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김혜자 지음 /오래된미래/2004년 3월/288쪽
▣ 저 자 김혜자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여중․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1962년 KBS 1기 탤런트로 방송에 데뷔, 한국 최고의 여배우가 되었다. 출연작으로는 TV 드라마 <전원일기>, <모래성>, <겨울안개>,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이 뭐길래>, <엄마의 바다>, <장미와 콩나물> 등 80여 편, 연극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 <사할린스크의 하늘과 땅>, <피가로의 결혼>, <19 그리고 80>, <셜리 발렌타인> 등 13편, 영화 <만추>, <마요네즈>가 있다. 백상예술대상에서 TV부문 신인상, 주연상, 대상 등을 포함하여 6회, MBC 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 4회, 특별상 1회, 동아연극상과 마닐라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여성신문사의 페미니즘상, 광고주가 뽑은 좋은 모델상, 배우로서는 처음으로 위암 장지연상을, 아시아 최초로 엘리자베스 아덴 사에서 주는 Visible Difference Award를 수상했다.
▣ Short Summary
오랜 가뭄으로 흙먼지만 날리는 거리에 퀭한 눈으로 멍하니 앉아 있는 어른들, 말라비틀어진 엄마의 젖을 물고 있는 갓난아기, 보자기에 싸인 채 서서히 죽음을 맞이하는 아이들,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눈과 입으로 수없이 파리가 달려들어도 쫓을 힘조차 없는 그들 앞에서 김혜자는 오열했다.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한쪽에서는 배가 불러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이들은 한 조각의 빵이 없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니! 인격과 생명이 휴지조각처럼 짓밟히는 참혹한 현장에서 그녀는 신에게 분노했고, 또 안온한 삶에 젖어 있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연기할 때를 제외하곤 늘 알 수 없는 허망함에 내면 속으로만 함몰되던 그녀에게 아이들은 더 넓고 깊은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막의 밤하늘 아래서, 인도의 저잣거리에서 오히려 그녀는 평화로웠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돌보면서 자신의 마음도 정결해지고 강건해짐을 느꼈다. 그러나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아이들의 천진한 미소와 눈빛을 보면서 김혜자는 세상의 불평등과 모순에 분노하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한 끼의 밥이라도 더 먹이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배우 김혜자에만 안주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운명적인 사명감으로 사막과 바다를 곡예하듯 횡단하며 난민 구호현장을 찾아다닌 것이 어느새 11년. 그녀가 방문한 나라만도 소말리아, 케냐, 르완다, 방글라데시, 인도, 라오스, 베트남, 중국, 북한, 시에라리온, 보스니아, 아프가니스탄 등으로 10여 개국을 넘는다. 이제 그녀의 소망은 연기 인생이 다 끝나면 아프리카에 가서 가난한 아이들과 함께 살며 한 명의 아이라도 더 껴안아주며 생을 마치는 것이다.
▣ 차 례
바람의 딸 에꾸아무 /슬픈 대략의 여자와 아이들
내 삶의 이유 /꽃으로 때리지 말라
피의 다이아몬드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망고 두 개를 훔치는 아이 /세상 사람들에게 내 눈을 빌려주고 싶네
신이 나를 데려다준 곳 /미치는 이 마음 이대로 얼어터져라
인젤라 엘름 /이것이 차라리 드라마라면
전쟁은 죽은 자에게만 끝난다 /울지 않는 아이들
행복이라는 이름의 불행 /눈물은 마르고
내 가슴을 아프리카에 두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우리가 천국으로 올려 보낸 재료 /갠지스강에 띄운 천 개의 꽃등불
가장 가난한 나라의 행복 지수 /당신이 가진 재산은 얼마인가요
살아남은 자의 슬픔 /죽지 말아라, 아이들아
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전원일기>와 나
익숙한 몸짓으로 살고 싶지 않다 /아이들이 보낸 편지
바람의 딸 에꾸아무
에꾸아무는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아는 에꾸아무는 케냐의 투루카나에 살고 있는 일곱 살짜리 소녀입니다. 수줍게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패이는, 정말 사랑스런 아이입니다. 사금 캐러 간 엄마를 대신해 동생을 돌보고 있습니다. 동생은 어디가 아픈지 계속 칭얼대며 누나를 힘들게 합니다. 에꾸아무는 그런 동생을 안아주었다가 힘들면 도로 뉘었다가 하고 있습니다.
