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요약

[스크랩] 아름다운 자신감(잉그릿 트로비쉬 지음 / 김성녀 옮김)

강인철 2009. 7. 15. 09:53

 

저자   잉그릿 트로비쉬

저자는 어거스타나 대학(Augustana College)과 파리 소르본느 대학교(Sorbonne University of Paris)를 졸업하고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1952년에 독일에서 가정 사역자 월터 트로비쉬와 결혼을 하고 1년 후에 미국 루터 교단의 후원을 받아 서아프리카 카메룬 북부지역에서 개척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 후 남편과 함께 가정 생활선교(Family Life Mission)를 설립하여 세계 각처의 그리스도인 가정을 돕는 데 기여했다. 저서로는 『여성이 된 기쁨』(생명의 말씀사), 『On My Way Home, My Beautiful Feeling』 등이 있다. 남편과의 사별 이후에도 다섯 자녀의 어머니로, 탁월한 가정 사역자로, 강인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살아가며 많은 여성에게 깊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Short Summary

아픔이 많은 세상에서 삶은 때로 힘겹게 감당해내야 하는 그 무엇으로 느껴진다. 이 가운데서 여성은 어떻게 자기 연민을 극복하고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저자는 평생의 경험과 통찰을 바탕으로 자기 용납의 비결, 가치 있는 독신의 삶, 당당한 인간관계, 자신감의 영적 원천 등을 탁월하게 제시한다. 연륜이 배어나는 그녀의 이야기는, 내면에서 비롯되는 자신감이 얼마나 강인하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가슴으로 느끼게 한다.

 

차례

감사의 글

서문 : 자신감을 상실한 시대

 

1부   정체성에 대한 자신감

1. 나는 누구인가

2. 나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다

3. 세상에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

4. 은사를 사용하고 기술을 익히기

 

2부   관계에 대한 자신감

5. 여성들과 당당하게 관계 맺기

6. 자신감 있는 독신 여성

7. 남성들과 당당한 관계 맺기

8. 자녀들과 당당한 관계 맺기

 

3부   내적 힘에 대한 자신감

9. 고통 뒤에 숨겨진 힘

10. 목표와 하나님의 인도

11. 시간 사용

12. 하나님과의 우정

 

1부   정체성에 대한 자신감

 

나는 누구인가?

 

자신감은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창조하셨다. 우리는 자기만의 독특함에 대해서 당당할 만하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당당함이 우리의 존재와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을 결정한다. 그리하여 남들과 다를 수 있는 용기마저 갖게 한다. 내가 창조된 목적에 맞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내 인생의 원대한 작업이 아닐까?

 

당신이 잘 하는 것은 무엇인가

종종 우리는 자기의 은사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잘 하는 건 바로 이거야라고 말해 주는 가족이나 친구가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다. 누군가 당신의 은사를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말을 하면, 그 말에 귀를 기울이라. 그것은 자기 인식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당신의 능력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우라. 그것이 어떤 능력이든 간에, 당신의 능력은 소중하다.

 

인생에는 단계가 있다

인생이란 성숙을 향한 몸부림이며, 그렇게 성인이 되는 과정에는 예측 가능한 위기들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 단계들을 건너 뛸 수 없다. 매 단계가 유익하기 때문이다. 뿌리를 뽑아내는 단계, 시행착오의 이십대, 따라잡는 삼십대, 삼십대의 막바지 등이 있다. 그리하여 사십대 중반쯤에는 새로운 안정을 얻게 된다. 중년의 위기를 어떻게 넘기냐에 따라 우리는 포기하기도 하고 새로워지기도 한다.

 

여성의 경우 중년의 위기 때 신체적인 변화를 이해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당당한 여성이라면 육체가 젊지 않더라도 자기 몸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그런 여성은 폐경기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안다. 폐경기가 완료되면 그녀는 더 이상 주기별로 변하는 호르몬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더욱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폐경기에 가장 잘 대처하는 여성들은 자존감이 높은 여성, 스트레스를 잘 극복한 경험이 있는 여성, 친구가 많고 외부에 대한 관심과 활동이 많은 여성, 격려할 줄 아는 남편과 함께 원만한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여성들이다.

 

자신의 한계와 위험지점을 알기

우리는 실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 경험만큼 좋은 선생은 없지만, 그래도 우리의 한계를 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좋은 친구들이 필요한 경우가 종종 있다.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면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내 한계와 위험 지점을 아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이런 것들을 말해 주는 적절한 친구와 동료, 그리고 자녀들이 꼭 필요하다. 우리의 은사는 누가 경고해 주지 않으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위험 지점이 될 수 있다. 당신의 은사를 표현하는 말 앞에 너무라는 단어를 넣어서 말해보라.

 

* 너그러운 것은 좋지만, 너무 너그러우면 신중하지 못하게 된다.

* 검소한 것은 좋지만, 너무 검소하면 인색해진다.

* 정리 정돈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정리 정돈에 신경 쓰면 즉흥성을 잃고 경직된다.

* 활동적인 것은 좋지만, 너무 활동적이다 보면 소박한 삶과 멀어지게 된다.

 

사진을 찍으려면 먼저 사진 속에 넣고 싶지 않은 부분부터 결정해야 한다. 그러려면 때로 아름다운 장면이 제외되기도 한다. 은사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그분의 지혜 가운데 우리 삶 속에 허락하신 위험 요소와 경계선도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보다 나는 진정 어떤 사람인가를 제대로 아는 핵심 열쇠다.

