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존경하는 한경직 목사, 옥한흠 목사" |
한복협 5월 조찬발표회 오정호 목사 발제문 |
인격과 사역이 부족함 투성이인 저 자신임을 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을 기리며...”라는 주제를 말씀드리기에는 심히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탁받는 순간 정중하게 수차례 거절도 하였습니다만, 순종역시도 용기가 필요한 것이기에 오직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제가 존경하고 사모하는 고 한경직목사님과 옥한흠목사님을 사랑하는 용기하나로 이 자리에 섰음을 용납해 주시기를 이 자리에 함께 참여하신 모든 분들께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한경직 목사 지난 2000년 4월 24일, 월요일 오전 9시 저는 서울 영락교회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과 아픈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 예배는 고(故) 추양(秋陽) 한경직(韓景職)목사님의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 총회장(總會葬)으로 드리는 장례예배였습니다. 예배의 시작 한 시간 반 전부터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찬송이 생전에 한목사님을 사랑하시고 따르시던 영락교회 권사님들의 합창으로 예배당이 가득채워 졌습니다. 저는 합동교단의 목사입니다. 그런데 왜 주일사역 이후에 장례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월요일 새벽에 대전에서 서울로 달려 왔겠습니까? 그 이유는 빚진 자의 심정과 더불어 감사하는 마음이 후배 목회자인 저의 마음을 크게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빚진자의 심정이란 한경직목사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목사님께서는 한교단의 목사님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목사님이셨으며 동시에 세계교회의 목사님이셨습니다. 목사들의 목회자셨던 목사님께서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에 끼치신 영향을 저의 짧은 언어로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모이신 한국교회 지도자분들과 성도들 모두 마음깊이 공감하게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특별하게 사랑하셨기에 한경직목사님이라는 은총의 선물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은혜임이 분명합니다. 저도 한목사님의 인격과 사역의 수혜자임을 평소 인식하고 있습니다. 한목사님으로부터 사숙(私淑)의 은혜를 간직한 저 자신은 한 목사님과 동시대를 살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고맙고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빚진자의 심정 또한 적지 아니합니다. 사역을 이어가는 영적 후배로서 또한 사역의 계승자로서 한목사님을 비롯한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님들과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빚진 자의 심정이 저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픈 마음으로 참석하였다는 의미는 숭고한 사역을 이루신 목사님의 모습과 연약한 저의 모습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아픔은 많이 아파할수록 더욱 희망적이란 사실도 저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한목사님께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날은 4월 19일 수요일 오후였습니다. 한목사님의 소천소식을 접하고 저의 마음속에는 여러 가지 형언할 수 없는 감회가 밀려 왔습니다. 그때 기록해 놓은 글을 옮겨 적어 봅니다. 한국교회의 산증인께서 드디어 천국에 입성하셨구나 ! 한목사님을 주님께서 초청하셨구나 ! 한목사님에 대한 개인적인 이미지 물욕이 없으신 어른 영성과 지성이 조화롭게 이루어진 인격 덕스러운 지도력 신사참배문제로 참회하신 분 목회적 안목과 시대에 대한 분별력을 소유하신 분 평화주의자 교육에 대하여 남다른 탁월한 식견을 소유하신 분 진실한 복음전도자 한목사님의 인자하신 모습을 뇌리에 떠 올리는 순간 이러한 단어가 연이어 나타났습니다. 한목사님께서 소천하신이후 영락교회주보에 실린 글입니다.(2000.4.23 NO.2556) “한경직원로목사의 소천 -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민족복음화와 이웃사랑의 평생을 헌신하시던 한경직 원로목사께서 4월 19일 오후 1시 15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원로목사님의 겸손과 청빈, 뜨거운 이웃사랑의 정신을 기억하며, 기도에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한목사님의 생애 전체를 압축하면 예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이었습니다. 따라서 한목사님의 지도력을 표현하자면 예수님을 닮은 사랑의 지도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해방 전에는 고아들을 품으셨으며, 한국전쟁중에는 전쟁고아와 미망인 병든 자를 위한 실천의 최선봉에 언제나 서 계셨습니다. 밥 피얼스(Bob Pierce)선교사와 함께 세운 월드비전은 지금도 국내와 해외에서 사랑의 봉사자로 힘차게 사역하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는 북한의 교회와 동포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시던 목사님의 모습과 목소리가 마치 도장 새기듯 깊이 박혀 있습니다. 한목사님의 어록(語錄)을 살펴보면 한목사님의 인격의 고상함과 민족복음화의 열정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적인 개신교 사상이 교파분열을 초래하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명분없는 분열이나 교권을 탐한 인간 집단의 분열은 곤란합니다. 이번 대회에서는 200개교단과 25개 단체가 단합해 교회 일치의 가능성을 높이겠습니다.”(1984년 8월 한국교회 100주년선교대회에 앞서 열린 취지 설명회에서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면서) “인간의 삶에는 믿음 소망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중에서도 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진정한 세계평화는 원수를 용서하시는 종교적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독일처럼 남북한도 멀지 않아 통일될 것이라고 믿습니다.”