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역사, 숨겨진 비밀을 밝히다
장장년, 장영진 편저
눈과마음 / 2007년 7월 / 327쪽 / 15,000원
▣ 저자 장장년, 장영진
▣ 역자 김숙향
고려대학교 중문과 졸업 후 중문과 고전문학 석사를 수료하였다. 이후 고려대학교 중국학연구소 조교를 지냈고, 2002~2003년 중국 상해 복단대 진수 과정을 이수하였다. 2003~2004년 8월 고려대학교 민족문화 연구소 기계번역실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하였으며 다수의 통역과 번역 작업을 해왔다. 한의학, 정치(문화대혁명), 중국 고대 무용사 등과 관련된 참고 논문 번역을 해왔으며, 번역서로는 『성공에 이르는 7가지 관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3가지 기술』, 『우화로 보는 다 빈치의 지혜』, 『좋은 부모가 되려면 자녀와 협상하라』, 『좋은 자녀를 원하면 아이처럼 생각하고 말하라』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이 책은 지금까지의 역사서보다 한층 흥미로운 성격을 띤다. 일반적인 역사서와 달리 역사 속 유명인들이 중대한 역사적 사건들에 어떤 식으로 관여하고 영향을 미쳤는지 자세히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 역사의 뒷이야기들은 역사가들로부터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역사 속의 수많은 상황과 사소한 일들은 특정 시기의 역사 발전과 방향을 결정짓는 데 분명 중대한 역할을 했다.
이 책은 사소한 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가는 새로운 방식의 역사서이다. 예를 들면 히틀러의 나치가 6백만여 명의 유태인을 죽이고 어린이를 포함한 십만여 명의 독일 게르만족을 학살했다는 것, 일본의 진주만 습격 정보가 이미 당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 의해 알려졌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 한국전쟁 중 다수의 미국 비행기가 소련 공군에 의해 격파되었다는 것 등. 이 책은 이와 같이 잘 알려진 사건 이외도 일본 국명과 국기의 유래, 화산우표가 현재의 파나마 운하를 만들었다는 사실, 흑인과 유태인의 수수께끼 등 역사 속의 재미있는 상식과 비화를 소개한다. 많은 독자들은 역사적 사건 뒤에 가려져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사실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들은 작고 사소한 일들이 합쳐져 이루어졌다.
▣ 차례
서문
고고학의 발견 로제타석과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 | 베히스툰 비문과 설형문자의 해독 | 중국 갑골문자의 발견과 해독 | 석비에 새겨진 함무라비 법전 | 도굴꾼이 발견한 동굴 안의 파라오 미라 | 투탕카멘 묘의 진귀한 보물 | 옛 도시 폼페이의 발굴 에피소드 | 인도 아잔타 석굴의 발견 | 앙코르 유적지의 발견 | 트로이 목마는 존재했다 | 고대 마야 유적지, 코판 이야기
명승지 이야기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화려하지만 잔혹한 콜로세움 | 피라미드는 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 피라미드는 이집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 세계의 기적,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등대 | 피사의 사탑의 새로운 공헌 |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의 탄생지 | 타지마할 이야기 | 폴란드 인어 조각상의 감동적인 이야기 | 오줌싸개 동상 | 자유의 여신상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 | 백악관에 얽힌 에피소드 | 베르사유궁전의 건축 일화 | 버킹엄궁전과 여왕의 생활
유적지에 관한 신기한 이야기 제1차 세계대전 무명전사의 무덤 | 사람 가죽으로 만든 등갓과 머리카락 카펫 | 공포의 나치 독가스실 | 죽음의 수용소, 세계문화유산 되다 | 베를린 장벽 아래의 사상자 | 잘 팔리는 기념품, 베를린 장벽
사건의 진실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이야기 | 고대 그리스의 인물 조각상은 왜 나체일까? | 고대 올림픽에서 우승자가 받은 상 | 우표가 올림픽에 한 공헌 | 페르시아 전쟁과 마라톤 | 한 장의 화산우표가 만들어낸 운하 | 히틀러가 ‘卍’을 나치의 상징으로 삼은 이유 | 히틀러가 유태인을 학살한 이유 | 동포를 학살한 히틀러 | 첫 번째 원자폭탄의 투하지가 히로시마였던 이유 | 일본 천황이 죄를 언도 받지 않은 까닭
천고의 수수께끼 신비로운 이스터섬 | 천 년 동안 녹슬지 않는 인도의 철 기둥 | 신비한 갠지스강 | 바스티유 감옥의 비밀죄수 | 제1차 세계대전이 남긴 살아 있는 시체 | 저주받은 나치 군함 | 예루살렘에서 나타난 신기한 현상
종교 역법 《코란》의 신기한 소문 | 성경에 관한 이야기 | 십자가는 정말 기독교의 상징인가? | 산타클로스는 누구인가? | 종교에 열광하는 필리핀 사람들 | 불교의 나라, 태국과 미얀마 | 요일에 담긴 과학과 종교
과학기술의 빛 백 년 후 교황에 의해 누명을 벗은 갈릴레이 | 노벨상에는 왜 ‘수학상’이 없을까? | 노벨상 설립 분쟁 | 노벨의 유산을 둘러싼 분쟁 | 노력이 만든 위대한 발명가 | 퀴리 부인의 고상한 품격 | 아인슈타인의 혀 내민 사진 | 레닌과 아인슈타인 두뇌의 비밀
문예의 정수 폭군도 잠재운 아라비안나이트 이야기 | 셰익스피어의 수수께끼 | 단테의 신곡 | 〈모나리자〉의 매력 | 〈모나리자〉의 보위 | 다 빈치의 원고와 모나리자 다리 | 〈최후의 만찬〉 | 음악의 거장 베토벤 |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
귀퉁이의 역사 자료 죄악으로 가득한 노예무역 | 일본의 무사도와 할복의식 | 미국 역사에 영향을 준 한 편의 소설 | 두 번만 연임할 수 있는 미국 대통령제도 | 테쿰세의 저주 | 국가 지도자의 병세는 국가 기밀 | 국가 지도자는 어떻게 경호할까? | 핵미사일 버튼의 비밀 | ‘V’를 알린 제2차 세계대전 | OK의 유래
