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폴 브랜드, 필립 얀시
폴 브랜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손 수술 외과 의사이자 나병 전문가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외과 의사이기 전에 헌신적인 의료 선교사다. 그는 인도에서 20년, 미국에서 30년 동안 오로지 나환자들을 위해서만 살았다. 선교사인 아버지와 어머니 또한 인도 산지에서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나환자들을 위해 평생을 바쳤기에, 폴 브랜드에게 있어 신앙과 삶은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었다. 고통을 느끼지 못해 고통을 당하는 나환자들과 함께 살아오면서 그는 그 무엇보다 고통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임을 몸으로 깨달았다고 할 수 있다. 고통의 문제와 씨름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들은 섬세하고 따뜻한 언어가 돋보이는 필립 얀시의 글을 통해 더욱 빛난다. 필립 얀시와 함께 쓴 책으로는 『오묘한 육체』(생명의말씀사 역간)와 『인간 하나님의 형상』(보이스사 역간)이 소개되었다. 현재 워싱턴 대학 의대 정형 외과 명예 교수로, 세계 보건 기구(WHO) 자문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에 살고 있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아픔과 고통이 없는 세상을 소망하며 살고 있다. 우리가 바라는 천국은 아픔과 고통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이기에 그렇게도 간절히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아픔과 고통이 있는 세상에서 살고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고통보다도 더 큰 아픔이 무고통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이 책에는 우리가 그렇게도 멀리하고자 하는 ‘고통’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해주는 역설적 진실에 관한 인생의 통찰력이 담겨 있다.
“고통이란 왜 존재하는가?”, “인생에서 가장 고통받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고통에 직면한 우리가 해야 할 올바른 삶의 태도는 무엇인가?” 등 의학자이자 선교사로서 고통의 신비를 50년 이상 파헤쳐 온 저자의 노력과 인생의 통찰력이 담겨 있는 이 책은 고통 회피와 쾌락에 중독된 이 시대 현대인들의 존재적 가벼움과 문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감동과 눈물의 드라마와 은혜와 도전을 담은 메시지를 통해 제시한다. 이 책에는 ‘그리스도인들은 궁극적으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목회자는 어떻게 목회를 해야 하는가? 선교사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 땅의 의료인들은 어떻게 환자들을 치료해야 하는가? 이 땅의 젊은이들은 어떤 비전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참된 인간다운 삶인가? 우리는 진정 누구처럼 살아가야 하는가?’ 등에 대한 대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의료 선교사로 인도에서 20년 그리고 미국에서 30년, 모두 50년을 고통이 없어 고통 당하는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한 폴 브랜드 박사의 자전적인 글로, 평생을 고통의 문제와 씨름하며 살아온 드라마틱한 그의 생애를, 뛰어난 글 솜씨로 유명한 필립 얀시가 함께 저술했다. 선교사인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실천하는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폴 브랜드 박사는 평생을 나환자들의 친구로 살아왔다. 인도의 산지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순교한 아버지, 그 아버지의 순교가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생을 그곳에서 바친 어머니, 그리고 부모님의 대를 이어, 천형이라는 오명을 쓰고 버림받고 천대받는 나환자들과 평생을 살아온 폴 브랜드의 이야기는 감동과 눈물 그 자체다.