(1992년 4월 29일 베를린에서 템플턴상 수상소감 중) “백두산의 튼튼한 소나무로 북녘 고향땅에 교회 지어 예배드리는 것이 나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1997년 96회 생일을 맞은 한목사가 국민일보와의 인터뷰 중 고향을 그리며) 하나의 뿌리로부터 출발한 통합교단과 합동교단이 안타깝게 나누어진 이후에 통합교단은 경이롭게도 한 번도 분열을 경험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합동교단은 원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차례 분열을 거듭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열이 나타날 때마다 저를 비롯한 모든 합동교단의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마음속에는 “한경직목사님 같으신 교단의 원로가 계셨더라면...” 가슴 아픈 탄식이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교회 김상복목사님께서는 “주기철목사와 한경직목사는 한국교회사상 가장 청청한 두 소나무 같은 분들이시다” 한목사님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의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이제 한목사님께서 유산으로 물려주신 사상과 사역을 짧게나마 정리하겠습니다. (유인물 참고) 1. 백성을 끌어안은 영적지도자 (p.1) 2. 연합과 일치의 사표 (p.2) 3. 인격목회와 청빈목회의 대명사 (p.2) 4. 물량주의를 극복한 목회자 (p.3) 5. 북한교회 재건을 위해 기도로 앞장 선 목회자 (p.3) 6. 먼저보고, 멀리본 목회자 (p.4) 7. 자기반성의 목회자 (p.4) 8. 메시지의 Text와 Context의 이상적인 조화를 이룬 목회자 (p.5) 사목자곡(思牧者曲) - 추양 한경직목사님을 통해 드러난 복음의 위대성 (pp.6-7) (한목사님의 장례식 참석이후 평소 한경직목사님의 주님 사랑, 양떼 사랑의 목회와 고매한 인격목회를 흠모하는 마음으로 기록한 내용, 한목사님 추모 사이트에 올린 글) 옥한흠 목사 은보(恩步) 옥한흠(玉漢欽)목사님을 기리는 목회자와 성도들은 한국 각 곳에 나아가 세계 동포교회와 가까이는 일본, 대만, 중국을 비롯한 유럽과 북미와 남미 교회들까지 포함합니다. 여러 해를 가까이서 모신 제가 경험한 옥한흠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 지도자로서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일관성있게 보여주셨습니다. 옥목사님은 가식과 떠벌리는 것을 매우 경계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외식주의에는 모든 이가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축소시키거나 짐짓 외면하지 않으시려는 결단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옥목사님의 태도를 가리켜 완벽주의자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자신과 사역에 대하여 무서우리만큼 정직하게 대면하시는 모습은 어떤 이들에게는 흠모함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두려움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비교를 통한 자기비애의 감정으로 나타납니다. 한경직목사님께서 우리민족가운데 한국교회가 뿌리를 내리며 교회가 세워지는 기초를 잡은 사역자로 자리매김하셨다면 옥한흠목사님께서는 한목사님을 비롯한 전시대의 아름다운 신앙적 전통을 계승할 뿐 아니라, 전세대가 경험하지 못한 예측불허의 변화가 급속히 이루어지는 디지털 시대를 아우르는 교회와 성도의 성숙한 모습을 갖추게 하는 일에 횃불을 드신 목회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경직목사님을 수식하는 단어가 인격, 청빈, 애국애족, 교회연합, 민족복음화라면 옥한흠목사님을 수식하는 단어는 평신도를 깨우는 목회자, 교회의 내실을 다지는 목회자, 굳어진 교회체질을 참신하고 역동적으로 변화시키는 목회지도력, “식은 밥은 다시 내어놓지 않는다”는 추상같은 설교관, 광인론(狂人論)과 성경에 기초하여 시대의 변화를 주도하는 교회론, 국제제자훈련원을 통한 목회자의 의식을 재조정하는 사역, 아름다운 세대교체로 한국교회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유인물참고) 1. 고민하는 목회자들의 귀착 목회자 (p.8) 2. 개혁자로서 고민을 가진 목회자 (p.8) 3. 양떼의 사랑을 삶으로 천착시킨 목회자 (p.9) 4. 치열한 메신저 (p.10) 5. 한국교회와 사회에 새로운 이미지를 던진 지도자 (p.10) 목사님의 사랑의 그늘이 오늘의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p.12) * 제가 미국 유학할 때 목회자를 대상으로 강의를 한 일이 있습니다. 그 주제가 ‘옥한흠목사의 지도력과 목회현장’이었습니다. 강의가 끝난 후에 여러분이 저에게 와서 “너무 축복된 사역자”라고 저를 부러워하였고, 참석하신 어떤 분들은 “그렇게 가까이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담임목사인 옥목사님을 존경할 수 있는가?” 라고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그때 저의 대답은 오직 한마디였습니다. “제가 강의 시간에 표현한 이상으로 옥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지금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을 뿐 아니라, 그 농도가 더욱 짙어지고 넓어지고 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을 기리며 “내가 존경하는 한경직 목사, 옥한흠 목사“ 대전 새로남교회 오정호 목사 I. 인격목회와 청빈목회의 대명사 한경직목사 1. 한경직목사의 생애 한경직목사의 생애의 기본은 하나님 사랑과 나라사랑이며, 그의 생애의 목표는 민족을 복음화하는 것이었다. 한목사는 영락교회를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 중에 한 교회로 성장시켰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며, 복음으로 민족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불타는 사명감과 소명감으로 목회에 임했다. 한목사는 자신의 목회를 시작할 때부터 세 가지 목표를 교회의 불가결의 사업으로 삼았다. 즉 전도사업, 교육사업, 그리고 봉사사업이었다. 그의 목회사역은 한국교회의 위상을 높였으며, 많은 목회자들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한경직목사는 1902년 12월 29일(음)에 평안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에서 한도풍과 청주 이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곳은 평양동북쪽으로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이었으며, 마펫(Samuel A. Moffett)에 의해 복음이 전해진 지역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육촌형인 한병직목사의 영향으로 기독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한병직목사는 평양신학교 3회 졸업생으로 한국 장로회 초대 목사 중 한명이다. 그는 1916년 평양 대성학교 출신의 홍기도 선생의 도움으로 오산학교에 진학하게 되어 남강 이승훈장로와 조만식장로로부터 철저한 애국 애족의 교육을 받게 되었다. 1925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졸업 후 미국에 유학, 엠포리아대학·프린스턴신학대학을 졸업하였다. 