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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죄를 대신한 고난을 체험하자

강인철 2009. 6. 27. 09:51

남의 죄를 대신한 고난을 체험하자
한복협 4월 월례발표회, 림인식 목사 응답 녹취록
 
림인식

오늘 아침에 친히 오셔서 귀한 말씀을 주셨는데 이 목사님들의 강의에 가감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 받아들일 것이구요 또 우리에게 현재를 가장 보람있게 사는 지침이 되어야 된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저로서는 세 분 목사님들의 강의를 한 솥에 반죽해서 섞어서 그렇게 해서 몇 마디 응답하는 심부름을 할까 합니다.

 아담의 피를 받은 우리 인생은 지구에 태어난  후손치고 고난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고난은 다 싫어하지만 고난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 목회자들이라든지 교회는 한번도 어느 시대나 고난을 벗어본 일은 없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실패한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목회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고난 때문에 실패한 그런 예가 너무 많습니다. 고난을 어떻게 이기느냐, 어떻게 극복하느냐 이것이 목회의 성패를 가르게 되고 교회의 존재 의미가 되게 되고 사명을 어떻게 완수하느냐의 키가 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 목회자와 교회가 받는 고난은 크게 나누면 네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 첫째는 스스로 만든 고난입니다. 구약의 야곱의 예가 있는데, 야곱은 목적은 좋아요 장자의 기업을 좋아하고 차지하고 싶고 그것은 좋은데 그것을 차지하려고 하는 과정은 너무 잘못되었어요. 그래서 야곱이 받을 고난은 자신의 실수와 죄와 허물에 대한 징계였습니다. 형과는 원수가 되고 부모에게는 불효가 되고 망명해야 하고 가서 종살이해야 되고 그 고난이 장자의 명분을 좋아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 때문에 온 고난이었습니다. 이런 고난은 부끄러운 고난이고 보람도 없는 고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넘치는 복을 다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복이 스스로 만든 고난의 해결책이 되질 않았습니다. 외형적 조건이라든지 풍부라든지 방법이라든지 환경을 아무리 다 바꾸어 놓아도 고난의 해결은 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얍복강에서 본질적 회개로 근본변화를 받았을 때 해결이 왔습니다 . 목회자에게 있어서 나는 주를 위해 고난받는다, 교회를 위해 십자가 진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가 대부분 많지만 생각밖에 스스로 만든 고난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자체가 사실 주를 위한 고난이냐, 확실히 십자가냐 그렇게 생각했을 때 우리가 받는 고난의 태반이 거의 야곱식으로 스스로 만든 고난이 너무 많습니다.

 두 번째는 남의 죄값으로 대신 받는 고난입니다. 구약의 요셉은 형들의 시기, 질투, 증오, 죄 때문에 노예가 되었어요. 또 보디발의 아내의 불륜적인 정욕 죄 때문에 죄수가 되었어요. 요셉 자신은 결백한데도 불구하고 너무 큰 고난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고난은 억울한 고난이다. 필요도 없는 고난이다. 그렇게 생각하기가 싶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이란 것은 죄인에게는 형벌, 심판, 저주, 멸망이 되지만 죄 없는 사람이 받는 고난이라는 것은 연단이 되고, 교육이 되고, 전환점이 되고, 축복도 되고, 영광도 되고, 보상도 되는 것입니다. 요셉의 고난은 별로 억울한 고난 같지만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직접 경험을 많이 했고 순수한 신앙이 되었고, 대인관계의 성실성, 사랑의 실천 능력을 다 받아가지고 애굽의 수상이 되어가지고 당시 세계 인구를 구원해 내고도 남을 수 있는 역량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렇게 남의 죄 때문에 대신 받는 고난의 클라이막스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고난중에서도 남의 죄 때문에 대신 받는 고난이 있으면 있을수록 가치가 있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을 체휼하는 것이고 또 그것을 본받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

 세 번째로는 스스로 택한 고난입니다. 바울 사도가 죽든지 살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내 육체에 채운다. 고난을 채우겠다. 바울 사도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의 말씀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내 생명조차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 이 스스로 택한 고난입니다. 바울 사도는 누구보다도 고난을 제일 많이 받았습니다. 그가 고백하는대로 형용할 수 없는 고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고난에서도 그는 결코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가 택한 고난은 괴로움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괴로움이 많을수록 오히려 보람있게 생각하고 만족하고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바울 사도야 말로 스스로 택한 고난으로 일생을 승리롭게 살았다.