▣ 차례
에버릿 쿠프 박사의 서문
역자 서문
1부 의사의 길로 들어서다
1. 무고통의 악몽들
2. 죽음의 산
3. 각성
4. 고통의 소굴
5. 고통의 멘토들
6. 인도풍의 의학
2부 고통과 함께 일하다
7. 칭글풋 우회로
8. 갈고리 손 펴 주기
9. 추적 진료
10. 얼굴 교정
11. 공표
12. 강어귀의새 일터로
13. 사랑하는 원수
3부 고통과 친해지다
14. 마음속에서
15. 낙하산 조립
16. 고통의 처리
17. 고통을 더하는 것들
18. 쾌락과 고통
후기: 나병과 에이즈
제1부 의사의 길로 들어서다
내 평생 가장 어두운 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신을 벗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준비를 끝냈을 때 끔찍한 생각이 무서운 힘으로 나를 강타했다. 발의 반쪽에 아무 느낌이 없었다.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내 마음은 무섭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마 환상이었을 것이다. 눈을 감고 볼펜 끝으로 발꿈치를 찔러 보았다. 아무 느낌이 없었다. 발꿈치 주변에 뭔가 닿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어떤 메스꺼움보다도 더 무서운 두려움이 뱃속을 뒤틀어 놓았다. 마침내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인가? 나병을 다루는 사람들은 누구나, 나병의 첫 증상 중 하나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나병을 치료하는 의사에서 나병 환자로 비참하게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인가? 나는 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 일어나서 무감각한 발에 힘을 주고 앞뒤로 무게 중심을 옮겨 보았다. 그리고 나서 옷 가방을 샅샅이 뒤져 바늘을 찾아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발목 바로 밑 살갗을 바늘로 조금 찔러 보았다. 아무 통증도 없었다. 반사 작용이 나타나는지 보려고 바늘을 더 깊이 찔렀다. 아무 느낌이 없었다. 바늘을 찔러 생긴 구멍을 통해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전율했다. 고통이 느껴지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느낄 수 없었다.
내 인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사람들의 아픔을 덜어주는 데 보탬이 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믿음으로 인도에 갔었다. 그러나 이제 소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영국에 그대로 머물다가 죽어야 하는가? 물론 가족과도 격리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은 특히 감염이 잘 되기 때문이다. 그 동안 내가 얼마나 환자들에게 나병과 맞서 싸우고 스스로 새로운 삶을 꾸려 가라고 입심 좋게 달랬는가? 저주받은 사회가 나를 환영하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내 진료실에 있는 진료 차트들은 내 몸이 점차적으로 마비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줄 도표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었다. 일상 생활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 강아지를 쓰다듬는다든지, 부드러운 비단의 감촉을 속으로 느껴 본다든지, 어린아이를 안는다든지 하는 이 모든 감각적인 일들이 곧 똑같이 느껴질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마침내 날이 밝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불안과 절망에 빠져 있었다. 거울을 통해 면도하지 않은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병의 흔적을 찾기 위해 코와 귓불도 살펴보았다. 밤새도록 내 속에 있는 임상 의사가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 했다. 런던의 여느 의사들보다 나병에 대해 더 많이 알았기 때문에 진찰 과정을 결정하는 것은 내게 달려 있었다. 제일 먼저, 그 병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감을 잡기 위해 감각을 상실한 부위를 정밀하게 표시해야 했다. 나는 앉아서 심호흡을 하며 바늘 끝으로 발꿈치를 찔렀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지금까지 마치 전기 충격처럼 생생한 그 통증만큼 유쾌한 감각을 느껴 본 적이 없다. 나는 나의 어리석음에 큰 소리로 웃어댔다. 이제는 모든 것을 완전히 느낄 수 있다. 내가 몸을 구부린 채 열차에 기대앉아 있었을 때, 내 몸은 무게와 압력을 재분배하는 일상적인 불안정한 움직임을 지탱하기에도 힘겨운 상태였다. 일시적이었다! 밤새 그 신경이 원상 회복되어 이제는 고통과 촉감과 추위와 더위에 대한 메시지를 충실하게 뱉어내고 있었다. 나병에 걸리지 않았다. 단지 피곤에 지친 여행자가 질병과 과로로 신경 쇠약에 걸렸을 뿐이다.
내 발이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정반대 현상이 일어났다. 깊은 수렁을 지나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하나님, 고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 그 이후로는 형태가 어찌됐든 그런 기도를 수백 번도 넘게 되풀이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기도가 이상하게, 심지어 모순적이거나 자학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이 계속적으로 밀려드는 감사의 제목이 되었다. 나병 환자가 고통을 느끼는 우리를 얼마나 부러움의 눈길로 바라볼지 그때 처음으로 이해했다.