 

나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다

 

자신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수용하지 못하면 사랑할 수도 없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 작고한 내 남편 월터는 한 세미나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사랑 또는 자존감은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아예 존재하지 않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 능력을 습득하지 못했거나 혹은 불충분하게 습득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전혀 사랑할 수 없습니다. 혹 사랑한다 해도 충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경우 자신을 수용할 줄 아는 능력이 제대로 계발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의무감에서 남을 사랑하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지 자신에게도 고통을 주는 유형의 그리스도인이 생기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거부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태도를 다른 사람에게도 투영한다.

 

하나님의 용납을 받아들이기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받으라(로마서 15:7).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첫 발을 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용납된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할리우드장로교회에서 시무하시는 로이드 오길비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지금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나도 이 진리를 배우는 데 오랜 세월이 흘렀다. 너무나 단순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내가 빈손을 내밀 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열심히 수고해서 얻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믿음이란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이며, 내가 육신의 아버지 품으로 달려가 안기듯이 하늘 아버지에게 그렇게 안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무리 완악하고 구제불능이라 해도 하나님은 무조건적 사랑으로 사랑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으신다는 말은 사실이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셨다는 이 사실에서 우리의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 부부의 멘토였던 테오 보베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내가 올바른 방식으로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면, 가만히 정체되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하나님이 나에게 바라시는 모습이 되고 싶어 변화를 갈망하게 된다. 우리는 이웃도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

 

곁눈질하지 않기

당당해지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는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는가에 지나치게 신경 쓸 때, 거절에 대한 두려움, 상처, 굴욕감 속에서 살게 된다. 인정받고 존중받고 사랑받아야 할 욕구가 충분히 채워지지 않은 어린 시절이 이런 태도의 원인일 수 있다. 그래서 어른이 된 뒤에도 자신의 약점을 숨긴 채 스스로에게 갇혀 사는 악순환을 거듭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질투와 시기심, 비난에 민감한 성격, 수줍음, 우유부단 등이다. 나는 수줍음과 씨름하던 시절 이 말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수줍음이란 사실은 자기중심성이다(Shyness is really I-ness).

 

우리는 자기 자신을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필요가 없다. 남편 월터는 모든 곁눈질은 죄입니다라고 늘 말했다.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수평적 눈길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거울에 비추어 보는 수직적 눈길뿐이지요.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 점을 분명히 했다. (여성들은)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여성들은)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갈 6:4-5).

 

자기 연민을 피하기

당당한 여성은 상처받았을 때 쪼르르 침대로 달려가 뾰로통해 있는 대신 용기 있게 말하는 여성이다. 어떤 상처든 일단 말로 표현하면 절반은 치유된다. 어느 여성은 남편이 정말로 자기를 사랑한다면 자기가 상처받은 이유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남편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자매님, 자매님이 말해 주지 않으면 남편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말하지 않아도 이해받을 권리는 아기한테만 있지, 다 큰 여성한테는 없어요. 이 사실을 꼭 기억하세요.

 

자기 연민의 해독제는 바로 감사하는 마음이다. 나도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자기 연민의 늪으로 가라앉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모든 것이 너무 버거웠다. 특히 마음 한 구석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은 고독감이 나를 힘들게 했다. 막내딸이 공부하기 위해 집을 떠나게 되면서, 결혼 생활 이후 처음으로 내 둥지가 텅 비게 되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한번은 친구가 집으로 나를 초대했다. 그녀는 음식을 준비해 나를 대접했는데, 그 음식은 내 육체뿐 아니라 영혼에까지 자양분이 되었다. 그 때 그녀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잉그릿, 나를 봐. 난 내 자식이 한 명도 없어. 자고로 어머니는 자식을 잃지 않아. 어디든 자식들이 편안하게 있다면, 어머니한테도 편안한 거야.

 

용납의 비결

어느 추수감사절 저녁, 라디오 진행자가 말했다. 여러분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에 대해 감사해 본 적이 있나요? 이 질문을 들으면서, 나는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면서 행하신 그 모든 일들에 진정으로 감사해 본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하나님이 어떻게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내 인생을 향한 계획을 세우셨는지, 어떻게 우리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선택하셨는지를 생각하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는 내 삶을 생각하면서 두 가지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한 가지는, 내가 하늘 아버지께 완전히 용납되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한 가지는 그 하나님이 나를 월터 트로비쉬의 아내로 부르셨다는 사실이다. 남편의 넓은 보폭을 따라 가는 것이 항상 쉽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감사하는 자는 점점 더 많이 받으리라는 글을 액자에 끼워서 오랫동안 내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또 하나님이 하지 못하는 한 가지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실망시키는 것이라는 말도 그렇게 간직했다. 하나님은 그분께 선택권을 드리는 자들에게 오직 최고의 것만을 주신다. 이것이야말로 용납의 가장 큰 비밀이다.

 

세상에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

 

자기만의 공간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에게 첫 번째로 주신 선물은 에덴동산이라는 공간이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자신만의 공간이 없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들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 머물 공간이 없어서 고통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 안에서 쉴 곳을 찾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시다. 그 분이 우리 안에서 머물 공간을 가지실 때, 우리도 그 분 안에서 안식처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임재를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집이 되어 줄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중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2)라는 말씀이 있다. 이 땅에서 자신의 공간이라고는 말구유와 십자가밖에 없으셨던 분이 우리에게 줄 공간을 예비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주신 것이다.

