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요약

[스크랩] 기 도 (필립 얀시 지음)

강인철 2009. 7. 9. 08:39

기도

필립 얀시 지음

청림출판 / 20076/ 614/ 19,800

 

저자 필립 얀시

상처 입은 영혼의 대변인이자 특출한 기독교 작가. 성경과 세상, 인간의 연약함을 꿰뚫어보는 통찰력, 일상에서 하나님의 흔적들을 찾아내는 예민함, 어려운 신학적 주제들을 쉽게 풀어내는 솜씨로 이 시대 최고의 복음주의 작가라는 찬사를 듣고 있다. 한때 교회에 대한 실망과 그리스도인들의 위선에 질려 잠시 교회를 등진 적도 있었지만, 그 기간 동안 책을 통해 탁월한 기독교 사상가들을 만남으로 인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았다. 글이 갖는 위력을 깨달은 그는 보고 쓰는 일을 업으로 삼는 저널리스트가 되었으며,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직설적이고 예리한 문제제기와 하나님의 은혜에 침잠케 하는 글로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낳았다. 휘튼대학과 시카고 주립대학을 졸업하고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편집장을 지냈다. 그의 저서 중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는 ECPA가 선정한 올해의 책에 선정된 바 있다. 현재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역자 최종훈

번역가, 자유기고가, 《목회와신학 기자와 《프리즘》 편집장, 도서출판 좋은씨앗 대표를 지냈다.『일상의 치유』, 『예수처럼 경영하라』 등을 번역했다.

 

Short Summary

2006년 《퍼블리셔스 위클리 종교 부분 올해의 책 2007년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Book Awards 수상작인 이 책에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상적이면서도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도를 그 특유의 관점과 역량을 발휘해 탐색하고 있다. 기도와 관련한 고금의 책들을 살피고 평범한 사람들의 고민을 듣고 각 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고하면서 기도가 무엇인지, 왜 기도해야 하는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왜 응답 없는 기도는 왜 그렇게 많은지 기도를 둘러싼 의문들을 역사와 신학, 신앙적 측면에서 답하고 있다.

 

1하나님과 한결같이 동행하는 삶에서는 하나님은 누구신지, 우리는 그분 안에서 누구인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계속 교제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에서는 1장의 논의를 더 발전시켜 기도는 하나님과의 동역이라고 말한다. 위대한 구원 사역에 인간을 동참시키길 원하시는 하나님이 인간의 기도를 사용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3기도의 언어에서는 예수님의 기도와 바울의 기도를 구체적인 예로 들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한편, 대부분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는 하나님의 침묵을 다루고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표현한, 하나님이 부재하는 것 같은 이 경험이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시간임을 보여준다. 이어 4기도의 딜레마에서는 응답 없는 기도와 질병의 치유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5기도의 실제 부분에서는 기도가 나 자신, 이웃,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영향을 주는지 모색하고 기도의 본질은 결국 대화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도의 방법론에 관한 이야기는 넘쳐나지만 홍수에 마실 물이 없듯 정작 기도해야 할 이유와 의미에 대해서는 듣기 어려운 오늘날, 이 책은 하나님이 기도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소중하게 여겨야 할 까닭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자고 정중하게 우리를 부르고 있다.

 

차례

1부 하나님과 한결같이 동행하는 일

1 우리 안의 깊은 갈망

2 하나님의 눈으로 보라

3 내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4 하나님은 누구신가

5 하나님과 함께

 

2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6 왜 기도하는가

7 하나님과의 끝없는 씨름

8 하나님과의 동역

9 무엇이 달라지는가

10 기도가 하나님 뜻을 바꾸는가

11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3부 기도의 언어

12 막힘없이 기도할 수 있다면

13 기도의 문법

14 기도의 문이 막힐 때

15 침묵의 소리

 

4부 기도의 딜레마

16 응답 없는 기도, 누구의 탓인가

17 응답 없는 기도, 미스터리와의 동거

18 기도와 질병의 치유

19 무엇을 위해 기도하란 말인가

 

5부 기도의 실제

20 기도 그리고 나

21 기도 그리고 이웃

22 기도 그리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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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하나님과 한결같이 동행하는 일

기도란 모든 이들이 체험하는 지극한 행복과 끔찍한 고통, 초자연적인 권능과 서정적인 친밀감들에 인간이 보이는 특별한 반응이다. - 패트리샤 햄플

 

내 모습 그대로 주님 앞에

참다운 내가 주께 고하게 하소서. 그리고 참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모든 기도보다 앞서야 할 기도가 바로 이것이다. - C. S. 루이스

 

기도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말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낮은 게 아닌가 싶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여기에 제대로 답할 수 있다면 굳이 말을 많이 하지 않더라도 깊은 기도를 드릴 수 있다. 기도는 방어벽을 바짝 낮추고 다른 누구의 모습도 아닌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이미 모든 걸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최대한 보여드리는 과정을 말한다.

 

복음은 도덕적 품성에 형편없이 못 미치는 인간들에게도 깊은 안식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물 같아서 차츰 아래로 흘러 결국 가장 낮은 곳까지 이른다. 우리의 결점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어떻게 은혜를 실감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당시 세리와 창기, 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손을 내밀었다. 반면, 신앙적으로 한 경지를 이루었다고 자부하던 이들은 주먹을 단단히 말아 쥐었다. 선물을 받는 데 필요한 조건은 손을 펼치는 것, 그것뿐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51:17). 나 개인적으로도 여러 차례 이 확실한 말씀으로 인해 힘을 얻었다. 그러나 누구나 이렇게 자신의 결점으로 인한 상한 심령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도대체 언제까지 하나님 앞에서 실패를 거듭해야 한단 말인가? 주께 다가가기 위해 누구나 공통적으로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모습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참다운 자아를 드러내고 진실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죄의식

기도에 관해 가르치는 책들은 한결같이 고백하는 행위를 강조한다. 하지만 허울을 벗어던지고 진리의 밝은 빛에 자신을 내어맡기며 진실한 자아를 드러내는 과정을 더할 나위 없이 고통스럽게 느끼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고백이 그토록 필요하다는 것인가? 이는 초라하고 비참한 느낌을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 새카맣게 잊고 지내던 실체를 상기하려는 몸부림이다.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순간부터 우주는 질서를 회복한다. 고백이란, 피조물이 창조주를 바라보면서 자기 자리를 제대로 잡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일 뿐이다.

 

고백은 신학적인 중요성을 떠나서 정신적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는 척도다. 여느 남편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부부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억눌러놓는다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니며 도리어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라는 진리를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배웠다. 대수롭지 않은 상처나 오해라도 몇 주, 몇 달 동안 방치해두면 어디부터 손대야 좋을지 모를 만큼 심각한 상태로 증폭되기 일쑤다. 살갗에 가시가 박힌 정도는 쉽게 치료할 수 있지만 깊은 곳에 생긴 감염을 무시하면 건강, 더 나아가 생명까지 위험할 수 있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신앙적인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허상을 여지없이 깨트리신 예수님을 가능하면 멀리하고 싶어 했다. 진실은 그토록 뼈아픈 법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단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치료는 불가능하다. 주님은 인간의 실체를 낱낱이 꿰뚫고 계신다. 인간은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받아들일 때에야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외쳤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139: 23-24). 스스로 속이고 속는 악순환을 극복하려면, 모든 걸 아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이기심과 교만, 거짓과 무정한 마음 따위의 죄악을 직시해야 한다.

