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창
켄 가이어 지음/윤종석 옮김
두란노/2000년06월/330쪽
▣ 저 자 켄 가이어(Ken Gire)
켄 가이어는 탄탄한 신학 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크리스천의 지성뿐 아니라 정서에도 큰 감동을 주는 영성작가이다. 그는 미국복음주의기독교출판협의회(ECPA)에서 수여하는 골드메달리언상과 C.S. 루이스 명예 도서상을 각각 두 번 씩 수상한 바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서는『주님을 만나는 기쁨』『묵상하는 삶』이 있으며, 그 외에도 십여 권의 저서가 있다. 현재 아내 쥬디와 네 명의 자녀, 두 명의 손자와 함께 미국 콜로라도주의 모뉴먼트에 살고 있다.
▣ Short Summary
하나님을 찾아가는 우리와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이 서로 만나는 일상 생활의 창, 이것이 영혼의 창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 주변의 많은 비유들을 통해 들려오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삶이 얼마나 풍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고, 그것을 훈련하는 자리로 우리를 안내한다.
저자가 가리키는 세상은, 가시덤불도 당신의 임재로 불붙는 떨기나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가득한 곳이다. ‘영혼의 창'은 우리를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새롭게 보고 듣고 누리는 삶에 눈뜨게 해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영혼의 창가로 오라. 자연, 인간, 영화, 예술품, 글쓰기, 추억, 꿈 등 삶의 여러 가지 비유 속에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친밀하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 차 례
머리말
1. 영혼의 창
2. 창가에서 쉬어 가기
3. 저 창에 그 무엇이
4. 영혼의 갈망
5. 창을 열며
6. 직업의 창
7. 이야기의 창
8. 예술의 창
9. 광야의 창
10. 시의 창
11. 영화의 창
12. 추억의 창
13. 꿈의 창
14. 글쓰기의 창
15. 성경의 창
16. 인간의 창
17. 눈물의 창
18. 우울의 창
19. 자연의 창
머리말
하나님을 말하지 않고 영혼을 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려면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걸음을 멈춰 예배하지 않고도 성 베드로 성당의 안내가 가능한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그런 여행이라면 다 해보았다.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아의 추구야말로 우리들 대부분이 한평생 해온 일이다. 심지어 신앙 생활을 통해서도. 그러나 자아란 막다른 골목이어서, 결국 우리는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인생을 헛산 기분.
우리의 추구가 영혼 자체로 끝난다면, 그것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이 길 역시 막다른 골목이어서, 아무리 열심히 걸어도 결국 자기 존재의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언저리와 매번 거기서 맴도는 걸음에 조금씩 지쳐 있다. 우리가 갈구하는 것은 종교적 반경을 맴도는 진부한 걸음 이상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동행을 원한다. 이 여정이 홀로 가는 길이 아니며, 그분이 우리와 동행하시고 대화하시며 우리 삶에 깊이 관여하신다는 확신을 원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런 친밀감을 경험한 순간들이 있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순간들. 아침 햇살의 부드러운 손길이 침실 창으로 새어 들어와 우리 눈을 간질여 영원한 것에 눈뜨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만지시던 순간들. 그 창은 단순한 깨달음의 순간일 때도 있다. 판단을 더디 하고 이해를 속히 해야 한다는.
그러나 간혹 그 창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에 들려 오는 말일 때가 있다. 우리를 잠 깨워 인생의 여정을 준비시키는 말, 위기를 일깨우거나 안식처로 인도하는 말, 내가 누구이며 지금 왜 여기 있으며 인생의 이 특정 시점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말일 수 있다. 햇빛보다 더 밝은 놀라운 은혜의 순간, 그것은 우리가 평생 그토록 듣고 싶었던 바로 그 말씀 - 하나님의 말씀 -일 수 있다. 가장 희미한 메아리까지 놓치지 않으려 가장 가파른 절벽까지 오를 가치가 있는 너무나 소중한 말씀. 영혼의 창은 바로 그 말씀을 듣는 곳이다. 그리고 그 여정이 시작되는 곳이다.
영혼의 창
하나님은 하늘을 펼치시고 아름다운 별들로 밤을 수놓으셨다. 해에게 하루의 리듬을, 달에게 한 달의 리듬을, 절기에 한 해의 리듬을 정해 주셨다. 갈대밭에 바람이 불게 하시고 멀리서 천둥이 울게 하셨다. 흙덩이로 당신의 형상을 빚어 생명을 불어넣으셨다. 그 형상을 온전케 하고자 짝을 만드시고 두 절반을 하나로 묶어 당신의 피조 세계의 중앙 무대에 두셨다. 그리고 유혹과 타락, 엄청난 상실, 숨어 버린 인간. 하나님은 숨은 그들을 찾으셨다. 그 이후로 그분은 그들의 자녀들과 그 자녀들의 자녀들을 찾으셨다. 그리고 나중에 그 찾는 사연을 글로 남기셨다.
하늘과 땅이 섞여 빚어진 우리는 두 세계 사이에 있다. 한편으로는 숨고 싶다. 한편으로는 찾고 싶다. 아직 읽을 수 있는 희미한 마음의 말과 아직 볼 수 있는 흐릿한 영혼의 그림을 통해 더러는 숨은 곳에서 나와 찾는 일을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가 잃은 것이 그림 속에 있나 보려 그림을 그렸다. 우리가 잃은 것이 음악 속에 있나 보려 곡을 만들었다. 우리가 잃은 것이 돌 속에 있나 보려 조각을 새겼다. 막막할 때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래야 모를 수 없던 때도 있었다.
