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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존경하는 이동휘 목사님과 이중표 목사님

강인철 2009. 6. 27. 09:47

내가 존경하는 이동휘 목사님과 이중표 목사님
한복협 5월 조찬발표회 이윤재 목사 발제문
 
이윤재
약 한달전에 김명혁 목사님께서 누구를 존경해?하고 물으셨어요 저도 모르게 이동휘 목사님과 이중표 목사님 존경합니다 이렇게 했는데 저는 물어보신 줄만 알고 발표하라고 하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발표하라고 할줄 알았으면 제가 이야기를 안할 걸 그랬습니다. 그 뒤에 제가 지독한 독감에 걸려서 무덤속에서 꼼짝을 못하고 원고를 써서 보냈어야 하는데 제가 어제까지도 무덤속에 있었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부활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많이 준비는 못했구요. 평소에 생각하는 것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 닮기는 어렵지만 신앙의 선배를 닮기는 그래도 쉽기 때문에 신앙의 선배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많은 분들의 영향을 받고 우리가 자라죠. 저는 신학하기 전에는 이동휘 목사님, 신학공부 이후에는 이중표 목사님의 영향을 받고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동휘 목사님이 연배가 조금 높으시기 때문에 이동휘 목사님부터 말씀을 드리면 개인적으로 이동휘 목사님은 저희 임시 당회장이셨어요 저는 아주 시골에서 태어나서 목사님이 안오는 교회에서 자랐어요. 그래서 시골에 여전도사님들이 주로 오시는 아주 작은 교회에서 자랐는데 그래서 목사님들이 안오시니까 임시 당회장을 보내잖아요. 세례 베풀고 성찬식 할 때 목사님, 이동휘 목사님이 그 때 임시 당회장이셨어요. 시골교회에서 그렇게 자랐는데 그 분이 아주 어릴 때 시골에 오실 때는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고 그 분이 인상이 되게 좋으시고 성자같잖아요. 늘 저희 집이 아버님 장로님이시까 시골에 방 하나 정리해서 거기 항상 머무시곤 하시고요 그리고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직접 세례를 주시고 어릴 때 많이 기도와 도움을 주셨던 목사님이십니다. 그래서 많은 일화가 있고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우리 목사님이 가르쳐주신 것은 이중표 목사님과 같이 연결된 고리로서 별세를 사신 분이다. 이분은 ..이중표 목사님이 별세를 말하신 분이라면 그 이전에 별세를 사신 분이 계셨는데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동휘 목사님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두 분간의 교류가 깊으시거든요. 그래서 두 분 사이에 흐르는 별세의 정신, 오늘날 저에게 큰 은혜와 감동을 주었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동휘 목사님은 전북 완주에서 태어나서 외할아버지의 신앙과 특별히 어머니의 믿음을 이어받았어요. 형님 이준휘 목사님의 영향을 받아서 목회를 했고  어릴 때는 서점을 경영하고 싶어했다고 해요. 책을 좋아해서 책방주인이 되고싶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만큼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시고 조용하시고 성품이 온화하신 그런 분이셨습니다. 만49세에 전주안디옥교회를 개척하여서 군산비행장 경납고를 옮겨서 건물을 지었죠. 교회건물도 없이 그냥 이상한 깡통교회라고 하죠. 그런 교회를 지금까지 하고 있는 거죠.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여름에는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켜고 겨울에는 히터대신 장작난로를 피우시고 그래서 장작난로에서 나오는 연기 때문에 겨울에는 예배드리기가 어려운 정도고 여름에는 선풍기 도는 소리 때문에 설교가 안들리는 그런 깡통교회에서도 그렇게 부흥하고 발전한 것을 보면 교회의 하드웨어가 꼭 중요한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천명이 될 때가지 부목사가 없었고 일체 목회자가 없었다고 해요. 천명이 될 때까지는 직접 자신이 주보를 만들고 사찰도 겸하고 청소도 하고 온갖 일을 다 하셨다고 하구요. 주일학교 찬양대, 중고등부 한번도 보조해 본 적 없이 각자 자기가 해결해라 우리는 선교해야 하니까 우리가 지원할 수 없다. 스스로 헌금해라 아이들, 중고등부 주일학교 학생들이 전부 자비로 운행하는 그런 교회를 하고 계셨습니다. 선교일념으로 사셨기 때문에 불편하게 사는 것을 감안해야만 했죠. 당회장실에 한번 가보면 비닐소파에 세계지도가 하나 있고 각종 공문서가 너질하게 있어가지고 이것이 복덕방인지 뭔지 모를 정도로, 선교 복덕방이다 이렇게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목사님댁을 한번 가보면 정말 아무것도 없는 정말 가난한 느낌을 주는 그런 집에서 사시는데 네 자녀를 다  선교사로 큰 아들은 아프가니스탄, 둘째는 인도네시아, 셋째는 키프로스, 넷째 필리핀 선교사로 본인이 설교하고 사는 것처럼 자녀들도 그대로 닮아서 그 자체가 성공인 목회자의 삶을 사셨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도행전 1장8절에 영구적인 표어구요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선교열정으로 사시는 분이죠. 잘 아시는대로 IMF이전까지 70%의 예산을 선교를 위해서 집중하시고 IMF이후에는 10%를 증액해서 어려울 때 더 열심히 해야된다해서 80%의 선교비를 IMF이후에 선교하셨지요. 어릴 때 제가 어머니께 들은 말씀인데 이동휘 목사님을 본받아라 본받아라 하면서 하신 말씀중에 기억나는 것이 하도 이분이 기도를 많이 해서 여름에 아주 더울 때 하얀 모시 적삼을 입고 교회에서 밤새도록 기도하면요 이 모기들이 얼마나 무는지 그 다음날 아침에 사모님이 그 적삼을 가져다가 물에 담그면 빨간 물이 피가 젖었다는 거예요. 그게 어린 저에게 너도 그렇게 되라는 거예요. 그렇게 피흘려 기도하신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교회를 은퇴하신 뒤에 수원에 사시는데 한번 찾아갔더니 왜 수원에 오셨어요? 하니까 말씀을 안하시더라 수원에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잖아 그래서 왔어 그러시더라구요 전주를 떠나서 목회 현장을 떠나주고 떠날 뿐만 아니라 자기도 아무도 아는데 없는데 왔다 그러시는데 쉽지 않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정신으로 사셨던 철저히 선교에 미쳐 사는 이런 분을 우리의 선배로 모신다는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을 여러분이 잘 아시고 너무 많이 아시는데 저는 신학교 3학년 때 목사님을 뵌 뒤로 은혜로 부목사로 5년가 한신교회에서 섬기고 멘토로 지도를 많이 받았습니다. 돌아가신 뒤에는 분당에 있는 한신교회에서 사역을 이어가고 있는데 목사님이 남기신 두 개의 날개, 소위 두 날개라고 하면 셀그룹과 공동체라고 셀목회에서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그 분의 두 날개는 예수님과 민족,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민족에 대한 사랑 이 두 가지가 그 분이 가진 두 날개가 아닌가 그 생각을 늘 합니다. 그래서 별세가 그 분의 트레이드 마크인데 별세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고 그 분의 개인적인 고난에 찬 목회현장에서 우러러나온 목회신학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질병과 폐병속에서 사시고 가난속에 사시고 또 여러 목회현장에서 자기를 죽이는 경험을 통해서 우러러 나온, 만들어진 그런 신학이라고 생각을 하구요, 특별히 세 번의 수술을 통해서, 네 번째 돌아가셨지요? 죽음과 가깝게, 죽음과 삶이 늘 백지장 한 장처럼 느끼는 그런 삶을 살면서, 보통 사람보다 죽음을 더 가깝게 늘 느끼고 사셨기 때문에 별세가 가까운 느낌으로 사셨지요.

