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한민국 외과의사다 민병철 지음 새론북스 / 2006년 12월 / 240쪽 / 10,000원
▣ 저자 민병철 1929년 경성부(京城府) 소격동(昭格洞)에서 출생했다. 진주 제일 소학교를 졸업한 뒤,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하여 진주중학교로 소개 전학을 갔다. 경성대학교 예과에 입학하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진학을 했다. 졸업과 동시에 해군에 입대, 중위를 예편한 뒤,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국 보스턴 터프츠 대학교 인턴, 레지던트, 치프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 의대 전임강사로 재직했다. 미 외과 전문의 한국인 1호로서 귀국한 뒤, 백병원에서 잠시 근무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조교수와 부교수를 거쳐 정교수직을 역임했다. 그리고 그 사이 신영병원을 개원했다. 미국 외과학회 정회원인 그는 대한소화기병학회 회장, 대한외과학회 회장, 고대 구로병원 초대원장, 서울중앙병원(현 서울아산병원) 원장을 역임했다. 상훈으로는 국민훈장모란장, 대한민국기업문화상, 한국능률협회 최고경영자상을 수상했다.
▣ Short Summary 53년간 외과의사로 활동하며 다양하고 흥미로운 인생을 펼쳐온 외과 전문의의 자전 에세이집. 호기심 많은 한 소년이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거치며 뜻밖의 기회로 유학길에 올라, 미 외과 전문의 자격 한국인 1호가 되어 귀국한다. 젊은 날 공부 길의 고단함을 넘어서 강단으로 병원의 경영자로 기관차같이 달려온 저자의 삶은, 한국 의료 현장에 신바람을 불러일으킨 외과 개척사이다. 각각의 시대상을 통해 변화된 진료실의 풍경과 의사들의 솔직담백한 생활상이 펼쳐지며 직업인으로서 의사들이 겪는 애환과 기쁨이 드러난다. 호기심 천재에서 종합병원 CEO가 되기까지 한 편의 메디컬 성장드라마를 통해, 열정과 의지로 점철된 도전과 모험정신 그리고 위기를 극복해 가는 경륜을 배울 수 있다.
1, 2, 3부에서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직후의 피폐한 상황 속에서 미국 유학을 떠나고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4부에서는 귀국한 뒤 1960년대 우리 의학의 실태를 기반으로 선진 의학을 앞세워 한국 의학에 버팀목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5부에서는 병원장으로서의 시간을 두루 돌아보고 우리 의료계를 통찰하며 느낀 문제점들을 에피소드와 함께 풀어나가고 있다. 특히 정주영 회장과의 각별한 인연이 주목할 만하다. 6부에서는 휴식과 운동도 의사 업무의 연장선임을 강조하고 있고 7부에서는 의사로서 겪는 자신의 투병기를 인간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부록에서는 의학을 공부하고 있는 젊은 의학도들에게 주는 조언과 당부의 말을, 의사의 길로 들어선 조카에게 주는 편지로 대신했다.
▣ 차례 서문 ― 출간에 대한 변
01. 소년, 인생을 펼치다 호기심 천재 / 아버지와 아들 / 100번 외워라 / 배고파서 공부가 안 돼 / 소개전학(疏開轉學) / 진주 다방의 명 DJ / 결혼
02. 전쟁과 의과대학생 바이올리니스트 의과대학생 / 마지막 레슨날 6·25 / 피난길 / DDT 세례식 / 생계, 그 참을 수 없는 문제 / 사교댄스와 쭈쭈함대 / 유학 가지 않을래? / 군 제대와 유학 수속
03. 외과의사의 길에 들어서다 군복 차림의 유학길 / 애 받아요! 오 제발…! / 실력, 영어, 체력의 한계에 도전 / 닥터 멕그레거와 로니스 / 배울 준비는 되었나? / 자원한 인턴 / 차이나타운 민중판점 / 하루 300번 실 매기 연습 / 응급실 술주정뱅이와 파견 경찰 / Pass Out? Pass Away? / 피라미드식 레지던트 선발 / 행운의 치프 / 미 외과전문의 자격 한국인 1호 / 고향의 가족
04. 교수로서 강단에 서다 1960년, 한국 의학의 현주소 / 백병원 외과의사 / 드릴 가져와 / 명강의 그리고 5·16 군사혁명과 첫 수술 / 서울대학교 의대에 호적을 올리다 / 무대 배짱 /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군 수송선 / 아, 보스턴! / 재미있는 지옥이냐, 재미없는 천국이냐 / 비싼 수업료 / 신영병원
05. 병원 CEO되다 고대부속 구로병원장에 발탁 / 특진제 부활 / 정주영 회장과의 인연 / 서울아산병원 초대 연구소장 / 당신이 병원장이다 / 눈꼴시고 아니꼬워 야단났다 / 병원이 물 속에 잠기다 / 중환자실에서의 특전사 장군과의 담판 / 생명 구출 작전 / 장기이식의 완벽한 팀워크 / 분산약국, 환자의 만족을 위하여 / 평균재원일수를 줄여라 / 수술실 안 레스토랑, 병원 안 레스토랑 / 오너의 병원에 대한 애정 / 처음으로 법정에 서다 / 대체의학에 대한 남다른 애정 / 외과학회를 돌아보면 / 청진기 의사, 컴퓨터 의사
06. 휴식과 운동은 업무의 연장선 일 잘하는 비결은 충분히 쉬는 것 / 산탄데르 피아니스트 / 멕시코발 한국 VS 이탈리아전 월드컵 중계 / 태양의 나라, 스페인의 낭만 / 오너도 내 휴가는 못 말려 / 늦깎이 수영 선수 / 골프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지? / 정신 집중에는 요가!