에꾸아무는 나를 보자 마치 친한 사람을 만난 것처럼 잘 웃었습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였습니다. 내가 "너 뭣 좀 먹었니?" 하고 묻자, 소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저께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동생이 아프다는 얘기를 하며 에꾸아무의 눈이 젖어듭니다. 이 예쁜 아이가 울고 있습니다. 바람이라는 뜻을 가진 에꾸아무가·
불과 3년 간의 가뭄으로 에꾸아무가 사는 투루카나 지역에서만 3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다른 나라에서 보내오는 구호품에만 의지해 살고 있습니다. 여기는 적도와 담 하나 사이를 두고 있는 곳. 사람이 살기 힘든 사막 지대입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최후의 유목민 중 하나입니다. 유목민들이니까 풀이 있어야 소떼와 양떼를 먹이는데 풀이 없어 동물들은 거의 굶어 죽었습니다. 한 청년이 길바닥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누워 있다가, 나를 보더니 말합니다. "가축이 다 죽어 아침에 일어나도 할 일이 없어요." 아침에 일어나도 할 일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막막하고 쓸쓸한 일일 것입니다.
한 움막으로 들어갔더니, 아빠는 1년 전에 죽고 엄마 혼자서 아이 셋을 키우고 있습니다. 엄마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은 게 없습니다. 젖이 안 나와서 아기는 젖을 비비 틀어가며 빨아댑니다. 이 엄마는 숯을 만들어서 파는데, 요 며칠 숯이 팔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 형편이 그 모양인데 누가 숯을 산단 말인가요.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그저 죽지 않을 만큼 구호 식량에 의지할 뿐, 가축 없는 이 유목민들의 삶은 아무 의미 없는 삶입니다.
다음날, 다행히 식량 배급차가 도착해 에꾸아무는 가까스로 죽음을 면했습니다. 언제까지 이 아이들이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단돈 1백 원이면 한 끼를 배불리 먹일 수 있는데.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에서는 4초마다 한 명의 아이가 전쟁과 기아로 죽어가고 있고, 매일 3만 5천 명의 아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 죽거나 전쟁터의 총알받이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억 5천 명의 아이들이 고된 노동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 아이들을 고통받게 해야 할까요?
내 삶의 이유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전쟁과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녀는 신에게 항의했습니다. "왜 당신은 이 사람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가요?" 그러자 신이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널 보내지 않았는가?"
누구나 그렇듯이, 남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내가 그만큼 다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가 왜 이곳에 있는가, 왜 살고 있는가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왜 사는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생의 계획 같은 것도 없는 나를 이곳까지 오도록 손잡아준, 그래서 왜 내가 존재해야 하는가를 순간순간 일깨워준, 너무나도 많은 것을 베풀어주신 신께 감사드립니다.
해마다 나는 세상의 고통받는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수십 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다음 비행기를 기다리고, 장거리 흙길을 엉덩방아를 찧으며 달리고, 6인승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곡예하듯 사막을 넘곤 했습니다. 다 말라버린 강바닥 주위로 짐승들의 뼈가 즐비하고, 이제 막 전쟁이 끝나 벽이고 전봇대고 온통 총알 구멍 투성이인 곳을 소형버스를 타고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왜 저렇게 총을 많이 쏘아댔을까? 저 정도 총알이면 땅바닥을 기어가던 개미들까지 다 죽었을 텐데. 그리고 이곳엔 아이들이 있는데도 어떻게 저렇게 촘촘히 총알을 퍼부을 수 있었을까?' 공포에 질린 아이들의 커다랗게 열린 눈동자가 내 얼굴을 휙휙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슬픈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맨 처음 에티오피아에 갈 때 황열병 주사를 맞으면서 약효가 10년이라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사를 맞았음을 증명하는 노란색 카드를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10년이 지났기 때문에 또다시 주사를 맞고 노란색 카드와 말라리아 약을 갖고 비행기에 올라탄 것입니다. 서울에서 인도 뭄바이까지 여덟 시간, 뭄바이에서 벨기에까지는 아홉 시간, 그리고 벨기에에서 시에라리온까지는 다시 아홉 시간이 걸리는 먼 여정입니다. 나는 비행기 좌석에 앉자마자 새처럼 몸을 부비작거리며 잠을 청합니다. 눈을 뜨면 나는 또다시 아프리카에 있게 될 것입니다.