우리는 많은 길을 통해 하나님께 다가간다. 하나님도 그런 것들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그분의 다가옴은 말씀으로 시작된다. 우리의 다가감은 들음으로 시작된다. 그분의 찾음은 보이심으로 시작된다. 우리의 찾음은 봄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을 찾는 우리와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은 일상 생활의 창에서 서로 만난다. 이것이 영혼의 창이다.
영적으로 훈련되지 않은 이들에게 이것은 영적 훈련 같은 것이다. 실은 훈련 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훈련이다. 창을 보고 그것을 통해 들려 오는 음성을 들으려면, 항상 눈여겨보고 귀 기울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리는 때로 희미하고 그림은 때로 아득한 까닭이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보고 귀에 들리는 것 이상을 듣기 위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민감해야 한다. 창은 어디에나 있어, 언제 눈에 띌지 모르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가 그 창의 한 광경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오랜 세월 우리를 찾으신 그분을 찾지 않는 한.
영화의 한 장면이든, 책 한 페이지이든,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든, 충분히 시간을 두고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 마음의 렌즈에 잡힌 그 순간이 점점 창처럼 투명해진다. 그림이 어디에나 있으나 실은 그림이 아니고 창이다. 그림 너머 저편을 볼 수 있는 눈만 있다면, 자세히 보면, 2차원의 액자 너머로, 일상 생활의 캔버스에 칠해진 평범한 색조 너머로 뭔가를 볼 수 있다.
그런 창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나의 현재의 모습, 과거의 모습, 미래의 모습에 대해 무엇을 보는가? 길 건너 이웃이나 아예 길거리에 사는 이웃에 대해 무엇을 보는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보는가? 영혼의 창은 세상을 보는 하나의 방식이며, 그것은 대상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존중한다는 것은 거기 뭔가 볼 것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표면이 전부가 아니라 이면에 뭔가가 있음을.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바꿔 줄 위력이 있음을. 삶을 보는 방식뿐 아니라 실제 살아가는 방식까지 달라지게 할 깊은 계시가 있음을.
예수님은 인생을 그렇게 사셨다. 나인 성의 과부, 우물가의 여인, 나무 위의 세리, 십자가의 강도, 부자와 나사로에게서 그림 이면의 것을 보셨으며 그것은 그분에게 영혼의 창이 된다.
창가에서 쉬어 가기
별난 직업으로, 때로는 무직으로 한때 여섯 명의 가족을 먹여 살린 작가의 영혼을 고요하게 한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당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더 좋은 날을 기다리며 보냈다. 언젠가는 쓰리라. 언젠가는 출판되리라. 언젠가는 전업 작가가 되어 내가 좋아하는 일로 생계를 꾸려 가리라. 그러나 그 언젠가를 위해 사는 동안 나는 오늘을 놓치고 있었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데만 너무 바빠 현재 있는 곳과 지금 하나님이 후하신 손으로 베풀어 주시는 것을 잊고 산 것이다. 내 하루하루의 삶의 창을 들여다보게 되고 나서부터야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내 영혼의 소음을 고요하게 하면서부터 비로소 내게 주어지는 선물은 물론, 그 선물을 주시는 분도 함께 깨닫게 되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렇게 주어지는 것을 받기 시작했다. 언젠가가 아니라 오늘.
우리 삶의 바퀴가 빠지지 않게 하는 고정축은 바로 영혼의 고요함이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창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준비하는 식사가 그 음식을 먹는 사람들보다 더 중요해질 때, 내 일이 그 일의 수혜자인 내 가족들이나 나의 소중한 사람들보다 더 중요해질 때, 내가 주장하는 말이 그 말을 듣는 사람보다 더 중요해질 때, 이것은 내가 고정 축을 잃었다는 증거가 된다.
중요한 것을 보는 눈과 타인의 성스러움을 느끼는 감각을 잃지 않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영혼의 창을 볼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온갖 준비로 마음이 산만한 종교 활동의 부엌에서 살고 싶지 않다. 너무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며 뜨겁게 열오른 오븐 앞에 달라붙어 살고 싶지 않다. 나는 주님의 발 아래 앉아 그분의 눈빛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보여 주시는 많은 창을 들여다보며 살고 싶다. 바로 그 발 아래에서 우리는 ‘창가에 쉬어 가기’를 배우는 것이다. 그분 발 아래 앉아 마음을 고요하게 하면 그분의 속삭임까지도 들을 수 있다.
저 창에 그 무엇이
창에 있는 것을 보려면 먼저 걸음을 멈춰야 한다. 그리고 C. S. 루이스의 말처럼 “거기 정확히 무엇이 있는지 선명히 보일 때까지 보고 또 보아야 한다.” 우리 삶의 일상적 사건 이면에 뭔가가 있다. 우리가 지나치는 모든 이들의 삶의 이면에 뭔가가 있다. 우리가 찾아내지 못하면 그것이 우리를 찾아낸다. 우리 어깨를 두드리며 재촉한다. 걸음을 멈추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고 보라 한다.
떨기나무 주위에서 야생 딸기나 따고 있었던 적이 얼마나 많은가? 마치 야생 딸기가 전부이기라도 한 양. 날마다 여기저기 오가면서 스쳐 지나는 이 땅의 많은 떨기나무들 속에서 하나님의 불꽃을 보지 못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거기서 나를 부르는 음성을 그냥 놓쳐 버린 일이 얼마나 많은가?