1945년~1972년 영락교회 목사, 1972년~2000년 영락교회 원로목사를 지냈고 1948년 엠포리아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숭실대학이사장을 거쳐 서울여자대학·영락상업고등학교·대광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홀트양자회 이사장이 되었고, 이후 1972년 아시아연합신학대학원 이사장·기독교방송 재단이사장, 1983년 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사업협의회 총재, 1989년 기독교선명회 명예이사장, 1989년 대표회장, 1998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명예회장을 지냈으며 같은 해 건국공로장을 수여받았다. 연세대학교 명예신학박사, 숭실대학교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2년 세계적인 종교계 상인 템플턴상을 수상하였다. 저서에 《건국과 기독교(1949)》 《한경직목사 설교집(전12권)》 《내일을 사는 인생》 《사도 바울에게 배운다》 《길》 등이 있다. 2. 백성을 끌어안는 영적 지도자 한경직목사는 오산학교에서 조만식장로와 이승훈장로에게 영향을 받은 애국 애족 사상을 그의 목회전반에 적용 실천하여, 사회봉사와 피난민들의 눈물을 애국애족으로 승화시킨 긍휼목회를 펼쳐나갔다. 그는 오산학교에서 배운 것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나라가 망했으니 나라를 되찾는 것이 한국청년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애국사상과 둘째, 민족을 부흥시키려면 과학을 배워야 한다는 것과 셋째, 애국심과 과학적 지식만으로는 안되며 근본적으로 먼저 사람이 바로 되어야 하기에 예수를 믿게 해야 하는 것이다. 한경직목사는 일제의 신사참배 거부의 이유로 신의주 제2교회를 강제사임한 후, 남신의주 보린원에서 고아들을 보살피며 해방 전까지 긍휼사역을 진행하였다. 그곳에서 한목사는 자연인으로 생활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고아들에게 몸소 보여주며, 청빈, 노동, 봉사, 기도의 시간을 보냈다. 월남 후에는 후암동에 자리 잡고 있는 일본인 시설 가마꾸라 보육원을 인수하여 영락 보린원의 간판을 걸고 고아구호 사업을 펼쳤다. 그 후, 6.25 전쟁으로 전쟁 미망인이 많이 발생하자 피난지인 부산에서 1957년 다비다 모자원을 세워 운영했다. 환도후인 1954년 다비다 모자원이 서울로 옮겨 성북구 돈암동에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노인복지시설인 영락경로원을 1952년 성북구 돈암동에 설립하였으며, 1957년에는 재단법인 영락원을 인가받고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풍산리에 이전하여 영락 경로원을 정착시켰다. 한목사는 어려운 이웃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그들의 보금자리와 삶의 터전을 만들어 주었다. 한목사는 은퇴 후에도 재단 산하 기관들을 순회하며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은퇴 후 남한산성 골짜기에서 기도할때마다 보린원 아이들과 노인들을 위해 기도를 쉬지 않고 했다는 주위사람들의 증언이 있다. 50년 전에 한목사가 지역사회와 소외된 이웃을 향해 실현한 사회봉사는 지금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강력하게 요청받고 있는 주제가 되었다. 3. 연합과 일치의 사표 한목사는 교회연합운동에 앞장섰다. 1956년 한국기독교 연합회 회장에 1983년에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사업회의 총재로 활동했고, 1989년에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 대표, 1998년에는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 명예회장으로서 교회 연합운동에 적극 앞장섰다. 교단과 교파들의 다양한 신조나 교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목사는 한 민족과 세계를 복음화 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하나 되어서 서로 협력하고 연합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한국전쟁 때에 ‘대한기독교구국회’를 결성하여 전란 중에 신앙집회를 통해 민심을 안정시킨 동시에 피난민들을 위한 전도와 구호사업에 힘을 썼다. 그리고 ‘엑스플로 74대회’,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대회’ 등 수 많은 연합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개신교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을 함께 치른 강원용목사는 한목사 만큼 한국교회를 조화롭게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분은 없을 것이라고 평했다. 한목사는 항상 열린 마음과 열린 자세로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화합과 하나됨의 큰 힘이 되었다고 평했다. 민족과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서는 교회의 연합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몸소 실천한 한목사의 주장이 지금도 절실히 요구되며, 한목사와 같은 탁월한 인격과 사역을 바탕으로 한국 교회 연합을 이끌 교계 지도자가 그리운 시대가 되었다. 3. 인격목회와 청빈목회의 대명사 한경직목사는 평생 청빈한 삶을 살았다. 한평생 자신의 이름으로 땅 한 평, 집 한 채 사본 적이 없고, 저금통장 하나 없었다. 어려운 시절에도 먹을 것이 생기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경직목사는 수많은 해외여행에서 선물로 받은 것 중에 기본적인 약품 몇 개 외에는 어떤 외제품도 반입하지 않아 세관에서도 그의 수화물조사를 항상 면제할 정도였으며, 영락교회에서 사택을 지어주었으나, 너무 크고 사치하다 하여 사양하고 남한산성의 아주 좁은 공간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수많은 집회에서 강사로 수고하고도 사례금을 일체 받지 않았고, 막대한 돈으로 구제와 선교를 위해 지출하는 대형교회 담임목사였지만, 저금통장하나 없이 일생을 보냈다. 한목사의 청빈은 없는 가운데서 가난한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있는 가운데도 불구하고 있음을 포기하고 자족생활을 했다. 한목사는 참된 목사는 가난해야 한다. 이것은 생활을 제대로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목사는 돈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 안되며, 검소한 생활은 목회자에게 가장 안전한 일이며, 참되게 사는 것과 돈과는 언제나 상대적이기에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한목사의 청빈한 삶의 동기와 헌신의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었다. 진실한 헌신을 실천한 청빈한 삶과 생활은 배금사상이 만연한 한국 사회와 황금 우상을 섬기는 교회와 교역자로 인하여 때로 전도의 길이 막히는 오늘 진정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4. 