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요약

[스크랩]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간경영

강인철 2009. 10. 28. 07:27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간경영

도몬 후유지 지음 / 이정환 옮김

작가정신 / 2000 / 240쪽 / 8,000원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각각 '천하의 지배자'로 불린다. 그러나 현재의 기업경영과 비교해보면 그 세 사람 사이에는 사업의 연속성과 계속성이 존재한다. 우선 노부나가는 그대까지 존재했던 중세 이후의 낡은 가치관을 타파하고, 파괴에 필요한 전략과 리더십을 선택했다. 히데요시는 새로운 가치 사회 건설을 담당, 나름의 전략과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도쿠가와는 두 선배가 한 일을 완성시켜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관리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이 천하를 얻은 가장 큰 이유는 같은 시대를 살던 일본인들의 요구를 재빨리 파악하여 선견지명으로 전략을 세우고 실현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아무리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해도 역시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절대로 천하를 지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들은 매우 뛰어난 전략을 썼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전략은, 그들이 첨예하고도 유연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확실한 정보 네트워크를 가동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 언론 속에 비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간경영》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간경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이어 천하통일을 완성함으로써 일본의 근세 봉건제 사회를 확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치, 경영 이념을 재조명한 것이다. 그는 사람 사이의 신뢰를 중시하고 여론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로 2백65년간의 토쿠가와 막부를 유지하게 만든 인물이다.

그는 인간관계의 신뢰를 자신의 CI(이미지 통합전략)로 삼았다. 그는 맏며느리인 노부나가 딸의 고자질로 아내와 아들을 죽여야 하는 지경에서도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끝까지 지켰다.

그는 신뢰를 바탕으로 4가지 철학을 정립했다. 첫째'모든 면에서 머리와 몸을 분리한 분단정책'을 사용했다. 쇼군이 된 지 2년 만에 아들에게 직위를 물려주고 슨푸에 은거하면서 유능한 참모진의 정책을 아들에게 전해 실행하도록 한 것이다. 머리는 슨푸에 두고 손발은 에도에 두는 식이다.

둘째 '꽃과 열매를 동시에 주지 않는다'는 전략이다. 권력을 가진 다이묘에게는 급여를 적게 주고 돈을 많이 받는 자에게는 요직을 주지 않았다.

셋째 '민심은 곧 천심', 넷째 '상인의 검소한 생활과 계산능력, 재능을 본받자'는 것이다. 그가 무예와 지략이 뛰어난 둘째 아들보다 평범한 셋째 아들에게 경영권을 넘겨준 대목도 '중역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하는' 시대흐름을 먼저 파악했기 때문에 나온 탁견이었다. --- 한국경제신문 고두현 기자(2000년 3월 30일자)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은 통쾌한 일이다. 그러나 진 사람의 고통만큼 그림자가 남는다.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다. 따라서 싸울 때마다 이기는 사람은 훌륭한 장수가 아니다. 그저 차선의 인물일 뿐이다. 어떻게 최선이 될 수 있을까? 적을 적으로 보지 않고 함께 살아가야 할 방편으로 보면 동지가 될 수 있다. 적을 파트너로 만드는 것만큼 훌륭한 경쟁은 없다.

일본인들은 이런 개념에 가장 부합되는 인물 중 하나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꼽는다. 그는 일본의 최고 경영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후계자 상이라고 한다. 울지 않는 두견새를 죽이지도 않고, 울도록 만들지도 않는다. 울 때까지 기다리는 유형의 인물이다. ‘너구리 영감’은 그의 트fp이드 마크다. 느긋하고 심계가 깊다. 고도의 전략과 심리적 능란함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이런 그의 경세 철학을 흥미진진하게 엮어가고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란을 종결하고 260년간의 안정적 막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첫째는 세상을 따른다는 것이다. 민심을 따르고 여론을 중요시한다. 백성은 정치가에게 있어 고객과 같다. 그는 백성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안다. 그리고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둘째는 자기개혁 능력이다. 낡고 오래된 생각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성장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중용한다. 셋째는 신뢰가 필요할 때 신뢰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공동체 유지의 기본은 신뢰다. 한 번 신뢰를 잃으면 필요할 때 신뢰를 만들어낼 수 없다. 신뢰와 관련하여 잊지 말아야할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신뢰를 잃지 말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한 번 잃으면 회복할 수 없기 때문에 잃지 않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이 신뢰를 저버리지 않도록 관리하라는 것이다. 무작정 사람을 믿는 것은 모든 어리석은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예를 들어 권력을 가진 자에게 재물까지 얹어주면 그는 더 이상 파트너로 남아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인간 관계의 핵심이다.