07. 의사도 가끔은 아프다 이제 죽는다? / 식도에 펑크가 나다 / CT에 나타난 간 종양 / 그리고 전립선암
부록 ― 우리 사회가 바라는 의사의 위상: 젊은 히포크라테스에게 힘드나 보람 있는 일 / ‘사람됨’이 제일의 요건이다 /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라 / 시간을 호율적으로 안배하라 /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의사
나는 대한민국 외과의사다 민병철 지음 새론북스 / 2006년 12월 / 240쪽 / 10,000원
01. 소년 인생을 펼치다
호기심 천재 서울에 올라온 것은 경기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태생은 서울 소격동이지만 다섯 살 때 진주로 이사를 갔으니, 서울은 내게 낯선 타향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1941년 일정시대의 서울은 진주에 비하면 활기가 넘쳐흘렀다. 보는 것마다 신기하고 재미있어 잠시도 똑바로 걷지 못한 채 시내 구경에 한눈을 팔았다. 그중에서도 내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한 것이 전차였다. 중학교 입학시험에 대한 압박감이나 긴장감은 둘째치고, 시골에 내려가기 전에 꼭 한 번 전차를 타보겠다는 설렘에 들떠 있었다. ‘정말 신기하다.’
입학시험은 잘 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판시험이 까다롭기는 했어도 제한된 시간 안에 답을 적어 넣었다. 이틀에 걸친 입학시험이 끝났다.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 2차 지원 중학교에 가서 또 시험을 쳤다. 그 당시에는 으레 그렇게 입시를 치렀다. 2차 시험을 보고 교문을 나서는데 정문 앞에 아버지가 서 계셨다. “병철아, 니 경기중학교에 합격됐다.” 시험에 대한 부담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에게 간청했다. “아버지, 전차를 한번 타보고 싶습니더.” “그리 하그라.”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서 내 손에 5전을 쥐어 주었다. 동시에 여관 이름이 적힌 종이와 수험번호를 쥐어 주고는 안국동에서 전차를 태워주었다.
02. 전쟁과 의과대학생
바이올리니스트 의과대학생 8·15 해방을 축하하기 위해 진주에서 음악회가 열렸다. 그때부터 나는 바이올린에 부쩍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음악에 취미를 갖게 되면서 나에게는 다방에서 온종일 명곡을 감상하는 취미가 생겼다. 아버지 몰래 어머니가 사준 바이올린으로 나는 골방이나 광에서 연습했다. 수험생이 되면서부터는 일단 대학을 들어가고 봐야 했기에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공부에 열중했다. 놀긴 했지만 한번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뒤로는 광기를 뿜어대며 미친 듯이 공부했다. 3개월 동안 열심히 공부한 끝에 나는 경성대학 예과(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합격했다.
경성대학 예과에 다니면서 나는 바이올린에 심취했다. 본과 1,2학년 때까지도 옆집에서는 내가 음대생인 줄 알 정도였다. 배가 고파 공부를 못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생활고로 먹는 것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시골에서 부쳐온 생활비 절반을 레슨비로 사용했던 것이다. 나중에는 작곡 레슨까지 받았다. 연주하기 좋게 편곡을 해야 할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현악 4중주단을 조직해 함께 연습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라디오 방송에까지 출연하여 생방송으로 연주도 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메디컬 오케스트라’는 1년에 두 번 정기연주회를 가졌다. 그 시절 나는 음악으로 재능을 살리고 싶어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서울대 예과 2학년 때, 집안에서 혼담이 오가는 규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에서 경기여고를 다니다가 소개 전학(疏開轉學: 공습이나 화재 따위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람이나 시설을 분산시키는 것)으로 진주에 내려와 진주여고를 다녔고 해방 후에는 다시 서울로 돌아갔던 규수였다. 진양군(晋陽郡) 지수면(智水面) 승산리(勝山里)가 고향인 규수 허영애(許英愛)는 만석꾼 명문가의 1남 3녀 중 막내였다. 당시만 해도 직접 맞선을 보는 것은 어려웠고 서로 사진을 교환해 보는 정도였는데, 나는 도무지 사진만 보고는 결정할 수 없었다. 내 뜻대로 여학생이 학교를 오가는 길목에 서 있다가, 교복을 입고 지나치는 모습을 찬찬히 엿보았다. 참한 얼굴과 조신한 태도가 마음에 들어 결국 집에 결혼하겠다고 기별을 보냈다. 결혼식은 처가인 지수면에서 전통 혼례로 치렀다.
의과대학 3학년 때, 소독(消毒)에 대한 개념이 없어 혼났던 경험이 있다. 본과 3학년에 갓 올라온 우리는 산부인과 수술을 참관하러 수술실에 들어갔다.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조를 이뤄서 들어갔는데, 간호 조무사가 우리에게 주의를 주었다. “수술대에 가까이 가지 마세요.” 그때 수술대 아래로 기구하나가 떨어졌다. 나는 얼른 그것을 집어서 소독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소독하지 않은 손으로 만진 오염된 기구를 수술대에 올려놓자마자, 조교수였던 이수종 선생(훗날 수도의과대학 학장)이 눈을 부라리며 불호령으로 나를 수술실에서 내쫓았다. 나중에 설명을 듣고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리게 되었다. 내가 쫓겨나자마자 소독한 테이블보 전체를 교체하였다고 한다. 그 뒤 우리가 이비인후과를 돌 무렵 6·25 전쟁이 발발했다.
생계, 그 참을 수 없는 문제 전시연합대학이 부산에 발족되었다. 부산으로 피난 온 서울의 의과대학생들을 한군데 모아 합동수업을 했다. 서울의 4개 대학, 즉 서울대, 연대, 이화여대, 수도의과대학(고대 전신) 학생이 함께 수업을 받았는데 한 학년당 학생 수는 30명이 전부였다. 그 수업을 받기 위해 거리로 나오다가 까딱 잘못하면 곧바로 징집되어 전장으로 끌려가기 일쑤였다. 일단 학교는 졸업해놓고 입대하기 위해서 요령껏 밖에 나다녀야 하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어찌어찌 하다 보니 1952년 2월, 졸업이 다가왔다. 이때 나는 자신을 돌이켜 보며 뭔가 획기적인 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졸업과 함께 주저 없이 해군 군의관에 자원입대를 했다. 1952년 3월, 서울대, 연세대 졸업생 열세 명과 함께였다. 군의학교에 입소한 열세 명의 군 후보생들은 한방에서 자고 함께 훈련했다. 훈련 중에 가장 큰 고생은 뭐니뭐니 해도 배고픔이었다. 식사라고 해봐야 잡곡밥과 소금물 한 종지가 전부였다. 끼니때마다 식탁에 앉을라치면 소금물에 밥을 말아 젓가락으로 휘저어 후루룩 마시면 뚝딱이었으니, 식사시간은 30초면 족했다. 하루 세 끼가 이런 식이었다. 혈기 왕성한 장정들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칼로리 섭취는 꿈도 못 꾸었고, 만날 영양결핍 상태인지라 틈만 나면 졸렸다. 옆에 있는 동료들도 나와 똑같은 증세를 보였다.