피의 다이아몬드
신의 축복이었던 다이아몬드 광산이 시에라리온에선 재앙이 되었습니다. 전쟁의 원인이 되었고, 이제 바닥이 나버렸다는 광산에선 아이들이 하루 종일 광주리에 흙을 떠다가 고여 있는 웅덩이에서 흔들어대고 있습니다. 그렇게 흔들면 다이아몬드 알맹이가 가운데로 모인다는 것입니다. 광산주는 물론 따로 있습니다. 아이들은 고인 물 속에서 계속 일을 해서 그런지 바위에 따개비가 붙듯 온몸에 좁쌀만 한 종기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마치 내 몸에 종기가 난 것처럼 괴롭습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입니다. 고작 하루 한 끼 밥을 얻어먹으면서 중노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른 할 일이 없으니까, 광산 곳곳 웅덩이마다 아이들이 올챙이떼처럼 바글바글합니다.
다이아몬드는 넘쳐나는데 밥을 굶는 나라. 이 어처구니 없는 곳이 바로 아프리카입니다. 피의 다이아몬드가 현지인들에게 얼마나 피해를 줄 수 있는가는 손과 발이 잘린 시에라리온 사람들이 말해줍니다. 반군들은 공포감을 조성하고 주민들을 다이아몬드 광산 지역에서 몰아내기 위해 사람들의 손을 잘랐습니다. 이웃 나라 라이베리아는 아프리카 전역에 걸쳐 총기, 마약, 돈세탁과 연결된 다이아몬드 관련 범죄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을 정도입니다.
모하메드는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일하는 소년병 출신의 남자아이입니다. 가끔 저 먼 곳에 시선을 주는 모하메드의 눈은 이미 열여덟 살짜리 소년의 눈이 아닙니다. 이 아이는 치유될 수 없는 병에 걸려 있습니다. 가엾고도 무서운 일입니다. 소년병 출신의 아이들이 거의 다 이런 상태일 것입니다. 모하메드가 들려주는 얘기는 도저히 인간의 귀를 갖고선 들을 수 없는 그런 내용입니다. 너무 일찍 군인이 된 아이들이 마구 사람을 죽이고, 팔다리를 자르고, 여자들을 집단으로 성폭행했습니다. 나쁜 짓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느냐고 묻자, 모하메드는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재미로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총을 들기 전에 무슨 약을 나눠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런 상황이 되면 또다시 반군이 될 것이라고. 군인이 되면 먹을 것도 주고, 총이 있으니까 힘도 생기기 때문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 있었습니다.
레베카를 만난 것은 모하메드와 만나고 나서, 성폭행당한 소녀들을 위한 재활센터로 갔을 때입니다. 재활센터라고 해봐야 재봉틀 세 대를 놓고 자수 놓는 법을 가르치는 곳입니다. 배워야 할 사람은 많고, 장소는 비좁기 그지없습니다.