경영은 돈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 관한 문제이다. 꿈을 다루고,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시장의 움직임과 고객의 요구를 따라간다. 의욕과 정열을 다루는가 하면, 정보와 이성적 판단을 함께 다룬다. 제도와 시스템과 기술을 통합하여 최선을 이끌어낸다. 돈은 그저 경영의 결과일 뿐이다. 아이로니컬하고 다행스럽게도 돈이 목적인 기업은 한두 번의 전투에서 이길 때도 있지만, 결국 다른 기업에게 세상을 넘겨주게 된다. --- 조선일보 구본형, 변화경영전문가(2000년 3월 17일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천하를 통일하고 그의 막부는 265년간 일본을 안정적으로 통치했다. 때문에 그의 인간경영학은 늘 현대 정치인과 경영자들의 모델이 되고 있다. 신뢰와 여론 반영이라는 두 원칙과 그것을 이끌어나가는 머리와 몸의 분단정책, 꽃과 열매를 동시에 주지 않기, 민심 파악, 상인의 검소한 생활과 계산능력 본받기를 일화와 함께 소개한다. 저자 도몬 후유지는 도쿄 도청에 근무하다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 한국일보 ‘읽어보세요’(2000년 3월 21일자)

▣ 저자 도몬 후유지(童門冬二)

도몬 후유지는 192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도쿄 도청에서 근무하다 작가로 활약하기 시작한 그는 수많은 역사적 자료를 섭렵하고 일본 각지를 돌면서 면밀한 취재를 통해 작품을 발표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역사의 사각지대에 묻혀 있던 새로운 사실들을 독자들에게 전해준다. 저서로는 《수수께끼의 태평기》, 《불타는 기병대》, 《소설 우에스기 요잔》, 《우에스기 요잔의 경영학》 등이 있다.

▣ 역자 이정환

경희대학교 경영학과와 인터컬트 일본어학교를 졸업했다. (주)리아트 통역과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 및 동양철학 ․종교학 연구가, 역학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번역서로는《손정의 21세기 경영전략》, 《금융열도》, 《리더가 되기 위한 33가지 철칙》, 《인맥을 넓히는 33가지 철칙》, 《스푸트니크의 연인》, 《초전도 나이트클럽》, 《충신장(忠臣藏)》등이 있으며 그 밖에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 Short Summary

경영은 자본을 바탕으로 인적자원을 활용, 상품을 판매함으로써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 정점에 이른다. 따라서 인적자원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어떻게 각자의 능력을 살리고 관리해주느냐에 따라 실적에서 엄청난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도쿠가와의 인간경영 방법은 바로 이런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도쿠가와 인간경영 방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꽃과 열매를 함께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꽃(권력)과 열매(금전적 대가)를 함께 쥐어주지 않는 이유는 서로를 견제하기 위함이다. 경영자가 측근을 관리할 때, 이 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회사가 도탄에 빠지는 경우를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서 흔히 볼 수 있다. 한쪽에는 꽃을, 다른 한쪽에는 열매를 쥐어주는 것으로 각각의 이점을 분산시키면, 경영자 자신이 굳이 그들을 견제하지 않아도 상호견제성에 의해 당연히 주권이 경영자의 손에 쥐어지게 된다는 것이 도쿠가와의 주장이다.

도쿠가와 인간경영의 두 번째 방법론은 원교근공(遠交近攻)이다. 이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는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가까운 곳에 있는 측근과는 적절한 선을 유지하여 경영자 스스로 형평성과 보편성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것. 원교근공을 다른 의미에서 해석하면 측근의 의견이나 조언과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외부인물의 의견이나 조언을 적절히 비교, 검토하여 가장 합리적인 의견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최고경영자뿐만 아니라 일반 직장인에게도 권할 만하다. 도쿠가와의 이런 인간경영학은 과장이나, 부장, 영업부문 팀장의 경우에도 충분히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시절부터 목표지점을 향해 인간관리 방법을 도입, 활용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좀더 높은 지위에 올라 리더가 되었을 때 자연스런 인간관리가 가능해지는 것이 아닐까.

▣ 키 포인트

- 신뢰를 기업의 CI로 삼아라. 도쿠가와가 평생 지키려고 애쓴 것은 신뢰였다.

- 충성심이 높은 직원에게는 권력을, 충성심은 약하나 활용가치가 높은 직원은 급여를 많이 주되 요직에는 임명하지 않는 인사관리 방법을 채택하라.

- 여론에 귀 기울이고 여론을 최대한 활용하라.

- 권력자의 심리를 읽고 이에 맞게 대처하라.

- 부하들 간에 교묘한 파벌을 형성하여 상호 견제하게 하라.