재미있는 것은 화장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우리의 그것은 퍽, 하고 퍼지는 소똥처럼 푸석푸석했다. 보통의 자줏빛을 띤 갈색의 똥과는 전혀 달랐다. 풀만 먹는 소가 푸석푸석한 똥을 누는 이유를 그때 알았다. 어쩌다가 일요일에 외출이 허용되어 쌀밥과 수육을 먹고 들어오면, 다음날 본 용변 상태는 확연히 달라졌다. 군 당국은 석 달의 훈련 기간 동안 오전에는 훈련을 하고 오후에는 공부를 하도록 배려해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52년 졸업생부터는 의사고시를 치러야만 의사 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새로운 제도 속에서 우리는 모두 열심히 공부하여 그해 5월 말, 열세 명 전원이 의사고시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이제 내 앞에는 임관(任官) 심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해상 근무에 적합한지의 여부를 가늠하는 것인데, 나는 배멀미를 심하게 했다. 당연히 인사기록부에는 해상 근무 부적격이라는 도장이 찍혔다. 그러한 판정을 안고 해군 중위로 임관된 직후, 나를 비롯한 모두가 진해 해군병원의 인턴으로 배치되었다. 주로 외과만 있던 진해 해군병원에서 그렇게 교대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으니, 1952년 6월이었다.
유학 가지 않을래? 진해 해군병원 일반외과 과장은 송전무 대위였다. 송 과장은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미국에서 2년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보기 드문 인재였다. 그는 인턴들을 가르치는 일이 몸에 익은 사람이었다. 송 과장은 인턴들에게 교대로 세미나 주제를 준 뒤, 여러 군의관들 앞에서 발표를 시켰다. 나는 나에게 부여된 ‘급성 신장부전증’에 대해 공부를 해야 했고 2주일 뒤 세미나에서 30분간 발표를 했다. 급성 신장부전증이란 심한 출혈로 혈압이 떨어져 신장의 혈액순환 상태가 나빠지면서 신장의 기능이 소실되어 오줌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증상을 말한다. 나는 부상병들을 통해 그와 같은 상태를 봐왔다. 의료 지식이 부족했고, 인공신장기도 등장하기 전인 시절이었기에 이 증세가 오면 대개 살아남지 못했다.
나는 세미나를 준비하기 위해 급히 관련 참고문헌을 찾고 이를 구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나는 존슨 중령을 보좌하고 있던 터라 중령과 같이 사용하는 책상에 참고문헌을 가져다 놓고 하나씩 검토하면서 공부에 몰입했다. 퇴근 후에도 계속 남아 발표 준비에 정성을 쏟았다. 물론 그러한 공부는 존슨 중령이 부여한 업무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하고 난 다음에 했다. 이와 같은 완벽주의는 늘 내 인생을 개척해 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루는 존슨 중령이 다가와 말했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하지? 한 번 볼 수 있을까?” 나는 관련 자료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자료를 유심히 읽어보던 존슨 중령이 말했다. “넌 참 열심히도 공부하는구나. 미국에 유학 가고 싶지 않니?” 나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 번 천 번 가고 싶죠. 하지만 어떻게…….” “인턴 자리는 내가 소개해줄 테니, 제대 문제는 민 중위가 알아서 해결해봐.” “고맙습니다.”
신이 났던 나는 결코 길지 않은 기간 안에 세미나 준비를 마쳤다. 물론, 발표는 성공적이었고 함께 모인 사람들로부터 한결같은 칭찬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송 과장의 교수법은 내 평생의 진로를 바꿀 만한 일을 벌이게 하였다. 존슨 중령은 미국에 있는 여러 병원에 서신을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콜로라도 주 덴버의 한 병원으로부터 인턴으로 오라는 답변을 받아냈다. 꿈만 같았다. 유학이라니!
03. 외과의사의 길에 들어서다
실력, 영어, 체력의 한계에 도전 1954년 7월 말, 내 나이 만 24세 8개월 때 드디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막상 인턴 생활을 실제로 체험하면서 나는 나 자신이 미국 출신의 인턴들에 비해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실력, 영어, 그리고 체력이었다. ‘어떻게 따라가지?’ 어쩌겠는가? 나는 일이 끝나면 무조건 병원 도서관에서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하도 열심히 공부에 매달리다 보니 폐관 시간인 열 시가 되면, 사서가 도서관의 규칙마저 어겨가며 내가 『NEJM :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세계적인 권위의 의학 저널)을 가지고 나가도록 허용해주었다. 나는 의학사전을 펼쳐놓고 『NEJM』에 실린CPC(Clinical-Pathological Conference, 임상-병리 집담회) 자료를 단어 하나하나 일일이 찾아가며 공부했다...이를 통해 내가 잘 모르는 혈액 검사라든가 엑스레이 촬영법 등을 의학용어와 함께 알아가면서 실제 임상에서 환자를 다루는 법에 대해 조금씩 터득해나갔다.