이러쿵저러쿵 어떻게 여러 인종이 생겼을까? | 아프리카 밀림의 소인국 | 지금의 마야인 | 인디언의 성인식 | 마야인의 생매장 의식 | 흑인 유태인의 수수께끼 | 유태인의 지혜 | 아프리카 여성의 다양한 헤어스타일 | 아랍인의 의상 | 국가원수 급의 예우를 받는 미라 | 미라의 제작 및 그 가치 |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국, 스위스 |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소국, 브루나이 | 세계에서 가장 신비한 소국, 바티칸 | 이색적인 아프리카의 수상 마을 | 스무 번이나 바뀐 국기 | 올림픽기와 공식 주제가
-------------------------
고고학의 발견
이집트 상형문자, 설형문자, 갑골문자의 해독
나폴레옹은 1798년 이집트 원정에서 175명의 문물 발굴단을 조직하고 군대를 이끌고 가 이집트의 문물을 수집했다. 그에 소속된 프랑스의 한 군관이 1799년 이집트 로테타에서 참호를 파다가 검은색 현무암 비석을 발견하게 된다. 군대를 따라 파견된 전문가들은 이 비석의 연구를 시작했고, 즉시 비문 탁본에 들어갔다. 전문가들은 비석에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와 민중문자 그리고 고대 그리스문자가 새겨져 있음을 발견했다. 전문가들이 비교적 수월하게 해독한 그리스문자는 기원전 196년 이집트의 신관들이 프톨레미 왕의 공덕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비석에 새겨진 이집트 문자를 밝혀내기 위해 많은 전문가들이 오랫동안 연구에 매진했으나 그 미스터리는 완전히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프랑스의 천재 문자학자 샹폴리옹에 의해 마침내 이 비밀이 밝혀진다. 14년간의 고군분투 끝에 그리스문자와 이집트 상형문자를 연구했다. 프톨레미 왕의 이름을 해독했는데, 이 해독은 표의문자일 뿐 아니라 표음문자이기도 한 이집트 상형문자에서 그 실마리 얻었다. 이토록 기나긴 노력 끝에 이루어낸 비문 해독 작업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설형문자는 서아시아의 고대 문자이다. 점토 위에 뾰족한 것으로 새긴 모양이 쐐기 같다고 하여 설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설형문자를 발명한 것은 수메르인인데, 후에 바빌론 문자와 아시리아 문자로 발전하여 페르시아 등지에 영향을 미치며 인류 문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역사의 변천 과정 속에서 이런 고대 문자는 소실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계속해서 발견되었지만 역사적 유적으로만 남을 뿐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세기 초, 사람들이 이런 고대 문자에 점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영국 문자학자 롤린슨이 베히스툰 비문 해독을 시작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그 비밀이 밝혀졌다.
중국의 갑골문자는 하남성의 소둔촌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은 3천여 년 전 중국 상나라의 유적지인데, 상나라는 다른 말로 은나라라고도 한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유적지를 은허라 부른다. 이곳의 사람들은 옛날부터 모종의 부호가 새겨진 짐승의 뼈와 거북이 껍데기를 자주 발견했는데, 당시 이들은 그것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옴을 앓는 한 마을의 수장이 땅속의 갑골을 가루로 만들어 덧발랐더니 병이 금방 낫는 것을 보고 갑골에 지혈 작용이 있음을 발견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볏짚에도 지혈 작용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갑골을 몹시 신성하게 여겨 용골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약방에서는 그것을 약재로 쓰기 위해 앞 다퉈 사들였다. 세계 문자 역사에서 중국 갑골문자의 발견과 해독은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와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함무라비법전, 파라오 미라, 투탕카멘 묘의 진기한 보물
함무라비법전은 서문, 본문, 결문 등 모두 28조로 구성되어 소송하는 절차, 절도, 소작, 고용, 혼인, 채무, 상해, 고리대, 노예 등 여러 방면의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 법전은 주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면서 노예와 자유 시민의 반항을 엄격하게 다스리고 있다. 예를 들어 노예가 주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두 귀를 잘랐고, 노예의 도피를 돕거나 숨겨준 자는 사형에 처했다. 함무라비는 오직 법전에 의거해 나라를 다스렸고, 노예를 거느리는 주 계급의 이익을 지켰다. 사람들에게 법전을 알리기 위해 그 내용을 비석에 새겨 바빌론 마르두크 대 신전 앞에 세워 두었다. 함무라비법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 법전이다.
이집트 고고학 역사상 가장 놀라운 발견 중 하나로, 한 번에 40여 구의 미라가 발견된 일이 있었다. 발견된 미라 대다수는 이집트 역사에서 유명한 파라오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발견이 한 도굴단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1922년 고고학자들은 이집트 왕의 계곡에서 투탕카멘의 왕릉을 찾아냈다. 투탕카멘의 무덤 안에는 그야말로 없는 것이 없었다. 투탕카멘의 옥좌는 앞뒤가 모두 황금으로 되어 있고, 채색된 유리와 보석이 박혀 있다. 심지어는 실제 사람 크기만 한 조각상도 있었다. 따라서 투탕카멘의 무덤은 종전에 찾아볼 수 없는, 또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엄청난 지하 보물 창고라고 할 수 있다.