- 건강에 주의하라. 최고경영자가 건강하지 못하면 정확한 판단을 내리리가 어렵다.

- 최고 경영자에게 친구란 필요 없는 존재이다. 단지, 부하직원만 있을 뿐이다.

- 자신의 후계자를 시대상황에 적합한 인물로 선정하라.

▣ 차례

1. 도쿠가와의 인간학과 경영철학

2. '운'과 어떻게 맞서야 하는가

3. 사람을 알아야 사람을 부릴 수 있다

4. 후계자 선택이 경영자의 능력을 결정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간경영

도몬 후유지 지음 / 이정환 옮김

작가정신 / 2000 / 240쪽 / 8,000원

신뢰를 CI로 삼은 개인과 조직의 경영방법

어느 경영잡지가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을 대상으로 전국시대 무장 중 후계자로 어떤 타입의 무장을 선택하겠는가?’ 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는데 도쿠가와가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왜 이처럼 최고경영자들은 후계자로 도쿠가와의 타입을 바라고 있을까?

아마 도쿠가와를 지지하는 최고경영자들은 기업을 260년 동안이나 안정상태로 유지할 수 있었던 도쿠가와의 경영방법과 인간성에 매력을 느껴서일 것이다. 도쿠가와의 위대한 점은 그가 자신의 불행한 경험을 사회에 대한 적대감으로 변환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고생을 하면 그 고생을 더욱 강조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게 된다. 그런데 도쿠가와는 결코 자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인질로 지내던 시대에도 의연한 태도를 보였을 뿐 불평이나 나약한 말을 하여 주위의 동정을 사려하지 않았다.

도쿠가와가 평생동안 지키려 애쓴 것은 신뢰였다. 이를 현대적으로 말한다면 신뢰를 기업의 CI로 삼았다는 말이다. 이것은 그의 젊은 시절부터 긴 세월에 걸쳐 축적된 가치관으로 상황변화에 대응하여 갑작스럽게 나타난 것은 아니다. 노부나가가 죽을 때까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동맹을 결코 깨지 않았던 일은 그의 신뢰에 대한 한 단면을 보여준다.

도쿠가와는 신뢰라는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위기가 닥치더라도 신뢰를 잃는 일 만큼은 절대 하지 않았다. 또한 가신들과도 강한 신뢰감으로 결속하여 다른 다이묘 가문에서 함부로 얕볼 수 없게 하였으며, 가신들로 하여금 도쿠가와가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책임지고 유지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도쿠가와가 에도 성(城)에 입성할 당시에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패권에 대한 야망이 있었다. 그러나 도쿠가와의 최측근들은 그런 도쿠가와의 마음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미카와의 보잘것없는 호족 아들이 엄청난 야망을 가지고 이 나라에 군림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그들은 어째서 계산에 밝은 신흥 관료들이 자꾸 등용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으며, 도쿠가와가 지향하는 새것에 대해 집요하게 반대하는 고루함을 내보였다.

도쿠가와는 에도를 정비할 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리하여 새로운 인물의 발탁과 등용에 열정을 쏟았으며 오래된 가신들 중에서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즉, 자기 개혁이 가능한 사람만 등용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도쿠가와에게 가장 고민스러웠던 문제는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는 충성된 낡은 부하들, 자기 개혁을 할 수 없는 인물들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사회적 정세 변화에 따라 최고경영자가 무엇을 요구하며 어떤 능력을 요구하는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부하들은 이미 뒤처진 부하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쓸모없는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도쿠가와는 결코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그들을 퇴장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는 그 처리를 자신과 히데타다, 이에미쓰 등 3대에 걸쳐 시행토록 함으로써 결코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게 했으며 도쿠가와를 신뢰하는 그들의 마음에 금이 가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도쿠가와는 조직의 경영체제를 유지하는 방법으로써 분단정책을 사용했다. 즉 머리와 몸을 분리하여 스스로는 일선에서 물러나 다양한 두뇌들과 경영정책를 세우는데 주력하였으며, 자신의 후계자인 아들을 경영일선 책임자로 임명, 입안된 경영정책 등을 책임지고 집행하도록 하는 경영의 이원체계를 사용했다. 또한 부하들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도 이원적인 분단정책을 사용했는데,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부하들에게는 권력은 주되 급여는 적게 주었으며, 반면 충성심은 다소 약하나 머리가 뛰어나고 활용가치가 높은 인물에게는 급여는 많이 주되 절대 요직에 임명하지는 않는 인사 방법을 활용했다.