나는 교과서 위주의 공부보다 실제 임상경험 판례집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면서 살아 있는 공부를 했다. 『NEJM』에 나오는 CPC 자료를 매주 한두 권씩 6개월 정도 공부하자, 내가 보기에도 눈에 띄게 실력이 향상되었다. 이 무렵, 미국인들은 실력으로 보자면 더 이상 내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나 같은 외국인들은 이상하게도 늘 그들에게서 소외되었으므로, 나는 항상 나 자신과 싸우는 고독한 생활을 반복했다. 외롭고 힘들 때마다 오직 공부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했다. 돌이켜 보면 정말 무서울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자원한 인턴 3년 미국의 전공 제도상, 외과 특과를 하려면 일반외과를 1년 더 순환 근무해야만 했다. 보스턴의 터프츠 대학을 소개받았다. 시카고를 경유하여 보스턴에 도착한 1954년, 당시 보스턴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은 지저분한 고도(古都) 같다는 것이었다. 시험을 칠 줄 알고 내심 긴장했었는데, 면접장에서 만난 교수들은 나와 잡담만 나누었다. 한 일반외과 교수는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가 바이올린을 켜는 것이라고 했더니, 그와는 30분 내내 음악에 관한 이야기만 주고받으며 인터뷰를 마쳤다. 물론 다른 외과 교수들과도 교대로 인터뷰를 계속했다.
하루 종일 인터뷰를 하는데도 외과 교수들은 외과에 관한 질문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로서는 의아했는데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네가 배우러 오는 것이지 가르치기 위해 오는 게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과연 배울 마음이 있는지, 한 인간으로서의 교양은 갖췄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인터뷰였던 것이다. 그와 같은 인터뷰는 훗날 내게도 후진들을 양성하는 데 소중한 기준이 되었다. 인턴이 여러 과를 도는 덴버와는 달리, 보스턴에서는 외과 계통에서만 붙박이로 일하는 인턴 생활이었다. 그리 나쁜 조건이 아니었다. 나는 고민 끝에 일단 터프츠 대학으로 갈 생각을 굳혔다.
터프츠 대학 의과대학병원(New England Medical Center, 공식명칭은 뉴잉글랜드 메디컬 센터)에서는 7월 1일부터 정상 근무를 했다. 확실히 보스턴 의사는 보수적이었다. 환자를 대할 때, 항상 와이셔츠를 입고 타이를 매야 했다. 머리를 감고 빗는 시간마저도 아까워 스포츠형 머리를 하고 다니던 나에게도 이 규칙은 고스란히 적용되었다. 환자에 대한 피검사(CBC)와 소변검사(Urinalysis)는 물론, 환자가 수술할 부위의 털을 깎고 관장을 하는 것까지도 인턴의 몫이었다. 미국 남자들은 가슴에 털이 많아 개복수술을 하기 전에 면도를 해야 했다. 당시만 해도 전동 면도기가 나오기 전이었기 때문에, 옛날 이발소에서 사용하는 식도 같은 면도날로 백인들의 가슴 털을 밀었다. 그러다가 졸기도 하는 날에는 환자를 베기도 했다. 그뿐인가, 수술 직전에 장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지 않으면 레지던트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졌다. “수술하다가 장에서 똥이 나오면 너한테 먹인다!”
인턴에게 레지던트의 명령은 법이다. 그러니 다음 날 아침까지 인턴은 환자에게 찰싹 달라붙어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지켜봐야 한다. 신환(新患)이 들어오면 환자의 병력을 자세히 듣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진찰을 해야 한다. 직장 검사를 포함해서 그 어떤 검사라도 하나가 빠지면 레지던트의 불벼락을 피할 수 없다. 수련 시절에 환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려주는 이러한 훈련은 훗날 남에게 일을 정확히 시킬 수 있도록 만드는 필수 과정이었다. 손가락으로 하는 직장검사나 여자 환자의 내진을 할 경우에도, 정상적인 상태를 100번은 경험해봐야 정상이 아닌 이상(異常)을 인지할 수 있다며 훈련을 반복하게 했다. 결국 인턴은 모든 업무를 마친 새벽 1시 이후에도 환자의 소변검사와 피검사를 직접 해야 했다. 모든 일이 끝나면 새벽이었다. 그때부터 잠자리에 들어도 기상 시간은 여지없이 5시 30분이었다. 일어나면 바로 세수를 한 뒤 숙소에서 걸어 나오면서 나비넥타이를 매고 길을 건너 병원으로 들어와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면 새벽 6시였다.
또한 회진하기에 앞서 치프 레지던트가 묻는 환자에 대해 인턴은 모르는 게 없는 박사가 되어야 했다. 질문이 무엇이든 명쾌하게 풀어서 그와 관련된 수치를 말할 수 있어야 했다. 만일 엉터리로 보고하거나 환자의 위액과 오줌, 담즙의 양이라도 틀릴라치면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쭐이 났다. 한 번의 폭풍 같은 질책이 연말에 레지던트로 올라가느냐 마느냐의 평가에 영향을 미쳤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전쟁 중 조국의 혜택을 받고 온 유학생답게, 내 가족들에게 떳떳한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기 위해, 모든 레지던트들의 질문에 완벽하게 답변하려고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더불어 환자를 위한 최선의 서비스에 정성을 쏟았다. 그것은 내게 생존이었다.
미 외과 전문의 자격 한국인 1호 그토록 의학 공부에 온 열정을 바친 이상, 나는 미국 외과 전문의 자격시험을 꼭 정복하고 싶었다. ‘일 년에 한 번밖에 없는 시험이기에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 년을 더 체류해야 한다!’ 사실 압박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나는 해부학을 복습하기 위해 학생들의 실습실을 드나들었고, 병리 슬라이드 공부를 위해 보스턴 의과대학에서 표본 한 세트를 빌려 오기도 했다. 시험공부를 하는 틈틈이 미국 생활도 요령껏 즐겼다.
1, 2차 시험을 끝낸 뒤 시험에 자신감이 생긴 나는 보스턴으로 돌아와 나의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다. 어디에서 환자를 돌볼 것이며, 의사로서 어떠한 소명의식을 가져야 할지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의사로서의 ‘삶의 질’을 따지자면 마땅히 미국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나는 처음 미국에 인턴으로 오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당시를 돌아보았다. 전시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나를 미국에 유학 보내기 위해 도와준 사람들의 뜻을 다시 떠올렸다. 또 내가 미국에 남기로 한다면 가족들이야 미국으로 오면 되었지만 부모님이 마음에 걸렸다. 그로부터 한 달 뒤, 그토록 바라던 합격증이 나왔다.