물량주의를 극복한 목회자 한경직목사는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청빈한 삶을 몸소 실천할 뿐만 아니라, 목회사역에 있어서도 물량주의를 극복한 목회자였다. 한목사는 서울 수복 후 영락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1947년 1월 7일, 한국교회 최초로 2부 예배를 드린 바 있었지만, 수복이후 다시 2부 예배를 드리게 되고, 서울 환도감사예배 때는 2000명이상이 넘는 교인들이 참석했다. 영락교회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성도들로 성장해갔는데, 설립초기는 서북을 중심으로 한 평북출신 교인들이 한경직목사를 중심으로 하여 이룩된 월남교회였다. 영락교회는 이북출신들의 실향민의 한을 풀어주며, 믿음과 용기를 주는 신앙의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전쟁 이후 한국사회는 산업발전을 경험하면서 물량주의화 되어가기 시작했다. 특히, 대형교회들이 등장하면서 교인들의 예배의 편의를 돕기 위해 버스를 운행하는 일들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경직목사는 예배참석 인원 동원을 위하여 충분히 교회 버스를 운행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버스를 운행하지 않았으며, 성도들로 하여금 가까운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였다. 한목사는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전도에 앞장서며 선두적인 역할을 담당했지만, 자신의 교회를 공격적으로 성장시키는 물량주의를 극복했다. 그 힘의 원천은 엄격한 자기 절제와 한국교회 전체 유익을 위한 결단 있었고, 신앙의 힘과 윤리적 탁월성을 추구한 청교도적 자기 정화의 원리를 추구함에 있다. 5. 북한교회 재건을 위해 기도로 앞장 선 목회자 한경직목사가 북한교회의 재건을 위해 앞장 선 것은 그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하한 피난민 사역을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1945년 12월 2일에 공산주의의 박해를 피해 월남한 27명의 성도들이 한목사를 중심으로 교회 설립 예배를 드렸다. 교회 이름을 베다니선교교회로 하였고, 일본 천리교 경성분소의 신전을 개조하여 예배장소로 사용하였다. 이듬해인 1946년 경기노회의 허락으로 지명 이름을 따서 영락교회로 부르게 되었다. 영락교회의 출발은 피난민들을 중심으로 한 사역이었으며, 초창기에는 서북을 중심으로 한 평북출신들이 모였고, 그 이후에는 피난민들이 중심이 되었다. 한목사는 전란 때 기독구국회를 조직하여 나라를 위해 기도하였으며, 서울 수복이후 평양이 수복되자, 대한기독교구국단 회장의 신분으로 군복을 입고 평양에 입성했다. 그 이유는 북한에 지하에 숨어있는 기독교인들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과 북한교회재건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1.4후퇴 시에는 북한에 산재한 교인 3천명으로 원산에서 배를 태워 남하시키는 일을 담당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한목사는 북한교회 재건에 앞장섰으며, 영락교회는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지금도 북한선교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영락교회 북한선교센터에서는 북한의 교회재건과 북한의 복지시설들을 지원을 위한 다각적인 세미나와 실질적인 방안모색 등의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6. 먼저 보고, 멀리 본 목회자 한경직목사는 청년들과 젊은이들을 복음의 진리로 세워 다음세대를 준비하는 목회자였다. 그는 해방 후 이북에서 월남한 피난민 중에 많은 청소년들이 교육의 기회를 놓치고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것을 보고, 뜻 있는 인사들과 함께 1947년 서울 신문로에 있는 피어선성서학원에서 대광중고등학교를 개설하고 중등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여성교육기관이었던 보성여자중고등학교를 1950년에 재건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53년에는 영락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59년에는 학교법인 영락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고등교육기관이던 숭실대학을 1954년 영락교회에서 재건하고 초대학장으로 취임했다. 그 후 숭실대학 이사장을 비롯해서 서울 여자대학 이사장, 영락여자 신학교 설립자 겸 이사장, 장로회 신학대학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자신이 관계한 학교들을 크고 훌륭하게 성장시켰다. 또한 군복음화에도 앞장을 섰다. 나라 잃은 설움을 몸소 체험한 한목사는 군복음화가 애국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가장 많은 곳이 바로 군대라고 생각한 한목사는 군을 복음화하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가 복음화 되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황금어장이라고 생각했다. 한목사는 군내 많은 군인교회를 개척하여 지원했으며, 군목제도를 신설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목사는 1973년 군복음화 운동후원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이는 군복음화에 앞장선 업적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전군 신자화 후원회 발기위원회를 조직하고 초교파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이를 통해 기독교인 참모총장, 군사령관을 배출하는 등 군의 주요간부들을 복음화 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7. 자기반성의 목회자 한경직목사는 1992년 인류를 위한 영성에 공헌한 세계적인 종교인들에게 수여하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Templeton Prize For Progress in Religion)을 수상하였다. 한목사는 템플턴상 수상 이후 영락교회가 주최한 축하자리에서 자신의 신사참배를 눈물로 고백하였다. 물론 이전에도 한목사는 8,15 광복직후 영락교회 교우들 앞에서 공개적인 참회를 했었다고 한다. 한목사의 신사참배 참회고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목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고백하는 절차를 밟았다. 자신의 죄악을 밝힘으로써 한목사는 지도자로서 마땅히 가야할 길을 보여 주었다. 부득불 죄를 지었을 지라도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고 참회하며 회개하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한국교회의 도덕적인 위상과 인격적 성숙의 차원을 한층 더 높여 주었다. 