 

나는 영적으로 발전이 없어서 낙담할 때마다 바로 그런 좌절감이 발전하고 있다는 증거임을 새삼 떠올린다. 주님이 무엇을 바라시는지, 그걸 채워드리기에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더 선명히 인식할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도 멀리 떨어져 나왔음을 더욱 잘 감지하게 되는 법이다. 자신의 연약함을 절감하고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이 되는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를 향해 돌이키기에 가장 적합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무기력

노르웨이 신학자 할레스비는 무기력을 하나님이 인정하는 대표적인 기도의 마음가짐으로 꼽는다. 말로 표현하느냐 마느냐는 인간의 관심사일 뿐, 하나님께는 의미가 없다. 오직 무기력한 인간만이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15:5)고 말씀하셨다. 지극히 명백한 사실인 동시에 인간들이 한사코 부정하려는 진리다.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말한다. 기도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온전한 빛 속을 걸어가며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저는 인간이고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일이다. 바로 그 순간 변화가 일어난다.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된다. 인간은 가끔 실수를 저지르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 역시 가끔씩 용서를 베푸는 창조주가 아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정의가 잘못됐다. 인류는 총체적으로 죄인이며 하나님은 총체적으로 사랑이시다.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105:4). 누구와도 비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의사 앞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가장 적절한 행동은 상처를 보여드리는 것뿐이다.

 

겸손

고대 그리스 로마 문명권에서는 성취와 자기 신뢰를 높이 평가하고 찬양하며, 겸손의 가치는 낮춰 보았다. 현대사회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대니얼 호크는 인간의 모든 문제는 신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에서 시작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강력한 개선책이 필요한데, 내게는 기도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께 다가가는 데 겸손이 그토록 중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진실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기준으로 자신이 우주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겸손이다. 당연히 인간의 왜소함이 분명해지는 동시에 하나님의 광대하심이 드러나지 않겠는가.

 

 

회의

밭에서 보화를 찾은 농부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가장 짧은 축에 든다. 나는 이 비유를 설명할 때마다 보물이 땅에 묻혀 있었고, 이를 캐내려는 노력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기독교 신앙 가운데 상당 부분은 눈에 띄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기 예수를 구유에 숨기셨고, 굴곡진 역사를 살았던 유대인들이 작성한 거룩한 문서들 속에 메시아를 감추셨다. 그뿐 아니라 아예 한술 더 떠서 별달리 거룩할 것도, 뛰어날 것도 없는 교회라는 조직으로 덮어두셨다. 허다한 인간들은 물론이고 하나님 자신도 처절한 고통을 겪었다면,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을까? 차라리 타락한 천사들을 구원하실 것이지 어째서 인간이라는 하찮은 종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일까? 지구라는 별 위에서 수십 년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영원이라는 시간을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될지가 정녕 결정된다는 말인가?

 

일본을 방문했던 때, 한 목회자가 내게 물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99퍼센트의 일본인들에 대한 고민이었다. 단지 예수님에 대해 무지하다는 이유로 지옥에 떨어져서 영원히 고통받아야 하는가? 신학자들 가운데는 죽은 뒤에 다시 한 번 구원받을 기회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 않은가? 심지어 베드로전서에는 예수님이 옥에 있는 영들에게 말씀을 전파하신다는 불가사의한 구절까지 있다. 이 목회자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생각에 잠겨 혼자 중얼거리듯, 창조주께서는 선인과 악인에게 골고루 햇살을 비추시며 누구도 멸망당하길 원치 않으신다고 말했다.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는 원수들을 위해 가장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다. 그러나 끝까지 구원의 손길을 물리치는 이들에게는 마지못해 말씀하셨다. 네 뜻대로 될지어다.

 

마침내 오랜 대화를 마무리하며 말했다.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마지막 때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서지 못할 겁니다.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도 없고요. 그렇지만 인류 역사를 매듭짓는 순간에는 하나님의 자비가 공의보다 앞설 겁니다. 욥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관찰과 논쟁이 아니라 만남을 통해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회의론자들에게 묻고 싶다. 볼테르, 데이비드 흄, 버트란트 러셀 등 이름난 불가지론자들이 하나님께 제기한 문제 가운데 하박국서, 시편, 전도서, 예레미야 애가, 특히 욥기 같은 성경책에 들어 있지 않은 게 있는가? 그곳에는 상처와 배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 보살펴보시지 않는 건 고사하고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 등 인간이 겪는 뼈아픈 갈등이 모두 담겨 있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런 고민과 비난이 모두 기도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기도는 회의와 불만을 꺼내놓고 그것들을 눈앞이 캄캄해질 만큼 환하게 쏟아지는 진실의 빛에 비춰볼 무대를 제공한다. 설령 진실을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신뢰하는 법은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다. 기도를 들으시는 분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갈수록 회의는 다른 모습으로 부상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비유의 핵심을 놓치고 있었던가! 농부는 밭에 묻힌 보화를 찾기 위해 수고했지만, 결국은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들였다. 그렇다면 농부가 땅 파는 일을 고단하게 여겼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직

기도는 아무에게도 말 못하는 비밀의 방문을 조금씩 열어나간다. 방안에는 외부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틀어막은 수치심과 후회가 가득하다. 하지만 엄연한 사실은, 주님이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이다. 어쩌면 기도하면서 생각하고 느끼는 하나하나가 말보다 더 절실한 기도일지도 모른다. 사실 모든 생각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떠오르고 사라진다. 주님 앞에서 그 비밀들을 쏟아내면 신비롭게도 영혼을 찍어 누르던 힘이 스르르 풀리면서 어느 결에 그것들이 사라져버린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내 친구가 편지를 보내왔다. 철들고 나서부터 줄곧 슬픔이나 두려움, 분노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을 품고 산다는 걸 부끄럽게 여겨왔다고 했다. 물론 억눌러 보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부정적인 느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진실이 아니었다. 분명히 느끼고 있으면서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가장하는 꼴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친구는 결론을 내렸다. 하나님 앞에서 그런 짓을 벌인다는 건 시간낭비더라고. 그래서 부끄러워하거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기보다 차라리 부정적인 감정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정직하게 내어놓기로 했어. 원색적인 감정들을 아예 갖지 않는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지. 나라는 인간이 본래부터 그렇게 만들어졌거든. 감성이 풍부한 편이지. 그러니 어쩌겠어. 감정이 요동치는 한복판에서도 제대로 균형을 잡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지. 하나님이 가르쳐주실 거라고 믿어.