 오늘 이 순교자들의 고난이 스스로 택한 고난입니다. 신석구 목사님의 고난, 주기철 목사님의 고난, 이것이 전부다 주를 위해 스스로 택한 고난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스스로 택한 고난의 농도만큼 자격이 있습니다. 스스로 택한 고난이 없는 목회자는 하나님 앞에서나 교회 앞에서나 스스로나 별로 큰 자격이 있다고 볼수가 없습니다. 나 스스로가 택한 고난이 강할수록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교회나 스스로에게 넘치는 필요한 주의 종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한 가지는 스스로 알 수 없는 고난이 있습니다. 스스로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 없는, 욥의 고난이 그렇습니다. 욥이 아무리 생각하고, 욥의 세 친구가 와서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 알 수 없는 고난입니다. 바울 사도가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라고 하는 고난이 왔습니다. 바울은 원래 고난을 불만한 일이 없습니다. 이미 각오했습니다. 어떤 고난도 좋습니다. 그런데 육체의 가시는 그 의미를 모르겠어요. 왜 이것이 있어야 하는지 그 의미를 몰라서, 알 수 없는 고난이라서 고민이 된거예요. 육체의 가시를 여러 가지로 해석하지만 그것이 보통 괴로운 것이 아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성지순례 해보시면 바울의 1차, 2차, 3차 여행, 그 여정, 그 범위과 고난은 건강한 사람도 못해내는 일을 다 해낸거예요. 바울 사도는 육체의 가시를 가졌어도 그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주시는 능력에 의해서 건강한 사람보다 몇배나 놀라운 큰 일을 다 해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4만2천번의 설교를 했고 연 평균 7천킬로미터 여행을 했고 매일 세 번이상 설교를 했는데 그의 83세 일기를 보면 나는 설교를 많이 하고 글도 쓰고 여행을 많이 하는데도 피곤을 모른다. 그런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들이 다 육체적인 어떤 힘에 의해 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바울 사도처럼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받아서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했다.  우리 목회자들은 스스로 알 수 없는 고난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알 수 없는 고난, 그래서 이제 목회 과정에서는 하는 일보다 되어지는 일이 많이 있어야 되고, 있습니다. 하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한도에서 하는 일입니다. 그저 하는 일은 100만큼 했는데 되어지는 일은 1000만큼 됩니다. 이것은 내가 가진 한도안에서 일한 것이 아니라 나의 부족과 허약과 병약과 온갖 이런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그래서 생각밖에 넘치는, 결과를 생각해보면 너무 황송할 정도의 결과를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만든 고난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인류 죄를 대신하시는 고난, 스스로 택한 고난, 스스로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하시면서 일생을 사셨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와 목회자는 스스로 만든 고난을 너무 많이 당하고 있지 않느냐. 목적은 이 민족을 살리자는 것이고, 죄인을 구원하자는 거고, 교회적 본질적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자는 것인데 야곱식으로 프로세스가 너무 스스로 만드는 것이 너무 많아요. 바로 이런 것 때문에 교회는 크게 성장했는데 안에서는 분쟁과 갈등이  자꾸 끊이지 않아요. 밖에서는 교회를 굉장히 존경하고 기대하고 그래야 되겠는데 오히려 밖에서는 불신과 비판과 지적을 자꾸해요. 이것은 오늘 한국교회 현주소에서 스스로 만든 고난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오는 고난입니다. 사실 스스로 만든 고난은 외부적 조건 아무리 만들어도 해결 안옵니다. 얍복강 이어야 됩니다. 얍복강 체험속에서 그리고 새로운 변화가 와야 바로 그때 우리의 목회도 보람이 있고, 한국민족도, 가령 우리 일재시대와  공산치하 6.25시대 그 당시 목회자와 교회들은 스스로 만든 고난이 적었습니다. 그리고 남의 죄 때문에 대신 받는 고난 , 스스로 택한 고난, 스스로 알 수 없는 고난을 많이 당하면서 그렇게 하면서 목회를 했습니다. 지난 날에는 교회가 수도 적고 영향력이 적었어야 되는데 민족에게 주는 영향은 컸습니다. 일반사회, 불신사회가 교회를 향한 기대가 컸고 교회가 가는 길로 따라가고 싶고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오늘 수난주간, 성금요일 아침입니다만 뜻있는 고난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종합해서 네 가지를 한번 고려하면서 주신 말씀들을 참고해서 이제 우리에게는 스스로 만든 고난을 좀 본질적으로 없애자, 좀 더 남의 죄를 대신하는 고난을 체험하자, 스스로 택한 고난이 좀 더 확실하도록 하자. 우리로 해석할 수 없는, 스스로 알 수 없는 고난도 하나님의 주시는 깨달음과 능력으로 극복하면서 목회를 해보자. 아마 이것이 오늘 우리 모임의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