한목사가 행사한 영적 권위나 지도력,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력, 그리고 한국교회 전체를 위한 큰 공헌의 가장 중요한 힘은 한목사의 윤리적인 삶에서 나왔다. 8. 메시지의 Text와 Context의 이상적인 조화를 이룬 목회자 한경직목사의 설교는 위대한 신학자의 주석 설교나 유명한 설교가의 설교보다 단순하면서도 구구절절이 골수에 사무치는 역동적인 설교였다. 한경직목사의 설교는 성경중심 설교, 즉 그리스도중심의 설교였다. 성육신의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이기에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정, 사회, 민족, 국가에 이르기까지 전달되는 그의 메시지는 영감이 있고 감화력이 있고 새 삶의 길을 보여주는 메시지였다. 무릎을 다시 세우고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며, 위로와 평강을 주고, 부드러움과 겸손의 도를 밝히는 설교였다. 한경직목사의 설교는 결코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며 실존적이며, 성도들의 삶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다. 조용하게 선포되었지만 듣는 사람들에게는 영육이 모두 표출되고 있는 듯한 신비의 설교였고 영혼의 설교였다. 한경직목사의 설교는 신행일치의 삶이 묻어난 간증설교이기에 감화력이 더욱 컸다. 그의 설교에는 그의 신학, 신앙, 인격, 생활이 모두 묻어나는 설교였다. 한경직목사는 한국교회 역사 가운데 대표적인 목사일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는 일반 사람들에게도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의 삶과 인격과 목회정신은 후배목회자들에게 거울이 되는 동시에 한국교회가 연합과 사회봉사와 다음세대를 세우는 사역을 담당해야하는 이정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신행일치의 삶으로, 자기부인과 청지기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던 한경직목사의 삶이 더욱더 그리운 시대를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향하여 은혜의 선물로 내려주신 축복이다. 추양 한경직목사가 보여 준 하나님의 사랑과 애국애족정신은 오고 오는 세대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사목자곡(思牧者曲) - 秋陽 韓景職 牧師님을 通해 드러난 福音의 偉大性 - “인간의 삶에는 믿음, 소망,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 중에서도 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진정한 세계 평화는 원수를 용서하시는 종교적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독일처럼 남북한도 머지않아 통일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말은 1992년 4월29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템플턴상(Templeton Prize) 수상 소감중의 일부입니다. 수상자는 가을볕이라는 호를 가지신 추양 한경직 목사님 이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한 세기가 시작된 1902년 12월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3남1녀중 장남으로 출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새천년의 봄날 4월 19일 오후에 평생을 섬기고 사모하던 주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영락교회의 부활절 주보 교회 소식란에는 한목사님의 소천 소식이 부활주일 광고 바로 이래 부분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민족복음화와 이웃사랑에 평생을 헌신하시던 한경직 원로 목사께서 4월 19일 오후 1시 15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원로 목사님의 겸손과 청빈, 뜨거운 이웃 사랑의 정신을 기억하며 기도에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봄기운이 무르익던 지난 4월 24일 오전 9시 영락교회 본당에서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總會葬)으로 한목사님의 장례예배가 엄숙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집례는 총회장으로 봉사하시는 이규호 목사님, 기도는 한국 대학생 선교회 김준곤 목사님, 찬양은 윤학원 장로님의 지휘로 헨델의 메시야 중에서 “할렐루야 코러스”가 한목사님께서 수십년동안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시던 영락교회 석조건물에 울려 퍼졌습니다. 설교는 “영원한 안식”이라는 제목으로 예장 총회장을 역임하신 옛 중국선교사로 명망이 높았던 방지일 목사님께서 옛 믿음의 동역자를 기리는 심정으로 간절하게 주님의 뜻을 뭇 조객들에게 전하셨습니다. 기독교 장로회의 강원용 목사님과 기독교 성결교회의 정진경 목사님께서 애잔한 추억을 더듬으면서 조사를 하셨습니다. 축도는 기독교 감리교회의 박대선 목사님께서 맡으셨습니다. 장례 집행위원회 위원장이면서 영락교회 담임 목사님으로 봉직하시는 이철신 목사님께서 한목사님의 행적보고와 인사순서를 담당 하셨습니다. 秋陽 韓景職 목사님께서 소천 하셨을 때 여러 언론매체는 다양한 기사 표제어를 통해 한목사님의 생전의 높은 뜻을 기렸습니다. “청빈 한평생, 목자의 표상” “한국교회의 상징, 세계가 인정하는 성자” “피난민교회 밀알로 조국을 섬기다” “집 한 칸, 통장하나 안 남긴 고난의 민족 위한 등불의 삶” “낮은 곳 보듬은 섬김의 종” “한국교회의 산 증인” “부귀와 명예를 하나님의 나라 창고에 저축한 사람, 신앙인의 표본이 되다” “한국교회 큰 지도자, 발전과 연합에 공헌, 남 위해 삶을 사신 이 시대의 사표” 여러 가지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동원한다 할지라도, 한 목사님의 주님사랑, 교회사랑, 민족사랑의 발자취를 다 표현할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한목사님의 삶은 한국교회의 역사로 직결됩니다. 한 세기를 민족교회와 함께 걸으시면서 교회와 사회 각 분야에 남기신 훌륭한 업적은 이루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목사님은 영락교회라는 한 지역교회의 목사님이기에 앞서 한국교회의 목사님으로 뭇 사람들에게 인식되었습니다. 그의 삶에는 한국의 시대적인 아픔과 고뇌가 짙게 묻어 있었습니다. 특히 남한과 북한의 단절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평생 가슴에 담고 살아야 했습니다. 한목사님의 평생소원, 평생기도제목은 북한과 남한이 복음안에서 하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민족복음화의 열정을 소유하였습니다. 시대를 바라보는 혜안으로 남보다 앞서 민족 복음화 운동을 주창하고 최일선에서 섬겼습니다. 한국 교회발전의 계기가 된 지난 73년, 77년 및 한국기독교 백주년 여의도 기념집회를 주도하였습니다. 특히 군복음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불타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었으며 학원복음화에도 남다른 열정을 나타내셨습니다. 