미 외과의 합격증을 손에 쥐는 순간 나는 귀국을 결심했다. 실로 벅찬 가슴을 안고 1960년 7월 마지막 주에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만 6년 만에 귀국하는 것이었다. 내 나이는 만 30년 8개월, 한국 나이로 32세였다. 내가 돌아왔을 때, 서울은 석 달 전에 일어난 4·19혁명으로 말미암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장면 씨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내가 한국에 없었던 만 6년 사이에 조금은 정돈이 돼 있었으나 여전히 전쟁 뒤의 어수선함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당시는 1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이던 시절이었다.
04. 교수로서 강단에 서다
드릴 가져와 1960년대 초의 한국 의학은 한마디로 말해, 1930년대의 일본 의학 수준이었다. 미국에서 외과의 전문의 자격을 땄다는 기쁨도 잠깐이었다. 왜냐하면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의사들이 국내 병원에서 자리를 잡기까지는 상당한 진통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국내파 의사들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국내 의과대학의 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하루 하루가 실망의 연속이었다.
백병원의 외과의사로 취직하면서 얼마간 처형 집에서 지내다가, 나중에는 돈암동에 집을 마련해 가족 모두를 불러들였다. 부모님과 아내, 그리고 세 아이를 거느린 가장으로서 나는 당시 15만환(61년 화폐 개혁으로 단위가 원으로 바뀌면서 가치는 10분의 1로 줄어든다)의 급료를 받았다. 백병원에서는 원장과 스태프 다섯 명을 포함해 모두 일곱 명의 환자를 돌보았다. 수술은 일제시대부터 전해지는 구식 시술법을 사용했다. 게다가 수술실의 환경은 참으로 열악했다. 나는 미국에서 배운 대로 시술하면서 환자들과 동료 의사들로부터 신임을 받기 시작했다.
한 번은 우물을 파 내려가다 낙석에 머리를 맞고 실신한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 왔다. 외상은 미미했지만 의식이 없는 환자였다. 다른 의사가 큰 병원에 환자를 데리고 가보라고 권했다. “돈도 없소.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죽을 것 아니오? 죽어도 여기서 죽겠소!” 보호자들은 완강히 버텼다. 외상 환자를 내려다보며 나는 보스턴의 응급병원에 근무할 때 수없이 봐왔던 경험을 떠올렸다. 나는 기계실로 달려갔다. “드릴 있습니까? 손으로 돌리는 거!” “녹이 슬어 더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만.”
나는 그것을 얼른 받아 녹을 긁어낸 다음 소독하고 삶았다. 그 다음, 환자의 머리를 면도한 뒤 드릴로 두개골을 뚫고 지주막을 절개하여 밑에 고여 있던 피를 배출시켰다. 환자는 얼마 후에 눈을 뜨고 의식을 되찾았다. 환자 측 입장에서는 내가 대단한 의사처럼 느껴졌겠지만, 사실 보스턴에서 많이 해본 수술이었던지라 나에게는 간단한 일이었다. 다른 의사들과 환자들의 박수를 받았지만 나는 만족할 수 없었다. 만날 맹장수술이나 탈장수술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거의 80% 이상이 이렇듯 간단한 수술이었다. ‘이런 수술이나 하려고 미국까지 가서 어렵게 공부하고 돌아왔단 말인가’ 하는 허탈감이 들었다. 서울대학교 의대에 자리가 나려면 5년은 족히 지나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 이래저래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7월에 귀국해서 12월쯤 되었을까. 나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희규 병원장이 나를 불렀다. “다시 미국에 가려고? 자네는 한국 외과를 개척해야 하지 않나? 서울대 의대에 이야기해 보겠네. 처음엔 좀 그렇겠지만 기다리다 보면 좋은 소식이 올 것이네.” 김희규 병원장이 나세진 학장과 협상을 한 모양이었다. “백병원에서 강사료에 해당하는 급여를 서울대에 기부하고 강사 대우로 자네를 편입시키도록 하지. 어때?” 내 생애에서 가장 절박하고 중요한 순간 중 하나였다.
서울대학교 의대에 호적을 올리다 3월에 서울대학교 의대 대우 강사 1호로 부임해서 대우 강사 9개월 만에 드디어 전임강사로 임명을 받았다. 환자가 밀려들기 시작하면서 나는 하루 종일 수술에 매달려야 했다. 젊었고 기운이 좋았기 때문에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10시, 11시에 귀가했다. 나에게는 휴일도 없었다. 밤을 꼬박 세우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정말이지 신바람이 났다. 내 생애에 가장 열정적으로 환자를 수술하고, 돌보는 틈틈이 수술실에서는 레지던트들에게, 강의실에서는 의과대학생들에게 열과 성을 다해 강의하던 시절이었다. 밤낮없이 병원에서 살았지만 나는 참 행복했다.
야간 수술 중에는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다. 치프 레지던트 박귀원(현 서울대 소아외과 교수. 대한여의사회 회장)은 서울대학교 의대 외과 여의사 1호다. 그녀는 굉장한 악바리였다. 그날 나는 식도정맥류가 터져서 출혈이 심한 환자의 정맥을 꿰매기 위해 개복을 해야 했다. 그런데 막상 보니 복부 절개로는 도저히 불가능했고, 차선책으로는 가슴을 열어 식도를 절개해야만 지혈이 가능할 판국이었다. 가슴 절개에 필요한 기계를 소독하고 있는 동안, 나는 그녀에게 지시했다. “닥터 박, 거즈를 출혈 부위에 대고 손가락으로 꽉 누르고 있어라.” 그러는 동안 잠시 짬이 생겼다. 5분이었던가, 10분이었던가. 나는 소파 위에서 잠깐 졸았다. 의사는 수술 도중 피로하거나 머리가 제대로 회전되지 않을 때, 잠시 눈을 붙인 뒤 다시 맑은 정신으로 수술하는 것이 길게 봐서는 환자를 위해서라도 능률적이다.