 

여행을 하다보면 두 종류의 사람을 볼 수 있다. 공간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사람들과, 반대로 공간을 너무 무시하고 그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 헤매지만 어디서 찾아야할지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자기만의 공간을 찾은 여성은 당당하고 안전감을 느낄 것이며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잠언 31:16에 등장하는 당당한 여인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지녔다. 밭을 간품하여 사며 그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심으며.

 

우리의 궁극적인 안식처

나의 어머니는 이 땅에서 당신의 안식처를 두 번이나 포기하셨다. 첫 번째는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에 개척 선교사로 가기로 결정하신 때였다. 그리고 쉰 번째 생신이 얼마 안 남았을 때 다시 한 번 안식처를 포기하셨는데, 남아프리카의 볼리비아에서 고아원 원장으로 섬기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공항에 배웅 온 자녀들에게 이렇게 작별 인사를 하셨다. 울지 마라. 우리가 함께 보낼 시간은 영원하지만, 이 땅에서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 사랑을 증거 할 시간은 아주 짧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잉그릿, 난 언제든 갈 준비가 되어 있단다. 그리고 어머니는 모라비아 교도의 성경에서 그 날 읽을 말씀을 찾아 읽어 주셨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삼상 7:12). 그러시더니 이 말씀이 내 인생의 좌우명이란다 하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이어서 기도하셨다. 우리의 소명은 두려움 없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과, 할 수 있는 한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약 한 시간 후 내 부축을 받아 침대에 누우신 어머니는 그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어머니는 이 땅에서 자기 장소를 떠나 마지막 안식처로 갔다.

 

 

 

2부   관계에 대한 자신감

 

여성들과 당당하게 관계 맺기

 

모녀 관계

나는 종종 어머니와 문제가 있는 여성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그들은 심지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거절감을 느꼈다. 그 어머니들은 딸과 항상 거리를 두고 사는데 그들의 어머니도 그들을 그런 식으로 길렀기 때문이다. 한 어머니는 말했다. 널 내치려고 했던 건 아니었단다. 그저 네가 내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한다는 걸 몰랐을 뿐이야. 나는 그런 여성들에게 이렇게 말해 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당신 자신도 좋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내적 치유의 전 과정이 이 부분에 달려 있는 경우도 있다. 자기의 뿌리인 가족을 알고 용납하는 것은 자기 용납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 때로는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 애정과 이해의 결핍에서 온 공허감도 마찬가지이다.

 

어머니를 보살펴야 할 때

오늘날 많은 중년 여성들은 자기 어머니의 어머니가 되어 그들을 보살펴야 한다. 이렇게 역할이 반전되는 상황은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다. 상당한 이타심과 사랑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책의 편집자인 엘리자베스가 자기 어머니를 성실히 보살피는 것을 지켜보았다. 돌아가시기 전 몇 달 동안은 24시간 내내 보살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항상 밝게 빛났으며 자기 연민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어머니가 존엄성을 지키며 돌아가실 수 있게 해 드렸던 것이다. 나와 우리 자매들도 어머니의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가까이에서 보살피게 되었는데 그것은 부담인 동시에 기쁨이었다. 그 때를 돌아보면 지금도 후회가 없이 마음이 편하다. 여기서 가장 훌륭한 법칙을 하나 소개한다면, 바로 황금률이다. 즉 우리가 받기 원하는 그런 보살핌을 베풀라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어머니 마음

나는 어느 날 월터에게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뭐예요?라고 물어 보았다. 그는 서슴없이 이사야 66:13을 인용했다.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하나님은 자신을 아기를 위로하는 어머니에 비유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이사야 9장에서 자신을 젖먹이는 어미에 비유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서 안전하다. 시편 91편 1절과 4절 상반절이 그것을 말해 준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아래 거하리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이 구절은 다시 한 번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는 어머니의 마음을 보여 준다. 누군가가 나를 품고 보호해 줄 때 진한 위로를 맛 볼 수 있다. 나는 남편의 죽음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의 시간들을 겪었다. 그러면서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손이 나를 품어 주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하늘 아버지가 어머니처럼 나를 어루만져 주실 때 나는 놀랍게도 위로를 받았다.

 

남성들과 당당하게 관계 맺기

 

내 친구인 라인힐트는 고등학교 교장이다. 그녀의 직장 동료는 대부분 남성이다. 그녀는 인정해주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그 남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늘 마음이 짠하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남성이 여성보다 인정받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한다. 나는 세계 여러 곳에 있는 다양한 출판사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편집자나 비서로 일하는 다수의 당당한 여성들을 보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남성이 편안하게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같았다. 한번은 투자전문가인 친구에게 동료 여성들에게 기대하는 점이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유능한 전문직업인이면서 여성 운동가들의 주장은 하지 않는 사람이죠. 여성들은 남을 돌볼 줄 알고 타고난 인간관계 기술을 가지고 있어요. 중요한 건 서로 경쟁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보완해서 온전하게 하는 거지요.

 

사랑과 진정한 성

남성들과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진정한 성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자신의 성을 편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성을 축복하세요. 이 말은 내가 여성과 남성에게 곧잘 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성 또한 하나님 형상의 일부이며, 이것 때문에 우리는 친밀감을 갈망하는 것이다. 부부들은 나이가 들수록 성적인 연합을 통해 점점 더 많은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당당한 여성이라면 가끔은 남편에게 먼저 구애할 줄 알아야 하고, 성적인 연합을 통해 아내만이 줄 수 있는 휴식으로 남편을 초대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아내 자신도 다시 한 번 새로워지고 자신의 삶을 이루고 있는 복잡다단한 일들에 맞서는 열정도 생긴다.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함께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성적 연합만큼 거룩하고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일은 없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우리가 새로워지고 만족을 느끼고 재충전하며, 삶을 다시 정돈하고 휴식하고 함께 나누고 출산하고 치유되기 원하신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배우고 민감함을 연습하고 타인을 위해 삶을 내려놓는 법을 익히고 온전해지고 공동체에 들어가며, 감사하고 그리워하고 소망하고 인내하고 즐거워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신비를 경험하고 포옹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축복을 누리기 원하신다. 성적 연합은 아마도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최상의 육체적 선물일 것이다.