이렇듯 신․불신간에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목사님이셨지만, 그는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결코 있지 않았습니다.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 수상을 축하하기 위하여 마련된 축하예배시에 목사님의 인사말은 그의 겸허한 모습을 가감없이 알려주었습니다. “먼저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이런 죄인을 하나님이 사랑하고 축복해 주셔서 한국교회를 위해 일하도록 이 상을 주셨습니다.” 추양 한경직 목사님의 일생에서 우리는 복음의 위대성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 세기전 벽안의 선교사님들을 통하여 평안남도 한 시골 소년의 가슴에 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복음은 목사님의 삶에서 꽃피고 열매맺어 한국과 세계의 한경직목사님으로 태어나게 했습니다. 과연 그의 삶은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해석될 수 있는 삶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은 바뀌어 은총의 계절 5월의 첫날이 되었습니다. 우리 앞에 선뜻 다가온 화창한 계절은 자기를 위해 분주하기 쉬운 유혹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영계(靈界)가 혼란한 때에 한경직 목사님을 어엿이 세웠던 복음의 능력이 그리운 때입니다. 목회자다운 목회자, 성도다운 성도가 그리운 때입니다. 할 일 많은 이 강산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을 소유한 제2의 추양 한경직 목사님이 더욱 그립습니다. ◉덧붙임글 : 저는 평소 한경직 목사님의 주님사랑, 양떼사랑의 목회와 고매한 인격목회를 흠모해왔습니다. 지난 장례식 참석이후 부족한 글이지만 큰 스승 목사님에 대한 후배 목회자의 사목자곡(思牧者曲)입니다. 저는 새로남교회가 복음의 위대성과 교회의 영광을 간직한 교회로 주님 오시기까지 서 있기를 소원합니다. II. 한국교회의 미래를 열어간 목회자 옥한흠목사 1. 이 시대의 진정한 목회자 필자는 1985년부터 1992년까지 만 7년을 사랑의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면서 옥한흠목사의 목회사역에 동참했다. 그리고 그 이후 사랑의교회 후원으로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전 새로남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지금까지 옥한흠목사를 목회의 멘토로 삼고 있다. 옥한흠목사는 한국복음주의 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로서 또한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신학도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로 각인되어 있다. 그는 평신도를 깨우는 제자훈련사역으로 사랑의교회를 이 시대에 건강한 모델교회로 세웠으며, 제자훈련을 통해 한국교회의 건강성을 제고하였으며 평신도를 깨우는 목회사역에 크게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 목회세습의 문제로 기독교에 대한 국민 여론이 좋지 않은 시점에, 조기은퇴를 통한 아름다운 세대교체를 실시하여 참다운 목회자상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그의 모범적인 세대교체는 한국교회 내 만 아니라, 한국사회에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옥한흠목사의 목회, 제자훈련, 설교, 인격, 사회참여 등 다양한 분야들은 목회자와 신학도 등에 의해 계속 연구되며 존경받고 있다. 또한 그는 한국교회사에서 목회적인 중요한 획을 그은 사역자이기도 하다. 별세(別世)의 목회자로 알려진 고 이중표목사는 한국교회에 영향력을 끼친 목회자로서 조용기 목사와 옥한흠목사를 내세운다. 60, 70년대 개발의 바람 가운데 영․육간에 지친 수많은 성도들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전했던 사역을 조용기 목사가 감당했다면, 80년대 후반부터 값싼 구원론를 극복하고 한국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화시켰다는 이유에서 옥한흠목사를 이시대의 진정한 목회자로 내세웠다. 2. 개혁자로서의 고민을 가진 목회자 하나님의 은총 속에 한국교회는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부흥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 부흥은 양적으로는 증가와 질적인 성숙의 균형이 요구된다. 이러한 양과 질의 불균형이 심화된 형상을 직시하며 한국교회의 삼허 현상, 즉, 허수(虛數), 허세(虛勢), 허상(虛像)의 문제점을 직시했다. 한국교회가 갖는 통계의 오류와 정직성의 결여가 세상 속에서 제대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무기력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든다는 것을 안 옥목사는 교회의 진정한 개혁에 앞장섰다. 그는 진정한 부흥은 한 영혼의 가치를 바로 인식하는데서 부터 시작되며, 참 교회는 회중의 크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실수(實數), 실세(實勢), 실상(實像)으로 돌려놓는 신행일치운동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삼실(三實)운동의 긴급성을 역설하며 실천의 장으로 옮겨 놓는데 힘썼다. 옥한흠목사의 한결같은 고민은 한국교회의 순결성과 갱신이었다. 이를 위해서 옥한흠목사는 1996년 3월 장로교 합동교단의 젊은 개혁주의 목회자를 중심으로 교회갱신협의회를 조직하여 그가 속해 있는 교단이 더 이상 부패하지 않도록 하고, 거룩함과 순결성 회복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노력했던 목회자였다. 옥한흠목사로 대표되는, 교갱협에서는 2001년 예장합동교단의 86회 총회 때부터 금권, 타락 선거의 대표처럼 여겨졌던 총회장 선거를 제비뽑기를 제안하여 실천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이전부터 관행적으로 움직이던 교단 정치 관여자들은 힘을 많이 상실하였고, 비록 임시적인 대안이지만, 현재까지 총회가 금권 타락 선거의 오명을 벗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제비뽑기 제도 역시 적지 않은 문제들을 안고 있지만, 금권 타락 선거를 막고 교회를 깨끗하게 지킬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되었다. 또한 대전 중앙교회에서 열린 2006년도 예장합동 제 90회 총회에서는 옥한흠목사를 중심으로한 교갱협에서 한국교회에서 불건전한 집단으로 판정된 박윤식의 평강제일교회가 서북지역 노회를 통해서 몇몇 총회 관계자들과의 밀약을 바탕으로 총회정신을 유린하며 총회로 가만히 들어오려는 것을 온 몸을 던져서 막기도 하였다. 옥한흠목사의 개혁적인 성향은 한국 교회에 만연하고 있는 교회세습의 문제에 대해서 개혁적인 자세로 처리하였으며, 목회자의 정년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인 정년의 보장이 아닌 교회와 성도를 위한 사역적 측면을 고려하여 조기 은퇴하여 교회와 성도를 위한 결단을 보여주었다. 