'여론'이야말로 도쿠가와 최대의 무기

도쿠가와에게는 여론을 무시하면 반드시 패한다는 뿌리깊은 신념이 있었다. 도쿠가와가 여론을 의식했던 행동 중에는 노부나가와의 연합군이 다케다 가家의 본거지를 공격하였을 때, 자결한 다케다 가쓰요리의 머리를 발로 걷어차고 채찍으로 때리는 노부나가와는 달리 정중하게 두 손으로 받쳐들고 그의 명복을 빌어 준 모습에서 그런 면모가 잘 드러난다. 이런 행동은 자신의 부하뿐 아니라 다케다가 유신들의 마음을 흔들어 후일 다케다의 수많은 유신들이 도쿠가와의 부하가 되어 충성을 바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도쿠가와는 늘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 방법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한 무기가 바로 ‘여론’이었고 여론이라는 무기를 가장 잘 활용한 전쟁의 예가 세키가하라 싸움이었다. 세키가하라 싸움은 도쿠가와가 죽은 히데요시의 본처를 편들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반해 적장인 미쓰나리는 히데요시의 첩이었던 요도기미 편을 들었다. 현대 사회로 치면 도쿠가와는 ‘본처파’ 였고 미쓰나리는 ‘첩파’였다고 할 수 있다.

상속문제가 얽혔을 때 사람들은 어느 쪽 편을 들까? 도쿠가와는 싸우지 않고 이기려면 어느 쪽을 편들어야 하는지 잘 읽고 있었다. 즉 본처를 소중히 여긴다는 태도를 사람들에게 알린 것이다. 히데요시의 은혜를 입은 수많은 다이묘들이 도쿠가와 편에 선 이유는 미쓰나리가 미웠기 때문이 아니라 도쿠가와 쪽으로 돌아선 여론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권력자의 심리를 읽어라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먼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에 절대로 서두르면 안된다.”

닛코의 도쇼 궁에 남아 있는 도쿠가와의 유명한 말이다. 이 말은 도쿠가와의 삶과 일맥상동한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2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깨진 적이 없어 전국시대의 미담으로 알려져 있는 노부나가와 도쿠가와의 동맹에는 도쿠가와의 이런 생각이 절실하게 배어 있다.

도쿠가와는 그 당시 권력자였던 노부나가가 자신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노부나가의 집요한 성격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도쿠가와가 이마가와 가家에 인질로 있었을 당시 노부나가의 성을 공격한 일 등 다섯 가지 사건을 노부나가가 잊지 않고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들은 모두 노부나가 쪽에서 볼 때 가슴 아픈 것이었다. 도쿠가와 스스로도 마음에 걸리는 점이었으나 그런 기색을 드러내면 노부나가가 의식하고 이에 대처할 것이기 때문에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다만 마음속으로 항상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덴쇼 7년(1579년)에 노부나가의 강요에 못이겨 도쿠가와는 아내를 살해하고 그 이듬해에는 장남인 노부야스에게 자살을 명령했다. 노부나가의 딸이자 자신의 며느리인 고도쿠의 허위 밀고 때문이었으나, 아직은 노부나가와 맞설 입장이 못되는 도쿠가와는 눈물을 머금고 두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과거의 다섯가지 사건을 노부나가가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또 한 가지, 도쿠가와가 노부나가에게 신경을 썼던 점은 노부나가의 강한 자존심과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이것은 노부나가의 콧대가 높아서만은 아니었다. 노부나가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사이에서 뛰어난 인물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그런 사고 방식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보통사람이라면 자신의 능력이 뛰어날수록 겸허한 행동을 한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자존심이 강했던 노부나가가 에치젠의 아사쿠라가를 공격했을 때에는 적 앞에서 도망치는 꼴을 도쿠가와에게 보였다. 노부나가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더구나 노부나가군을 구한 것은 동맹자인 도쿠가와였다. 또 아네가와 싸움에서도 실질적으로 승리를 안겨준 것은 도쿠가와군이었다. 노부나가군은 이때 아사쿠라와 아사이의 연합군에 한때 본진을 돌파당했다. 이것도 노부나가에게 모욕적인 경험이었다.

도쿠가와는 나가시노 싸움에서 이 두 사건에 대한 보복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때 구원을 부탁한 노부나가군은 평상시라면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사흘에 걸쳐 느릿느릿 행진했다. 도쿠가와 쪽에서 보면 나가시노 성이 함락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기 때문에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여유있게 도쿠가와의 옛 거점인 오카자카 성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부하들에게 통나무와 밧줄을 짊어지게 하고 느릿느릿 행진했다. 노부나가의 부하들 조차도 왜 이렇게 느긋한지 이해할 수 없다고 속삭일 정도였다.