기계가 소독되고, 환자의 가슴을 열고 식도를 절개한 후, 닥터 박이 누르고 있던 거즈를 떼어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피부의 피가 멈춰 있었다. 출혈을 멈추는 수술을 하기 위해 기계 소독을 지시하고 기다리는 사이에, 식도의 출혈 흔적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곁에 있던 닥터 박은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내 손이 아닌 것 같네요. 감각이 없습니다.” 닥터 박이 30분 동안 워낙 식도를 잘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개복하여 꿰매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한참을 주시하고 있다가 마침내 수술을 끝냈다. 지혈 압박을 지속하는 것이 실로 꿰맨 것과 마찬가지의 지혈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경험하게 된 일화였다.
외과 동료 교직원들과도 간혹 문제가 발생했다. 동료 교수가 췌장암 환자의 췌장을 부분적으로 걷어내지 않고 전부 들추어내는 바람에 환자가 걷잡을 수 없는 당뇨 증세를 보이게 되었다. 당뇨 수치를 재면서 동분서주하던 레지던트는 얼마나 다급했던지 나를 찾아와 어찌해야 되는지 조언을 구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응급처치 방법을 알려주면서 친절하게 참고문헌까지 제시해주었다. 이튿날 그 레지던트가 다시 나에게 찾아와 인사를 꾸벅했다. “환자의 상태가 정상적으로 회복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다가 복도에서 그 환자를 수술했던 동료 교수와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의 뺨을 후려갈길 듯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의 느닷없는 행동에 나는 깜짝 놀랐다. “왜 이래?” “이 자식아! 왜 이러냐고? 이젠 내 환자까지 네가 간섭하겠다는 거냐?”
그제야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순수한 의도에서 레지던트의 질문에 답변해준 것뿐이었는데, 그 레지던트는 내게서 배웠다며 그 교수에게 곧이곧대로 이야기해버린 것이었다. 나는 내가 그런 오해를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거듭 사과했다. 하지만 착잡한 기분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본질적인 의학이나 의술 문제에 대한 건전한 집담회나 토론이 아닌, 사소한 문제로 사사건건 부딪치는 현실이 무척이나 피곤했다.
05. 병원 CEO되다
정주영 회장과의 인연 나는 1970년 무렵, 잠깐이지만 정주영 회장과의 첫 만남을 가졌다. 정 회장의 아들 정몽필(작고) 씨의 부인 이영자 씨가 신영병원(저자가 서울의대 부교수 시절 우여곡절 끝에 개업하여 겸직했던 병원)에서 유방암 수술을 받았을 때였는데, 정 회장이 며느리를 문병하러 왔다가 잠깐 인사를 나누었었다. 운명의 트위스트에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1984년, 당시 현대자동차의 정세영 사장이 구로병원(저자가 고대 구로병원장과 외과 과장을 겸직하고 있을 때)에서 나에게 담석수술을 받고 입원해 있을 때, 동생을 문병하러 온 정주영 회장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두 번 다 병원에서 자연스러운 만남을 가진 것이다.
이 무렵, 당시 아산재단의 자문을 맡고 있던 문인구 변호사의 제청으로 나도 아산재단의 의료 자문위원으로 위촉받게 되었다. 아산재단은 1977년, 의료 차원의 복지를 일반인들에게 제공하며 사회에 기여한다는 취지로 설립되었다. 1978년 시범적으로 전북 정읍에 100개 병상의 정읍병원이 첫 개원을 했다. 계속하여 보성, 영덕 등 여덟 개 지방에 의료복지를 돕는다는 취지 아래 아산병원이 들어섰다. 그런 가운데 병원을 총괄할 수 있는 중앙병원을 지어야 한다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면서, 정주영 회장과 함께 자문단 모임이 이루어졌다. 자문단에서는 의과 대학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며, 병원은 풍납동에 1천 개 병상으로 설립할 것을 기정사실화했다.
그 시기에 나는 고려대 의대의 평교수로 재직하면서 병원 업무를 마치면 정시 전에 퇴근하여, 수영을 배우는 데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리고 신설 서울중앙병원 병원장으로 내정되어 있는 서울대 의대 이문호 교수와 의사들을 어떻게 영입할 것인가를 놓고 논의했다. 그 후 자문단은 최신식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병원을 만든다는 결의 아래, 영국, 독일, 덴마크 등지의 유수한 병원들을 답사하러 다녔다. 모든 면에서 각광받는 최고의 병원으로 만들고, 의사들의 연구열을 늦추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의과 대학의 신설이 시급했다. 1987년 10월 23일, 울산의과대학 신설을 인가 받았다.
1988년부터 의사 및 일반 직원들을 공채로 채용할 인사방침을 대외적으로 공표했다. 하지만 국내 인적 자원으로는 한계가 있어 미국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서울대 의대 정년을 눈앞에 둔 이문호 교수와 고대 평교수인 내가 둘이서 약 2주간의 예정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내과계는 이 원장이, 외과계는 내가 도맡아 사람을 만나고 평가하기로 했다. 상호 간의 양해 아래, 미 동부와 중부, 그리고 서부로 나누어서 시간을 정해주고 개별 면접을 추진했다. 다행히도 시기적으로 1960년대 말에 무리를 지어 미국으로 건너갔던 의사들이 20여 년의 고생 끝에 많은 일을 성취했고, 그 결과 몸과 마음의 여유가 생겨 고향 한국이 그리워질 때 즈음이었다. 게다가 병원 측의 공정한 인사방침이, 외국에서 대단한 명예와 높은 보수를 받고 있던 우수한 교수진들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던 것이다. 열 명 이상의 우수한 의사들을 영입해 올 수 있었던 미국 순회 면접은 말 그대로 대성공이었다.
서울대 의과대학에서는 해외 출타 건으로 말이 없었지만, 고대 의과대학에서는 말썽이 될 만했다. 다른 병원 스태프 영입에 나서는 일이라면 못마땅하게 여길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사표를 제출했다. 물론, 서울중앙병원(현 서울아산병원)이 개원하기 전이었다. 정식으로 임명될 때까지의 공백을 88올림픽이 다 메워주었다. 올림픽 대회가 끝난 뒤 1988년, 11월, 나는 서울중앙병원의 정식 직원이 되었다. 내가 맡게 된 보직은 아산생명과학연구소의 초대 연구소장 겸 외과 과장직이었다.