담임목사 정년연장과 목회세습의 문제로 한국교회가 지탄받고 있는 현실 속에서 옥한흠목사는 개혁자로서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고, 오직 교회와 성도를 위해 선택된 후임 목사를 담임목사로 새우고 만 65세가 된 2003년 12월 21일에 은퇴하여 한국 사회의 귀감이 되었다. 3. 양떼의 사랑을 삶으로 천착시킨 목회자 옥한흠목사는 평신도의 재발견을 통해 평신도들이 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을 본격적으로 열었으며, 교회 내 소그룹 사역을 정착시켜 양떼들의 행복을 도모한 목회자이다. 그는 교역자와 평신도가 신분상 차별되지 않으며 그 본래의 의미가 주님을 모신 선택받은 자, 성도, 제자, 믿는 자의 전공동체, 전 교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임을 밝혔다. 그러므로 평신도는 교회의 객체가 될 수 없으며 그들은 정기적으로 예배석에 나와 경건한 의식에 잠깐 감명 받고 돌아가는 관람객이나 교회운영에 보탬을 주는 손님이 아니라, 교회의 주체이며 그들 모두가 머리 되신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간파하였다. 이 소명을 위해 성령은 각자에게 맞는 은사를 주어 몸의 지체로서 그 기능을 다하게 하신다. 그는 평신도들을 사역의 주체로 이끌어내어 그들의 은사를 극대화하여 교회에서 봉사하며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행복한 사역자로 설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평신도를 깨우는 그의 사역은 이제까지 내려온 전통적인 한국교회의 목회의 패러다임에 큰 변화를 주는 개혁적인 사역이기도 했다. 종교개혁이후, 교회 내에서 만인제사장직을 공인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평신도들이 사역의 객체로 남아 있는 현실에서, 옥한흠목사의 평신도를 깨워 그리스도의 제자 삼는 운동은 교회론의 재발견이라는 열매를 맺게 하였다. 옥목사는 개척교회부터 철저하게 지키고자 했던 것은 예배의 본질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목사와 평신도가 같은 눈높이에서 은혜를 나누기 위해 둘 사이의 거리감을 줄이려는 것이었다. 그는 평신도를 교회의 주체로 바라보면서, 잠자는 평신도를 깨우길 원했고, 훈련된 평신도가 잠자는 한국교회를, 무너져가는 세상을 지탱하는 이시대의 일꾼을 양육하길 원했다. 1981년 9월 개척 때부터 사용하던 ‘강남은평교회’를 ‘사랑의 교회’로 개칭하였고, 명실상부 한국 교회의 복음주의전통을 지키며, 변화된 삶으로 이 시대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만들어 나갔다. 처음에 순장 한명을 위해 기도하던 옥한흠목사의 제자훈련 사역을 통해 내외적인 수많은 도전가운데에서 은혜롭게 교회가 성장하였다. 4. 치열한 메신저 옥한흠목사는 성령이 의미하는 메시지를 회중에게 전하기 위해서 설교자의 자세에 대해서 강조한다. 그는 설교는 불변한 진리를 가변적인 인격을 가진 설교자가 전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바울이 말씀과 사람을 보배와 질그릇으로 비유한 말씀처럼 진리는 결코 변치 않지만 그 진리를 담아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는 설교자의 인격은 가변성이 많다. 이런 이유로 설교자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더 잘 받아 낼 수 있도록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불완전한 인격이 완전한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고통이며, 짐이기 때문에 설교자는 부단한 노력을 기우려야 한다. 옥목사는 바른 설교는 바른 설교자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설교자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준비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오정현목사는 옥한흠목사의 설교의 특징 중에 첫 번째로 ‘절대적인 시간투자’를 꼽았다. ‘옥목사님의 설교의 전개력과 묵상력, 적용성과 논리성은 옥 목사님이 설교준비에 들이는 엄청난 시간 투자를 이해하지 못하면 모두 껍데기에 불과하다. 옥 목사님의 설교준비는 ‘삶 자체가 설교의 중심이다’라는 말에서 그 핵심이 들어난다.’고 했다. 오정현목사는 설교자로서의 옥한흠목사의 대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먹이를 찾지 못하면 죽는 다는 절박한 생존 본능이야말로 설교를 준비할 때의 옥 목사님의 모습이다. ‘내가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사랑의교회는 죽는다’는 인식이 단순한 머릿속의 관념이 아니라, 굶주린 사자와 같은 생명을 건 생존본능처럼 옥 목사님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다.’ 옥목사는 한평생 하나님 앞에서 바른 목회자로, 바른 설교자로 서기 위해 몸부림친 우리 시대의 목회자이다. 5. 광야에 서 있는 목회자 1978년 9명의 평신도와 함께 교회 개척을 시작한 옥한흠목사는 처음부터 제자훈련을 시작하였다. 제자훈련을 시작하면서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제자훈련 시킬 생각을 하지 않고, 교회의 주춧돌이 될 사람들에게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다 바쳐서 옥한흠목사는 사역하였다. 그는 2004년 7월 7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25년간 사랑의 교회를 개척하고 사역하는 동안 의도적으로 제자훈련에 대한 집중과 목양 이외에는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교단적인 정치활동과 대 내외적인 집회에도 최소한의 성의만 보였을 뿐, 모든 사역을 단 몇 사람의 제자훈련생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옥한흠목사의 제자훈련 목회 30년은 교회 공동체를 이끄는 강력한 정신으로 자리 잡고, 평신도 역시 세상으로 보냄 받은 강한 소명감을 가진 청지기임을 깨닫고 모든 성도들이 교회의 주체라는 분명한 자의식을 갖게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기초를 세우기 위해서 옥한흠목사는 건강을 필두로 포기할 것이 여러 가지였다. 그는 오직 제자훈련에만 매달려야만 했다. 그가 가진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와 같이 사역하였고, 또한 지배하는 권위가 아니라 섬김과 모범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보여주는 사역자였다. 그는 목회현장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교회를 향한 사역의 확산을 위하여 정진하고 있다. 이 시대의 모든 성도들이 그 부름 받음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가르치고 있다. 옥한흠목사는 제자훈련의 시스템을 한국교회에 정착시킴으로써 잠들어 있는 평신도를 깨우고 한국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옥한흠목사는 제자훈련의 궁극적인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제자훈련은 예수를 닮고 그들 따르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는데 그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신자의 자아상을 확립하는 것이다. 