이 너무 많아서 하늘이 잘 보이지도 않을 거예요.” “그래서 별똥별이 있는 거야. 하늘에서 별똥별이 하나 떨어지면 별이 하나 지는 거지. 그래서 새로운 별이 뜰 자리가 생겨나는 거야.” “그럼 떨어진 별똥별은 어떻게 되는데요? 어디로 가요?” “솔직히 말해서 그건 나도 몰라. 그냥 사라져 버리겠지. 어쩌면 땅에 남겨두고 온 사랑했던 사람이 더 이상 빛을 비춰 주지 않아도 잘 살아가니까 그만 비추는 건지도 몰라. 이 순간에도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고 있어서 영혼이 다른 몸에서 새로 태어나야만 하기 때문에 별똥별로 지는지 누가 알겠니?”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하면 별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흰색 페인트칠을 한 천장만 보였다. 아빠가 집에 돌아와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를 보고 큰 소리로 웃었다. “아니, 세 사람이 왜 그렇게 위를 잔뜩 올려다보고 있지? 도대체 무슨 일이야?” 엄마는 아빠에게 우리가 방금 전에 나누었던 얘기를 그대로 해주었다. 잠시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아빠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아빠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왔다. 아빠는 사다리를 방 가운데 세우더니 그 위로 올라가 붓을 물감에 묻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큰 별 두 개와 작은 별 두 개였다. “멋있어요!” 루벤이 소리쳤다. 지금도 우리 집 거실 천장에는 별이 그려져 있다. 루벤과 아빠와 나는 문득 엄마가 보고 싶어지면 셋이 함께 소파에 바짝 붙어 앉아 천장의 별들을 쳐다본다. 그렇게 하고 있으면 엄마가 우리와 함께 있었던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다.
엄마 안녕!
엄마와 보낸 마지막 성탄절은 분위기가 아주 이상했다. 사실 우리들 모두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루벤도 대충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엄마한테 이상한 냄새가 나, 그렇지? 예전처럼 향기롭지 않아. 곧 죽을 사람한테서는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건가 봐.” 루벤이 말하며 하품을 했다. 루벤은 품속으로 더 바짝 파고들더니 스르르 잠이 들었다.
성탄절 휴가 첫날 집에 손님들이 무척 많이 찾아왔다. 낮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기차를 타고 왔고, 다른 손님들이 줄줄이 이어서 왔다. 아빠와 야니 삼촌이 그렇게 많이 초대한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그냥 알아서 스스로 찾아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혹시 그 사람들도 냄새를 맡은 걸까? 엄마는 무척 힘든 하루였는데도 즐거워했다. 이웃집 사람들도 찾아왔고, 아빠와 엄마 친구들도 왔다. 베키는 엄마랑 같이 왔다. 사람들은 엄마에게 인사를 하거나, 작별인사를 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무척 조심스러웠고 모두 30분 이상 머물지 않았다. 그랬는데도 엄마는 손님들이 다 가고 나자 무척 피로해했다. “휴, 정말 고문이었어.” 내가 차를 만들어 갖다주자 엄마가 내게 속삭였다.
사실 엄마는 집에서 닷새 정도 쉴 수 있었지만 우리는 나흘째 되는 날 엄마의 통증이 너무 심해졌기 때문에 엄마를 다시 병원으로 모셔다 드렸다. 엄마를 다시 병원으로 모셔다 드리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언제 엄마가 집에 돌아올 수 있을지 아무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날이 오기는 할 것인지. 출발하기 전 엄마는 묘한 표정으로 거실을 둘러보았다. “참 예뻤는데….” 엄마는 자신의 손때가 묻은 가구들을 하나하나 훝어보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집에 있던 것들이지만 엄마의 말을 듣고 나는 그것을 처음 보는 것처럼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지나갔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엄마는 돌아가시기 전에 2개월이나 병원에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엄마의 건강은 서서히 나빠졌다. 난 날마다 수업이 파하면 엄마를 만나러 갔다. 우리는 침대 옆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는 기침은 적게 했지만 숨쉬는 것을 점점 더 힘들어했다.
한 시간 정도 잠자는 엄마 곁에서 책을 읽었다. 마침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을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이제!” 난 책장을 덮고 엄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엄마는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이제 시간이 다 된 것 같아.” 난 엄마가 내게 그만 집에 돌아가라는 말을 하는 줄 알았다. “이제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단다. 하지만 너도 이미 알고 있었을 거야, 그렇지?”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엄마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고, 눈에는 약간 물기가 어려 있었다. “네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 난 늘 너와 함께 있을 거야. 비록 네가 내 모습을 볼 순 없겠지만 네가 내 생각을 하는 동안 난 늘 네 곁에 있단다. 네 마음속에, 네 머리 위에 있는 하늘에서 너를 비춰줄 거야. 내게 작별인사를 꼭 하고 가렴, 루이제. 알았지?” “네, 꼭 그럴게요.” 엄마는 만족스러운 듯 빙그레 웃고는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나는 엄마에게 몸을 숙여 조심스럽게 볼에 뽀뽀했다. “안녕, 엄마. 저 그만 갈게요.” 내가 속삭였다. 엄마가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난 엄마를 그때 마지막으로 보았다.
사흘 후 엄마는 돌아가셨다. 아빠는 엄마가 편안하게 잠자듯이 돌아가셨다고 말해 주었다. 이상하게도 난 그 말을 듣고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아빠가 나를 안아주는 것도 싫었다. 할머니도 야니 삼촌도 마찬가지였다. 난 가끔 눈을 감고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처럼 그렇게 편안한 모습으로 엄마가 돌아가셨을 거라고 상상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건 내게 참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있다.
어제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난 정원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별똥별이 하나 뚝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엄마별이 아닐 것이다. 엄마는 아직 하늘 높이 떠서 우리를 비춰주고 있을 것 같았다. 별똥별이 지든 말든 엄마는 늘 내곁에 있다고 믿는다. 아니, 믿는 정도가 아니라 그렇다고 확신한다. 내가 엄마 생각을 하는 한 엄마는 내 마음과 생각 속에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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