당신이 병원장이다 1990년 새해를 맞이하고, 어느덧 2월도 다 지나갔다. 어느 날인가 정 회장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서관 치과 앞에 있는 이사장실로 병원장을 비롯한 주요 임원들이 모두 불려 왔다. 늘어서 있는 우리 앞에서 정 회장은 호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더니 선 채로 읽기 시작했다. “이문호 면(免) 병원장 명(命) 의료원장, 민병근 면 부원장 명 울산대 부총장, 민병철 명 연구소장 겸 병원장. 이상 천구백구십 년 삼 월 일 일부 아산재단 이사장 정주영.” 모두가 아연실색했다. 정 회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그 상황은 나도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원래 생각이 많고, 행동은 단칼에 순간적으로 하는 것 같아도 그전에 심사숙고하여 결정을 내린 듯했다. 그랬다가 공표는 이런 식으로 불시에 터뜨리는 방식이 정 회장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세월이 지나면서 차츰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매일 담배 한 갑을 피워가면서 회의에, 병원 경영에 온 정성을 쏟았다. 무엇보다 붙박이로 일하는 성실성을 인정해주는 것이 정 회장의 경영 스타일이었다. 정 회장은 일단 자리를 맡겨 놓으면 처음 얼마간은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그 사람을 주시하고 뒷조사를 하는 등 철저하게 검증하는 타입 같았다. 정 회장은 사람을 판단할 때 거짓말을 하는가, 열심히 하는가, 능력이 있는가, 이 세 가지를 순차적으로 집중 파악한 뒤, 그 사람을 믿고 완전히 맡길 것인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듯했다.
내가 병원 내부적으로 제일 신경 쓴 것은 유능한 의사들이 자기 간판만 내세우게 두지 않고 진짜 자기 실력을 발휘하도록 해주는 일이었다. 또한 관리직 쪽에는 지나친 의욕과 주인의식을 앞세워 의사들에게 간섭하려는 것을 일절 금지시켰다. 의사가 전투군인이라고 한다면, 관리직은 전쟁에 필요한 보급물자를 의사들에게 제공하고 제대로 된 환경을 조성하면서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병참담당이라고 할 수 있다. 직원들 누구라도 무언가를 요구하면 다 들어주었고,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원장에게 직접 와서 말하라고 일렀다. 그러면서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의사들과 식사와 술을 함께 하고 골프를 치면서 대화를 나누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관리직 쪽에서는 몇몇 임상과가 심한 적자를 내고 있으니, 없애버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주장했다. 마치 일반 기업의 만성적자 부서를 정리하는 것과 같은 맥락의 생각인 것이다. “우리 같은 큰 종합병원에서는 갖추어야 할 과를 다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소리 마세요.” 나는 그렇게 잘라 말했다.
나는 의사들에게 돈 이야기를 절대 꺼내지 않았다. 의사이면서 교수인 그들은 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나는 각 임상과 과장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지시켜 주었다. “과장의 업적은 과의 전체 공적을 총괄하는 것이지, 과장 개인이 얼마나 많은 수술 환자를 받느냐 하는 것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과장 개인이 적게 시술했을지라도, 과 전체 의사들이 어떻게 업적을 냈느냐에 따라 과장의 업적도 달라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세요. 그러니 과원들이 일할 수 있는 최적의 여건을 만들어주세요.” 다행히 과장들은 원장의 말을 잘 알아듣고 따라주었다.
대체의학에 대한 남다른 애정 병원 사람들은 나를 대체의학의 신봉자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양의학보다 역사가 긴 대체의학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에, 대체의학에서도 인간의 몸을 치유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찾아내어 양의학에 접목해보려는 연구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미국의 경우, 국립보건원은 미국 국민들이 매년 대체의학에 사용하는 비용이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미국국립보건원(NIH)은 이런 대체의학이 몸에 해를 주지는 않는지, 만일 해를 주지 않는다면 어떤 종류의 대체의학이, 어떤 경로로, 어떤 상황에서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지, 국민을 위해 검증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주 미미했던 이 분야의 예산을 획기적으로 늘려, 연구 희망자가 나오면 거액의 연구비를 제정, 지원해주었다. 치매의 진행을 늦추거나 개선하는 데 이용되는 은행에 대한 연구라든지, 미국 내 20여 개 센터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침술에 대한 연구가 그 예이다.
이런 연구의 목적은 첫째, 대체의학 중에서 우리 인체에 해를 미치는 것은 없는지를 가려내는 것이고, 둘째, 만일 이 치료가 유효하다면 어떤 식으로 유효한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어떤 약초가 특정 질병을 가진 환자에게 효과가 있다면 그중에서 유효 성분만을 추출해서 신약을 개발한다는 상업적인 목적도 없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우리의 민간요법을 포함해 대체의학의 무해, 무독성을 검증하고 실제로 어떤 질병이나 불편한 상태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를 규명하고자 했다. 그렇다고 과학적으로 월등한 양의학을 버리고 대체의학을 수용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은 양의학에 대체의학을 보완해보자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발목이 삔 사람에게는 당연히 발목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깁스를 대게 한다. 그리고 통증 완화를 위해 별도의 약을 얼마간 복용시킨다. 그러나 약을 쓰는 대신 통증을 완화시키기 위해 침을 놓고 깁스를 대면 어떨까, 하는 발상이다. 이처럼 대체의학을 접목시켜 우리가 시술하고 있는 서양의학에 보탬이 되는 길을 찾아보자는 것이 내 의도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경희대 한방병원의 침술 전문의를 연구요원으로 연구소에 초빙하기도 했었다. 하버드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어 2년마다 합동 세미나도 가졌는데, 1995년에는 대체의학, 보완의학을 주제로 아산병원과 하버드 대학의 합동 세미나를 이틀간 개최한 적도 있다. 이제 우리는 여러 가지 대체의학의 치료법을 검증하여 우리가 현재 시술하고 있는 의술에 이용할 것이 있다면 수용할 줄 아는 아량이 필요하다.
