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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차원에서의 고난의 의미

강인철 2009. 6. 27. 09:53

개인적 차원에서의 고난의 의미
한복협 4월 월례발표회, 화평교회 안만수 목사 발제문 전문
 
안만수

순교 신앙과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며
“개인적 차원에서의 고난의 의미”



 


Ⅰ.서론

하나님께서 성도 한 개인에게 허락하시는 고난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한 편으로는 성경의 인물 가운데 고난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는 욥의 고난을 생각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초대 교회이래 순교의 피를 흘린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의 발자취를 염두에 두며 성도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고난의 의미를 성경 말씀을 통해 조명해 보고자 한다.

Ⅱ. 하나님의 자유, 성도의 자유 

 첫째, 고난이 성도에게 주는 기초적인 의미는 “겸손”이다. 이 겸손은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겸손이다. 고난의 대명사인 욥이 그의 환란을 통해 가장  먼저 학습한 것이 바로 “겸손”이다. 흔히 욥기의 주제를 “자유”라고 말한다. 사람의 자유가 아닌 하나님의 자유(혹은 주권)이다. 이 하나님의 자유를 수식으로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자유 = 하나님 - 진리” 무슨 소리인가? 하나님 자신이 진리인데 하나님으로부터 진리를 빼면 무엇이 남는다는 말인가? 여기서 진리란 하나님에 대해 “내가 아는 진리”를 일컫는다.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들이 확신하고 있었던 진리보다 크신 분이었다.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의롭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던 욥이 이해하고 있었던 진리보다 더욱 크신 분이었다. 이 하나님은 오늘날 내가 몸담고 있는 장로교단보다 크신 분이시며, 내가 신뢰하고 사랑하는 개혁주의 신학체계보다 크신 분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나의 생각과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분이다. 고난의 정점을 통과하면서 욥은 이 크신 하나님의 주권을 “겸손”함으로 고백하였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3,6) 그렇다. 고난 속에서 성도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의 능력과 이해력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유와 대면하게 된다. 이 앞에서 성도는 피조물의 실존, 곧 절대자 앞에서 적신으로 서 있는 한 인간의 한계와 무지를 고백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겸손의 실체인 것이다.

 둘째, 고난은 성도로 하여금 “십자가의 사랑”을 이해하고 바라보도록 도와준다. 이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 곧 “하나님 맘대로의 사랑”에 기초한다. 욥기의 주제일 뿐 아니라 성경전체가 말하는 하나님의 자유(주권)는 궁극적으로 성도를 불안케 하는 자유가 아니다. 반대로 우리를 살리는 자유이다. 즉 하나님은 당신 마음대로 죄인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메시지이다. 사랑의 대상을 결정하는 것, 사죄 및 구원의 방식을 정하는 것, 구원의 때와 장소, 그리고 구원 이후의 삶과 성화의 모든 과정을 하나님 마음대로 정하셨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생명을 얻고 하나님과 영원한 사랑의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요컨대, 하나님의 자유는 우리를 심판하고 죽이는 자유가 아니라 우리를 살리는 “사랑의 자유”인 것이다.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는 “끊임없이” 부정을 저지르는 음란한 아내 고멜을 “끊임없이” 사랑함을 통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이 끊임없는 “사랑의 자유”를 표현했다(호3:1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쉬운성경). 이 하나님의 “맘대로 사랑”의 선언에 대해 혹자는 이는 결코 “공의의 하나님이 행할 수 없는 부당한 사랑”이라고 말하며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이의제기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바로 롬8:31이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아마도 앞서 인용된 호세아와 로마서의 말씀에 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일 구약의 인물이 있다면 바로 욥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난을 통해 욥은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자유와 절대주권을 삶으로 체험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 또한 그 누구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는 복음을 설명함에 있어 구약의 욥기는 분명 의미 있는 기여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욥은 신비롭게도 19:25에서 메시아 신앙을 고백한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이는 욥기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연 극심한 고난 속에서 욥이 궁극적으로 붙잡은 것이 메시아 신앙일 진대, 그의 뒤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이 각자의 고난의 현장 가운데서 결국 바라보아야 할 것이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겠는가?