 

끝까지 지속되는 결혼을 위하여

결혼을 잘 유지하는 부부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은 핵심적인 열 가지 특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①부부 관계를 지키기로 헌신하는 마음과 부부 관계를 우선순위에 놓는 태도 ②대화할 수 있는 능력 ③개인적인 경건 생활 ④갈등 해소 ⑤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즉 친구들과의 교제권 ⑥성적 친밀함 ⑦놀이, 여가, 유머 등 함께 나누는 즐거움 ⑧현실적인 기대 ⑨상호 섬김과 리더십의 공유 ⑩ 개인적인 성장. 이 열 가지 특성으로 당신의 결혼 생활에 점수를 매긴다면 몇 점이나 받겠는가?

 

B-E-S-T는 결혼 관계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네 가지 요소를 지칭하는 약자로서, B는 'blessing'(축복), E는 edifying'(세워주기), S는 'sharing'(나누기), T는 touching'(접촉)을 의미한다. 축복은 배우자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친절하게 대하며,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중보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세워주기는 서로 격려하고 인정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나누기는 자기 자신을 내어 주고 배우자의 말에 성실하게 귀 기울이며, 둘 사이의 사랑을 더욱 깊게 할 수 있는 방법들을 민감하게 의식하고 개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접촉은 자신이 상대방에게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려 준다. 그럼으로써 두려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통을 누그러뜨리며 위로를 주고 정서적 안정감에서 오는 기쁜 만족감을 주는 것이다. 기를 쓰고 사랑을 얻으려 하기보다 사랑을 주는 법을 배울 때, 사랑은 사랑을 낳는다. 그렇게 사랑을 낳는 능력,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다.

 

자신감 있는 독신 여성

 

온전한 인격체 되기

혼자 사는 여성이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삶 속에는 여전히 진공 상태 같은 공허함이 있다. 어떤 여성들은 결혼만 하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성공적인 독신 생활이란 온전한 인격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온전함이란 우리의 여성성뿐 아니라 남성성까지도 제대로 인정받을 때 이루어진다. 독신 여성이 온전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인정과 소속감이 필요하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

나는 친구 에널리즈를 통해 사람은 진공 상태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창조로써 존재를 표현하기 때문에 존재에는 반드시 창조성이 따르게 마련이다.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며, 그 용기란 좌절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좌절을 딛고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는 능력이다.

 

그리스도인 독신 여성이 자주 겪는 가장 큰 두 가지 문제는,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과 스스로에게 느끼는 불확실성이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든가 심지어 존재할 수 없다고까지 생각하는데, 여기까지만 해도 괜찮다. 그보다 더 나아가서 죄책감과 자존심 결핍까지 생길 수 있다. 나는 해야 할 일을 조용히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인정받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암비 레프로사리엄이라는 병원에서 수간호사로 일하는 여동생 베다를 방문했다. 거기서는 500명의 환자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보살핌 받고 있었다. 나는 내 여동생과, 그녀처럼 세계 각처의 외로운 선교지에 흩어져 있는 멋진 독신 여성들에게 바치는 찬사의 글을 일기장에 썼다.

 

이 고귀한 독신 사역자들을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그들은 모두 여성이었지만 보통 남성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들을 수행했다. 그들은 여성으로서의 연약한 측면을 나타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자기보호라는 갑옷 속에 감정을 숨겨야 한다. 지프를 몰고 끝없는 길을 달려야 하고, 또는 소들이 다니는 이정표 없는 거리를 달려야 한다. 그들은 상자와 맥주통을 들어올리고 건물을 짓고 아기를 받아내며 나병환자들을 관리하고 그들에게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는 수백 가지 일들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잘못이라도 저지르면 가차없는 비난이 떨어진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기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 엄청난 일들을 맡기셨다. 이 고귀한 사람들이 해내는 일을 보며 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실감한다.

 

소속감에 대한 욕구

성공적인 독신자가 되려면 온전한 인격체가 되어야 한다. 이 말은 곧 홀로 됨(aloneness)을 잘 관리해야 한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시 68:6)라는 말씀은 독신인 내 삶에 큰 위로가 되었다. 이 말씀을 하나님은 외로운 사람들에게 머무를 집을 마련해 주시고(표준새번역 개정판)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좋은 친구들과 대가족 식구들과 교회 그룹과 관심그룹을 통해서 그렇게 하시며, 또한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하나님이 외로운 자들을 깊이 생각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나는 내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다.