나의 직업 생활은 고통이라는 주제의 주변을 맴돌아 왔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여러 다른 문화 속에 살면서 고통에 대한 다양한 태도를 아주 가까이에서 보아왔다. 내 인생은 대충 3기로 나누어지는데 인도에서 27년, 영국에서 25년, 미국에서 27년 이상을 살았다. 각 나라에서 나는 고통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았다.
나는 나치스 치하 독일 공군의 대공습의 공포로 가득했던 시기에 런던에서 의학 인턴 과정을 밟고 있었다. 그 대공습으로 인해 자만에 빠져 있던 런던은 쑥밭이 되고 말았다. 육체적 고통은 끊일 날이 없었다. 그것은 거의 모든 대화의 초점이 되었고 신문 1면의 헤드라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가 겪은 런던 사람들의 60%가 그때를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던 때로 회상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본다.
전쟁 후 나는 인도로 갔다. 마침 그 나라는 분할로 인해 쪼개지고 있을 때였다. 어디를 가나 가난과 고통이 상존하는 그 나라에서 나는, 근엄하게 조용히 고통을 수용함으로써 고통을 참아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육체적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비극을 안고, 사회에서 최하층 천민으로 취급당하며 살아가던 나병 환자들을 보살피기 시작한 곳은 바로 그 땅이었다.
미국으로 건너와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고통을 피하려고 하는 사회를 접하게 되었다. 미국은 어떤 면에서 볼 때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독립 전쟁을 치른 나라였다. 미국 환자들은 내가 겪어 본 어떤 환자들보다도 더 편안한 삶을 영위했다. 그러나 그들은 고난을 맞이할 준비가 훨씬 덜 되어 있었을 뿐더러, 고난으로 인해 훨씬 더 많은 상처를 입었다. 미국에서 진통제는 이제 연간 630억 달러에 달하는 상품이 되었고, 텔레비전 상업 광고들은 효능이 더 좋고 더 신속한 진통제를 선전하고 있다. 어떤 상업 광고는 다음과 같은 짤막한 표어를 내세운다. “통증을 느낄 틈도 없어요.”
런던 사람들은 어떤 대의 명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고통을 견뎌냈고, 인도 사람들은 고통을 예상하고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웠으며, 미국 사람들은 고통을 적게 겪으면서도 고통을 더 많이 두려워했다. 이들 세 나라의 사람들은 각각 인간 존재의 이런 신비스러운 사실들에 대해 내 나름의 안목을 갖는 데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대부분 언젠가 끔찍한 고통에 직면할 것이다. 나는 우리가 미리 어떤 태도를 계발하느냐에 따라 실제로 고통이 닥쳤을 때 그 고통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가 결정된다고 확신한다. 이 책은 그 확신에서 나왔다.
나의 어린 시절, 부모님이 콜리 말라이 사람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은 이유는 바로 그분들의 의술이었다. 아버지는 선교사 훈련 대학인 리빙스턴 대학에서 1년 동안 열대 의학을 공부하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런던에 있는 동종 요법 병원(Homeopathic Hospital)에서 배운 것에 의존하셨다. 그분들이 받은 의학 훈련은 한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분 모두 히포크라테스의 본래 모토를 몸소 보여주셨다. 좋은 의술은 질병뿐 아니라 사람을 치료한다는 것이다.
부모님은 주위에서 무언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전통적인 선교사들이었다. 그분들은 힘을 합해 학교 아홉 개와 일련의 병원들을 세우셨다. 농사에 대해 말한다면, 어머니는 콜리에서 채소밭을 가꾸는 데는 거의 성공하지 못하셨다. 그러나 감귤류의 과일을 생산하는 과수원은 번창했다. 아버지는 당신의 전문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건축업 분야에서 일하시는 것을 더 좋아하셨다. 아버지는 젊은 마을 청년들을 모아 놓고 목공을 가르치셨고, 마을 주민들의 초가 지붕을 갈아야 할 때가 되면 기와 만드는 법도 가르쳐 주셨다. 소작농들이 평지에 사는 지주들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으면, 아버지는 수백 명의 대표단을 이끌고 지역 사령부로 가셨다. 그리고는 소작농들을 대신하여 영국의 식민지 관리들에게 말씀하곤 하셨다.