열여덟 살의 레베카는 열세 살 때 반군이 칼로 엄마와 아빠의 목을 친 뒤 발로 차는 것을 보았고, 뒤이어 그들이 언니의 팔을 끊은 뒤 성폭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언니도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그런 다음 반군은 열세 살짜리 그녀를 집단 윤간했습니다. 소녀는 마침내 기절했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반군 대장 앞에 끌려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얼굴이 예뻐서 대장의 다섯 번째 아내가 되었습니다. 다섯 번째 첩이니까 온갖 궂은 일을 시키고, 밤마다 담뱃불로 지지고, 때리고, 성폭행을 일삼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레베카는 담담하게 담뱃불에 지져진 허벅지와 가슴팍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5년이 흘렀고 아이가 생겼습니다. 지금 옆에서 손가락을 빨며 서 있는 여자아이가 바로 그 아이입니다. 그러다가 정부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정부군 대장은 레베카가 보는 앞에서 5년 동안 함께 살던 반군대장의 목을 날려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레베카를 보호해주겠다고 데리고 가서는 몹쓸 짓을 했습니다. 그래서 생긴 아이를 지금 레베카는 젖을 물리고 있는 것입니다.
등에 업힌 아이는 이마가 불덩이 같습니다. 어디가 아픈 걸까. 나는 이 열여덟 살짜리 소녀에게 삶이 고통만 계속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어쨌든 잠깐이라도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서 결심했습니다. 그녀에게 벽이 있는 방을 반드시 마련해 주겠다고, 그리고 몇 달 먹을 양식, 흙바닥이 아닌 침대와 예쁜 색깔의 침대 시트도. 나는 약속대로 당장에 그녀의 소망을 이뤄주었습니다. 다 허물어져가는 벽을 다시 쌓아주고, 침대와 가재도구를 사주고, 여섯 달치 식량을 들여놓았습니다. 그리고 손을 흔들며 레베카와 작별했습니다. 뿌연 먼지를 날리며 내 모습이 아득히 사라질 때까지 레베카는 손을 흔들고 또 흔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레베카와 완전히 작별할 수 없음을 압니다. 왜냐하면 시에라리온에는 아직도 수많은 레베카와 모하메드가 있으니까요.
인젤라 엘름
에티오피아에 도착한 다음 날, 나는 3개월 전까지 내전을 치른 콘볼차로 갔습니다. 우리의 밥에 해당하는 것이 수수를 갈아서 빈대떡처럼 부친 인젤라인데, 부자들은 그 안에 양고기 다진 것과 야채를 넣어서 먹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 양념도 없는 수수떡 그 자체만 있어도 감지덕지입니다. 그것마저 없어 굶기를 밥 먹듯 하는 곳이니까요.
르박 수용소에는 가난과 내전을 피해 무작정 상경한 5천여 명이 수용되어 있습니다. 우리 일행을 보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우르르 달려듭니다. 너무 말라서 앙상하게 뼈만 남은 손가락을 펼치고 "인젤라 엘름(엘름은 없다는 뜻입니다)!"을 외치며.
난민들은 대형 군용천막 하나에 150명 정도씩 살고 있습니다. 천막 안은 정말 생지옥입니다. 그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 화장실도 따로 없고 그냥 찢어진 대형 천막 안에서 오물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아기가 설사를 하면 아기를 조금 옆으로 옮기기만 할 뿐, 그 옆에서 간신히 구한 수수를 찧어 인젤라떡을 만들고 있습니다. 한쪽 구석에는 숯 같은 검은 것으로 아기 이마에 십자 모양을 그어주고서 보채는 아기를 안은 나이 어린 엄마가 서 있습니다. 아기가 아파서 병이 나가라고 십자가 모양을 그려줄 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어린 엄마가 그렇게 애처롭게 울고 서 있습니다. 아기는 축 늘어져서도 손에 무엇인가를 꽉 쥐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조약돌만 한 감자입니다. 엄마가 어디선가 얻어서 쥐어준 것이겠지요. 아기는 그것을 입에 넣을 힘조차 없습니다. 다만 놓칠세라 있는 힘을 다해 꼭 움켜쥐고 있을 뿐입니다. 그 옆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는 일밖에 없습니다. 죽어가는 자식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아이에게 사탕 하나라도 갖다 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몸을 떨면서 그냥 울고 또 울었습니다.