옛 도시 폼페이의 발굴, 인도 아잔타 석굴발견, 앙코르 유적지 발견
기원전 7세기, 조밀한 인구와 번화한 거리를 가진 작은 도시 폼페이는 부유한 사람들의 피서지이자 오락과 유흥을 즐기던 곳이었다. 하지만 79년에 일어난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인해 역사적인 도시 폼페이는 화산에서 뿜어져 나온 용암과 잿더미로 뒤덮여 순식간에 매장되었다. 폼페이 성에는 수많은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의 화려한 별장이 있다. 이런 별장들에는 커다란 대리석 기둥과 정교하게 조각된 문이 있고 복도와 정원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방에는 빛이 환하게 들어오고 담장에는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바닥에도 그림이 조각되어 있다. 폼페이 재앙 당시의 피해자들은 석고상이 되었다. 폼페이는 1천 9백여 년 전의 옛 성으로 완전하게 보존된 덕분에 당시 로마 사회의 실제 모습을 후손들에게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아잔타석굴은 인도 불교 석굴 예술 가운데 가장 전형적이고 유명한 예다. 석굴 예술은 역사에서 오랫동안 사라졌다가 1819년에 다시 발견되었다. 8세기 중엽 이후 인도의 불교는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불교 저작이 산실되고 불당은 파괴되었으며 석굴은 매장되었다.
12세기 앙코르와트는 인구가 백만 명이 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이처럼 한때 지극히 번성했고 아름다운 사원이 무수했던 성지가 무려 4백여 년 동안 역사에서 사라져 있었던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 한 일이다. 전문가들은 앙코르와트가 4백여 년 전의 것임을 고증했으나, 그것이 갑자기 사라졌던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트로이 목마, 고대 마야 유적지 코판 이야기
호메로스의 서사시 속에는 인류에 널리 회자되는 트로이 목마 이야기가 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서술된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인지 신화적 전설인지에 대한 전문가들의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중 역사적 사실이라고 굳게 믿어 트로이 유적지를 찾겠다고 나서는 이도 있었다. 바로 독일의 고고학자였던 하인리히 슐리만이다. 평생 동안 트로이 전쟁과 트로이 유적지를 연구한 그는 1870년에 터키로 건너갔다. 당시 사람들은 터키를 트로이 성지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본 터키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기술한 부분과 상황이 달랐다. 그는 다시 다른 곳으로 트로이 유적지를 찾아 나섰고, 마침내 기록과 유사한 성을 찾게 된다. 곧바로 발굴 작업을 진행한 결과, 그는 그곳이 정말 트로이의 유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유적지는 오늘날 터키의 차낙칼레 서남쪽에서 약 3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있다. 터키 정부는 이곳에 트로이 공원을 만들고 박물관도 지었으며, 그 옆에는 호메로스 서사시 속에 묘사된 모습 그대로 목마를 세웠다.
코판은 고대 마야인이 세운 도시이다. 코판에는 크고 작은 피라미드가 있는데 그 피라미드 사이에는 대형 경기장이 있고, 위에는 큰 비석이 있다. 중앙에 있는 대형 광장에는 짓다 만 운동장이 있고 아이들이 가지고 놀 수 있는 고무공과 돌난간들도 보인다. 고고학자들은 이들의 오락이 종교성을 띠고 있으며, 아마 게임에서 지는 쪽이 제물을 바쳤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코판 성 안에는 38개의 돌기둥이 있다. 위쪽에는 사람의 키보다 높은 제왕이 조각되어 있다. 천체의 위치에 따라 배열된 돌기둥에는 날짜가 새겨져 있었는데 조금의 오차도 없었다. 코판에서 사람들의 관심이 가장 주목되었던 부분은 바로 마야의 상형문자이다. 돌기둥과 건축물 위의 상형문자는 아주 규칙적으로 쓰여 있었고,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으며, 게다가 수량도 많았다.
명승지 이야기
바빌론의 공중정원, 콜로세움, 피라미드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피라미드, 로드스의 거상, 올림피아의 제우스상, 마우솔레움, 파로스 등대와 함께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힌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바빌론의 국왕, 테부카드네자르 2세가 아름다운 왕비 아미티스를 위해 지었다고 한다. 궁전 옆에 자리한 정원은 대략 25미터 높이에 밑변은 125미터 총 3층으로 지어졌다. 장방 5미터의 대형 기둥이 각 층을 지탱하였고, 약1미터 넓이의 석판이 바닥에 깔렸다. 침수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상부에 철판을 대고 가장 윗부분에 흙을 두텁게 깔아 그곳에 각종 꽃과 나무를 심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해’ 또는 ‘매달린 정원’처럼 보이기도 했다. 바빌론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번성한 도시였다. 기원전 6세기 건립된 공중정원은 3백여 년의 영화를 누린 뒤 기원전 3세기에 멸망했다.
원형의 콜로세움은 초기 기독교인이 설계하였으며 직경이 긴 곳은 188미터, 짧은 곳은 156미터, 외벽의 높이는 대략 48.5미터이다. 12층 정도의 높이로 담황색의 대리석이 사용되었고 전체 경기장은 대략 2만 제곱미터. 모두 4층으로 구성된다. 각 층의 분위기는 서로 다른데, 반원형의 돌기둥으로 나뉘며 80개의 돔 모양 대문이 있다. 경기장을 만들 당시 2층과 3층의 문 안에는 대리석 조각상이 있었다. 경기장의 관람석은 하층민, 기사, 귀족, 황실 석으로 나뉜다. 고대 로마의 잔인한 투우 경기는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대략 4백 년 즈음, 아시아의 한 승려가 투우 경기 중 경기장에 뛰어들어 그만두라고 크게 외치다가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로마인들은 투우 경기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402년에 이르러 로마 황제는 마침내 정식으로 투우 경기를 폐지했다.