이 모든 선행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제시 브랜드와 어머니 에벌린 브랜드는 산지 사람들을 위해 기독교 교회를 세우려는 소중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하셨다. 영 숭배를 전문으로 하는 마을의 한 사제가 자신의 생계가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한 나머지,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신들의 진노를 얻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다녔다. 우리는 신체적 위협을 당했으며, 나는 그 사제를 볼 때마다 숨곤 했다. 독살당한 소들이 그의 위협을 잘 보여주었다. 그래서 부모님이 매주 예배를 드리셨지만 참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감히 기독교인이 되려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다가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전염성이 강한 스페인 독감이 콜리 마을까지 퍼졌다. 그 병은 콜리 마을을 덮쳐서 맹렬한 기세로 사람들을 죽였고 마을 전체를 형체도 없이 산산이 깨뜨렸다. 두려움에 질린 사람들은 병든 가족이 낫도록 보살피기는커녕 숲 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아버지는 그렇게 버려진 독감 희생자들이 질병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영양실조와 탈수 때문에 죽어 가고 있다고 판단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우리 집 밖에 있는 큰 가마솥에 한 솥 가득히 쌀죽을 끓여 여러 날 동안 그 죽을 계속해서 공급하셨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말을 타고 마을마다 다니시면서 버려진 환자들의 입 속에 죽과 정수한 물을 떠 넣어 주셨다.
부모님을 대적하던 그 사제와 그의 아내도 결국 병에 걸렸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버렸으나 부모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부모님은 정기적으로 그들에게 음식과 약을 가져다 주셨다. 그 사제는 ‘적’으로 생각하던 사람들의 극진한 간호를 받으며 자기가 부모님을 아주 잘못 판단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아버지께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이 나를 이어 사제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나를 도와줄 만큼 나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 자녀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면 좋겠습니다."
며칠 후, 나는 우리 집 현관에 서서 눈물에 젖은 열 살 짜리 소년이 들판을 가로질러 오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는 고열로 시달리는 아홉 달 된 여동생을 안고 있었으며, 사제와 사제의 아내에게서 받은 서류 뭉치를 갖고 있었다. 그렇게 하여 내 여동생 루스와 형 아론이 우리 가족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콜리 말라이에 있던 교회가 6년 동안의 거센 저항 끝에 첫 신자를 얻었다.
나는 부모님에게서 고통이 환자에게만 신호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의 공동체에까지 신호를 보낸다는 사실을 배웠다. 마치 고통을 감지하는 개개의 감각 기관들이 몸의 다른 세포들에게 "나를 보살펴 줘! 제발 나를 도와줘!" 하고 외치듯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인간들도 전체 공동체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님은 아무리 위험해도 그러한 요청에 용기 있게 대처하셨다. 훈련도 거의 받지 못하시고 자원도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당대의 가장 치명적인 질병들을 치료하셨다. 서혜 임파선종 전염병, 장티푸스, 말라리아, 소아마비, 콜레라, 천연두 따위의 질병들이었다. 나는 에이즈 바이러스 같은 변종이 콜리 말라이 산에 나타났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분명히 안다. 아버지는 충분치도 못한 약품 가방을 챙겨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들에게 달려가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의술은 인간의 깊은 동정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동정심(compassion)이라는 말은 라틴어 어근인 'com + pati'에서 나온 것으로, 함께 고통을 당한다(to suffer with)는 뜻이다. 부모님은 의학 훈련의 부족을 인간의 고통을 향한 본능적인 반응인 동정심으로 극복하셨다.