 

내가 혼자가 된 뒤로 받아들이기가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나를 삶의 제1순위로 생각해주는 사람이 더 이상 없다는 점이었다. 내 연약함을 인정하고 상처를 드러내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여성에게도 마찬가지로)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를 창조하셨다. 내 마음에는 여전히 구멍이 있다. 그리고 그 구멍을 솔직히 직시함으로써 그것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런 고통을 캐트린에게 털어놓았을 때, 그녀는 다음의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다시 사춘기로 돌아가서,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간직한 채 살아가는 비결을 새로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순결의 문제

당신이 선택해서 독신이 되었든, 버림받거나 이혼 또는 사별로 원치 않게 독신이 되었든, 충만하고 완전한 삶이란 육체적인 성관계 없이는 가능하지만 사랑과 인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신의 운명을 조종하는 것은 성 기관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다. 순결은 새침한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태도이며 내면의 힘이다. 순결은 영적인 에너지로서 이기심의 결박을 끊는 데 도움이 된다. 순결은 자유롭기로 선택하는 것이다. 성이라는 압력, 임신의 두려움, 끔찍한 질병, 성급한 결혼과 이혼으로 인한 자녀의 고통, 죄책감과 아픔, 피임의 위험성, 개인의 선택권 상실 등으로부터 자유하는 것이다. 당당함을 지킬 수 있는 가장 큰 뿌리는 바로 순결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다. 순결한 삶을 통해 우리는 자기 존중감과 상호 존중을 다져나간다. 책임 있는 사람, 즉 결혼 전의 철저한 순결과 결혼 후의 철저한 정절을 배우는 것이다.

 

예수님도 독신이셨다. 우리가 여는 잔잔한 물가 수양회 마지막 날에는 종종 독신들도 참석한다. 한번은 인도자가 독신 여성을 의자에 앉히고, 옆의 의자는 비워 두게 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결혼한 사람들입니다. 다만 두 사람으로 이루어진 부부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부부라는 차이뿐입니다. 예수님은 크리스마스 날 당신을 위해 아버지를 떠나셨습니다. 성 금요일에는 당신을 위해 어머니를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아내로 맞아 남편으로서 당신과 연합하십니다. 당신과 함께 사는 삶이 얼마나 힘들 건 상관없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성찬을 통해 자매님과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자녀들과 당당하게 관계 맺기

 

존중받고 싶으면 먼저 존중하라

한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신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 18:5)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처음으로 집을 마련한 곳은 킬리만자로 산기슭이었다. 차가(Chagga)부족의 추장은 종종 부족 남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기를 가진 여자들을 잘 돌보아야 한다. 그 여자들이야말로 우리 부족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니까. 그러니 임신한 여성들이 당당하고 위엄 있게 처신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의 몸 속에는 나라의 미래가 들어있었으니까. 그런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자라는 아기는 매우 존중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당당하고 매사에 주도적이며 문제 해결 능력이 있는 성인이 되는 것이다. 존중받고 싶다면, 먼저 존중하라.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 기본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와 교사들, 여러 어른들을 보면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다. 어린이는 장난감이 아니다. 존중받고 사랑받고 교육받아야 할 진정한 인격체다.

 

당당함을 심어 주기

독일인들이 말하듯이 자녀를 반듯하게 키우고 싶다면, 아이가 태어나기 25년 전에 시작해야 한다. 자신이 어떤 가정생활을 경험했느냐 하는 것이 자녀를 키우는 방식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정말 자녀를 사랑하고 지도해야 할 진정한 인격체, 건강한 인격체로 보고 있는가? 결혼 생활에서 가장 소중한 시기 중 하나가 임신 기간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 때 여성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 한 생명을 불러내는 하나님의 동역자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생아는 먹을 것과 포근함과 안전감이 필요하며 이 모두를 어머니의 젖가슴에서 공급받는다. 이 젖가슴이야말로 서로간의 신뢰와 동반자 의식이 싹트는 기반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역할은 가정생활의 근간이 된다. 아버지는 딸이 처음으로 알게 되는 남성이며, 나중에 딸이 남자들을 이해하는 태도를 상당 부분 결정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모든 사랑의 관계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자존감과 자기 용납의 기초를 놓는 사람들이다. 어린이는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소중하고 고유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모든 아이는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여러 자녀가 한 방을 쓰는 상황에서도, 자녀들 각자는 자기만의 책꽂이, 서랍 정리 상자 등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자기만의 공간은 모든 가족들이 존중해 주어야 한다. 어린 아이들에게 필요한 기본 원칙은 네 것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 내 것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서로의 소유권을 존중하면서 함께 나누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는 자녀들이 안전감을 느낄 만한 공간을 창조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가? 그럴 때만 우리는 감히 그들을 저 차가운 세상으로 내보낼 수 있다. 그럴 때만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안전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해 낼 만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가끔씩 자녀에게, 또는 친구나 배우자에게 비를 피할 수 있는 쉼터가 되어 주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때로는 따뜻한 방이 되어서, 자녀들이 배불리 먹고 그들 앞에 놓인 싸움에 대비해 힘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라는 부르심을 받기도 한다. 이런 일은 나 자신이 안전한 공간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 시편 27:5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어린아이들을 축복하기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에 하나님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우리는 자녀들을 얼마나 더 인정하고 격려해 주어야 하겠는가? 우리는 자녀들이 올바른 행동을 할 때 놓치지 말고 칭찬해 줄 필요가 잇다. 학령기 아동에게는 애정과(나는 네 편이다), 격려와(넌 할 수 있어), 도전이(자 해보렴!) 필요하다. 이런 행동이야말로 자녀들을 축복하는 실제적인 방법이다. 부모가 자기 자녀의 좋은 점이나 가치를 보지 못하면 그 자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만한 좋은 것이 자기에게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다.