어느 이교도가 랍비를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왜 떨기나무 속에서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시라면 적어도 영산(靈山)의 정상에서 천둥소리로 말씀하셔야 한다는 것이 그 이교도의 생각이었다. 랍비는 이렇게 답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 보잘것없는 가시덤불조차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 오는 방식에서 그분의 겸손이 보이지 않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마구간의 갓난아기 울음소리로 낮아진 그곳에서 우리는 겸손의 극치를 보지 않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거하시며 말씀의 통로로 삼으실 수 없을 만큼 세속적인 시간과 장소와 사건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함이리라. 낮고 겸손하게 찾아오시는 하나님 특유의 방법을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는 이 땅에 천국이 가득한 순간들, 하나님이 인간의 태를 빌려 태어나는 베들레헴의 그 순간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 것이다. 말구유 건초더미 위에서 성스러운 것을 볼 때까지 우리는 그 창을 보고 또 보아야 한다.
영혼의 갈망
우리 안에는 인간의 혈통과 하나님의 혈통의 피가 섞여 흐르고 있다. 우리 안에는 이 땅의 흙과 천국의 호흡이 죽음만이 갈라놓을 수 있는 신비한 방식으로 연합되어 있다. 인간 본성의 고지대와 저지대, 우리는 그 둘 사이에서 끝없는 긴장 속에 살아간다. 나무처럼 우리도 두 세계에 끼여 있다. 한쪽은 이 땅에 뿌리를 두고, 한쪽은 하늘로 잎을 향한 채. 그러나 잎이 하늘을 붙들기보다는 뿌리가 땅을 붙드는 것이 안전하기에 언제나 현실성이 커 보이는 쪽은 땅이다.
그러나 잎의 기공으로 하늘이 흡입되고 그 세포 속으로 태양이 빨려 든다. 잎은 이산화탄소를 공급받아 생명에 필요한 엽록소를 만든다. 하늘이 주는 모든 것을 박탈하면 잎은 양분을 얻고자 뿌리에 더욱 매달리다 결국 시들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영혼도 하나님과 단절되어 영원한 의미의 근원인 태양이 가려지면 엉뚱한 곳에서 의미를 찾으려 한다. 좋은 직장, 좋은 학교, 좋은 소속 단체를 찾아 뿌리를 뻗으며 더 깊이 땅속으로 파고든다.
갈망은 영혼의 본질적 기능이다. 다윗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시편들 속의 극도의 굶주림은 이 땅의 어떤 음식도 채워 줄 수 없는 굶주림의 산물이다. 우리 영혼의 창에 놓인 음식은 맛보면 맛볼수록 다시 맛보고 싶어진다. 마침내 견딜 수 없는 배고픔이 우리의 덜 중요한 갈망들뿐 아니라 삶 자체마저 바꿔 놓을 때까지.
그러나 우리 안에 솟아나는 이 갈망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신학자 본 휘겔은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계신다.”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의 갈망도 어쩌면 같은 이치이리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갈망이 우리에게도 그분을 찾는 갈망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은 아주 세미한 것 - 내면으로 끌리는 마음, 우연만은 아닌 말과 사건들의 조화 - 에 계실지라도, 우리 심장의 고동을 멈추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은 갈망을 심어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창을 열며
시스틴 성당 천장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그림은 인간 역사를 통틀어 온 인류와 하나님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손을 내미신다. 아직 손가락이 맞닿아 있지는 않다. 손가락이 맞닿을 때마다 그 계시의 한 순간, 하늘과 땅 사이에 창이 열린다. 그리고 그 계시의 순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말씀이다. 은혜와 사랑의 말씀, 인도와 교정의 말씀, 지혜와 깨달음의 말씀, 용서와 확신의 말씀. 우리 영혼에 갈급한 말씀...
하나님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을진대, 이제 해와 달과 별은 그 말씀의 편린이요, 우리는 그것을 살핌으로써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다.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듣기만 한다면 모든 삼라만상이 하나님의 자기 표현의 수화임을 알게 된다. 먼 옛날 하나님이 홍수의 설교로 세상에 심판을 명하시자 지층은 그 말씀이 기록된 퇴적의 책장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기에 그리스도의 삶의 모든 언행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언어가 되었고, 지금도 그렇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하나님은 우리의 언어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면, 그 응답을 이루는 삶의 상황은 그대로 그분의 말씀의 메아리가 된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말씀은 그 소임을 완수하기 전에는 결코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에도 새겨져 있다. 마음속 깊은 곳의 도덕법만이 아니라 우리 혈통에도 메시아의 혈통의 유전적 기호가 있다. 우리의 기원에 대한 아련한 잉크 자국은 지금도 우리가 우연한 화학 반응물이나 동물적 본능의 집합체 이상의 존재임을 일깨우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다. 뚜렷한 물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실체의 그림자 같기에 또한 믿음의 여지도 있다. 우리의 본능적 성향은, 은혜의 순간을 분석하여 그 순간을 재현시킬 수 있는 원리를 만들고, 그 원리를 신앙의 척도와 행동 규범으로 율법화하려 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연스러움을 놓칠 뿐 아니라 생명마저 잃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보이지 않는 영역에 속한 것이기에, 자신의 이해의 희미한 불빛으로 말씀의 신비를 파헤치며 더듬어 찾아가는 것이다. 창을 여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기서 그분이 주시는 것을 받거나 받지 않는 것뿐이다.