나는 아홉 살 되던 해인 1923년까지 콜리 산에 머물렀다. 그 후 누이인 코니와 함께 정규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영국으로 갔다. 하지만 영국에서 나는 이방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자연 속에서 배우신 것들을 편지를 통해 나에게 개인 지도하셨다. 거의 6년이란 세월이 흘러 나는 열 다섯 살이 되었고, 나의 미래를 위해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가 되었다. 어디에서 살아야 하며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우리에게는 상의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나는 부모님이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그러나 1929년 6월, 비보가 도착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였다. 말라리아의 악성 합병증인 흑수열에 걸려 발병 이틀만에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그 전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비보로 인해 자녀들이 놀라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 이후 어머니가 보내시는 편지들은 모두 두서가 없었고 어머니는 마치 정신이 혼미한 사람 같았다. 그래서 가족들의 권유로 1년 만에 어머니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때 슬픔이 사람을 얼마나 황폐화시키는지를 처음으로 보았다. 시간이 흐르자 어머니는 잘 적응해 가셨다. 그러나 1년 뒤 어머니는 영국에 계속 머무르시라는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시고 콜리 말라이 산 꼭대기에 있는 방갈로로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일은 콜리 산에서 인근 네 개의 산지에까지 이어졌다. 그곳 사람들은 어머니를 가리켜 ‘산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 말은 어머니의 묘비에도 새겨져 있다. 어머니의 무덤은 내가 자라던 방갈로에서 비스듬히 경사진 곳 바로 밑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 옆에 있다.
어머니는 나에게 아버지의 과학적인 업적을 유산으로 물려주려고 애쓰셨다. 내가 의사가 되어 콜리 산으로 돌아오는 것이 어머니의 꿈이었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어린 시절 경험한 의술에 관한 기억들이 몇몇 고통스러운 장면으로 압축되었다. 아버지가 돌보신 가장 끔찍한 환자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 남자는 곰에게 찢긴 채 살아남았는데 머리 껍질이 이쪽 귀에서 저쪽 귀까지 완전히 찢긴 채였다. 그리고 또 다른 장면이 있는데, 그것은 아마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오후 낯선 남자 세 명이 병원을 찾아오자 아버지는 우리에게 구경도 못하게 하셨다. 나는 살금살금 나가서 숲 속에서 몰래 지켜보았다. 그 사람들의 양손은 염증으로 뒤덮인 채 뻣뻣하게 굳어 있었으며, 손가락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붕대로 발을 감쌌는데 아버지가 붕대를 풀자, 발가락이 하나도 없는 뭉툭한 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 시절, 나환자를 접촉한 일은 더 이상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의학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아버지가 그 환자들을 치료하실 때 느끼던 것과 똑같은 두려움과 극도의 혐오감이 뒤섞여 떠오르곤 했다. 의학은 내게 맞지 않았다. 고통과 아픔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고 싶은 것들이었다. 영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만일 누군가 나에게 내 일생의 과업이 고통을 의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에 집중되면 좋겠다고 제안했다면 나는 큰 소리로 웃었을 것이다. 내게 고통은 연구 대상이 아니라 회피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건축학을 5년이나 하고서도 결국은 의학을 전공했다.