피라미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보존이 잘된 위대한 건축물이다. 기원전 2천 6백 년에 지어진 쿠푸 피라미드는 높이 146.5미터 밑변 232미터로, 탑을 둘러싸면 대략 1킬로미터나 되며, 이를 만드는 데 230만 개의 돌과 2.5톤의 거대한 돌이 사용되었다. 지하에는 천여 개의 무덤이 모여 있었다. 망자의 수장품 속에서 측량과 계산, 가공에 필요한 공구들이 대량으로 나왔으며, 무덤의 벽에는 북군, 남군, 지구군 등 공사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더불어 훌륭하게 공사를 마쳤음을 치하하는 문구도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죽은 자가 피라미드를 만든 사람임을 분명하게 증명해 주었다. 당시 사람들은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를 신성했기에 성스러운 마음으로 피라미드 공사에 나섰다. 대부분 현지의 농민이나 수공업자들이 참여했고, 심지어 온 집안 식구들이 공사에 참여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4세기 중엽 유럽 로마 제국의 군주도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경외심을 가져 쿠푸 피라미드를 모방한 두 개의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피라미드가 있는 아시아 국가로는 중국과 캄보디아가 있다. 유럽에는 피라미드가 이집트보다 더욱 많다. 한 고고학자가 계산해 보았더니 깊이 숨겨진 피라미드만 해도 십만 개에 달한다고 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묘지로 지은 것이지만, 아메리카 대륙의 피라미드는 제사와 천문 관측의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폴란드 인어 조각상, 오줌 싸게 동상, 자유의 여신상
폴란드의 인어 조각상은 침략에 저항하고 고향의 안전을 바라는 여성 영웅의 형상을 표현했다. 폴란드는 역사적으로 국가적인 재난을 여러 번 겪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에도 폴란드의 국민들은 좌절하지 않았고, 시종일관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폴란드를 침략하려는 독일의 계획이 이미 만천하에 폭로되자 강한 애국심을 가진 폴란드의 한 여성 조각가는 국민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오랜 생각 끝에 마침내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전해져 온 아름다운 인어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 조각은 1937년 5월에 완성되었다. 상반신은 아름답고, 건강한 여성의 모습 그대로였고, 비늘로 덮인 하반신은 출렁이는 파도의 모양과도 같았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긴 칼이, 왼손에는 방패가 들려 있어 마치 영웅과도 같은 분위기도 느껴졌다. 전시되자마자 폴란드에서 금세 화제가 된 이 인어상은 독일이 침략하기 전 비스와강 부근에 설치되었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는 유명한 오줌 싸게 동상이 있다. 건실한 알몸의 오줌 싸게 동상은 미소를 띤 얼굴로, 꼭 오줌을 누는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고 마음껏 오줌을 누는 듯한 모습에 사람들의 관심이 적잖이 쏟아진다. 오줌 싸게 동상에 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스페인 군대가 브뤼셀을 침략하여 점령했는데, 철수할 당시 성 안에 화약을 매장해 도시 전체를 폭파하려 했다. 이때 한 남자아이가 도화선을 보고는 다급한 마음에 오줌을 싸서 불을 껐고, 곧 성 전체를 구했다. 감격한 시민들은 그 아이를 작은 영웅으로 부르며 그를 ‘브뤼셀 제일의 시민’으로 추대하여 남자아이의 모습을 조각하였고, 도화선을 끈 곳에 조각상을 배치하였던 것이다.
미국 뉴욕의 허드슨강 입구에 우뚝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선물하였다. 자유의 여신상의 제작과 설계는 프랑스인 건축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가 맡았다. 고대 그리스 여신에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를 융합해 여신상을 설계했다. 자유의 여신상의 오른손에는 자유의 빛을 상징하는 횃불이 들려 있고, 머리에는 일곱 개의 뾰족한 가시가 달린 월계관이 씌어져 있는데, 이것은 광선이 세계 7대륙에 퍼지기를 소망하는 것을 상징한다. 왼손에는 미국의 독립을 축하하고자 ‘독립선언문’을 들려 놓았다.