물론 이때 부하들에게 가져가게 한 통나무와 밧줄이 일종의 방어선 역할을 했고 3천 명의 소총부대가 위력을 발휘하여 다케다군은 궤멸상태에 이르렀다. 이것은 완전한 노부나가의 승리였다. 그러나 도쿠가와는 노부나가의 태도는, 이 싸움이 자신의 싸움이 아니라 도쿠가와의 싸움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즉 노부나가는 도쿠가와에게 무슨 일이든 좀더 확실하게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라는 일종의 경고를 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덴쇼 10년(1582년), 도쿠가와는 노부나가와 협력하여 가이 국의 다케다 가쓰요리를 섬멸했다. 그러나 이때 노부나가는 출전하지 않고 거의 모든 일을 아들인 노부타다에게 맡겼다. 이 또한 능력 있고 가정교육도 잘 받았다는 칭찬이 무성한 도쿠가와의 장남, 자살한 노부야스에 대한 대항심 때문이라고 도꾸가와는 생각했다.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살해되는 변을 당했을 당시, 도쿠가와는 노부나가의 성에 인사차 머무르고 있다가 급히 이가의 산을 넘어 귀환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 이가의 험준한 고개를 넘어 이세의 바다를 바라보다가 마음이 확 트이며 무엇인가가 시원스럽게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노부나가에게 억눌려 있던 응어리였다.

그는 노부나가의 생애 동안에 또다시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비극과 같은 사태를 당하지 않기 위해 언제나 권력자인 노부나가의 심리상태를 읽고자 애썼으며, 그의 비위를 상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먼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에 절대로 서두르면 안 된다”는 말에 나오는 ‘무거운 짐’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다. 도쿠가와 쪽에서 볼 때 무거운 짐은 의심할 바 없이 노부나가였다.

교묘한 파벌 만들기

흔히 정치가의 필수조건으로 세력과, 재력, 지지받을 수 있는 정책을 꼽는다. 도쿠가와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에게 이 세가지 조건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면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민중에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부분은 정책이다. 하지만 실현 능력이 따라주지 않는 정책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실현 능력은 그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에 달려 있다. 도꾸가와 시대의 지지자는 민중이 아니라 다이묘였다. 지지하는 다이묘가 부족하면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그래서 패권자들을 파벌을 만들었다.

노부나가, 히데요시, 도쿠가와 세 사람 중에서 파벌 만들기에 가장 광분했던 사람은 히데요시였다. 출신성분이 나빴던 히데요시는 지지세력이 없었다. 그래서 재력을 이용해 파벌을 만들었다. 그는 다이묘들뿐 아니라 귀족들에게도 돈을 뿌렸다. 그렇게 파벌을 만들면서도 늘 불안해했다. 돈으로 만든 인간관계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도구카와는 정책을 내세웠다. 그는 시대를 앞서가는 선견지명과 사람의 심리를 읽는다는 점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또한 재력도 풍부했다. 세력은 배후에 장로격인 실력자가 있어야 구성된다. 도쿠가와 시대에는 실력자들이 모두 세력이 없었다.

“사람은 자신을 생각해주는 사람에게는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오히려 신경을 많이 쓴다”는 말이 있다. 즉 자신을 알아주고 원하는 사람은 외면하고 자신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거나 무시하는 사람에게 다가간다는 뜻이다.

도쿠가와는 사람의 이런 심리를 멋지게 활용했다. 그는 항상 자기자신에게 비싼 값을 매겼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재력과 정책, 그리고 어느 정도의 세력까지도 겸비한 그를 매수하려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이다. 다이묘들 쪽에서 먼저 도쿠가와의 신뢰를 얻고 싶어했다.

히데요시는 자신을 팔아 다이묘들의 충성심을 사려고 했지만 도쿠가와는 가능하면 자신을 팔지 않고 그것을 손에 넣었다. 이것이 경영자로서 히데요시와 도쿠가와의 실력차이였다.

도쿠가와는 선택과 억제의 명인이었다. 그는 가까운 자보다 먼 자를 선택하여 가까운 자의 질투심을 일으키는 식으로 사람의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또한 선택받은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를 분명하게 구분해 파벌을 조장했다. 당연히 다툼이 있고 불만이 쌓였다. 하지만 그것은 도쿠가와에 대한 불만이나 반항심이 아니라 선택받은 자에 대한 적대감이었다. 이것이 다음에는 반드시 선택받아야겠다는 오기를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도쿠가와에 대한 충성심으로 표현되었다. 이런 관리가 260년에 걸친 도쿠가와 주식회사의 기초가 되었다.

조심성이야말로 장수의 비결

전국시대 세 명의 패권자인 노부나가와 히데요시, 도쿠가와는 각자 선배의 정책을 이어받아 역할 분담을 했다. 노부나가의 역할은 옛 일본을 붕괴시키는 파괴의 역할이었고, 히데요시는 새로운 일본을 만드는 창조와 건설의 역할을 맡았으며 마지막으로 도쿠가와는 그것을 정비하고 장기화하는 유지, 관리의 역할을 담당했다.