 

노출

기도할 때 가장 깊고 은밀한 부분까지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가? 그렇기만 하다면 참다운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그 무엇도 실체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광선을 약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빛 아래 서면 그동안 쌓아왔던 이미지와는 다른 자신과 주변 인물들이 또렷하게 보인다. 마치 발가벗고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모든 행동 뒤에 감춰진 이기적인 동기나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욕망과 야심, 완벽해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게 만드는 치유되지 않은 상처 따위는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다.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삶 전체를 들고 나와서 정결하게 씻어내고 제 모습을 되찾으라고 초청하는 안내장이다. 자신의 참 모습을 노출하는 바로 그 순간, 켜켜이 때를 뒤집어쓰고 망가진 채 버려졌던 예술작품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그토록 손대고 싶어 하시는 바로 그 걸작품이다. 삶의 시시콜콜한 구석을 모두 보여드리는 것 자체가 주님께는 기쁨이다. 진정한 자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게 하는 것이야말로 기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2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주님은 분명히 들으신다. 귀를 만드신 분이 듣지 않으실 리가 있겠는가? - 조지 허버트

 

기도가 하나님 뜻을 바꾸는가

기도란 다른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역사를 일으키는 권능이다. - 앤드류 머레이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3:6).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11:8). 이 모두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종종 독자를 헷갈리게 만드는 구절들이다. 하나님이 변치 않으신다는 구절은 이것 말고도 부지기수다. 물론 마음을 바꾸신다는 말씀도 그만큼 많다. 결코 변치 않는 주님께 기도한다는 게 대단히 역설적이라는 점에 처음으로 착안한 학자는 오리겐이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오리겐의 뒤를 따랐다. 임마누엘 칸트 같은 철학자는 인간의 기도가 거룩한 뜻을 굽게 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불합리하며 건방진 망상이라고 단정했다. 신앙이 깊었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탄원하는 기도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대로 움직이거나 마음을 정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의 관점

하지만 성경적인 역사관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며 잊지 않고 응답하시는 인격적인 분으로 보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르시는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셔서 역사하신다는 성경의 선명한 가르침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던 자크 엘룰은 기도는 산산이 깨져 흩어진 창조 세계의 파편들을 다시 끌어모아 맞춰나가는 일이다. 역사를 존재하게 하는 동력인 셈이다라고 고백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간절히 기도하며 부르짖은 뒤에 일어났다.

 

성경은 시종일관 하나님을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인간으로부터 깊이 영향을 받으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 147:11) 하나님이시다. 동시에 예언자들이 지적하듯, 불순종하는 자녀들 때문에 속을 태우시고 인내의 한계를 느끼는 분이기도 하다. 내가 오랫동안 조용하며 잠잠하고 참았으나 내가 해산하는 여인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 42:14). 신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 또한 자녀들의 기도가 하나님과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강조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7:7).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5:15-16).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벧전 3:12).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4:2).

 

이처럼 아낌없이 주시겠다는 약속들을 제시하면서, 성경은 예언자와 사도들에게 육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심지어 주검이 다시 살아나게 해주시길 구하라고 가르친다. 사라, 리브가, 라헬, 한나, 엘리사벳은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서, 세 친구들은 불구덩이 속에서 기도했다.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통보받았을 때, 히스기야 왕은 다시 한 번 무릎을 꿇었다. 이사야가 채 궁정을 나서기도 전에,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시고 왕에게 15년의 삶을 추가로 허락하셨다.

 

반면에 기도로도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증거 역시 곳곳에 보인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멈추라고 세 번씩이나 명령하셨으며, 반역한 백성들을 경계하시려는 계획을 바꾸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처벌의 수위를 낮추신다. 요나는 이방인의 성읍에 들어가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3:4)고 선포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 구약 성경은 이처럼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셔서 뜻을 돌이키시고 예고된 징벌을 철회하셨던 사실을 네 차례에 걸쳐 기록하고 있다( 32:14, 106:45, 7:3, 7:6).

 

작업 진행중

칼뱅주의자였던 앤드류 머레이는 이런 점들을 고려해 단호히 결론지었다.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는 행하지 않으실 일들을 기도를 통해서는 행하신다. 그리고 삼위일체를 실마리로 하나님의 마음이 달라지는 메커니즘을 설명했다.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이 기도에 의지해서 아버지와 교제하고 도움을 요청했었던 건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런 주님이 이제 하나님 앞에서 변호사가 되어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관심사를 대변해주신다. 그뿐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님 또한 기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하신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8:26). 에베소서 2 18절에서는 삼위를 한꺼번에 언급한다. 이는 저(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삼위가 서로 토론하며 의견을 주고받으며 내면의 대화를 나누신다는 것이다.

 

C. S. 루이스는 기도와 관련된 의문점들을 풀어나가는 일에 쾌감을 느꼈던 듯하다. 그중에서도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기도를 듣고 반응하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매달렸다. 일본이 상하이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자 C. S. 루이스는 외국에 나가 있는 형 워렌을 위해 기도하면서 혼란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개인의 허약한 기도가 필연적인 운명이나 하나님의 섭리를 어떻게 바꿀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이 주제를 계속 추적해가면서 몇 권의 책과 수많은 논문, 편지들을 썼다. 루이스는 회의론자의 목소리로 문제를 제기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루는 일에서 제대로 아는 것도 없는, 게다가 자가당착에 빠지기 쉬운 인간의 조언을 듣고 싶어 한다는 건 천부당만부당한 생각이다. 주님이 흔히 얘기하는 것처럼 전지전능하다면 무엇이 최선인지 모르실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정말로 선한 분이라면 기도하든 말든 그 일을 행하시지 않겠는가?

 

마침내 C. S. 루이스는 인류 역사의 드라마를 작품이라는 말로 규정짓는다. 줄거리를 이루는 장면들과 전반적인 틀은 작가가 확정해놓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세부 묘사는 배우들이 즉석에서 처리하도록 만들어진 연극이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에 개입하게 하신 이유는 언제까지나 수수께끼로 남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그런 일들을 감당하게 하셨던 것만큼은 전혀 이상할 게 없다. 하나님은 권능을 행사하는 도구로 기도를 지목하셨다. 주님이 사용하시는 다른 수단들만큼이나 실제적이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방편이다.

 

시간의 한계를 초월한 복잡성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하나님은 시간의 한계를 벗어나 존재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동감을 표시했다. 인간은 한순간에서 시작된 4차원적인 우주에 갇혀 있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그렇다면 시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속성은 기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C. S. 루이스는 최종 결과를 모르고 있는 상태라면, 10시에 있었던 진찰의 결과를 위해 12시에 기도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판단했다. 결과는 분명히 결정되었다. 어떤 점에서는 모든 세상이 있기 이전에 정해진 일이다. 하지만 결정을 촉발한 요소, 즉 그런 상황이 벌어지게 만든 요인 가운데 하나는 현재 드리고 있는 기도다. 루이스는 과학에 어두운 이들보다는 과학자들이 쉽게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석을 붙였다.