베르사유궁전, 버킹엄궁전
프랑스의 보물이자 예술 작품인 베르사유 궁전은 세계적인 유명한 건축물이다. 베르사유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2층의 ‘거울의 방’이다. 거울의 방은 베르사유궁전에서 가장 특색 있는 공간이다. 프랑스의 역사상 수많은 사건이 이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국왕 윌리엄 1세는 이곳에서 황제를 선언했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베르사유조약’을 체결한 곳도 바로 이곳이다. 이 밖에도 베르사유궁전에서 일어난 중대한 사건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사람들이 베르사유궁전을 볼 때 예술적 측면에서 감탄할 뿐만 아니라 프랑스 역사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영국 여왕은 버킹엄궁전에서 생활한다. 궁전은 그녀의 거주 공간이자 업무 공간이며, 손님을 접대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여왕의 생활은 매우 규칙적이다. 오전 열 시는 여왕이 집무실로 향해 고문들과 접견하는 시간이다. 여왕은 집무실에서 여러 가지 문서를 검토한 후, 붉은 상자와 검은 상자에 각각 외교부와 의회에서 온 문건을 나누어 보관한다. 점심 식사는 일반적으로 혼자 하거나 왕실의 구성원들과 함께 한다. 오후에 비로소 공식 활동을 시작하는데, 오랜 시간 서 있거나 사람들과 악수를 해야 하는 일이 빈번하다. 저녁 시간에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때때로 공식적인 파티를 열기도 하는데, 이때 여왕은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입고 가장 좋아하는 식기를 내놓는다. 파티는 대체로 큰 회장 안에서 열리며, 꽃 사이에 설치된 특이한 조명이 파티의 진행을 지휘한다는 특징이 있다. 여왕은 옷과 음식에 무척 신경을 쓴다. 어패류와 마늘은 절대 먹지 않고 닭고기와 양젖을 즐겨 먹는다. 술은 선호하지 않아서, 간혹 파티에서 순한 포도주를 마셔도 한 잔을 넘지 않는다. 여행을 떠날 때는 여왕의 옷을 항상 큰 옷상자에 넣어 구겨지지 않도록 준비한다. 어떤 날에는 하루에 네 벌의 옷을 갈아입어야 할 때도 있다. 여왕은 항상 많은 사람들과 악수를 하기 때문에 하루에 다섯 번 장갑을 바꾼다. 여왕은 매일 밤 잠들기 직전, 그날 하루의 일과와 느낌을 개인적으로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유적지에 관한 신기한 이야기
사람 가죽으로 만든 등갓과 머리카락 카펫, 공포의 나치 독가스실, 베를린 장벽,
나치들은 유태인을 잔인하게 살해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재산을 강탈했고, 심지어 시체까지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았다. 유태인의 유골을 농부에게 비료로 팔아넘겼고, 기름은 화학 공장에 팔아 비누로 만들게 했다. 두발은 아미노산의 원료로 쓰여 양말이나 카펫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나치들은 유태인들의 몸에서 나온 가죽으로 등갓, 편지의 겉봉, 지갑, 등을 만들었다. 나치는 수용소를 만들어 수많은 혁명가와 전쟁 포로, 유태인들을 잡아다 몰살시켰다. 통계에 따르면 아우슈비츠 수용소 독가스실에서는 2백만 명 내지 4백만 명이 살상됐고, 그 가운데 백만 명이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나치는 제2차 세계대전 중 6백만여 명의 유태인을 살해했다. 나치가 일삼았던 잔혹한 만행의 수준은 말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다. 현재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 유산이다. 인간을 잔혹하게 살해한 수용소를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목적은 끔찍한 죄악의 역사를 영원히 기억하고 다시는 그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1961년 8월 31일, 베를린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동서를 가르는 철조망이 세워지는 일이 발생했다. 동독 사람들은 서독으로 넘어가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열기구를 타고 상공으로 넘어가는가 하면 8년 동안이나 열심히 땅굴을 파서 넘어가는 학생들도 있었다. 열네 대의 트럭이 한꺼번에 장벽을 부딪혀 서독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1989년 11월 9일, 동독은 마침내 베를린 장벽을 허물기로 결정했고 동서로 갈라진 베를린 시민들은 모여 살 수 있게 되었다. 베를린 장벽은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동서양이 냉전으로 접어들었다는 상징이었다. 동독 정부는 결국 베를린 담장을 팔기로 했다. 건설 회사를 통하여 판매를 대행했고, 이 소식을 들은 전 세계인들은 베를린 장벽 기념품을 사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들었다. 3.6미터 2.6톤의 장벽은 무려 8천 달러에 매각되었으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가격은 더 높이 치솟아 10만 달러에 판매되기도 했다.
사건의 진실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 고대 그리스의 인물 조각상, 고대 올림픽
기독교 신자들에게 있어 예루살렘은 예수가 못 박혀 죽은 곳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또 다른 의미는 바로 예수가 다시 부활하고 승천한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예루살렘은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쟁탈의 초점이 되어 오래전부터 전쟁이 끊이지 않아 온갖 변화를 겪으며 오늘날에 이르렀다. 통곡의 벽은 서쪽으로 향하고 있기에 ‘서쪽 담’이라고 불렸다가, 유태인들이 이곳에 와서 경전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해서 ‘통곡의 벽’으로 바뀌었다.
그리스인들은 선천적으로 행동이 민첩하고 좋은 혈통을 타고나 몸의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그리고 운동을 잘하는 것을 남성의 자랑으로 여겼기 때문에 알몸으로 운동할 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을 좋아했다. 인체에 대한 고대 그리스인의 독특한 미적 관점은 예술가들의 창작적 소재와 환경에도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고대 그리스의 인물 조각상이 대부분 나체인 것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이들의 나체 조각상은 결코 가볍지 않은 느낌을 준다. 장엄하고도 순결하고 우아해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고대 그리스 올림픽에서 우승한 선수에게 상으로 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정신적인 응원이었다. 고대 올림픽에서는 각 종목마다 한 명의 선수만을 우승자로 뽑았다. 이 등이나 삼 등이 없었기에 경기는 더욱 치열하고 격렬했으며, 최종 우승자를 향한 존경은 더욱더 컸다. 이처럼 고대 올림픽 우승자가 받았던 상은 물질적인 부분만이 아닌 정신적인 격려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의 우승자는 가장 신성하고 숭고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존경과 칭찬을 받았던 것이다.
나치의 상징, 유태인 학살, 동포학살
히틀러가 만卍 자를 나치의 상징으로 삼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나치당의 이름에서 연유한다. ‘나치’라는 말은 ‘국가 사회당’을 뜻하며 독일어로 국가와 사회에는 모두 알파벳 ‘s’가 들어간다. 이 ‘S’를 엇갈려서 하나로 합쳐 바로 卍 모양이 된 것이다. 또 다른 설은 권력에 대한 강한 욕망이 있었던 히틀러는 어린 시절 한 수도원에서 卍 부호를 보았고, 그것이 바로 수도원의 권력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나치의 상징으로 卍 모양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도 있다. 조직을 만든 점술가가 히틀러의 미래를 점쳤을 때 세계를 놀라게 할 인물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히틀러가 기뻐하며 조직의 상징인 卍을 나치의 상징으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 신비한 분위기의 卍 부호를 향해 무수히 많은 나치들이 열광했고, 그들은 卍 모양이 그려진 깃발 아래에서 잔혹한 짓을 저질렀다. 그 후 전쟁이 종결되면서 나치의 상징 역시 무너져 내렸다.