 

어린아이를 축복하는 또 다른 방법은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마 19:13-14). 매일 저녁 자녀들을 재우면서 그들을 축복해 줄 수도 있다. 아이들은 누구나 문제 있는 행동을 한다. 아이들은 누구나 나쁜 꿈을 꾼다. 자녀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라. 우리는 또한 자녀들에게 형제나 자매를 축복하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 나는 아이들과 떨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아침이면 자녀들 중 한 명의 사진을 골라 그 아이를 내 가슴에 품고 그 날 하루 동안 그 아이를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드린 후에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그들이 엄청나게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우리가 늘 사용하던 가정 기도문이 이제는 그 아이들의 집안에서 울려 퍼진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또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애 3:22-23).

 

3부   내적 힘에 대한 자신감

 

고통 뒤에 숨겨진 힘

 

육체의 고통

영국 여배우 질 아일랜드는 유방암으로 5년 동안 꿋꿋이 투병생활을 하면서, 병든 사람과 건강한 사람 모두에게 희망과 영감을 주었다. 그녀는 글과 강연을 통해 자신이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라고 표현했다. 유방 절제술을 겪은 사람들에게 질은 이런 격려의 말을 했다. 인생을 최대한 누리세요. 가슴이 있고 없고가 우리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녀는 자기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암으로 고통 받는 다른 사람들만 생각했다. 그녀의 정신력은 특별했고, 그 정신력은 질병 가운데서도 전혀 빛이 바래지 않았다.

 

나는 몇 년 동안 부부들을 대상으로 출산의 기쁨에 관해 가르쳐 왔다. 고통 없는 출산이 아니라 두려움 없는 출산에 대해서 말이다. 아기가 태어날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자궁 수축은 점점 잦아지고 강도도 더 세어진다. 그럴 때 산모는 남편과 의사의 지시를 따라, 바다에서 파도를 타는 것처럼 자궁 수축의 흐름을 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수축의 진통에 짓눌리게 된다.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고통에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썼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요 16:21).

 

상실의 슬픔을 딛고

애통하다는 말은 슬픔에 짓눌린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한탄하는 과정의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다. 애통하는 시기가 끝날 때 비로소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슬픔을 제대로 풀지 못하면 온전히 살아 있는 삶을 누릴 수 없다. 슬픈 마음에 반창고나 하나 붙여 놓고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고통은 반드시 표출해야 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위로를 받으려면 먼저 애통해야 한다.

 

나는 고통이 올 때 자기 연민에 빠지기보다 나를 제련하는 고통의 역할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애통하던 시기에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후회는 자기 연민 못지 않게 무익한 막다른 골목이다. 계속 자기를 괴롭히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 올 것이다. 후회는 허망하고 파괴적이다. 앤 린드버그는 말한다. 그것은 자신을 우롱하고 환상에 젖어 사는 모습이다. 추억에 집착하고 유품과 사진에만 매달려 사는 삶이 환상이듯이 그런 행동도 마찬가지다.

 

죄책감 또한 애통하는 과정의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죄책감에 잘 대처하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애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으며 그 기간도 훨씬 길다. 애통하는 것은 하나의 여정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기 전에 있던 곳을 떠나, 삶에 일어난 변화에 적응하고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언제쯤 끝날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엄청난 상실의 슬픔을 딛고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거부와 실패에서 오는 고통

당당한 여성은 거부도 견딜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를 절대로 거부하지 않는 한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여성은 세상에 오직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그들은 먼저 사랑하고 이후에 사랑을 받는 부류이거나, 상대방이 사랑해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부류일 것이다. 앞의 여성은 자기의 길을 더 당당히 걸을 수 있다. 그렇다. 더 나아가서는 자기가 여전히 자유롭게 하나님의 뜻을 추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한다. 하나님께 선택권을 맡기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최선의 것임을 주신다. 이 말은 로마서 8:28을 다시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통의 의미

성경에 나오는 고난보다 실제로 훨씬 더 많은 고난을 받았음이 분명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잘못된 신학 때문에 우리가 모두 건강하고 부자가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결단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시험과 고난에서 면제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요 16:33). 그리고 바울도 이렇게 썼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 3:10).

 

여성은 어머니가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깊은 긍휼의 마음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남성들은 악과의 싸움에서 상처를 받으며 이런 긍휼의 마음을 터득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위대한 본이 되신다. 그 분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우뚝 서 계신다. 죽음에 맞서 죽음을 이기기 위해 기꺼이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서. 교회는 그 분의 옆구리에서 탄생했고 성령은 그분의 상처에서 흘러나온다. 우리의 마음이 고통을 통해 확장되고 민감해지는 것도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다.

 

내가 아끼는 물건 중에 십자수로 기도문을 새긴 작품이 하나 있다. 주여,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변화시키고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줄 아는 용기를 주소서. 그리고 그런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인생에는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 그런 것은 그저 수용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을 판단하거나 또는 합리화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반면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있다. 이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딸로서의 존엄성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그런 변화는 우리 자신 안에서 시작되는데, 주로 용서로 시작된다. 당당한 여성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최선의 것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목표에 눈을 고정시키고 살아갈 때 현재의 고난은 미미하게 보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목표와 하나님의 인도

 

현대의 많은 여성들은 목표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불안정하다. 웨스트민스터 교리 문답에 의하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누리는 것이며 일단 이 목표를 깨닫고 나면 단기 목표들도 더 잘 세울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목표가 하나님의 뜻과 관련된다. 어떤 사람이 마더 테레사에게 조언을 구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이라면 하셨을 일을 하도록 하세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가?