 

이전의 물리학 모델들은 인과관계가 분명했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하는 모델들은 복잡성 이론과 정보이론을 추구한다. 복합적인 시스템에는 명백한 인과율을 적용하기 어렵다. 이제 사건이 벌어지는 이유와 거기에 기도가 작용했는지 여부를 가리자면 뉴턴이 찾아낸 원리를 능가할 만큼 복잡하고 불가사의한 모델이 필요하다. 과학자들은 한쪽 입자의 회전을 어떻게 통제하느냐에 따라 수억 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분자의 운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나비효과 이론이다. 곤충의 날갯짓 한 번이 연쇄적인 인과관계를 만들어내면서 멕시코만의 허리케인이나 텍사스의 토네이도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자연계에서든 인간사회에서든, 누구라서 사건의 원인을 자신 있게 지목할 수 있겠는가?

 

기상이변이나 기형아 출산 같은 현실문제에서 주님은 무슨 역할을 하시는가? 거기에 기도가 영향을 미치는가? 인간이 자연재해로 고통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통과 기쁨은 어째서 그토록 들쭉날쭉 불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하는가? 구약의 욥이 그와 관련된 고뇌에 찬 질문을 꺼내들자 하나님은 과학적인 질책을 쏟아내셨다. 가련한 욥은 먼지와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으며 주님이 제기하신 복잡성 이론 앞에서 스스로의 무지를 통감하고 몹시 민망해하며 입을 다물었다. 여기에 아주 흥미로운 후일담이 있다. 인과율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고 자만했던 욥의 친구들을 향하여 창조주께서는 그들의 우매한 대로 갚지 않으시고 욥의 기도에 따라 처분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흔히 거룩한 역사를 자연의 움직임이나 인간의 행위와 다른 범주에 놓지만, 성경은 그 둘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모든 피조물과 역사 속에서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일하신다. 기도는 창조주와 피조물, 영원과 시간을 한 점으로 수렴해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신비 속으로 끌어들인다. 기도란 시간에 묶여 사는 지상의 인생들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좀 더 직접 개입해주시도록 요청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직 배워가는 과정에 있을 따름이지만, 때로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기도를 생각하기도 한다. 영원이라는 시간의 리듬 속에 들어가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창조주의 시점에 나를 맞추는 방식이다. 자신의 소원을 주님의 소망에 일치시켜서 그분이 영원한 나라를 위해 세상에서 이루시기로 작정하신 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힘을 보태는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6:10). 마더 테레사의 후배 수녀들이 동트기 훨씬 전에 예배당에 가서 무릎을 꿇고 하루를 살아갈 힘과 정결한 마음을 주시도록, 캘커타의 가난한 이들이 고통 없이 자비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요청하는 모습이 생각난다. 호스피스 사역자들과 군목들, 그리고 내가 염려하는 걱정거리 따위는 새 발의 피도 안 될 만큼 엄청난 과제들을 껴안고 사는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예수님, 인류 역사상 가장 캄캄한 날을 앞에 두고 모든 일을 멈춘 채 복음서에 기록된 가장 긴 기도, 요한복음 17장의 간구를 드리셨던 그분을 생각한다.

 

시간을 초월한 사랑

성전 경비원과 로마 병사들이 칼과 채찍을 갖추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음울한 밤, 폭풍 전야처럼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영원한 세계와 차분히 교통하는 기도가 절절히 이어졌다. 죽음을 예견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아버지께 맡기는 기도를 드리셨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7:13-14). 그리고 핵심을 강조하시려는 듯 다시 한 번 되풀이하셨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15-16). 주님은 장차 세상과 맞서 벌이실 싸움을 생각하시며 제자들을 하나씩 돌아보셨다.

 

33년간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리스도는 단숨에 역사 전체를 꿰뚫어보는 힘이나 시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스스로 내려놓으셨다. 하지만 이번 기도에서는 달랐다. 지구라는 험한 행성에 자원해서 찾아오기 전까지 향유하셨던 아름다운 시절을 잠시 떠올리며 순간과 영원을 하나로 연결하고 계신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17:5). 예수님은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 시간을 초월해서 사셨던 기억을 떠올리시는 것이다.

아울러 길지만 명쾌한 이 기도를 통해 ?라는 질문에 궁극적인 해답을 주셨다. 왜 창조하셨는가? 왜 자유의지를 주셨는가? 왜 인류 역사는 이렇게 흘러왔으며 시간의 지배를 받는가? 하나님은 태초부터, 또는 그 이전부터 창조 이전에 거룩한 속성 가운데서 누리시던 사랑과 교제(생명)를 다른 피조물들과 영원토록 나누기로 작정하셨다. 그 동안 벌어졌던 온갖 사건들과 앞으로 생길 일들에도 불구하고 창조주께서는 만물을 지으신 본래의 의도를 되살리는 한편,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인간들과 다시 한 번 온전한 친밀감과 사랑을 나누기로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바로 그 비전을 다시 부각시키고 있다. 주님 자신을 위한 요청인 동시에 우리를 위한 간구이기도 했다.

 

그날 밤,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유난히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 예수님은 임박한 죽음에 관한 이야기로 분위기가 우울해진 사실을 알고 계셨다.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16:6). 그래서일까? 마치 기운을 북돋우시려는 듯 덧붙이셨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16:7). 참으로 모를 말씀이다. 하나님은 하나뿐인 아들을 몇 년 동안 지구의 한 변방에 보내어 살게 하시고, 인류에게 보내고 싶어 하시던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고 다시 떠나셨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신다.

 

궁금증과 불만, 갖가지 요청을 예수님께 직접 전달하는 데 익숙했던 제자들은 곧 전혀 다른 접근 방법인 기도에 의지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들 가운데 기도는 가장 허약하고, 모호하며, 무시하고 지나가기 쉬운 방법인 듯하다. 그리스도의 뜻 모를 말씀이 사실이라면, 주님은 권능을 나눠주시는 방편으로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거룩한 자녀들로 하여금 하늘 아버지와 직접 교제하게 하는 한편, 악한 세력과 싸우는 결정적인 역할을 맡기기 원하셨던 것이다.

 

필요를 알려드리는 일

하나님의 주권 문제를 깊이 파고들었던 20세기 신학자 칼 바르트는 기도를 들으시고 마음을 돌리시는 주님의 모습에서 아무런 모순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벙어리가 아니시며, 우리 기도를 귀 기울여 들으신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몸소 움직이신다. 기도하든 말든 똑같은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게 아니다. 기도는 존재 자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응답이란 바로 그런 것을 의미한다. 바르트의 설명이 계속된다. 인간의 호소에 뜻을 굽히신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기도를 들으시고 생각을 바꾸신다는 것은 연약함의 상징이 아니다. 위엄과 권능이 가득한 영광 가운데서 스스로 그렇게 의도하신 것이다.

 

왜 기도하는가? 예수님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6:8)고 지적하신다. 다만 창조 작업의 동반자로 초청하시면서, 동시에 관계 속으로 부르신다. 사도 요한은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 그저 사랑을 가졌거나 사랑을 느끼시는 존재가 아니다. 주님은 사랑이시며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다. 그러므로 창조주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든 피조물들과 친밀한 관계를 열망하신다.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6)고 가르쳤다. 모든 걸 알고 계신 주님께 어떻게 필요를 알릴 것인가? 열쇠는 바로 관계다.