리빙스턴 의과 대학의 1년 과정은 세계 각지에서 온 35명의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들 해외에서 활동하기로 헌신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의 끔찍하던 장면들을 회상하면서 창백해졌다. 그러나 머지않아 의학이 내가 자연에 대해 느끼던 경이감 속으로 나를 빠져들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 역시 의료 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2년 간의 훈련원 과정에는 일정 기간 동안 자선 병원에서 봉사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의학에 대한 나의 관심이 마침내 행동으로 옮겨지게 된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
어느 날 밤 내가 응급실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구급차 수행원들이 의식을 잃은 아름다운 젊은 여성을 실어 왔다. 병원 직원들은 의식을 잃은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통제된 응급 처치를 신속히 실시했다. 한 간호사가 피 한 병을 가지러 복도를 달려가는 동안 의사는 수혈 기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의사는 내가 조수복을 입고 있는 것을 흘끗 보더니 혈압계를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혈압계를 읽을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 여자의 팔목에서 아무런 맥박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그녀의 살갗은 소름끼칠 정도로 창백했다. 내부에 출혈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병원의 휘황찬란한 불빛 속에서 그 여자는 성당에 있는 석고상 같았다.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간호사가 피 한 병을 들고 도착했다. 의사는 큰 주사기로 여자의 혈관에 주사를 놓고 혈액이 들어 있는 병을 철제 스탠드에 높이 달아맸다. 의료진은 돌아가며 그녀에게 적합한 피를 더 구해 올 동안 수혈의 진행 상황을 지켜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 다음 순간 일어난 일은 내 기억 속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적이었다. 죽음의 실재 앞에서 초조함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방안에 혼자 있는 동안 나는 그 여자의 차갑고 눅눅한 팔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맥박이 미미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정말이었다. 분명히 맥박이 있었다. 나는 가운데 손가락으로 희미하지만 규칙적인 진동을 느꼈다. 두 번째 혈액이 도착했다. 여자의 볼에 수채화 물감을 한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연분홍 빛이 감돌았다. 그러더니 점차 퍼져서 볼 전체가 홍조를 띠기 시작했다. 입술도 분홍빛으로 변하더니 이내 빨갛게 변했다. 그녀의 몸은 깊은 호흡과 함께 떨리기 시작했다. 세 번째 병이 연결되었다. 내 가슴도 뛰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한 편의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꺼풀이 가볍게 떨리더니 이윽고 눈을 뜨며 숨을 몰아쉬었다. 마침내 그 여자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놀랍게도 입을 열었다. “물, 물 좀 주세요. 목이 말라요.”
그 젊은 여자가 내 생애에 들어온 것은 고작 1시간 정도뿐이었지만, 그 체험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어느 누구도 내게 의술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 적이 없었다. 시체가 살아나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선교 훈련원에서의 첫해가 끝나갈 무렵, 나는 구제 불능일 정도로 의학을 사랑했다. 나는 선교 훈련원 생활을 그만두고 1937년 런던에 있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병원 의학부에 등록했다.
마거릿은 매력적인 급우였다. 내가 건축업을 하다가 의과대학으로 옮기던 첫 해, 그 어려운 시기에 개인적으로 나를 가르치며 도움을 준 아가씨였는데, 사실 나는 마거릿 베리와 결혼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그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런던으로 돌아가 그녀를 찾았다. 우리는 사랑에 빠졌으며 1년 뒤 결혼했다.
내가 고통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실 외과를 선택하기 몇 년 전 의학 훈련을 받으면서 이것저것 탐색할 때다. 1939년 9월, 나는 2학년이 되었다.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하고 영국이 그에 대해 선전 포고로 대응한 때였다. 독일 폭격기의 일차적인 목표가 될 런던은 저학년 학생들이 의학을 공부할 만한 장소가 아니라고 결정한 정부는 내가 속한 학급 학생들을 대부분 웨일스의 카디프로 이동시켰다. 바로 이 활기 없는 해안 도시에서 나는 고통과 감각의 신비에 처음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나는 카디프에서 뇌를 해부한 경험을 통해 감각에 대해 생각해 보았고, 고통의 본질에 관한 근본적인 진리를 배웠다. 내가 해부한 그 웨일스 사람의 머리를 바라보면서, 고통이라는 감각이 다른 모든 감각들과 마찬가지로 모스 부호의 형태로 신경 전달이라는 중립적인 언어를 통해 뇌에 들어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감정적인 반응이나 “앗 따가!” 하는 자각조차 뇌에 의해 제공되는 해석이라는 것이다.