직업의 창
신학교 다니던 시절, 나는 학생들과 교수들이 자신의 특별한 ‘부르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간혹 들었다. 선교지로 가라는 부르심. 목회에 대한 부르심. 그러나 나의 경우 그것은 좀더 일반적인 방식으로 왔다. 고3을 마치던 여름, 콜로라도에서 열린 ‘영 라이프’ 캠프에서였다. 저녁 메시지 후 침묵의 시간에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응답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날 밤, 나무 아래 앉아 내 인생으로 그 부르심에 응답했다. 내 인생이 그분에게 별로 소용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 그분이 뜻이 있으셔서 원하신다면 그분 것이 되고 싶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였다. 받은 것은 너무 컸고 돌려 드릴 것은 너무 작았다. 그토록 큰사랑에 어떻게 내 인생을 내어 드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너무 많이 드려야 하면 어쩌나 하는, 조용하지만 아주 현실적인 두려움이 일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너무 깊이 빠질까 두려웠다. 그분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갔다가 그분이 내 눈을 유심히 보시며 무리 중에서 나를 지명하여 불러내 원치 않는 곳으로 보내실까 봐 두려웠다.
신학교 졸업 후 한 농촌교회에서 2년 간 목회를 했으나 결국 하나님은 나를 목사로 부르시지 않았다. 죄책감이 들기는 했으나 그 어색한 2년이 흐르는 동안, 나는 글을 써야 한다는 ‘야생의 부르심’ 같은 것을 느꼈다. 날마다 잠에서 깨어날 때면 목사로서는 느끼지 못했던 흥분으로 가슴이 설렜다. 나는 매일, 매 문장, 매 페이지에 몸을 던졌다. 하루가 다 끝나고 자정을 넘겨도 에너지가 남았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뜰 때면 다음 장을 쓰고 싶은 열망에 그렇게 기분이 상쾌할 수 없었다. 너무 보람 있고, 너무 충만하고, 너무 재미있었다.
작품이 완성되자 마치 내 인생의 퍼즐 맞추기에서 잃었던 조각을 찾은 심정이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맞아 들어갔고 모든 것에 의미가 생겼다. 그때 나는, 하나님이 나를 작가로 만드시고자 내 성격을 조성하시고 내 인생 경험을 빚으시며 내게 특정한 기술을 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야생의 부르심’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을까? 작품을 쓰는 데 걸린 그 두 달은 상큼한 공기와 햇살 가득한 하나의 창과 같았다. 창턱에 앉은 새가 내 이름을 부르며 노래하는 창.
이제 와서 인생을 돌아보면, 내 직업을 선명히 보여 준 창은 먼 옛날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은 말했다. “모든 인간의 어린 시절에는 문이 열리며 미래가 들어서는 순간이 있다.” 내 경우 그 순간은, 나무 책상에 머리를 대고 코벨 선생님이 읽어 주는 『샬롯의 거미줄』을 듣던 바로 그날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돌아보면, 그 순간은 내게 나의 직업을 내다보게 했던 하나의 창이었다. 내가 처음 쓴 책이 어린이 책이라는 것이 우연일까? 또 다른 창들도 보인다. 내가 누구이며 평생 무슨 일을 할 것인가에 대해 실마리를 던져 주던 창들.
나는 작가였다. 목사가 아니었다. 내 삶의 소리에 귀기울였더라면, 내게 기쁨을 주는 일들에 귀를 열었더라면, 나는 그것을 벌써 오래 전에 알았을 것이다. 우리는 아득한 유년의 복도를 뛰어가다 이따금씩 멈춰 서 숨을 고른다. 당신도, 나도, 그때마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있다. 미래의 희미한 불빛. 나의 미래. 미래를 머금은 산들바람에 얇은 커튼이 올려지면 창은 그렇게 한 순간에 우리 앞에 활짝 열리며, 이내 우리 마음은 희망찬 꿈으로 가득 차 오른다.
그 창에서 우리는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소리를 듣는다. 아직은 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그래서 우리는 그 부르는 자가 누구이며 부르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만은 알아차린다. 그 소리는 우리에게 비밀을 속삭인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 준다. 우리가 평생 동안 하게 될 일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우리에게 보는 눈과 듣는 귀와 따르는 믿음만 있다면.
예술의 창
아브라함 헤쉘은 말했다. “예술 작품은 우리를 전에 품어 본 적 없는 정서와 만나게 해준다. 위대한 작품은 세상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갈증을 줌으로써 필요를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보는 예술 작품은 이 세상과 다음 세상을 갈라놓는 벽에 뚫린 작은 창이 된다. 그 창을 내다볼 때 우리의 영혼은 솔제니친의 말처럼 “열망하기 시작한다.” 제대로 보기만 한다면, 반드시 그래야 한다.
C. S. 루이스는 예술 작품을 제대로 보는 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림 앞에 앉을 때는 내가 그 그림으로 뭔가를 하려 하지 말고 그 그림이 나에게 하는 일을 그대로 받으려는 마음으로 앉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보고 들은 뒤, 받아들이지 않고 대응한다. 복종하지 않고 저항한다. 변화되어 떠나지 않고 비평하며 떠난다. 토요일 밤 영화를 보고 떠날 때도, 주일 아침 설교를 듣고 떠날 때도 마찬가지다.
한때 노틀담 대학교와 하버드에서 가르치다 정신 지체 장애인 공동체에서 일하며 살았던 카톨릭 사제 헨리 나우웬은 〈탕자의 귀향〉이라는 렘브란트의 예술 작품 앞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떠난 경우이다. 그 그림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묵상하며 나우웬은 이렇게 썼다. “그 그림은 나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설 수 있는 신비의 창이 되었다.” 그림의 사본만 보고도 내면에 일어난 열망이 하도 깊어 마침내 원본이 있는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에까지 찾아간 그는 그 신비의 창 앞에 꼬박 네 시간을 앉아 있었다. 보며, 들으며, 받아들이며.... 자신의 책 『탕자의 귀향』에서 그는 그 경험을 이렇게 회고한다. “그 위엄과 광채 앞에 모든 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나는 그림 속에 완전히 빨려들었다... 인간 영혼의 끊임없는 갈망, 즉 마지막 귀향, 확고부동한 안전감, 영원한 본향에 대한 갈망과도 같은 그 무엇에.”