 

태풍이 지나가거나 공산주의가 붕괴되는 동안 기도가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 나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시간의 제한을 받는 인간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 그렇다 할지라도 어린아이가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를 찾듯 관심사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간다. 그분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필요한 것들을 알려드린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최종 결정권자라는 사실을 마음깊이 새긴다. 그렇게 주님과 더불어 시간을 보내고 돌아설 때쯤이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갖게 된다. 적어도 스스로의 시각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대신 하나님은 자녀들의 관심과 약속, 그 마음을 받으신다.

 

창조주께서는 다른 수단을 제쳐두고 기도를 사용하기로 작정하셨다. 자유를 크게 강조하는 행동 유형을 선택하신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요청하길 기다리신다. 세상에서 행하시는 역사를 인간의 손에 맡기시는 쉬 납득하기 어려운 방식이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뜻이 성취되는 속도가 느려지지 않을까? 그렇다. 하지만 엄마 아빠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어린 자녀를 위해 보폭을 줄이게 마련이다. 부모의 목표는 아이들이 굳세게 서도록 돕는 일이기 때문이다.

 

 

3부 기도의 언어

간청한다. 흐느껴 울기도 한다. 하찮은 찬송으로 하나님을 부담스럽게 한다. 벌써부터 잘 알고 계신 죄를 새삼스럽게 털어놓는다. 창조주의 한결같으신 뜻을 바꿔보려고 안달을 한다. 그런데 때로는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은혜에 힘입어 그 기도가 용납된다. - 프레드릭 뷰크너

 

기도의 문이 막힐 때

늘 기도하며 힘을 잃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기도가 원하는 대로 응답받는 것보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데 훨씬 더 많은 가치를 둘 것이다. 기도의 궁극적인 목표가 그것이다. - 조지 맥도널드

 

기도의 거장 아빌라의 테레사는 기도하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라고 모래시계를 흔든 적이 있노라고 고백했다. 마르틴 루터 역시 기도가 신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조용히 혼자 하나님과 대화하려고만 하면, 채 시작도 하기 전에 오만 가지 훼방꾼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사탄은 모든 이유들을 총동원해서 기도를 지연시키려고 했다. 사방을 에워싸고 극렬하게 방해 공작을 폈다. 하지만 끝까지 할 일을 할 뿐, 절대로 거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한번 시도해보라. 열심히 기도하기로 작정하는 바로 그 순간,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잡념들이 달려들어 시작조차 못하도록 물고 늘어질 게 틀림없다.

 

무가치하다는 인식

루터의 혀를 단단히 잡아 묶었던 끈 가운데 하나는 자신을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여기는 마음이었다. 어린 시절에 심한 학대를 받기라도 한 듯, 루터는 좀처럼 수치심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청년 수도사 시절, 죄악을 낱낱이 찾아내려고 몇날 며칠을 고민했는지 모른다. 철저하게 고백하고 또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으면 언제나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예수님이 죄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비천한 이들에게 은혜와 용서를 베푸셔서 하늘 아버지의 성품을 환히 드러내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부족하고 가치 없는 존재여서 기도할 수 없다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그런 사실을 깨닫는 일이야말로 기도를 시작하는 데 필수적인 전제 조건일 뿐이다.

 

 

 

잡생각

그리스도를 본받아』로 유명한 토마스 아 켐피스는 하늘의 것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할 때마다 육신의 유혹이 성난 폭도들처럼 사납게 덤벼든다고 적었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은 기도를 영혼을 들어 주님께 올리는 일로 정의하고, 오직 하나님께만 마음을 열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완전히 빗장을 닫아걸어야 한다고 했다. 한편, 잡생각과 싸우는 데는 영국 신학자 허버트 맥카비의 충고가 제격이다. 흔히 기도하는 동안 잡생각이 든다고 불평한다. 신경이 이리저리 분산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건 십중팔구 진심으로 원하는 일을 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잡념이란 대부분 품위 있지만 진심이 결여된 소원을 아뢸 때마다 진정한 욕구가 불쑥불쑥 떠오르는 걸 이른다. 잡생각이 생기는가? 상념의 뿌리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서 바로 그것을 위해 기도하라. 진실로 소원하는 바를 위해 기도해야 산만해지지 않는다. 침몰중인 배에 타고 있는 승객들은 기도할 때 잡생각이 난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제대로 드려야 한다는 오해

하루에 평균 두 시간 이상 기도했던 마르틴 루터는 말수가 적을수록 더 훌륭한 기도라고 했다. 실제로 성경에 기록된 가장 짧은 두 편의 기도야말로(세리의 고백과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의 탄원) 가장 강력한 간구였다. 루터는 당시의 형식적이고 현란한 기도에 진저리를 쳤으며,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죽었다 깨어나도 루터나 테레사 수녀처럼 기도할 수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는가? 두말하면 잔소리다. 하나님은 세상에 사는 누군가를 똑같이 흉내 내라고 우리를 부르시지 않았으며, 저마다 진정한 자아를 찾기를 바라신다. 세상에 보여주고 싶어 하는 자아와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진정한 자아를 구별했던 토머스 머튼은 성도가 된다는 건 곧 자신이 된다는 뜻이라고 했다.

 

기도와 성격

최근 성격에 따라 선호하는 기도 형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몇몇 연구자들은 MBTI 검사를 통해 드러난 성격 유형별로 어떤 스타일의 기도와 묵상을 좋아하는지 조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첫 번째 유형은 직관/감정형이며, 두 번째는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직관/사고형이고, 세 번째는 의무를 이행하는 게 중요한 감각/판단형, 네 번째는 기도에 활동을 접목시키는 감각/인식형이다. (1) 직관/감정형은 성경의 약속과 명령들이 개인적으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마음을 자극하면 분주한 사역에 묻혀버리기 일쑤인 깊은 감정들을 끄집어낼 수 있다. (2) 직관/사고형들은 말씀 연구식의 묵상 유형을 선호하는 사람들로, 진리를 끌어들여 삶에 적용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게 유익하다. (3) 감각/판단형들에게는 평화니, 은혜니 하는 추상적인 개념들보다 확고하고 질서정연한 묵상 체계가 더 매력적이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이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고, 듣고, 냄새 맡는 감각을 동원하면 옛 진리를 현대적으로 적용하기에 좋다. (4) 감각/인식형은 설거지하면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던 로렌스 수사처럼 일하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지구상의 누구와도 닮지 않은 저만의 얼굴과 몸, 지성, 감성과 기질을 소유한 인격체로서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하나님과 사귈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인간이고 왜 사는지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반응한다 해도 조금도 놀라지 않으신다.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139:1-4).