청진기 의사, 컴퓨터 의사 이제 마무리 단계에 들어간 의사로서 한평생을 돌이켜 보면, 그 사이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진료실 풍경도 많이 변한 것 같다. 옛날에는 환자를 대할 때 첨단 진료장비 대신 환자와의 대화와 청진기와 손으로 하는 진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배가 아프다는 환자를 대하게 되면, “어떻게 아팠느냐?”, “살살 뒤틀리듯 아프냐?”, “쏙쏙 쑤시냐?”, “무지근한 둔통이냐?”, 또 “이런 통증이 어떻게 하면 발생하느냐?”, “어떻게 하면 가라앉느냐?”를 자상히 물음으로써 장에서 오는 통증인지, 궤양에 의해 오는 통증인지, 혹은 췌장 같은 실질 장기의 이상으로부터 오는 통증인지, 아니면 화농의 징조인지를 분별하려고 애썼다.
더욱더 도움을 얻기 위해선 환자의 과거 병력과 가족의 병력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야 했다. 세심한 진찰을 위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환자의 전신을 손으로 만지고 청진기로 듣는 것이 필수였다. 이러한 방법은 환자 한 명을 보는 데 많은 진료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사적인 대화와 진찰을 거치는 동안 환자와 의사 사이엔 어느덧 친밀감과 신뢰감이 구축되었다. 그 시절, 피검사나 엑스레이검사는 아주 드물게 시행됐다. 시설이 갖추어진 병원이라고는 큰 대학병원 정도밖에 없었고, 결정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검사 방법이 많지도 않았기 때문에 질병에 대한 진단은 병력을 듣는 것과 진찰과 경험을 통해 얻은 의사의 짐작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어떤가, 질병의 예단과 진단, 치료 등 모든 질료 과정은 물론, 질병의 발생 경로를 이해하는 모든 분야에서 엄청난 발전과 변화가 이루어졌다. 그중 컴퓨터로 대표되는 진단 분야에서의 발전은 가장 괄목할 만하다. 일일이 예를 들 것도 없이 현재 대형 병원에서 매일 사용되는 진료장비들은 최근 10년에서 20년 사이에 탄생된 장비들이다. 옛날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의료 전달체제가 바뀌고 수가제도가 바뀐 탓도 있지만, 새로 나온 복잡한 진단장비에 너무 의존하다 보니 환자와의 대화는 최소화되었다. 손이나 청진기로 하는 진찰 역시 최소한으로 끝난다. 대신 5~10장 정도의 처방전이 나와서 수십 가지 피검사와 엑스레이, CT, MRI, 초음파 검사가 쏟아진다.
이후 검사 결과가 나오면 의사들은 환자가 느끼는 불편이나 느낌을 상대로 한다기보다는 그 검사 수치나 진단 사진을 상대적으로 결정적인 이상이 없으면, 병이 없다고 선언한다. 환자는 처음 의사를 찾았을 때와 똑같이 아프거나 불편한 증상을 느끼는데 말이다. 환자인 사람 전체를 고쳐주지 않고 질병과 수치만 중시한다면 환자 마음속에 흡족한 마음이 들 리 만무하고 의사에게 신뢰감이 생길 리 없다. ‘위안을 받았다면 다만 암과 같은 큰 병은 없는가 보다’라는 스스로에게 주는 위로 정도일 것이다. 어느 쪽이 좋고 어느 쪽이 나쁘다고 논하기 전에, 병의 정밀한 진단을 보면 지금이 이전보다 정확하게 내려진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환자에게 짧은 시간밖에 할애할 수 없는 현재의 의료 전달체계, 수가체계 하에서 의사 개개인이 진료실 풍경을 옛날처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겠으나, 이전의 의사와 환자 간에 이루어졌던 친밀한 인간 관계에다 현재의 발전된 진단과 진료 방법이 첨가될 수 있다면 얼마나 이상적이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희망에 그칠 뿐, 현재의 제반 여건 하에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듯하다. 그런데 이런 식의 환자와 의사 간의 건조한 인간관계가 점차 증가하고 있는 의료사고 소송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평소 대화가 많고 환자 진료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열정을 다 바치는 의사에게는 아무리 메마른 현대사회라고 할지라도 감사와 존경의 마음이 생기게 마련이다.
의사란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상식이 풍부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이런 바탕 위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모나지 않은 원만한 성격에 아픈 사람, 약한 사람의 얘기를 따뜻하게 들어줄 수 있어야 하고, 풍부한 상식으로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과 조건들을 이해해야 하며, 그 다음에 전문지식이 들어와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의학교육에 대해 돌이켜 보게 된다. 의사의 전단계인 의예과 교육에서부터 전인교육에 좀더 중점을 두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의예과 단계에서 의학의 기초가 되는 과학지식을 주입하기에 급급한 현재의 교육방식이 바람직한지는 한번 생각해볼 문제다.
의학은 과학일지 몰라도 이 과학을 실제로 다양한 환자 개개인에게 적용하는 임상의술은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몸에서 일어난 생리적, 병리적 현상과 그 과정을 이해하고 검사 수치의 높고 낮음을 가름하는 것은 과학이지만, 각양각색의 성격과 환경을 가진 사람 각자에게 알맞은 처방을 내려 병을 고치고 사람을 고치는 의술은 예술이지 앵무새 같은 과학적 반사 행위가 아니다. 미국의 의과대학 졸업장에는 ‘의학의 예술과 과학 과정(art and science of medicine)을 마쳤기에 이 졸업증을 준다’라고 적혀 있다.
현대 문명이 가져온 최대의 결정물인 컴퓨터가 병원 구석구석을 채우면서, 분명 진단과 진료기술은 진보하고 있지만, 그 뒤편에 가려 서서히 잊히는 청진기 의사와, 그 의사가 환자의 배를 쓸어주면서 전해주던 따뜻함이 무척이나 그리워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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