뇌가 어떻게 활동하는지에 대한 이러한 기본적 인식, 즉 뇌는 격리되어 있으면서 바깥 세상을 위해 ‘최선의 추측’을 통한 내부의 영상을 만든다는 것이 고통에 대한 나의 생각을 명료하게 해주었다. 어렸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고통을 ‘바깥 저쪽에 있는’ 원수라고 생각했다. 고통이 상처 부위에서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전갈에 손가락을 물렸을 때 나는 그 손가락을 꽉 쥐고 집으로 달려가 울면서 어머니에게 보여 드렸다. 이제 나는 내가 해부한 웨일스 사람의 뇌를 통해 고통이 바깥 저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 안쪽’ 즉 해골이라는 상아빛 상자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실제로는 우리가 고통이라는 감각을 만들어 내 우리 자신에게 준 것이지만 고통이 바깥 세상에 의해 우리에게 일어난 것처럼 생각한다. 우리가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부상자 수용소에서 매일같이 전쟁의 끔찍한 결과들을 보았지만, 한편으로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위대한 지도 보았다. 오늘날 여론조사에 따르면 당시 대공습을 겪고 살아남은 대다수의 런던 시민들은 애정과 향수를 가지고 그때를 회상한다. 나도 거기에 동감한다. 매일 밤마다 점점 더 많은 폭탄들이 런던에 떨어졌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러한 공포와 위협의 순간에 새로운 공동체 의식이 생겨났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그곳 지하 승강장과 통로에서 나는 하나의 도시를 이루어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나는 지하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거기서 볼 수 있는 동료 의식에 한껏 고무되어 돌아오곤 했다. 부자들이건 가난한 사람들이건 런던 사람들은 밤마다 공습을 피해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기도 하고 서로를 격려하기도 했다. 사별의 슬픔조차 누그러졌다. 한 사람이 가족을 잃은 이야기를 하면, 처음 보는 사람들도 그 주위에 모여들어 함께 울곤 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땅 위에서는 집과 재산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렸으나, 땅 밑에서는 친구들에게 위로를 받았다.
의료계에도 새로운 공동체 정신을 배웠다. 런던의 엘리트들이 병원의 자원 봉사자로 등록했기 때문이다. 아가사 크리스티도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직원으로 합류했다. 탐정 소설을 쓰기 전에 약사이던 그녀는 전쟁시 사회에 도움을 주기 위해 약제실에 자원했다. 내 아내 마거릿은 어느 날 아침 수술을 끝내고 붕대를 감아 주다가 그 환자의 침상 근처에 까무잡잡한 아름다운 여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여자는 자원 봉사자의 옷을 입고 있었다. 마거릿은 그 여자에게 오물이 묻어 냄새나는 붕대를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는 일을 시켰다. 나중에 아내는 그 여자가 그리스의 마리나 공주로, 최근에 미망인이 된 요크의 공작 부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수련의로서, 전쟁으로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은퇴 후 다시 돌아온 최고의 실력을 갖춘 의사들에게서 아주 많은 것들을 배웠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이 사심 없는 교수들은 내게 생리학과 약학에 관한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었다. 유니버시티 칼리지는 우리에게 단순히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들을 치료하라는 도전을 주었다. 우리는 지혜롭고 숙련된 의사들이 활약하는 것을 지켜봄으로써 의학의 인간적인 측면이 완성되는 것을 목격했다. 나중에 가서야 나는 비로소 치료에 있어 이러한 접근이 고통을 인식하는 데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전쟁 시 자원 봉사자로 일하던 귀니 윌리엄스라는 외과 의사가 의학에 대한 이런 ‘구식’ 접근을 전형적으로 보여 준 사람이었다. 그로부터 나는 의학에서 인간의 접촉을 대신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윌리엄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침대 곁에 그냥 서 있지만 말아요. 환자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으세요. 그렇게 해서 손바닥 전체로 환자의 배를 만지는 거예요. 절대로 서두르지 마세요. 그냥 손을 거기 대고 잠시 기다리는 거예요. 환자의 근육의 긴장이 풀어지면 작은 움직임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귀니 윌리엄스는 난방이 잘 되지 않는 우리 병원의 환자들을 진료하기 전에, 난방기에 손을 올려놓거나 뜨거운 물에 손을 담그곤 했다. 때때로 그는 나폴레옹처럼 오른손을 큰 외투 속에 넣고 병실을 걷곤 했다. 외투 속에는 뜨거운 물병이 감추어져 있어서 그의 손이 훌륭한 청취자가 되도록 해주었다. 차가운 손은 환자의 복부 근육을 반사적으로 긴장하게 하지만, 따뜻하고 편안한 손은 그 근육들을 완화시켜 긴장을 풀게 한다. 윌리엄스는 청진기보다도 자기 손을 더 신뢰하였고, 심지어 환자 자신의 설명보다도 자기 손을 더 믿었다. 그는 성난 얼굴로 곧잘 이렇게 말하곤 했다. “환자들이 실제로 자기 뱃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알아요? 환자들의 뱃속에서 나는 소리를 직접 들어보세요. 그리고 청진기에 대해서 말이지만, 잔뜩 긴장한 환자의 살갗에 차가운 쇳덩어리를 갖다 댄들 도대체 뭘 알 수 있단 말이죠?”