유럽인의 유월절에 기독교에서 신봉하는 아동을 제물로 바쳤기에 이들을 유럽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있었다. 히틀러는 이러한 유럽인들의 정서를 이용했던 것이다. 히틀러가 유태인 학살에 지독하게 매달린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많은 전문가들은 히틀러의 대규모 학살이 군사적으로 상당히 불리한 결과를 낳았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훌륭한 유태인 과학자들이 독일에 대한 원망을 키워 독일을 떠났고, 히틀러는 인류를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무거운 죄명을 쓰게 되었다. 1939년에서부터 1941년까지 소위 게르만 민족이라는 고귀한 신분의 독일 중증 장애인들 십만여 명이 히틀러에 의해 소리 소문 없이 잔혹하게 죽어갔다. 전란 후에 이러한 악행은 모두 낱낱이 드러났다.
일본 천황이 죄를 언도 받지 않은 까닭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끝난 후, 극동 군사 재판에서는 일본 전범들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최고 총수인 히로히토 천황은 기소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처분도 받지 않았다. 이것은 모든 국민은 물론이고 천황 본인마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맥아더는 일찍이 “천황 하나는 미군 백만 명과 같다”고 말한 바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미국의 이익을 확실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일본 천황을 살려두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미국은 장차 막대한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긴급 보고서를 작성해 보냈다. 트루먼 대통령도 그의 의견에 동의하고 지지하였다. 히로히토 천황을 재판에 세우지 않게 하기 위해 맥아더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의 죄를 덮고자 했다. ‘천황은 직접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발발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전쟁 중에 발생한 죄를 그에게 씌울 수는 없으며, 전쟁은 일본의 군벌 세력 몇 명이 계획하며 일으킨 것’이라며 천황을 옹호하는 발언을 몇 번이고 거듭했다. 이로써 일본은 천황제를 존속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천황제를 유지한다는 ‘유조건 항복’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천고의 수수께끼
이스터섬, 갠지스강
태평양 동남쪽 칠레에서 3천 7백 미터 떨어진 곳에 섬이 하나 있다. 이스터섬의 대형 석상은 검은 돌로 만들어져 있고 대체로 7~10미터 높이에 몇 십 톤의 무게가 나간다. 그 가운데 가장 긴 것이 22미터로 3백 톤 정도의 무게가 나간다. 생동적인 모습의 석상들은 높은 콧대와 좁은 이마, 긴 귀와 올라간 입술 등 얼핏 보면 모두 서로 비슷한 생김새인 듯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조금씩 다르다. 그런데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이 황량한 섬에 어째서 이토록 많은 석상이 만들어져 있는 것일까? 이런 모습의 석상을 누가, 왜 만들었을까? 과학자들은 오랫동안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지만 만족할 만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이 섬에 있는 석상을 연구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섬 안에 있는 석상들을 모두 완성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5천여 명의 노동력이 필요했을 거라고 한다. 그런데 섬의 자연 조건으로 볼 때 한 섬 안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삶이 유지되었다는 것은 실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섬에는 수많은 상형 부호가 새겨진 목판이 있다. 이들의 길이는 제각기 다른데, 그중 가장 긴 것은 2미터에 달한다. 아직까지 이 상형 부호를 해독한 사람은 없었다. 만약 이 문자를 해독하기만 한다면 이스터섬의 수많은 수수께끼는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다.
갠지스강은 인도 제일의 강이다. 인도 사람들은 갠지스를 ‘성스러운 강’ 혹은 ‘어머니의 강’이라고 부른다. 인도의 전설에 의하면 천당여신의 화신이 인간세계의 한 국왕의 요청에 부응하여 속세에 내려와 선조의 죄업을 씻고 농사에 필요한 관개수로를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인도 사람들은 갠지스강을 무척 성스럽게 생각한다. 인도의 신도들은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하면 죄를 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더불어 행운이 온다고 믿는다. 사실 갠지스 강물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비스러운 성수는 아니다. 매일같이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강물에서 목욕을 하고 죽은 이의 재를 뿌리며, 또 시체를 화장하지 않고 바로 강에 버리는 사람 등으로 들끓기 때문이다.
종교역법
요일에 담긴 과학과 종교
현재 통용되는 7일의 요일은 고대 바빌론 사람이 기원전 2천 년 즈음에 만든 것이다. 고대 바빌론 사람은 태음월에서 달빛이 28천의 4등분되는 것을 발견하고 일주일은 제사를 지내 7일을 일주일로 삼았다. 요일은 바로 별자리의 위치와 일기 때문에 칠요일이라 부르게 되었다. 7성은 ‘일월화수목금토’의 순서이다. 중국 고대 역법 역시 이 순서를 따라 7일을 일주일로 하고 ‘칠요’라 불렀다. 고대 바빌론의 요일 체계는 이후 고대 로마에 전해졌다. 성경에는 신이 세계 만물을 창조했다고 쓰여 있다. 첫째 날에는 빛과 암흑을 나누어 밤과 낮을 창조했고, 셋째 날에는 풀과 나무 그리고 모든 식물을 만들었고, 넷째 날에는 해, 달, 별을 만들고 년, 월, 일과 계절을 만들었다. 다섯째 날에는 생물과 동물을, 여섯째 날에는 곤충과 맹수를 만들었고, 마지막에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만물을 창조했다고 한다. 기독교는 예수가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흘 뒤 일요일에 부활했기에 일요일을 주일이라 부른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신자들은 주일인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를 찾는 것이다. 이 요일 체계를 사용하는 것은 321년 3월 7일 고대 로마에서 정식 공포하였고, 이 이후로 지금까지 전 세계가 모두 칠요일을 사용하고 있다.