예수처럼 되고 예수처럼 살기를 원하는 신앙인으로 만드는데 있다. 옥한흠목사는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동시에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다”라고 말하면서 모든 성도들이 예배와 경건 생활을 기초로 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제자훈련이라고 말한다. 옥한흠목사는 사랑의교회를 통해 얻어진 제자화의 유익을 혼자만 독차지 하려하지 않고 한국의 모든 교회가 제자화를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칼 세미나와 모든 자료를 공유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서 새롭게 CAL세미나(Called to Awaken the Laity Discipleship Seminar)를 개최하였으며, 매회 450명 이상의 목회자들과 400개의 교회가 참석하고 있다. CAL세미나 이후에도 목회에 적용하며 상호보완 할 수 있도록 CAL-NET을 조직하여 전국적으로 제자훈련 사역이 가능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옥한흠목사가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모범이 되어준 것은 그가 가진 리더십을 후임 오정현목사에게 이양한 것에도 있다. 은퇴하기 3년 전에 2001년 7월 22일 정기 당회에서 65세 시무연한에 관한 의결을 하고, 2003년 3월 16일 정기당회에서 오정현목사를 위임목사로 청빙키로 하고 2004년 1월 14일 옥한흠목사 원로 목사추대 및 오정현목사 위임 예배를 드렸다. 이러한 리더십의 이양은 교계신문 뿐 아니라 일반 사회 신문에도 대서특필되었으며 한국교회의 미래를 열어준 위대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효과적이고 은혜로운 권위 이양은 사랑의교회를 더욱더 성장할 수 있도록 했다.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리더십 교체가 교회의 성장을 가져 온 것이다. 옥한흠목사님의 리더십 이양을 통해서 사랑의 교회 뿐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가 부흥의 가능성을 맛보게 했다. 이는 한국교회에서 목회철학을 통한 리더십 이양의 성공의 한 케이스로 자리매김 할 수 있으며 한국 교회의 미래를 여는 기념비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옥한흠목사는 끝없는 자기성찰과 고뇌 속에서 자기개발에 전력 추구한 목회자의 사표이다. 그의 평신도를 깨우는 사역, 제자훈련을 통한 건강한 교회를 세우며 제자훈련을 시스템화, 교갱협을 통한 부패한 교회정치를 정화한 한 일, 그리고 아름다운 세대교체로 한국교회에 이정표를 제시해 주었다. 옥목사의 목회자로서의 한 평생 삶은 후배 목회자들에게 평생의 귀감이 되며, 하나님께서 옥목사를 한국교회에 허락하신 것은 한국교회를 향하신 은총이리라. 목사님의 사랑의 그늘이 오늘의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목회의 스승이신 옥한흠 목사님께! 저희들의 목회의 스승이시며, 목양일념의 사표가 되시는 목사님! 목사님을 모시고 마음 설레임으로 사랑의 교회에서 사역하였던 저희 모두는 목사님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그리고 마음 가득한 감사를 드립니다! 목사님의 품을 벗어나 전국각지 사역의 현장에서 목양하는 동안, 한 시도 목사님의 가르침과 친히 보여주신 목자의 본분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충성된 제자는 스승의 삶을, 자신의 삶을 통해 오늘, 현장에 재현하는 것처럼 목사님의 건강한 교회에 대한 비전을 저희들도 온 몸과 마음으로 전수받아 목양의 현장에 뿌리 내려 꽃 피우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에는 원함이 있었지만 자주 찾아뵙고 말씀을 듣고, 아뢰는 기회가 너무 부족하였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심정이 있는 때에 좋으신 하나님께서 복된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저희 모두는 목사님께서 보수신학의 태두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부터 명예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심이 너무나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목사님의 영광은, 저희 모두의 영광입니다. 또한 한국교회의 영적인 지각변동을 가져온 ‘평신도를 깨운다’의 영문판 출간은 한국교회 제자훈련사의 쾌거라 생각합니다. ‘평신도를 깨운다’가 한국교회 목회자와 평신도들에게 건강한 교회론과 평신도신학의 자양분을 공급한 것처럼 영어권의 성도들에게도 새로운 안목과 거룩한 충격을 가져올 것을 확신합니다. 제자훈련 목회철학을 지향하는 저희들도 가슴 뿌듯함을 느낍니다. 인생의 축복은 의미 있는 만남을 통하여 열매를 맺는 것처럼, 사도바울의 생애가 복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해석이 불가능한 것처럼, 저희들의 목회와 사상은 목사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미 해석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저희의 긍지요 높은 자존감입니다. 오늘의 귀한 자리를 통하여 목자의 내리사랑을 체험케 하신 목사님 내외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머지않아 목사님의 사상을 체득하고, 목회현장을 경험한 사랑의교회 출신 동역자들과, 한국강산의 교파를 초월한 목회자들과, 일본과 대만의 현지 목회자들, 오세아니아 그리고 미주 동포교회 목회자들을 통하여 평신도를 깨우는 함성이 곳곳에서 메아리치리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목사님! 초지일관 달려오신 길에 때로는 남 모르는 아픔과 시련도 있었겠지요. 건강이 소진되셔서 온 가족과 교우들이 눈물로 기도한 때도 있었지요.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평화의 때에는 평화로움으로, 오직 주님의 교회사랑, 양떼사랑을 묵묵히 실천해 오신 목사님! 수년 전 부터는 교단의 갱신과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하여 남은 열정을 불태우고 계시는 목사님, 더욱 강건하셔서 주님 주신 높은 뜻을 이루시기를 소원합니다. 저희 모두는, 목사님의 충성스런 제자들과 동역자로 언제나 함께 할 것입니다. 좋은 목사님, 이 시대의 변화를 읽고 영적인 대안을 고민하는 목사님, 언제나 소년의 순수함 가운데서, 개척자의 투지와 선구자의 고뇌를 잃지 않으시는 목사님, 옥한흠 목사님을 이 시대에 내려 주신 생명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Soli Deo Gloria!" 주후 2001년 7월 5일 사랑의교회 출신 목회자 일동 올림 (오정호목사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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