윌리엄스의 말은 옳았다. 잘 훈련된 손을 복부에 얹으면 장기의 긴장이나 염증뿐 아니라, 더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확인할 수 있는 종양의 모양까지도 알아낼 수 있다. 촉진은 무려 50년 동안 나의 가장 귀중한 진단 도구가 되어 주었다. 촉진은 내게 환자의 증세를 알려 줌과 동시에, 그 환자에게 의사가 개인적으로 관심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에 환자들의 두려움과 걱정을 진정시켜 고통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귀니 윌리엄스는 의사들과 환자들 사이에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장애물들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겸손이라는 것은 외과 의사가 계발해야 하는 유일한 자질이오. 의사라는 자리에서 철저히 내려오시오.”
이 같은 만남을 통해 나는 의학이 단지 신체의 일부를 치료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질병을 치료하는 것과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매우 다른 관심사다. 왜냐하면 회복이라는 것은 대부분 환자의 마음과 영혼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마음의 상태로, 전 인격을 포함한다.
세상이 분열되고 있을 때, 우리 학생들은 불분명한 학문적인 연구가 세상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가끔씩 의문을 품었다. 그러나 토미 루이스는 대학의 연구 계획을 한 치도 바꾸지 않았다. 의학 연구의 매력적인 새 영역을 개척하게 하는 부수 효과를 제외하면, 전쟁이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1차 대전 때 그는 심장을 연구했지만 이제는 고통에 대해 연구했다. 그 결과 1942년 처음으로 출판된 『Pain(고통)』이라는 책은 오늘날까지 의과 대학에서 읽히고 있다.
루이스는 내게 연구에 대한 애정을 불어넣었다. 우리가 고통을 연구하는 동안, 내가 배운 많은 것들이 수년 동안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결코 도망칠 수 없는 궤도 속으로 빠져들었다. 의사와 환자 모두 고통을 문제의 증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의 관심은 곧장 그 원인으로 이동해서 진단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루이스는 과학적으로 입장을 달리하여 고통 그 자체를 하나의 감각으로 간주했다. 그의 지도하에 공부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어떤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이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이전에 나는 고통을 창조의 한 가지 흠, 즉 하나님이 하신 한 가지 큰 실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토미 루이스는 내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고통을 측량할 수 없이 귀중한 인체공학의 특별한 공훈으로 부각하여 신체적인 고통의 다양성을 범주화하려고 시도했다.
2차 대전이 끝난 지 1년 뒤인 1946년, 나는 외과 연수 과정을 마쳤다. 당시 나는 영국 점령군들과 더불어 몇 년 동안 해외로 나갔다가, 돌아온 후에는 연구소 같은 데서 조용히 일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그러나 인도 남부에서 나병 환자들을 돌보는 책임자로 있던 로버트 코크런 박사가 벨로어라는 도시에 새로 세운 의과 대학에 필요한 외과 의사를 한 명 모집하려고 런던에 들렀는데, 그것은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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