 그리고 성경적인 배경으로는 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묵상의 주제에요.  아주 초기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에 경도하고 거기에 집중하시고,  묵상하시고 기도하시고 그것이 바로 별세신학의 기초, 케리그마 라는 말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1988년 무렵부터 별세라는 말을 사용하시기 시작하셨는데요, 사실 그 이전부터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적 십자가와 고난의 신학에 거기서부터 사상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80년대에 별세 신학이 나왔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80년대는 먹고 살만한 시대 아니에요? 먹고 살만한 시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떠나요. 물량주의에 빠져가는 한국 교회를 보시면서 탄식하시면서 철저히 그리스도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지요. 80년대 후반에 이 신학적인 언어 - 별세 - 가 나왔다는 것은 시대적인 반성으로부터 나왔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목사님에게서 배운 철저한 믿음 중에 하나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지요. 예수님 이야기하시다가 우시고, 설교 시간에도 거의 두 번 세 번 우셨어요. 제가 목회를 하면서 죽어도, 꿈에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설교하다 우는 것이에요. 울어 볼려고 애를 썼는데도, 눈물이 안 나오는 거에요. 인력으로는 안되는 것이지요. 억지로 안되는 거지 않아요? 그래서 어쩌다 울어보려고 애를 썼는데, 아주 힘들죠? 교인들은 그런 모습을 보기를 원하는데, 그것이 참 어렵더라구요. 그래서 남긴 말씀 중에 제 뇌리에 남는 것이, 예수로 살고 예수로 살게 하라! 설교론에 있어서 가르치신 것 중에 남는 것은, 예수만 남게 하라! 설교를 딱 끝내고 교회당을 나갈 때, 그 사람이 무엇이 남느냐 그것이 중요하다. 예수만 남았으면 성공하는 설교, 다른 게 남았으면 그건 성공 못했다는 것이지요. 예수만 남느냐 그것이 철저한 질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유달리 예수님을 사랑하셨어요. 성경에서 예수님 이야기를 나오실 때마다 눈물을 흘리시고, 찬송하실 때도 예수님만 나오면 우시고, 이것은 하늘이 내린 은혜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순교에 대한 강한 소원을 가지고 계셨지요. 그래서 서재에 보면 순교자에 대한 책이 제일 많고, 그리고 돌아가실 때도 그것을 안타까워하셨어요. ; 하나님 난 순교자를 사모하고 염원했는데, 내가 순교자로 못 죽고 병으로 죽는 것이 너무 속상합니다, 안타깝습니다 하고 그렇게 마음 아파했는데, 어느 순간 그것은 뛰어 넘으셨어요. 한 번은 암으로 판명된 뒤에 어떤 분이 방문했더니, 눈물을 쫙 흘리셨다고 해요. 그래서 ‘왜 우시냐고, 별세를 말하시던 분이 왜 우시냐고?’ 했더니, 그 분이(이중표 목사님) 그랬다는 것입니다. ; 야~ 내가 암 선고 받기 전에 예수님 안에 일찍 죽었다는 사실이 너무 너무 감사해서 운다고, 예수님 안에서 일찍 죽었기 때문에 지금 사는데, 지금 그 때 죽지 않았으면 어떻게 할 뻔 했냐고, 암걸려서 큰 일 날 뻔 했다고, 너무 너무 감사해서 운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일찍 죽었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해서 우셨다고 합니다.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고,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붙들고 울었고, 한국 이라는 말이 좋아서 한국 신학대학을 진학하셨습니다. 본래는 합동측 출신입니다. 합동측 출신으로 믿음생활하시다가, 그런데 한국 이라는 말이 좋아서 그저 무작정 한국 신학 대학을 들어오셨습다는 것을 여러분 잘 아실 것입니다.