그림에 거의 문외한이었던 내가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처음 만났던 것은 박물관에서였다. 그때까지 내가 반 고흐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그의 생전에 팔린 그림이 단 한 점뿐이라는 것, 괴로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자기 귀를 잘랐다는 것. 그리고 결국은 자살로 그 괴로운 인생을 끝냈다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그곳에 있는 〈아이리스〉라는 그림 앞에 네 시간은커녕 단 4분도 서있지 않았다. 이렇게 평범한 그림이 소더비 경매에서 수천만 달러에 팔리다니! 하고많은 꽃 중에 아이리스란 말인가? 그러나 몇 년 후, 누군가로부터 반 고흐가 하나님을 믿었으며 인생의 한때는 아주 뜨겁게 믿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서점에 가 이 화가에 대한 책을 몇 권 구입해 그의 삶의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군데군데 나오는 그림도 유심히 보았다. 해바라기, 밀밭 위로 나는 새들, 소박한 사람들(대부분 가난하고 슬픈 사람들)의 초상, 밭에서 씨 뿌리는 자의 초상. 그러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그는 가난한 노동자 계급 사람들에게 ‘성경 말씀의 씨를 뿌리고’ 싶었다.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 밤마다 책상에 앉아 성경을 영어, 독어, 불어로 번역하며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옮겨 적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매일 읽었다. 말씀을 외우고 그 말씀에 비추어 삶을 보고 싶었다.”
런던에 살 때, 그는 도시의 가장 먼 변두리로 가 극빈자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목사인 아버지의 소명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 자신의 갈 길이라 느낀 그는 신학 교육을 받고자 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특유의 기질과 열정과 괴벽 때문에 빈센트는 기성 종교에 다가갈 수 없었다. 그의 동료 학생 중 한 명은 “그는 복종의 의미를 몰랐다”고 말했다. 그가 다녔던 학교에서 그를 가난한 탄광촌의 ‘평신도 전도자’로 지명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지 모른다.
광부들의 작업 조건은 한없이 열악했다. 빈센트는 광부들 속에서 그들과 똑같이 가난하게 살았다. 그들과 함께 탄광에 들어갔고, 그들이 마시는 까만 흙먼지를 함께 들이마셨다. 병자들을 찾아가 상처를 싸매 주고 그들과 함께 기도했다. 주일이면 그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그는 테오에게 썼다. “그들을 보면 정말 가슴이 아프다. 언젠가 그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그들의 알려지지 않은 잊혀진 삶을 사람들 눈앞에 보여 줄 수 있도록 말이다.” 후에 시인 릴케는 이것이 화가로서 반 고흐의 삶의 시발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렇게 그는 소위 전도자가 되어 광산 구역에 가 사람들에게 복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말하면서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말하는 것을 멈추고 그림만 그리게 된다.”
나는 빈센트의 편지글들을 읽으며 거기서 그를 만났다. 화가 자신과 얘기하는 것 같았다. 나는 들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직접 그의 그림을 보는 법을 배웠다. 그의 스케치 〈영원의 문에서〉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그림에서 나는 하나님과 영원이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 중 하나를 표현하려 했다. 그것은 바로 이 왜소한 노인의 표정 속에 담겨 있다. 구석진 곳 불가에 말없이 앉아 얼굴을 두 손에 묻고 있는 노인… 그런 무한한 감동이 또 있을까. 거기에는 뭔가 소중한 것, 뭔가 고귀한 것이 있다. 벌레들에게 먹힐 운명으로 끝날 수 없는 그 무엇이.”
그러나 이 감동한 화가가 말하려는 바를 세상에서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게 거부와 고독과 우울의 세월이 흐르는 사이 빈센트의 정신 상태는 서서히 쇠퇴해 갔고, 신앙의 상태도 같이 침식해 갔다. 화가 인생 10년 동안 그가 썼던 편지들이 그 과정을 잘 보여 준다. 그의 고뇌와 절망은 점점 깊어지고 어두워지고 격해진다. 1889년 이 병든 화가는 생 레미 정신 병원에 보내진다. 이때 방을 안내한 수녀가 묻는다. “창문을 열어 드릴까요?” 빈센트는 고개를 끄덕인다. 수녀가 창문을 열자, 그는 창 밖으로 햇빛이 부서지는 시골의 들녘을 내다본다. 창 밑으로 보이는 정원 한 자락에는 꽃들이 자라고 있었다. 정신 병원에서 그린 첫 작품이 바로 그 꽃이었다. 그는 그림의 오른쪽 하단에 ‘빈센트’라고 이름을 써넣었다. 그리고 짤막하게 ‘아이리스’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가 온전한 정신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이 바로 이 그림이었다.
그 해 후반에 그는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그림을 완성했다. 그 속에는 빈센트의 영혼의 어두운 밤 같은 것이 보인다. 그러나 그 속에는 또한 별빛 같은 것도 보인다. 그 그림에 대해 빈센트는 이렇게 썼다. “그것은 또다시 영원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인생의 전모일까? 아니면, 우리는 죽기 전까지는 과연 삶의 반쪽밖에 모르는 것일까?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저 별은 나를 꿈꾸게 한다. 지도에 도시와 마을로 표시된 검은 점을 보며 꿈꾸는 것과 똑같이.”