월터가 친구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해서 글을 써 보낸 적이 있다. 다음은 그가 말한 내용의 요점이다.

 

1. 때로 하나님의 인도는 우리가 특정 방향으로 구체적인 단계를 진행해 나갈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불현듯 아주 작고 고요한 음성이 마음속에서 부드럽게 들려오고 우리는 내가 제대로 방향을 찾아가고 있군, 이건 발을 잘못 들여 놓았군 하는 등의 생각을 하게 된다. 열왕기상 19:12에 따르면 여호와는 강한 바람이나 지진, 불꽃처럼 극적으로 나타나시지 않는다. 그 분은 온유하고 고요한 중에 말씀하신다. 이런 목소리는 밖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내면의 안테나가 있는 사람, 모든 것을 멈추고 고요한 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인도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2. 내면의 안테나가 메시지를 포착했다면 그 메시지를 따라가야 한다.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그리고 모든 조건이 다 좋아지기를 기다리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전 11:4). 외적인 상황은 늘 불투명하므로 오로지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에 비추어서만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 하나님의 신호는 절대로 틀릴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나침반의 바늘과 같다. 우리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이건 너한테 당하지 않다. 손을 떼라. 또는 이건 너한테 아주 좋은 기회란다. 한번 해보려무나.

 

3.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교정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 앞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제가 실수했습니다, 제가 틀렸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시편 119장 67절과 71절을 보면 내가 고통받기(수치를 당하기) 전에는 딴 길로 갔었습니다  고통받은 것이(수치를 당한 것이) 내게 유익했으니 그로 인해 당신의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라는 구절이 있다. 부끄러운 행동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깨닫는 법을 배우는 과정 중 하나다.

 

먼저 잘 살펴 깨달은 다음 결단을 내리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체를 다 보여 주시지 않고 바로 다음 단계만 보여 주신다. 그분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시 32:8).

 

시간 사용

 

시간을 한 톨도 허비하지 말라

시간은 우리의 탄생과 더불어 각자에게 주어진 유한한 재산이며 그 시간을 사용하고 투자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시간을 한 톨도 허비하지 말라는 말이 당당한 여성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일과 놀이 사이에서 편안하게 리듬을 타는 것이요, 속도에 변화를 주는 것이다. 지적인 일을 하다가 정원 가꾸기, 청소, 요리 등을 하는 식으로 말이다. 때로는 일하는 장소를 바꾸어 보는 것도 시간을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는 항상 시간을 의식해야 한다. 그저 시간을 써 버리지 말고, 시간을 투자하라. 우리 내면에 장착되어 있는 경고 시스템은 우리가 시간을 허비했을 때 후회라는 감정을 유발한다. 이제 육십 대 중반이 된 나는 시간이 무한정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건강한 불안감은 나의 오늘과 다가올 오늘을 잘 활용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내부에 있는 이 경고 시스템을 잘 이용해서 시간을 허비하고 속상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조지 맥도날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좋은 조언을 해준다. 나는 바로 앞에 놓인 일을 하면서 만족감을 느낀다. 인생 전체를 볼 때 바로 지금 5분이 가장 중요하고 또 그 5분을 과연 하나님이 우리 앞에 놓아두신 일을 하는 데 사용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고 이 조언을 깨우치길 빈다. 중요한 비결은 제 때에 제 일을 하는 것이다.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미 4:2).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골 4:17). 바울의 이 말이 다른 번역본에는 네 사역을 완수하라(RSV, 역자사역)라고 나와 있다.

 

거룩한 여가 선용

탈무드 학자들은 창세기에서 안식일을 강조하는 이유가 하나님께 휴식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휴식을 창조하셨고 우리가 안식일에 휴식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창조에서 안식일이 중요한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한다.

 

1. 안식일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평등하게 만든다. 일주일에 하루만큼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자유롭기 때문이다.

2. 안식일은 우리가 한 일을 평가할 시간을 준다. 하나님도 자신이 하신 일을 안식일에 평가하셨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그분이 보시기에 좋은 일인가?

3. 안식일은 우리가 차분히 인생의 의미를 생각해 볼 여유를 준다.

 

여가 선용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는데 바로 놀이와 휴식이다. 우리는 놀이조차 일로 만드는 위험에 처해 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이 건강해지려면 노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조앤 치티스터 수녀가 말했듯이, 베네딕투스의 영성이 다루는 여가는 거룩한 것이다. 거룩한 것을 위한. 인간을 좀더 인간답게 하는 여가다. 인간의 마음을 다루고 시야를 넓혀 주며 통찰력을 깊게 해주고 영혼을 뻗어 나가게 함으로써 말이다. 베네딕투스의 영성은 경건한 사람보다는 생각하는 사람을 개발하는 데 좀더 중점을 두고 있다. 기도하는 것과 기도하는 자세로 사는 것은 별개 문제다.

 

매일 하루를 시작하면서 나는 찬송가의 신년 부분에 있는 오래된 찬송가 한 곡을 부른다. 그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의 시간은 당신의 손 안에 있나니, 오 하나님이여, 그리하소서. 우리의 생명, 우리의 친구들, 우리의 영혼을 온전히 당신께 의탁하나이다(E.R. Gieren).

 

하나님과의 우정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딱 맞는 배우자만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내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갈구를 채워줄 수 있는 남편은 없다. 그것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은 단 한 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아내도 남편의 마음속 가장 깊은 갈구를 채워 줄 수 없다.