 2000년도에 북한을 방문해서, 평양 봉수교회를 방문했는데, 다녀 와서 설교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3박 4일동안 울면서 평양을 걸었다고. 자기는 평양을 걸어가면서 3박 4일을 울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시고 사람을 격려하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신 분, 어떤 사람도 그 앞에서 좋은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람도 그 앞에서 좋은 성도가 되고, 어떤 사람도 그 앞에서 좋은 목회자가 되는 것 같아요. 제가 목회를 하다 보면, 신자들 중에 좀 못된 사람도 많고, 혼낼 사람도 많고, 치리할 사람도 많지만, 그 앞에선 치리할 사람이 없어요. 후배들은 생각할 수 없는 은혜라고 생각됩니다.

 돌아가시기 두 주 전에 어떤 분이 방문했는데, 또 마찬가지로 눈물을 계속 쏟으시더래요. 그래서 왜 우시느냐고 물으니까, 눈물을 계속 흘리면서 그러시더래요. ‘내가 죽으면 가난한 신학생, 유학생,  누가 도울꼬? 내가 죽으면, 농촌 목회자 누가 돌볼꼬’ 하시면서 우셨다고 합니다. 2005년 1월달에 영국에서 공부하시던 어떤 목회자가 공부를 하는데, 소포가 왔대요. 소포를 열어 보니까, 이중표 목사님이 편지를 쓰고 무언가를 보내셨대요. 이 분이 입으시던 잠바를 보내셨어요. 보내시면서 ; 누구 누구 목사, 내가 많이 주고 싶은데, 줄 건 없고, 내가 입던 잠바를 보낸다. 많이 춥지? 이 잠바 입고 열심히 공부해서 한국 교회를 많이 섬기라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나중에 고백하기를, 내가 박사 과정을 많이 공부했지만, 그 한 사건이 나를 변화시켰다고 것입니다. 자기가 입던, 그 떼묻은 잠바, 그것을 손으로 만지면서 그 속에 사랑과 은혜가 있는 것을 깨달았다고 제가 들었습니다.

 교회를 사랑하시는 목사님, 교회에 딱 도착하시면 본당으로 들어 가세요. 들어가셔서 먼저 기도를 하시고 나서, 그 다음에 1층부터 5층까지 다 한 번 씩 돌아봐요. 그러니까 사찰 집사가 힘들겠어요. 돌아다니시면서 왜 이 문은 열어 놨어! 전기는 왜 켜놨어! 휴지 떨어진 것 못봐, 휴지를 일일이 다 주으시고,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시는 목사님. 

 오늘 저는 오늘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권성수 목사님이 책에서 별세 신학을 평가하는 말을 인상적이어서 담았습니다.    권성수 교수가 ‘별세는 양극간에 다리를 놓았다. 현세와 내세, 신앙과 생활, 진보와 보수, 복음과 민족, 텍스트와 컨텍스트, 현대와 고대 ... 특별히 진보와 보수를 하나로 묶었다 이중표 목사가. 그것은 진보에 속했지만 사실은 보수다. 진보와 보수가 그 안에는 없었다. 이것을 권성수 교수가 말해서 좋았어요. 오늘 제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철저히 준비를 잘 못했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