 셋째, 고난은 하나님의 자유뿐만 아니라 “성도의 자유”가 무엇인지도 보여준다. 타락한 인류는 자유를 “죄지을 자유”로 밖에는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할 자유”도 주셨음을 선포한다. 욥은 이것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이 자유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자유이다. 누가 보아도 주님을 배신할 만한 상황에서 조차도 그 분을 끝까지 배신하지 않을 자유이다. 또한 환란 중에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할 자유인 것이다. 욥기를 읽다 보면 몇 차례에 걸처 진주와 같은 욥의  신앙고백을 발견하게 된다. 1:21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23:10“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이러한 욥의 고백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배신하지 않을 자유, 한 걸음 더 나아가 환경을 초월하여 내가 섬기는 하나님을 끝까지 내 마음껏 사랑할 성도의 자유에 기초한다. 이 똑같은 자유가 순교의 현장에서 기꺼이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은 순교자들의 가슴 속에 있었고, 또한 오늘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의 속에도 동일하게 심겨져 있는 것이다.

Ⅲ. 순교의 고난이 가지는 구속사적 의미 

 앞서 인용한 로마서 8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환경을 초월한 “사랑의 자유”를 또한 노래한다. 특히 36절에서 바울은 시편 44:22절의 말씀을 인용한다. 이 말씀 속에서 도살할 양으로 비유된 주체가 누구인가? 바로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다. 왜 도살당할 처지에 있는가? “주를 위하여!”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의 고통을 당한다는 의미이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주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도살당할 고난까지 자칭한다는 의미가 배어있다. 못 말리는 사랑이다. 자기 독생자를 내어주신 아버지의 사랑도 못 말리는 사랑이지만, 그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서 도살당하는 것까지 감수하는 성도의 사랑도 못 말리는 사랑이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 특히 순교 신앙의 핵심에는 바로 이러한 주를 향한 “못 말리는 사랑” 때문에 스스로 고난을 자청하고 감수한다는 의미가 배어 있다.

 마지막으로 모든 고난당하는 성도들이 기억할 것이 있다. 앞서 욥과 바울선생이 표현한 “성도의 사랑의 자유”는 사실상 새 언약에 대한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이다. 구약의 예레미야 선지자는 새언약 안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과거 혼인관계 이상의 연합을 이룰 것임을 예언한다.(예31:32-33절)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새 언약 안에서 새롭게 규정한 자신(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구약의 부부관계를 초월하는가? 그렇다. 물론 새언약 역시 예수와 성도들의 관계를 여전히 부부관계로 묘사한다. 이는 새 언약 안에서 우리가 그 분과 이룬 연합의 성격이 “사랑”에 기초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동시에 예31:32-33절은 이 사랑이 “의무”가 아닌 우리의 마음을 통치하고 사로잡는 자발적인 “언약적 사랑”의 성격임을 암시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새 언약 속에서 신부된 교회는 신랑이신 하나님께 대해 진실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애정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 것은 이제 언약적인 의무조항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신랑에 대한 사랑의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33절) 초대교회 성도들이 핍박 가운데서 보여준 [욥의] 인내와 신앙은 바로 이러한 새언약의 성취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때에야 비로소 그 진정한 가치가 제 빛을 발하게 되어 있다.

Ⅳ.결론 

 구원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언제 어디서 성취되는 것일까? 기복신앙을 따르는 자들은 그것이 육적이고 가시적인 축복을 받는 순간 이루어진다고 말 할런지 모른다. 중세가톨릭 교회는 그것이 선행을 통해 나의 영혼이 연옥의 업보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에 성취된다고 가르쳤다. 오늘날 적지 않은 수의 성도들은 구원의 의미란 내가 죽어서 천국에 갈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과 교회사에서 등장하는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교훈할 것이다. 내가 내 생명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순간에 또한 그 고백을 삶으로 증명하는 순교의 현장에서 내가 얻은 구원의 진정한 의미가 성취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런 면에서 성도들에게 닥치는 모든 고난과 연단 그리고 작은 순교들은 매우 귀중한 의미를 가진다. 바로 이 고난의 현장이야 말로 성도가 가진 “사랑의 자유”를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또한 이를 통해 성도 개개인에게 부여된 자유와 구원의 가치가 스스로 증명될 수 있는 축복의 현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