 

 

심령의 체육관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시편을 일컬어 모든 심령을 연마하는 일종의 체육관이라고 했다. 나 개인적으로도 시편을 기도의 임상 실습 노트라고 부른다. 시편을 펼치면 언제라도 상황에 딱 맞는 기도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루터교 신학 교수였던 마틴 마티는 말기 암으로 몹시 고통스러워하는 아내와 함께 시편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 아내는 남편이 시편 87편을 읽은 다음 은근슬쩍 91편으로 넘어가는 걸 눈치 챘다. 시편 88…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같이 인정되고…라는 구절을 건너뛰어서 91편의 그가 너를 그의 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라는 위로의 말씀으로 곧장 갔던 것이다. 아내가 물었다. 왜 빼먹고 읽어요? 그날 밤에 시편 88편 말씀을 아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였다는 게 남편의 대답이었다. 아내는 단호히 말했다. 돌아가서 제대로 읽어주세요. 어두움을 다루지 않으면 다른 말씀들이 빛을 내지 못하잖아요.

 

훗날 마티는 그 참담하던 시절에 관한 책을 썼다. 이제는 묵상집의 고전이 된 『부재의 아침』에서 작가는 시편 가운데 절반은 한겨울 분위기였으며 밝고 따뜻한 여름 느낌을 주는 건 고작 3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고 적었다. 하지만 그렇게 씁쓸한 시편들이야말로 눈앞에 맞닥뜨린 현실 속에서 환자가 두려움과 슬픔을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스스로 할 말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다른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티는 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 거듭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감격적인 사건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직접에 집착한 건 잠시뿐이었다. 시편 같은 2차적인 통로를 통해 얼마든지 하나님과 의사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인들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직접 얼굴을 맞대지 못하는 동안에도 만남을 유지하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4부 기도의 딜레마

구걸을 끝낼 시간, 누군가를 위해 간구하는 입술들이 그들의 기도가 헛수고임을 인식할 때가 왔다. - 에밀리 디킨슨

 

응답 없는 기도, 미스터리와의 동거

주님은 인간에게 부르짖을 수 있는 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혀의 외침을 듣지 않으십니다. - 조지 허버트

 

어떻게 하면 응답되지 않은 기도의 속뜻을 단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어째서 하나님이 속 시원히 대답하시지 않는가에 관해서는 다양한 추측이 가능하겠지만, 성경에 기록된 여러 사례들을 살펴보면 쓸 만한 단서들을 얻을 수 있다. 모세, 다윗 왕, , 요나, 엘리야, 예언자 하박국, 예레미야 등이 했던 기도들이 응답받지 못했다. 더욱이 응답받지 못한 기도에 관해서라면 사도 바울도 할 얘기가 많은 사람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사도 바울 자신이 육체의 가시를 없애주시기를 세 번에 걸쳐 요청했던 일을 꼽아야 한다. 바울은 부정적인 응답에 대해 모범답안 같은 반응을 보였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실망하는 대신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독생자마저도 응답받지 못한 기도의 쓰라림을 피해갈 수 없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께 도움을 구했다.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사형선고가 떨어졌고, 마침내 예수님의 입에서 버림받은 존재의 몹시 고통스러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27:46). C. S. 루이스는 어디서도 도움을 얻을 수 없었던 그 무기력한 상황을 이렇게 해석했다. 주님의 이 부르짖음은 인간의 처지를 확대해서 보여준다. 단단히 붙들고 있던 밧줄들은 모두 끊어지고, 손을 뻗기가 무섭게 모든 문들이 쾅 하고 닫혀버렸다.

 

나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던 이런 사례들을 통해서 기도의 수수께끼를 푸는 희미한 실마리를 얻었다. 예언자들의 기도가 받아들여져서 이스라엘이 세계 열강의 반열에 오르고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마음에 단단히 품은 채 세상에 나눠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바울의 가시가 사라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그 두려운 순간에 기도한 대로 응답을 받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는 건 곧 인류의 멸망을 뜻하는 게 아닌가?

 

C. S. 루이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기도의 핵심은 응답될 수도 있고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점에 있다. 결과를 강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지혜가 무궁무진하신 분께서 어리석기 한량없는 피조물의 요청을 듣는다면, 경우에 따라 들어주기도 하시고 거절하기도 하시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언제나 응답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는 건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다. 오히려 마술에 가까운 현상일 뿐이다.

 

기다리는 시간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불의한 재판관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여인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영적 거장들은 너나없이 기도를 사이에 두고 하나님과 치열한 씨름을 벌였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께 드리는 요청에 일정한 한계를 설정하셨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서도 하나님 뜻에 맞춰 수정하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베드로의 믿음이 굳세어지기를 간구하셨지만, 시험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지는 않으셨다. 천사들을 보내 처형을 면하게 해주시길 부탁드릴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기도의 한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응답 받지 못한 기도 속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지 깊이 생각하며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주께서는 주를 기다리는 사람이나 주를 찾는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3:25).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를 새 힘을 얻으리니( 40:31).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6:9).

 

바로 이 지겨운 과정, 기다리는 행동 자체가 인내와 끈기, 신뢰, 온유, 긍휼 따위의 자질을 키워내는 자양분을 공급한다. 하나님이 세상에 역사하시는 흐름에 몸을 담고 있기만 하면 자연히 그런 성품들을 갖추게 된다. 구한 바를 얻었을 때보다 얻지 못할 때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은 미래지향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요구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8-9).

 

세상에 대해 하나님은 내내 기다리고 계신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사랑하시기에 인류사 전반에 걸쳐 가해지는 모욕을 참아내시는 것이다. 신음과 탄식 소리가 낭자한 시편조차도 마침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주제로 돌아간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이 어떠하든, 하나님이 여전히 우주를 통치하신다는 사실에 신뢰를 보낸다. 주님은 거룩한 이름을 걸고 언젠가는 모든 일이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놀라운 요소들

네팔이나 중국 같은 지역을 방문할 때마다, 응답된 기도와 응답받지 못한 기도 사이에서 역설을 느끼게 된다. 한편에서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놀라운 간증을 듣게 된다. 네팔에서는 1950년에 첫 회심자가 나왔는데 지금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50만을 헤아린다. 네팔의 교회 지도자들에 따르면,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는 이들 가운데 80퍼센트 이상은 육체의 병이 나은 경험이 회심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이 병든 이웃을 위해 기도하면 신기하게 병이 낫곤 했다는 것이다. 현장을 인터뷰한 선교사들은 그처럼 놀라운 회복은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데이비드 아이크만은 『베이징에 오신 예수님』이란 책에서 비슷한 형태의 기적이 중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보고한다.

 

반면에 네팔과 중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온갖 핍박을 받고 있으며 감옥이나 고문을 받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소식들도 심심찮게 들린다. 몸 아픈 이들은 고치시면서 고통받는 그리스도인들은 보호하시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기적인 성품을 가진 나로서는 성공과 행복한 결말, 고난의 면제를 간구하는 성향이 있다. 그리고 삶에서 얻을 수 있는 내 몫의 축복을 다 누렸으니 얼마나 감사하냐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난과 슬픔, 주림, 박해 등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과는 전혀 동떨어진 일을 경험하는 이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이 불행의 구렁텅이로 곤두박질친다면 과연 내 신앙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내 기도는 또 어떻게 달라질까? 그처럼 달갑지 않은 요소들을 통해서라도 성령님이 거룩한 뜻을 내 안에서 이루어 가시도록 겸손히 마음을 열 수 있을까?