그러나 데오 외에 빈센트의 영혼의 빛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빈센트는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썼다. “우리 영혼에는 거대한 불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거기에 몸을 녹이러 오지 않는다. 지나는 사람들은 굴뚝에서 나오는 한 줄기 연기만 보고 총총 제 갈 길로 가 버린다.” 그에게 삶은 얼마나 슬픈 것이었을까. 그렇게 깊이 느꼈고 그 느낌을 그렇게 뜨겁게 전하고 싶었건만, 모두들 멀찌감치 비켜서서 고개를 저으며 발길을 돌렸으니. 결국 그는 육체와 영혼과 정신과 감정의 상태가 모두 쇠퇴했다. 어두움 일색이었다.
마침내 빈센트 안에서 타오르던 열정, 끝내 재 한 줌 없이 다 소멸할 때까지 타오르고 타오르던 그 불꽃의 마지막 불씨가 1890년 7월에 그린 화폭에 떨어져 있다. 제목은 〈까마귀 나는 옥수수 밭〉. “어지러운 하늘 밑의 광활한 옥수수 밭.” 그것이 그림에 대한 그의 묘사였다. 그 어지러운 하늘 밑 그 광활한 밭 어디선가 빈센트는 제 몸에 총을 쏘았다. 1890년 7월 29일 새벽 1시 30분, 데오의 팔에 안겨 화가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슬픔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가 말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 자신을 가장 잘 아는 가까운 사람들이 바로 자신을 가장 존경하는 사람들일 때, 그는 인생에 성공한 것이라고. 빈센트를 가장 잘 알던 두 사람은 그의 형제와 어머니였다.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할 일을 찾는 고귀한 심성을 지녔다.” 그의 형제가 비문에 쓴 말이다. 그의 어머니는 이런 글을 남겼다. “빈센트는 그 모든 기벽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이며 살았다. 그것만은 분명 하나님도 그냥 지나치시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그의 작품도 무심하게 외면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하나님한테만은.
그의 그림들과 편지들을 통해, 그에 관한 영화와 노래를 통해 나는 화가를 보았고 화가의 영혼의 일면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본 것이 또 있다. 나는 그를 통해서 영혼의 위대한 예술가이신 예수님의 일면을 보았다. 반 고흐는 말했다. “그리스도는 예술가들보다 더 예술가이시다. 그분은 살아 있는 영혼과 살아 있는 육체로 작업하신다. 그리하여 동상이 아닌 인간의 만드신다.” 빈센트처럼 예수님도 밭에서 씨 뿌리는 자, 공중의 새, 들판의 꽃, 가난한 이들의 얼굴에 우리의 시선을 향하게 하셨다. 빈센트처럼 그분도 내 영혼의 어두움을 아는 눈과 고생에 시달린 주름진 얼굴을 어루만져 주는 화가 같은 손을 지니셨다. 빈센트처럼 그분도 누더기 옷을 걸친 누더기 인생들을 사진틀에 담으셨다. 빈센트처럼 그분도 그들에게 자유를 주려 하셨다.
그러나 스스로 입힌 상처로 죽어 간 빈센트와는 달리,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이 입힌 상처로 돌아가셨다. 마지막 날들이 절망으로 가득 찼던 빈센트와는 달리, 예수님은 잡히시던 밤 제자들에게 아버지 집에 그들이 거할 곳을 예비하러 가신다며 절대 근심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셨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그분은 천국의 소망으로 옆 십자가의 강도를 격려해 주셨다. 버림받으신 중에도 예수님은 당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셨다.
유사점도 있지만 많은 점에서 두 예술가는 확연히 구분된다. 삶의 방식에서도, 죽음의 방식에서도. 그러나 죽음조차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리라.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슬픔을 당하였거늘.” “슬픔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돈 맥클린의 노래 마지막 부분에 빈센트의 슬픔과 그리스도의 비애의 한 단면이 한데 섞여 있다.
지금에야 나는 알 것 같다네.
당신이 내게 말하려던 것이 무엇인지.
당신이 제정신을 지키려 얼마나 고뇌했고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네.
지금도 듣고 있지 않거니와
영원히 듣지 않을지도 모른다네.
구경꾼들은 멀찌감치 서서 두 예술가를 모두 비난했다. 그들의 그림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발길을 돌렸다. 이 두 예술가가 말하려던 것은 무엇일까? 나에게, 당신에게 말하려던 것은 무엇일까? “그림을 보라.”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아닐까. 우리가 제대로 보기만 한다면 그 그림들은 창이 될 것이다. 우리 속의 탕자를 감옥 밖으로 끌어내 집으로 가는 길을 찾게 해주는 창이 될 것이다.
광야의 창
이전에 참석했던 졸업식들에서 누군가 식순 중 W. E. 헨리의 ‘인빅터스(Invictus)'라는 시를 격찬하는 것을 듣곤 했다. “좁은 문이 아니어도 좋다/ 심판날의 벌도 상관없다/ 내 운명의 주인은 나다/ 내 영혼의 선장도 나다” 먼 바다를 항해하는 선장처럼 자신의 영혼의 선장이 된다는 것은 언제나 문학의 낭만적 주제가 되어 왔다. 졸업생들을 고등교육의 안전한 항구에서 각자 계획한 인생의 직업 항로의 거친 바다로 내보낼 때 들려줄 말로는 과연 헨리의 시만큼 걸맞아 보이는 것도 없다. 적어도 부두를 떠나기 전에는. 배가 암초에 걸리기 전까지는. 그러나 그 다음에는 뭐라고 말해 줄 것인가? 각자 알아서 살라고? 아무거나 물에 뜨는 것에 매달리라고? 소중한 목숨을 위해 다른 선장이 구해 주러 오기만 바라라고? 태평양에서 개헤엄이라고 치라고?