세 사람이 한 일과 그 건강법을 연결해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보인다. 지금도 큰 사업을 하는 최고경영자에게는 건강관리가 매우 중요한데, 세 사람의 사망 나이는 노부나가가 49세, 히데요시가 62세, 도쿠가와가 75세다. 세 사람 중 노부나가는 운동으로 건강을 유지하려고 했고, 히데요시는 주로 온천요양을 즐겼으며 도쿠가와는 건강요법으로 매사냥과 의료요법을 병행했다고 한다.

도쿠가와는 죽과 보리밥을 즐겼다. 소화가 잘되고 영양가가 높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여름철에는 보리밥을 많이 먹었다. 그 당시 의사들 사이에도 보리밥이 설사를 멈추게 하고 위장을 튼튼하게 해주며 열과 땀을 물리친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미 도쿠가와는 경험을 통해서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제철이 아닌 음식은 무척이나 조심하였다. 어느 해 겨울 노부나가가 이 추운 겨울에 진귀한 것을 얻었는데 한번 먹어보라고 부하를 시켜 복숭아를 보내왔는데 자신은 이런 진귀한 음식을 먹을 정도로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고 하면서 완곡하게 거절했을 정도다.

‘건강과 조심성’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몸이 허약해져서 열이 높고 사고력이 흐려지면 당연히 결단을 내리기 어려워 자칫 실수할 가능성이 높다. 심신이 지쳐 있으면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결론을 내리기 쉬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고경영자의 건강은 매우 중요하며, 최고경영자가 자신의 건강을 위해 매사에 조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장사까지 한 축재 능력

도쿠가와가 사망했을 때, 그가 갖고 있던 재산은 토지 외에 금은 200만 냥, 다도 도구 2만여 점, 의류와 목화, 비단 등을 포함한 포목류 170상자 등 엄청난 양에 달했다. 도쿠가와는 쌀을 매점매석하기 좋아해서 쌀값이 떨어지면 대량으로 사들였다가 값이 올랐을 때 내다 팔았는데 그로 인해 많은 수익을 올렸다.

공교롭게도 노부나가,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 세 사람은 모두 아이치 현 출신이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그 당시 인물로는 드물게 뛰어난 국제성과 경영감각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인데, 특히 새로운 지식을 도입하고 기술혁신을 추진하는 모습은 훌륭했다. 세 사람 모두 경제인의 의견을 무척 존중했다.

노부나가나 히데요시는 장사에 직접 손을 대지 않았지만 도쿠가와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소장하고 있던 수입품은 모두 무역거래를 통해 직접 거두어들인 것이다. 그러한 그의 경제감각은 지독한 인색함으로부터 비롯된다. 도쿠가와는 종이 한 장도 아꼈으며, 음식이 짜서 도저히 밥을 먹을 수 없다는 시녀들의 불평에 요리책임자를 불러 야단을 치는 대신 계속해서 짜게 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지출에 대해 인색했다.

그는 전쟁을 하기 직전에 대량으로 납을 사들여놓고, 전쟁을 시작해 자신을 위해 전쟁을 준비하는 다이묘들에게까지 비싼 값으로 납을 팔곤 하였다. 성의 증축을 위한 공사를 다이묘의 자발적인 봉사 형식으로 진행시키는 과정에서 미리 매점매석한 값비싼 돌을 돌담에 이용하도록 해 다이묘들로 하여금 억지로 구입하게 만들었다는 일화는 장사에 대한 그의 탁월한 감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도쿠가와에게 친구는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도쿠가와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전혀 없었다. 나이 차이를 무시한 친한 관계를 친구라고 한다면 동맹관계에 있던 노부나가 정도겠지만 도쿠가와는 노부나가를 무척 부담스러워했기 때문에 친구라고 표현하기는 적합치 않다.

두 사람의 권력 차이가 컸으므로, 표면적으로는 동맹자라고 해도 도쿠가와가 볼 때 노부나가는 분명히 상위에 위치한 존재였다. 즉 주군에 해당하는 존재였다. 그 즈음의 도쿠가와는 약소 경영자였기에 대기업으로 발전하고 있는 노부나가 주식회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히데요시와는 어떤 관계를 유지했을까?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가신이다. 노부나가와 동맹관계인 도쿠가와 쪽에서 보면 그는 가신그룹에 해당한다. 그래서 도쿠가와는 처음부터 끝까지 히데요시에게 그런 태도를 보였다. 노부나가가 살해된 이후 도쿠가와는 어쩔 수 없이 히데요시의 가신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지만 마음속으로는 줄곧 히데요시를 경멸했다. 권력 차이 때문에 허리를 굽혔을 뿐이다.