 

기도로 충만한 삶

우리는 기도하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썼다. 너희가...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사 30:15). 이 약속은 우리의 갈구를 만족시켜 주실 수 있는 단 한 분을 아는 것이 진정한 비결임을 강조한다. 즉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라고 말씀하신 분을 아는 것이다. 요한일서 5:14-15에는 또 한 번 확실한 약속이 나와 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실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이 말씀들은 다 능력 있는 말씀들이다.

 

때로 확신과 신뢰의 기도는 고뇌에 찬 부르짖음 뒤에 찾아온다. 고통을 토로하는 중에 우리는 하나님께 솔직해지고 믿음의 한계를 고백하게 되며, 도마처럼 멀리 떠나 버리셨다고 생각했던 그 분이 자신 앞에 우뚝 서 계시는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양한 세대와 환경에 처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 냈는지를 살펴보면 많은 도움이 되고 그것을 기억하노라면 자신의 기다림의 시간들도 좀더 견딜만해진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히 13:5-6).

 

덕이 되는 삶

누군가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그가 바라는 모습으로 변해간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셨다. 하나님은 자녀 하나하나를 외동자식처럼 대하신다. 내 손을 하나님 손에 맡겨 드리고 죄 사함과 정화라는 선물을 받아들일 때만 나는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는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그 분은 내가 모든 유혹들에 침묵과 기도로 맞설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

 

이 능력을 받으려면 딱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도관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거울인 그분의 말씀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성령의 탐사등이 우리의 더러운 부분을 비추시도록 해야 한다. 십계명은 제안 사항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다. 요한일서 1:9에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일단 죄 사함을 통해 신선한 출발을 하게 되면 우리는 빛 가운데 거하고 서로 사귐이 있는 삶을 경험할 수 있다. 이 기쁨을 가로막는 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주지 않을 경우뿐이다. 그런 경우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감히 할 수 없다. 하나님과 당신은 힘을 잡은 쪽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런데도 어떻게 우리가 당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령 충만한 삶

당신은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 성경을 열심히 찾아보았는가? 그리고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는 그런 은사를 키우는데 쓸 생각을 해 보았는가? 갈라디아서 5:22은 성령의 열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온유, 충성, 절제. 이 열매 중 하나를 골라서 그것이 당신의 삶 속에서 더욱 풍성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 보라.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하루를 예수님과 함께 사는 법

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인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우리 종교는 하나님과 일정한 거리를 두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하나님을 찾아뵐 수 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를 정말로 원한다면 내 삶은 보통 사람들의 삶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 대가는 우리가 노력한 것보다 훨씬 더 클 것이다. 예수님과 친밀하게 살아가는 삶은 결단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는 내면의 결단이다. 이것은 곧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은 하루를 예수님과 사는 법이라는 워크숍에서 달라스 윌라드가 제안한 것이다:

 

성경적인 하루 즉 하나님의 하루는 일몰에 시작됩니다. 사람은 나와서 노동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시 104:23). 어둠이 깔리면 우리는 다 함께 모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편안함 속에서 회상하고 찬양하고 꿈을 꿉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쉽니다. 쉼은 믿음의 행위이며 오늘날은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본성에 맞게 정해 놓으신 휴식을 별로 취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쉬지 않을 경우, 우리는 실패로 가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잠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루를 마치기 전에 집안의 모든 분쟁을 정리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입니다. 해가 질 때까지 노를 품지 마십시오. 당신과 배우자, 자녀, 룸메이트 사이에 어떠한 거리끼는 문제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루를 마치면서, 다음날 깨어나면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을 가장 먼저 갖기로 결심하고 어떻게 그렇게 할 것인지를 미리 생각해 두십시오. 잠자리에 들 때 기도하십시오. 주기도문을 생각하거나 시편 23편을 생각하십시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하나님께 인사를 드리고 그 분의 동행하심을 누릴 것입니다.

 

내 방에는 4세기 때 그리스도를 그린 그림을 찍은 사진이 있다. 그림 속에서 예수님의 눈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 마음이 무거울 때나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 처한 상황 때문에 슬퍼하고 있을 때는 그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어떤 때는 그 눈이 기쁨으로 반짝이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나는 예수님의 임재를 받아들이고, 새롭게 맞은 하루 동안 나와 함께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마음속에 문제와 걱정거리가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나는 간단한 던지기 게임을 한다. 그 문제와 걱정거리들을 기꺼이 받아주시는 주님 발 앞에 다 던져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영양을 공급받는다. 그렇게 하루를 시작할 자신감을 얻는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밷전 5:7). 내가 염려를 주께 던져 버리지 않으면 내가 내쳐지고 말 것이다라고 마르틴 루터는 말했다.

 

그 다음은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들을(성경읽기) 시간이다. 그렇게 하늘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사랑을 받고 나면 드디어 나는 하루를 직면할 준비가 된다. 하루 동안 내가 부딪치는 새로운 상황이나 관계 속에 예수님이 늘 함께 해 주시기를 매순간 초청한다. 요한복음 7:37-38을 생각하면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니라. 나는 내가 경험하는 평강과 기쁨이 나와 대화하는 사람에게 생수처럼 흘러넘치기를 기도한다. 내가 만나게 될 모든 사람들에게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는 축복의 기도도 드린다. 내 육체는 성령을 담는 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육체를 사랑하고 돌보고 축복하기 원한다. 하루를 마감할 때는 15분 정도 시간을 내서 하루를 돌아 보라. 잘 해 낸 일들에는 감사드리고 실패한 일들은 왜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라.

출처 : 상운교회
글쓴이 : 강인철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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