암초에 부딪힌 배의 선장은 더 이상 자기 운명의 주인이 아니다. 나는 인생의 좌초를 겪은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삶이 좌초되자 나는 인적 없는 먼 해안에 쓸려 내려가 있었다. 문명으로 다시 돌아오는 유일한 길은 육로, 위험하고 불확실한 광야를 지나는 육로뿐이었다. 글을 쓰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처음 들었을 때, 그것이 광야로의 부르심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은 내게 고통스런 내성의 시간이었다. 미꾸라지처럼 달아나는 내 재주를 붙잡으려 쫓아다니던 시간. 역시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나의 참 정체를 찾아 고뇌하던 시간. 글로 아내와 네 아이를 먹여 살리려 몸부림치던 시간. 지금도 그 시절이 일기로 남아 있다. 그야말로 지푸라기 하나라도 부여잡고 싶은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부여잡기를 3년째에 접어들자 나는 지쳤다.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려 애쓰며 나코다췌스에서 보낸 그 마지막 날들, 그 시절에 뜻밖에 만난 성경 말씀이 있는데, 일기장에 적혀 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7-19).
그러나 그 시절, 나는 기뻐할 수 없었다. 내 믿음은 그렇게 강하지 못했다. 돌아보면 그때 맞닥뜨린 이 말씀은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영혼의 창이었다. 그분은 내가 겨울 뒤에 봄이 온다는 사실을 믿기 원하셨다. 보는 것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셨다. 성공이 아니라 그분 자신을 내 기쁨의 원천으로 삼기를 원하셨다.
음식이 없을 때 육체적 굶주림이 더 심해지듯, 하나님이 부재할 때 영적 굶주림은 더욱 심해진다. 우리 삶에서 광야의 역할이 중요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모세와 다윗과 엘리야와 욥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광야란 장시간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는 곳이다. 내 경우, 그것은 전직으로 인한 위기였다. 당신의 경우에는 암이나 이혼이나 기타 다른 문제로 인한 위기일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배우는 곳이 바로 그 광야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 영혼에 가장 합당한 음식일 뿐 아니라 가장 절박한 음식임을 배우는 곳이 바로 그 광야다.
나는 얼마나 그분의 말씀에 굶주렸던가. 거기 처박혀 있는 나를 보고 계시며, 내 기도를 듣고 계시며, 무엇보다도 내게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그 한마디 말씀을 듣고 싶어. 날마다 텍사스의 드넓은 하늘로 태양이 질 때면, 나는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내 삶을 되돌려 달라고, 나를 광야에서 구해 달라고. 그러나 그분은 묵묵히, 광야에서 나가는 길은 눈물로 덮인 길임을 내게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드디어 무화과나무에 싹이 돋았다. 봄이 왔다. 드디어. 원서를 냈던 그 많은 곳들 중에서 일자리를 내준 유일한 곳이 글쓰는 곳이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그 일을 하는 것에 대해 누군가가 정말 나에게 보수를 준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나를 작가로 준비시키신 곳은 신학교가 아니라 바로 그곳 광야였다. 광야는 고통과 굴욕과 불확실함과 고독과 절망의 장소였다. 모두가 나에게 필요한 경험이었다. 마땅히 되어야 할 작가가 되려면, 내가 되고 싶었던 작가가 되려면, 내가 기도했던 그런 작가가 되려면, 내가 절망해 보지 않고 어떻게 절망한 자들의 심정을 알 수 있겠는가? 내가 가난해 보지 않고 어떻게 가난한 자들의 심정을 알 수 있겠는가? 내가 혼돈에 빠져 보지 않고 어떻게 혼돈에 빠진 자들의 심정을 알 수 있겠는가? 내가 우울해 보지 않고? 내가 버림받아 보지 않고?
광야는 내게 인생을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당신에게도 광야는 인생을 사는 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광야는 나의 광야와 다를 것이다. 당신에게 보인 창들도 나에게 보인 창들과 다를 것이다. 광야의 교육은 학교처럼 표준화 교육이 아니다. 이제 나는 나 자신의 삶 - 다른 어느 누구의 삶도 아닌 -을 통해 하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다.
40년 간 방황하던 광야를 떠나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선 신생국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창을 하나 보여 주셨다. 그 방황하던 시절의 목표를 보여 주는 창이었다. 그 창은 우리도 볼 수 있도록 신명기 8장에 잘 보존되어 있다. 그들에게 맨 처음 보이신 것은, 그들을 광야에 들어가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었다. 모세도 아니고 아론도 아니고 그들이 방향 감각이 둔해서도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광야로 이끄신 이유를 깨닫는 것이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 8:16). 하나님은 평탄대로만 주시지는 않지만 선하신 분이다. 이것이 광야에서 내가 도달한 결론이다.
자연의 창
어머니의 사랑은 갓난아기에게 물리는 젖가슴을 통해, 품에 안고 얼러 주는 손길을 통해, 잔잔한 미소와 자장가에 실린 음조를 통해 전달된다.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아직 알 리 없는 아기도 포근한 가슴과 따뜻한 젖과 부드러운 목소리는 이해할 수 있다. 자라나는 내게 자연은 그런 어머니였다. 자연은 잎이 무성한 품으로 내게 젖을 먹이고 나지막한 강물 소리로 나를 얼러 주었다. 자연에게 받은 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내게 양분이 되고 나의 한 부분이 되어 나를 자라게 했다. 이제야 어렴풋이 깨닫는 바이지만.