과학 기술의 빛
노벨상
노벨은 유족에게 자신의 유산으로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문학상, 평화상을 만들어 달라고 유언했다. 유언장은 당시 큰 파문을 일으켰다. 노벨은 평생 동안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자녀가 없었고 가족이라면 프랑스와 러시아, 스웨덴 등지에 흩어져 사는 친척들이 전부였다. 친척들은 힘을 합쳐 유언을 바꿀 준비를 했고, 이를 지켜본 스웨덴의 유명 인사들은 친척들을 비난했다. 거액의 유산을 스웨덴에 환원해 스웨덴의 과학, 문화, 예술 발전에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노벨 친척들과의 분쟁이 해결된 뒤 스웨덴 정부는 1900년 6월에 드디어 노벨상을 설립하였다. 1901년 12월 10일, 노벨 사후 5주년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노벨상 시상식을 치렀다. 노벨상에서는 스웨덴 예술가가 제작한 상장과 메달, 그리고 상금이 수여된다. 메달은 반 파운드 정도의 무게가 나가는23k 금으로 제작되었다.
문예의 정수
아라비안나이트, 셰익스피어, 단테, 최후의 만찬
아라비안나이트는 천 일 동안의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천 가지의 이야기가 담긴 것은 아니다. 모두 134가지의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으로 세계 수많은 나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는 유럽으로도 전해졌다. 1717년 프랑스의 A. 갈랑의 이름으로 출간되었는데 이 번역본이 나오자마자 세간에 큰 이슈를 불러왔다. 이 책에 깊이 빠진 어떤 이는 책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한밤중에 역자를 찾아가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셰익스피어는 영국의 천재 시인이자 극작가이며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강한 매력이 있다. 작품을 통해 그가 묘사한 작중 인물들은 전형적이면서도 각기 개성을 지니고 있다. 정제되고 풍부한 어휘와 생동감이 느껴지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영국 문학을 대표한다는 것은 만인이 인정한 사실이다.
단테는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위대한 시인이며 그의 대표작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편 서사시인 『신곡』이다. 『신곡』에서 단테를 천당에 인도하는 사람은 그가 젊어서 사랑했던 베아트리체이다. 단테가 처음 베아트리체를 본 것은 9세 때였다. 단테는 붉은 옷을 입은 매력적인 베아트리체를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졌고, 성장하는 내내 그에게 있어 베아트리체는 정신적인 흠모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이와 결혼을 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깊은 슬픔에 빠진 단테는 베아트리체에 대한 그리움과 찬미, 사랑과 슬픔을 시로 표현하였고, 그는 훗날 이 시들을 묶어 『신생』으로 펴냈다.
〈모나리자〉와 함께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마리아델레그라치에 교회에 그린 벽화이다. 그는 성경 속에서 유다가 예수를 이용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한동안 예수와 유다의 얼굴을 두고 고민했었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오랫동안 관찰했지만 예수와 유다의 모습을 그릴 만한 모델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당시 수도원의 원장은 벽화를 빨리 완성하라고 재촉했고, 다 빈치는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원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만약 수도원의 원장이 다시 나를 찾아와 재촉한다면 원장의 얼굴을 유다의 얼굴로 그려 넣을 테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말을 전해 들은 원장은 다시는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고 한다. 더 이상 원장이 성가시게 방해하지 않자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와 유다의 얼굴을 완성했다.
귀퉁이의 역사 자료
노예무역
15세기 신항로 개척이 시작되자 서양은 아프리카를 침입하여 식민통치를 자행했다. 서양의 강대국들은 광적으로 아프리카를 침략했고 인류 역사상 가장 가혹한 노예무역을 실시했다. 서양의 노예무역은 삼각무역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먼저 유럽에서 값싼 물건들과 무기들을 배에 싣고 출발하여 아프리카에 도착하는데, 이 과정이 첫 번째 단계이다. 아프리카에 도착하면 싣고 간 물건과 흑인노예를 바꾸어 미국으로 간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미국에서 흑인노예를 담배, 면화 등과 바꾸고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4세기가 넘게 진행된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노예무역을 기반으로 유럽인들은 거대한 부를 쌓았다. 이처럼 노예무역은 강대국에게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시켰으나 그와 반대로 아프리카는 오랫동안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테쿰세의 저주
1800년대 초,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이 백인들의 횡포에 맞서 무기를 들고 저항했다. 이 반란을 주도한 사람은 쇼니 족의 추장 테쿰세였는데, 그는 죽기 전 “20년마다 ‘0’ 자가 붙는 해에 당선되는 미국 대통령은 저주를 받아 목숨을 잃으리라”는 저주를 남겼다. ‘테쿰세의 저주’는 1840년부터 나타났다. 1840년에 당선된 윌리엄 해리슨은 감기가 한 달 만에 폐렴으로 바뀌어 목숨을 잃었고, 1860년에 당선된 아브라함 링컨은 연임이 결정되었으나 남부 지지자에 의해 암살 당했으며, 1880년에 당선된 제임스 가필드 역시 취임한 지 넉 달 만에 워싱턴 기차역에서 암살 당해 사망했다. 1900년에 당선된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도 암살 당했고, 1920년에 당선된 워렌 하딩 대통령은 서부 지역에서 연설하던 중 갑작스러운 심장발작으로 돌연사 했다. 1960년에 당선된 존 F. 케네디 대통령 역시 임기 중에 암살 당했다. 1980년에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연설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암살범의 총탄을 맞았으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따라서 레이건은 테쿰세의 저주에서 벗어난 유일한 생존자라고 할 수 있다.