도쿠가와가 친구를 만들지 않은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도쿠가와의 인생철학으로 볼 때, 친구만큼 믿을 수 없는 존재는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란 대체 어떤 존재일까?’ 도쿠가와는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그는 특히 금전관계가 얽히면 우정은 쉽게 깨져버린다는 사실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결국, 필요한 것은 부하이지 친구 따위는 단 한 명도 필요없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하 역시 필요한 존재일 뿐 믿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도쿠가와의 그러한 생각은 그의 이런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물은 배를 띄워주지만 한편으로는 배를 뒤집기도 한다.”

도쿠가와는 부하를 감동시키는 명인이었지만 그것은 겉으로 나타난 것일 뿐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다만 보통사람과 비교할 때 표층이 워낙 두껍기 때문에 부하들은 그의 속마음을 간파할 수 없었을 뿐이다. 도쿠가와는 부하에게 절대로 사랑을 주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늘 냉정한 시선을 유지하면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고독한 일면이다. 하지만 이것은 도쿠가와뿐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산 노부나가나 히데요시,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모리 모토나리 등도 마찬가지였다. 전국시대의 리더들에게는 고독을 어떻게 견뎌내느냐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들은 산꼭대기에 홀로 서 있는 한 그루 소나무처럼 외로운 상태에서 거친 바람을 견뎌냈다. 그런 고독을 견디지 못한 자는 뒤처질 수밖에 없었고, 그 즉시 부하의 반격을 받았던 것이다.

태평성세의 지도자로 어울리는 인물은?

도쿠가와는 중신들에게 누가 후계자로 어울리는지를 자주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의견은 분분했지만 넷째 아들인 다다요시의 이름이 가장 많이 거론되었다. 도쿠가와도 다다요시에게 마음이 기울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일본의 평화를 유지해나갈 지도자로 과연 전쟁터에서 용맹을 떨치던 다다요시가 적당한 인물일까 하는 의문을 던지곤 했다. 결국 후계자는 히데타다로 결정됐는데, 히데타다의 너그러운 인품과 부하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면을 높이 샀던 것이다.

사실 히데타다가 완벽한 후계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쇼군이 어느 정도 능력이 부족해도 좋은 참모들만 있으면 얼마든지 훌륭한 경영을 해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결국 그렇게 결론을 내린 것이다. 도쿠가와는 한 사람이 모든 것을 통제하면 노부나가와 같은 결과를 맞게 되는 것이라, 여러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집단 지도체제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특히 평화로운 시기에는 그런 정치가 바람직할 것이라고 믿었다.

후계자를 선택하고 나니 지도자를 보좌할 참모들의 적성이 문제가 되었다. 도쿠가와는 평화시의 참모에 대해서도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때로는 자신이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비정하게 전체를 정리할 수 있는 근성이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기준을 적용하자 두각을 나타낸 적임자가 혼다 마사노부와 그 아들 마사즈미였다. 두 사람은 비정한 야망가로 불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정이 많으면 참모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도쿠가와의 생각이었다. 여기서 도쿠가와가 낙점한 혼다 부자는 히데타다가 아닌 히데야스를 후계자로 추천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쿠가와는 비록 그들이 히데타다를 추천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를 보좌하기에 적합한 참모라고 판단했다. 참으로 도쿠가와만이 가지고 있는 예리한 통찰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리더십

기업에서 자주 문제가 되는 것이 사장과 회장의 권한이다. 전 사장인 회장이 완전히 물러나 사장실에 걸려 있는 사진 속에만 존재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여전히 결정권을 가지고 있을 경우 여러 가지 반응이 나타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 아들인 2대 쇼군 히데타다의 관계는 바로 그런 ‘회장’과 ‘사장’의 관계였다.

히데타다는 도쿠가와가 슨푸에서 짜낸 많은 안건을 직접 실행했다. 그러나 그 실행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새로운 기준을 새로이 첨가한다. 우선 공식적인 문서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이름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도쿠가와 히데타다라는 이름만 사용했다. 또한 슨푸의 지시가 실정에 맞지 않는 부분은 수정하여 실행했다. 그 밖에 안건을 실행할 때에는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고 사적인 감정에 얽매이는 특례조항은 일절 만들지 않았다.

언뜻 보면 특별한 내용이 없는 듯 보이지만 이 방침대로 진행하다 보면 도쿠가와 막부의 위세는 더욱 강해지고 그에 따라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이름은 더욱 유명해진다.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름이 아닌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이름이 더 유명해지는 것이다.