내가 자연에게 받은 것은 다분히 트리니티 강에서 온 것이다. 이 강이 내게 미친 영향은 꼭 달과 같은 것이다. 아침에 나를 곁으로 데려가 저녁 늦게 놓아주며, 내 영혼에 밀물과 썰물이 밀려오고 밀려가게 했다. 강이 주는 것이 무엇인가 보고자 나는 강으로 갔다. 때로 그것은 개복치였다. 가재나 올챙이나 작은 물고기일 때도 있었다. 어쩌다 한 번씩 거북이도 있었다. 걸리는 것은 그뿐 아니다. 물밑에서 S자 모양으로 헤엄치는 물뱀이 보인다. 바닷가재만한 가재도 보인다. 물 속 2척 정도의 깊이에 커다란 물고기가 죽어 있는 것도 보인다. 크기가 내 몸만한 것이 꼭 멸종된 선사 시대의 바다 생물 같다. 물고기 외에도 강에서 걸리는 것은, 이 모든 아득한 신비에 대한 경이감이다. 그것 때문에 아이는 또 강을 찾는다.
내가 어른이 되어 강을 찾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이사 갈 계획이었지만 어디로 갈지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몇 군데를 놓고 얘기한 끝에 결국 텍사스와 콜로라도 중 하나로 좁혀졌다. 그 둘 중에서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노만 맥클린 원작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이었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그 영화를 보노라니 뭔가 내 영혼의 발목을 휘어 감는 물살이 있었다. 트리니티 강에서 보낸 그 모든 날들의 추억이 소용돌이쳤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시편은 말한다. “날은 날에게 햇빛으로, 밤은 밤에게 별빛으로” 그 선포를 콜로라도처럼 선명히 들을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으리라. 반 고흐는 말했다. “모든 자연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왜 모든 사람이 보거나 느끼지 않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안 간다. 자연은 눈과 귀와 깨닫는 마음이 있는 모든 이에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일 수도 있다.” 자연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 바라보는 곳 중 하나이며,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에게 다가와 말씀하시는 곳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자연이 과연 하나님의 동족어 중 하나라면 자연이야말로 우리가 공부해야 할 언어임은 지극히 당연하다.
‘지혜롭다’는 말은 히브리어의 ‘듣는다’는 단어에서 왔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것은 곧 ‘듣는 마음’이다. 가시덤불이 퍼진 포도원이나 일하는 개미의 모습에서 영혼의 창을 볼 수 있는 마음. 지상 계명에도 똑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지혜로운 자가 되는 첫걸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이 주신 말씀에 귀기울이는 것이다.
콜로라도로 이사온 후 내가 노력한 일이 그것이다. 특히,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 들려주실 말씀에 귀기울이려 했다.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장로교 목사인 노먼 맥클린의 아버지가 두 아들이 낚시하고 있는 동안 강둑에 앉아 요한복음을 읽고 있다. 노먼이 아버지가 앉아 있는 곳으로 오자 아버지는 생각에 잠겨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읽고 있던 부분에 말하기를,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는구나. 맞는 말이다. 나는 물이 먼저 있은 줄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 보면 물밑에 말씀이 있는 것을 들을 수 있다.”
피조 세계 밑에 생명의 말씀이 있다. “... 있으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출애굽 밑에 구원의 말씀이 있다. 광야 밑에 심판의 말씀이 있다. 만나를 내리신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한 말씀으로 이스라엘은 광야를 벗어났고, 또 다른 말씀으로 모세는 뒤에 남겨졌다. 모든 것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자세히 들으면 들린다.
나는 치즈만 계곡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영겁의 세월 전, 산이 둘로 나뉘면서 이 기품 있는 물줄기에게 길을 터 주었다. 나는 무릎 길이의 개울에 들어가 섰다. 물은 내 바지 둘레를 휘돌고 있다. 낚싯대를 물위로 쭉 들어올렸다가 물 속에 풍덩 던져 넣는다. 강물 소리는 고요했다. 잠시 후 쾌활한 곡조가 콸콸 높아졌다가는 다시 졸졸 낮아졌다. 말하는 듯 부르는 듯. 그 물밑에는 어떤 말씀이 있었을까? ‘강물은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 나에게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
“결국 모든 것은 하나로 모아진다. 그리고 강물은 그 속으로 흐른다.” 노만 맥클린은 책을 그렇게 끝맺고 있다. 한편 시편 기자는 결국 모든 것은 망각으로 모아진다고 말한다. 이 땅의 모든 것이, 결국 그렇게. 그러나 하늘에는 하나님의 성이 있다. 그리고 강물은 그 속으로 흐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느 날 다 사라지고 말 것이다. 작게는 나와 당신의 인생의 세상으로 시작해서 크게는 온 인류가 살고 있는 거대한 세상에 이르기까지. 그 요동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강은 내게 가만히 있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가만히 있음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깨닫게 해주었다. 그분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다. 그분은 만물이 요동하는 것을 보시지만, 언제나 요동 없이 그대로이시다. 변화하는 만물 위에 앉아 계시지만, 언제나 변함 없이 그대로이시다. 내 불안한 마음은 그것을 잊곤 했다. 강이 다시 기억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분은 하나님의 성의 왕좌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강물은 그 속으로 흐른다.
강물이 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강둑에 있던 소년에게는 개복치를 주었다. 성인이 되자 가만히 있는 마음을 주었다. 물밑에 흐르는 말씀에 귀기울이며 나는 들리는 것이 또 있음을 느낀다. 돌돌 흐르는 기쁨의 첫 음절이 들리는 것 같다. 기쁨이. 환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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