핵미사일 버튼의 비밀
미국 대통령과 러시아 대통령이 외국을 방문할 때 군관이 들고 있는 휴대용 상자를 본 적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통령 권력의 상징이며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핵미사일 버튼이다. 국가의 규정에 따라 핵미사일 버튼을 휴대하는 장관은 반드시 대통령과 10미터 안에 있어야 한다. 저녁에 대통령이 휴식을 취할 때도 항상 대통령의 집무실에 있어야 하며 네 명의 육군 부대 장교와 특공 요원이 함께 지킨다. 러시아의 대통령 옐친이 요양차 크렘린 궁전을 떠나 별장에서 휴식을 취할 때도 핵미사일 버튼은 몇 명의 장교가 밤낮으로 함께 관리했다.
이러쿵저러쿵
어떻게 여러 인종이 생겼을까?
인류의 진화는 기나긴 과정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그 과정에서 지리적 위치가 다르고 진화한 환경이 다르면 인류의 체질은 각 환경에 적응하는 특징을 갖는다. 예를 들면 흑인은 작열하는 태양과 온도가 높은 환경에서 장기간 생활했기에 이러한 자연 조건에서 생활할 수 있는 몸으로 맞추어졌다. 반면 추운 지역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흑인과 반대로 검은색 함량이 적은 피부와 큰 체형을 가지게 된다. 높고 좁은 코의 백인이 바로 그러한데, 흑인과 백인의 사이에는 각각의 환경적 특징에 따라 황색, 갈색, 홍색 등의 인종이 형성된다. 인류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다른 인종이 서로 혼합된 것처럼 장기간 한 환경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면 새로운 인종이 생기기도 한다. 최근 과학자와 탐험 대원들은 황폐한 밀림 속에서 특이한 인종을 계속해서 발견하고 있다. 1999년 미국의 몇몇 생물학자는 칠레의 해발 6백 미터의 산에서 남색 피부를 가진 인종을 발견했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산소가 희박한 고산 지대에서 생활하다 보면 산소를 충족시키기 위해 단백질이 증가하여 혈액이 남색으로 변한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신비한 소국, 바티칸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로부터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바티칸은 세계에서 가장 신비로운 작은 나라이다. 국토 면적이 겨우 0.44평방킬로미터로, 중국의 천안문 광장보다도 작으며 중등 규모의 대학교 캠퍼스보다도 작다. 바티칸은 주권이 온전한 국가로 자신들만의 국가, 휘장, 국가, 군대와 법원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 백여 개 이상의 국가, 지역과 정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바티칸은 정교가 합일된 특수한 형태의 국가이다. 이 나라의 수뇌는 교황이며, 교황은 최고의 입법, 사법, 행정권을 가진다. 이 작은 국가에는 가정이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부모도 없고 자녀도 없다. 바티칸의 상주인구는 약 8백 명으로, 모두 성직자이며 신부나 수녀들이다. 공업이나 농업, 상업이 없으며 학교나 극장도 없고 서점이나 신문 가판대도 없다.
바티칸은 군대를 가지고 있지만 군인은 모두 바티칸의 국민이 아니고 스위스에서 고용해 온 용병이다. 그렇다면 바티칸은 어째서 스위스 인을 병사로 고용하는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서기 8세기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드족이 남쪽으로 침입하여 바티칸을 위협하자 바티칸은 심기일전하여 스스로를 지켜냈다. 당시 바티칸의 군대는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등의 국적을 가진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중 스위스 국적의 병사들만이 끝까지 용감히 싸웠다. 그래서 교황은 특별히 스위스 국적의 병사들에게 크게 상을 내렸고, 그 후로도 계속 스위스인만을 병사로 쓰겠다고 선포했다. 이 전통은 십 수세기에 걸치는 동안 변함없이 이어져 왔으며, 지금까지도 바티칸 군대는 스위스인만을 고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티칸의 부 역시 수수께끼 중 하나이다. 이 나라는 지금까지 대외적으로 재무 상황을 밝힌 적이 없으며 은행 업무 또한 극비로 하고 있다. 미국 정보국에서 비밀을 캐내려고 해보았지만 아직까지 밝혀 내지 못했다.
스무 번이나 바뀐 국기
국기는 국가의 상징이자 표시이다. 한 국가의 토대가 바뀌지 않는 이상 한 번 정하면 절대로 바꿀 수 없지만, 세계에서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국가가 하나 있다. 바로 미국인데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의 도안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바뀌어 왔다. 미국의 국기 도안은 건국 이래 2백여 년 동안 스무 번 바뀌었는데, 평균 11년에 한 번 꼴로 바뀐 셈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한 나라의 국기 도안이 이렇게 자주 바뀌었을까? 이는 미국의 영토가 끊임없이 변화한 것과 관련이 있다. 성조기 위쪽에 있는 별 하나하나는 미국의 주가 그동안 끊임없이 늘어남에 따라 국기 도안도 함께 바뀌었던 것이다. 이처럼 한 국가가 2백 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스무 차례나 국기 모양을 바꾼 것은 세계에서도 이례적인 일이다.
'도서 요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우연의 일치, 신의 비밀인가 인간의 확률인가(마틴 플리머 · 브라이언 킹 지음) (0) | 2009.07.09 |
---|---|
[스크랩] 기 도 (필립 얀시 지음) (0) | 2009.07.09 |
[스크랩] 거침없이 걸어라(유인촌 지음) (0) | 2009.07.06 |
[스크랩] ‘험담’ 로리 팰라트닉․밥 버그 지음/김재홍 옮김 (0) | 2009.07.06 |
[스크랩]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는다(김요셉목사 지음) (0) | 2009.07.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