그 밖에 히데타다가 도쿠가와와는 별도로 독자적으로 실행한 일이 있는데 이것은 가신단의 양성이었다. 히데타다에게는 도쿠가와가 붙여준 참모가 많았다. 그들은 그대로 존중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함께 공부한 친구들을 중심으로 ‘히데타다에게 충성을 다하는 가신’ 그룹을 따로 양성한 것이다.

도쿠가와는 사람을 부리는 능력이 뛰어났지만 히데타다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능력이 뛰어났다. 지나치게 긴장한 부하가 실수를 하면 갑자기 조는 시늉을 하며 모르는 척 눈감아주었다. 그리고 부하를 부리기보다는 부하에게 부림을 당해야 한다고 늘 말하곤 했다. 또한 한번 믿은 부하는 어떤 악평이 나더라도 끝까지 믿었다. 주의해서 살펴보면 이것은 아버지 도쿠가와와 반대되는 행동이다. 도쿠가와는 사람을 일단 의심하고 부하끼리 서로 의심하게 하여 견제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히데타다가 이런 태도, 즉 초대 쇼군의 방침을 따르기는 하되 상당히 변질된 자세를 취할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자신의 가신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힘은 강력하게 그를 지탱해주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쟁 경험이 없는 세대가 늘어가면서 일본 전체가 세대교체기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히데타다는 이런 시대적 기류를 확실하게 읽고 있었다.

도쿠가와 역시 시대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평화시기에 접어든 이후 나타난 새로운 세대는 도쿠가와의 이해 범위를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었다. 도쿠가와의 입장에서는 인형이 자신의 리모콘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도쿠가와는 말년에 그런 외로움을 느꼈다.

히데타다는 사람을 활용할 때에도 매우 부드러운 방법을 사용했다. “에도 성에서 일하는 아무개는 이런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곳으로 배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중역이 이렇게 말하면 히데타다는 “그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힌 중역이 바로 자네가 아닌가? 자네야말로 다른 곳으로 배치를 받아야겠군. 결점이 있는 사람을 그런 중요한 자리에 앉힌 자네야말로 책임을 져야지”라고 응수했다. 이런 소문은 즉시 성 안에 퍼졌고 지적은 받은 무사는 온정에 감사하는 한편 중역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반성하였다.

히데타다는 “사람은 누구나 결점이 있으며 실수할 수 있지만 본인이 그 사실을 깨닫고 잘못을 고친다면 그는 이미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때는 과거의 잘못만 따져서는 안되며 오히려 앞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그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경영자 밑에 있는 직원들은 당연히 일에 대한 의욕을 갖게 되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될 것이다.

▣ 가이드북 코멘트

일본을 전란에서 평화시대로 이끌어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주된 경영철학은 신뢰라고 하는 기업 이미지를 심기에 주력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기업들이 저마다 좋은 기업이미지 심기에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경영에 있어서 기업이미지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새삼 느낄 수 있게 된다.

도쿠가와가 활용하였던 이원 경영체제는 고객의 소리를 직접 듣고 그에 합당한 경영정책을 수립하기에 가장 적합한 경영체제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 최고경영자가 정책을 집행해 나가면서 외부의 소리를 직접 듣기는 상당히 어렵다. 당장 가시적인 성과에 얽매여 외부의 소리가 차단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품이나 서비스에 고객이 맞추어 가던 시대는 끝나고 있으며, 이제는 고객의 욕구에 제품이나 서비스를 맞추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오고 있다. 따라서 각 기업의 최고경영자는 외부의 소리에 온 청각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도쿠가와가 접했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은 현장의 소리를 최고경영자에게 직접 전해주는 외부정보 창구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도쿠가와의 인간경영 방법과 경영정책등을 현재의 시각으로 재조명한 이 책은 그러한 점에서 우리의 최고경영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또한 도쿠가와가 후계자를 위하여 임명했던 참모들이나 후계자로 선정한 인물에 대해서도, 이제 2세 경영을 준비하거나 후계자 구도를 구상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영자들이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 작가정신에서 나온 다른 서적

《비전 2003》, 미치오 가쿠, 2000

《시대를 앞서간 여자들의 거짓과 비극의 역사》, 로사 몬떼로, 2000

《시대를 움직인 16인의 리더》, 게리 윌스, 1999

▣ 유용한 사이트

http://my.netian.com/~tamtam/lecture/tokuka.html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간략한 소개

http://www.interj.co.kr/history/sidaisa/n6.htm 일본 중세 시대 개관

http://www.bcline.com/~japanese/culture 일본 역사 강의

출처 : 상운교회
글쓴이 : 강인철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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