 

순교자들의 기도』라는 책이 있다. 서기 107(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부터 1980(오스카 로메로 주교)까지, 여러 순교자들이 드린 기도를 모아놓은 책이다. 기도들을 읽으면서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으르렁거리는 사자들이나 칼날을 겨누고 있는 검투사들 틈에서도, 또는 로메로 신부의 경우처럼 암살자들이 자동소총을 겨누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목숨을 건져달라고 기도한 이는 없었다. 순교자들은 한결같이 뒤에 남게 될 가족, 견고한 믿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맞이할 힘을 달라고 간구했다. 더러는 순교자가 될 재목으로 인정해 주셨음에 놀라워하면서 고난당하는 특권을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핍박하는 이들을 용서해달라고 구하기도 했다. 기적을 일으켜주시길 요청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나님의 미소

우리들은 지속적인 협상을 토대로 하늘 아버지와 관계를 유지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행해주셨으면 하는 일들을 아뢰고, 주님은 그것을 위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역할을 알려주신다. 원하는 걸 모두 얻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소망을 완전히 채울 수 없기는 하나님 쪽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역사하신 궤적이 직선을 그리는 예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지만 응답되지 않은 기도가 훨씬 나은 결과를 불러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모니카는 쾌락을 좇고 기괴한 철학에 탐닉하는 아들을 위해서 무려 18년 동안이나 기도했다. 결국 어거스틴은 주님께 돌아왔으며, 지난날의 경험들은 그의 생각의 깊이와 폭을 더하여, 오래도록 그리스도인들의 나침반 구실을 하는 저술들을 남기게 해주었다. 언젠가 모니카는 아들이 사악한 로마에 가지 못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다. 하지만 아들은 어머니를 속이고 배에 올라탔고, 바로 그 여행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훗날 어거스틴은 당시를 돌아보면서 어머니가 늘 간구하던 제목을 들어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단 한 번 기도를 거절하셨다고 했다. 하나님의 미소를 보고 싶으면, 주님께 계획을 알려드려라는 옛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대리인 인간

기도에 응답하실 때, 하나님은 일반적으로 인간이라는 대리인을 통하신다. 응답되지 않는 기도의 비밀을 붙들고 씨름하는 이들일수록 하나님이 오늘날 이 세상에서 역사하시는 방법에 관한 신학적인 진리들을 결코 흘려듣지 않는 법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어떤 형식으로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한다. 로널드 롤하이저의 표현을 빌자면, 단순한 유신론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늘에도 계시고 이 땅에도 거하시며 인간의 내면에도 존재하시는 주님을 믿는다. 하나님은 예수라는 인물로 역사의 한 장을 사셨던 것처럼 지금도 육신을 입고 실질적으로 살아계신다. 그리스도가 그러셨던 것처럼 인간의 살갗을 가지셨으며 두 발로 땅을 딛고 걸어다니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어째서 집 없이 거리로 내몰린 노숙자들을 그냥 내버려주십니까?, 에이즈 고아들을 도와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는 기도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국제 구호 단체 월드비전의 창설자 밥 피어스의 간구가 뒤따라야 한다. 주님, 당신의 마음을 울리는 일들이 내 마음도 울리게 해주소서. 이 간구를 드리는 이들은 스스로가 그 기도의 응답이 된다. 신약 성경이 채택하고 있는 가장 훌륭한 교회의 모델은, 각 부분이 서로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서로 협력하면서 머리의 의지를 실행에 옮기는 신체의 개념이다.

 

사도의 기도

실망스러운 상황에서 사도들이 보인 반응은 응답되지 않는 기도의 문제를 극복하는 이상적인 모범이 될 만하다. 무엇보다도, 바울은 일단 요청해놓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시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바울이라는 대리인은 기도를 행동으로 옮겼다. 뿐만 아니라 응답될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져가는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기도했다. 칼뱅은 말한다. 두세 번 간구하다 말 게 아니라 똑같은 기도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필요한 만큼 자주 반복해야 한다. 절대로 지치지 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은 아버지고 우리는 자녀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은 극작가고 그리스도인들은 배우다. 기도의 존재는 은혜의 선물이며 조화로운 미래로 우리를 부르는 너그러운 초대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는 바울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던 바로 그 신비, 즉 하나님의 시각과 인간의 관점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다르다는 진리와 마주치게 해준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55:8-9)

 

노인들의 기도

언젠가 아내가 원목으로 섬기고 있는 근처 요양원을 찾아가 그곳에 있는 노인들의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다. 기도의 딜레마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갔는데, 노인들은 대부분 응답받은 기도에 관해 간증하는 걸 더 좋아했다. 기적을 체험한 간증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는 움직이기 힘든 노인들을 만났다. 그 중 침울해 보이는 몇몇 노인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그들의 마음을 비추던 빛은 이미 사라진 뒤였고, 기도의 비밀을 기억해낼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요양원에 다녀오면서, 기도의 딜레마에 관한 최종적인 대답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설명한 그대로라는 확신이 깊어졌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인간이 제아무리 지혜롭고 신령하다 해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식을 꿰뚫어볼 수는 없다. 누구에게는 기적이 일어나고 다른 이에게는 침묵하시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고, 이 일에는 개입하시고 저 일은 그냥 놔두시는 까닭도 파악할 수 없다.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그저 기다리고 신뢰하면 그뿐이다.

 

 

5부 기도의 실제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은 응답받지 못한 간구가 아니라, 아예 드리지도 않은 기도다. - F. B. 마이어

 

기도 그리고 나

간단히 말하자면 기도는 병에 걸린 영성을 다루는 야전병원이다. 누구보다 탁월한 권위자가 직접 진단을 내리고 치료까지 담당했다. - 월터 핑크

 

주파수 맞추기

문자 그대로 공간, 즉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께서는 자녀들의 마음에 하나님 구역을 확보하고 잡다한 것들이 삶을 채우지 못하게 지키고 싶어 하신다. 나로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시종일관 의식할 능력이 없지만 최소한 열심히 기다리고 항상 주의를 기울일 수는 있다.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조용히 말씀하실 때가 많다는 것이다. 지난날의 기억이나 성경 말씀, 친구의 모습 등이 떠오르기도 하고, 언젠가 낙심했던 경험이 삶에 소망을 갖도록 자극을 줄 수도 있다. 스스로 잘못을 저질러 본 뒤에야 복수하고 싶은 마음 대신 용서의 정신이 자리를 잡기도 한다. 모르는 척 지나가지 말고 상황에 뛰어들라는 부르심을 받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모두가 하나님께 주파수를 맞춰놓고 있을 때만 가능하다.

 

기도의 치유 효과

헨리 나우웬은 남아메리카에 머무는 동안 아무도 내게 기도하면 달라진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일 필요가 없었다라고 했다. 기도하지 않으면 쉽게 화를 내고, 마음이 무거우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자주 놓쳐서 자신이 아닌 남에게 관심을 쏟을 수 없게 된다. 기도하지 않으면 선입견에 따라 행동하기 쉽다. 변덕스럽고 사소한 일에도 원한을 품는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에 시달린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하루에 한 시간씩 교회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정신을 집중하기 어렵고, 안절부절못하고, 졸리고, 혼란스럽고, 지루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에 되돌아보았을 때, 기도한 뒤로부터 하루가 다르게, 한 주가 다르게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하루에 한 시간 정도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내 삶은 일관성을 잃어버렸을 테고, 그저 갖가지 사건 사고들이 이어지는 평범한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두려움

아내와 함께 가장 힘들다는 봉우리를 등반할 때는 두려움이라곤 전혀 모를 것같이 생긴 전문 산악인을 채용한다. 그는 무뚝뚝하지만 우리가 오르려는 봉우리를 손금 들여다보듯 환히 알고 있었다. 우리는 온갖 불안감을 그에게 죄다 떠넘길 수 있었다. 삶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산에서 부딪치는 공포감보다 훨씬 복잡하지만 둘 사이에는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 삶에서도 그러한 가이드가 필요하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낮고 천한 이들, 즉 한센병에 걸린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에게 치료와 은혜를 전했던 폴 브랜드 박사를 가이드로 만났다. 그를 무려 10년 넘게 따라다니면서 함께 기도할 기회를 가졌는데, 그때마다 그의 단순한 믿음에 탄복했다. 박사는 형편없는 박봉을 받고 고된 일을 하면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눈앞에 닥쳐온 노년을 두려움은커녕 기대를 품고 바라보았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갑자기 나타난 장애물이 아니라 인생의 정점으로 보고 진심으로 환영했다.

 

헨리 나우웬 역시 신뢰할 만한 가이드였다. 그를 만난 덕분에 내면에 두려움을 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할 줄 알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어떻게 아뢰어야 할지 모르면서도 기도할 수 있고, 불안한 가운데서도 안식을 누리고, 시험을 당하면서도 평안하며, 여전히 걱정스러운 가운데서도 안연하고, 암흑 속에서도 밝은 빛에 둘러싸여, 회의하면서도 오히려 사랑할 수 있다고 했던 그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를 붙들어주시고, 태어나기 전부터 사랑하셨으며, 죽은 뒤에도 영원히 사랑해주실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그는 나의 좋은 가이드였다.

 

염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하는 대목을 읽을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편지는 감방에서 사슬에 묶인 채 썼던 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이 모든 시각을 초월하는 평안을 주신다는 바울의 말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이 말씀은 세상이 눈앞에서 흔들어대며 유혹하는 거짓 평안의 실체를 폭로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막에서의 편지』를 쓴 카를로 카레토는 1954, 분주한 일상을 버리고 알제리 사막에 있는 예수의 작은 형제회에 입회했다. 그는 수도자가 되기 전까지는 누구보다 열심인 행동가였다. 그런 경험 때문이었을까? 카레토는 하나님을 위해 번잡하고 중요한 일들을 해내고 있는 이들에 대해 깊은 우려를 드러낸다.

 

오랫동안 교회에서 제법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교회 기둥을 어깨로 떠받치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시간이 모자랐다. 이 일을 하다가 저 일로, 한 사람을 만나다가 다른 사람에게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쉴 새 없이 뛰어다녔다. 기도는 조급해지고, 대화는 사나워졌으며, 마음은 혼란에 빠졌다. 그러다 마침내, 카레토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사막에 나가 모래 위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어느 날, 나는 부담스러운 일들을 죄다 벗어버릴 요량으로 돌연히 모든 일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없이도 모든 게 차질 없이 잘 돌아갔다. 기둥 운운은 자작극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세상의 모든 짐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것이다.

 

시간 멈추기

한때 의사였던 안토니 블룸은 『기도 입문』이라는 책에서 조바심을 극복하고 시간을 멈추게 해서 하나님을 생각할 여유를 창출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블룸은 환자를 검진하면서도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손님의 수를 세어보느라 자꾸 옆방을 흘끔거렸다. 늘 서두르며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을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고, 환자에게 똑같은 질문을 두세 번씩 던지곤 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생각한 블룸은 접근 방식을 바꾸기로 작정했다. 눈앞에 앉아 있는 환자를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람처럼 대하자고 다짐했다. 빨리 움직여야겠다는 조급증이 들면 일부러 의자에 깊이 몸을 기대고 환자와 몇 마디 친밀한 말을 주고받으며 서두르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결과는 놀라웠다. 하루에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이전보다 훨씬 늘어났던 것이다.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고 같은 절차를 쓸데없이 반복하는 실수가 대폭 줄었기 때문이었다. 블룸은 너무 빨리 움직이려고 애쓰는 시간을 멈추게 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그래야 시간을 온전하게, 내면의 긴장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분일초가 정말 일분일초답게 흘러가는 걸 상상할 수 있는가? 우리는 5분이 30초 만에 달아나 버리는 것처럼 살지만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시간을 멈추게 하는 훈련은 차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변화시켰다. 무엇보다도 과거는 돌이킬 수 없으며 미래는 어떻게 될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현재의 삶에 집중하게 됐다. 눈앞에서 흘러가고 있는 지금이 영원이란 시간과 교차하는 지점이었던 것이다. 뜻밖에도 5분을 한가하게 쉬면, 세상도 그만큼을 기다려주었다. 과제를 처리하는 게 제아무리 급박하다 해도 3, 5, 아니 10분 정도는 여유를 낼 수 있었다. 사실, 잠깐 짬을 냈다가 다시 시작하면 오히려 더 평온하고 신속하게 과제를 끝낼 수 있었다. 그러자 그는 아침, 저녁 기도의 짬을 만들어 나갔다.

 

블룸은 날마다 조용하고 평온한 가운데 일과를 시작했다. 하루라는 시간 자체가 이전에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던 하나님의 선물이며 다시 시작할 기회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겼다. 눈을 뜰 때마다 새로운 날이 펼쳐졌다. 오늘은 주님이 만드신 날이다. 마음껏 즐기며 기뻐하자! 아침에는 하나님의 사자로서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의 임재를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밤이 되면 그날 일어난 일들을 차분히 돌아보며 잘됐든 잘못됐든 모든 일에 감사했다. 하루를 통째로 하나님 손에 올려드렸다.

 


어떻게 달리는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침묵 가운데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스스로 움직이려는 마음을 줄이고 한결같으신 창조주를 더 의지할 수 있을까? 어떻게 두려움과 염려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루를 잘 조절해서 주님과 더불어 시작하고 마감하는 틀을 잡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분주함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대답을 내놓을 수 있다면, 급한 일에 매달리도록 끌어당기는 요인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 실체를 정확히 규명해낼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상운교회
글쓴이 : 강인철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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