11년 전, 미지의 대륙으로 여행을 떠났던 나는 그 여행이 내 남은 생을 지배하게 될 줄 몰랐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간 아프리카 여행에서 나는 이 한 가지를 배웠습니다. 산다는 것은 얼마나 치열하고 힘든 것인가. 내게 주어진 한 순간 한 순간들을 무의미하게 흘러가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내 몸이, 내 마음이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눈물은 마르고
소말리아를 다녀온 이듬해에는 르완다에 갔습니다. 우리는 일단 르완다 국경에 위치한, 콩고 민주공화국의 고마 시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트럭을 타고 고마 남쪽에 위치한 1백만 명에 가까운 난민들이 있는 무궁가 난민촌으로 갔습니다. 무궁가 난민촌은 한마디로 거대한 쓰레기장입니다. 간밤에 내린 비로 질척질척해진 땅 어디에나 쓰레기와 오물이 함께 썩어가고 있습니다. 거기서 나는 악취는 견디기 힘들 정도입니다. 커다란 쓰레기통 안에서 사람들이 바글거리며 살고 있습니다. 동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말입니다.
르완다에는 원래 질그릇을 만들고 사냥을 하면서 살던 피그미족이 살고 있었지만, 8세기 무렵부터 농경민족인 후투족이 이주해 피그미족들을 삼림 쪽으로 몰아내고 르완다를 건설했습니다. 그런데 14세기 초 나일강 유역에서 긴 뿔소를 가진 유목민인 투치족이 이 나라로 들어왔습니다. 숫자는 적지만 가축을 기르고 살던 투치족은 우수한 군사 기술과 긴 뿔소를 빌려주는 대가로 농경민인 후투족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이 피라미드 구조는 1916년 벨기에가 르완다를 점령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르완다는 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렇듯 강대국의 욕심 때문에 나라 전체가 멍들고 병들어 버렸습니다. 식민지 시절에 소수 부족인 투치족은 벨기에인들의 앞잡이가 되어 더욱 세력을 잡았고, 벨기에는 또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하층 계급인 후투족의 세력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독립 후 정권을 잡은 후투족이 오랜 세월 동안 자신들을 착취해온 투치족에 대한 대대적인 말살정책을 폈습니다. 그러니까 적은 숫자의 투치족이 많은 숫자의 후투족을 괴롭히다 상황이 거꾸로 되어 많은 수가 적은 수의 사람들을 없애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이때 수만 명의 투치족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이웃 나라로 피신했습니다.
1990년 우간다로 피신해 있던 투치족 사람들이 군대를 일으켜 쳐들어왔습니다. 양쪽 부족은 협상을 시작해 평화조약을 맺었지만, 극단적인 후투족 지도자들은 권력 분배를 거부했고 조약은 깨졌습니다.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은 온건파인 자기네 대통령이 탄 비행기를 미사일로 쏴 폭파하고, 그것을 투치족의 소행으로 덮어 씌웠습니다. 그리고 불과 몇 달 안에 5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을 살해했습니다. 그들은 투치족의 씨를 말리기 위해 큰 쥐들을 박멸하려면 작은 쥐들을 없애야 한다며 투치족 아이들을 대량 학살했습니다. 기가 막힐 일입니다. 그래서 인구의 절반 정도가 난민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또 다시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후투족의 대량 학살 정책에 대항해 투치족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후투족을 물리치고 투치족이 다시 정권을 잡자, 이번에는 후투족 사람들이 보복을 두려워해 대거 키부 호수를 건너 이웃 나라로 달아났습니다.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르완다 국경 근처인 콩고 민주공화국의 고마 난민촌입니다.
투치족 정부가 보복하지 않을 테니까 돌아오라고 해도 무서워서 가지 못하고 후투족 사람들은 이 쓰레기장에서 살고 있습니다. 워낙 못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난민촌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학살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 없는 농민들입니다.
봄부터 난민촌이 생겼기 때문에 그곳에서 태어난 아기들도 있습니다. 콜레라, 이질, 탈수증, 폐렴, 감기 등 여러 종류의 병을 가진 사람들, 특히 아이들이 많습니다. 두 살쯤 돼 보이는 아이가 진료소 천막 안에 누워 있는데, 팔이 너무 야위어서 링거 바늘을 이마에다 꽂고 있습니다. 아기 옆에선 엄마가 달려드는 파리를 쫓는 일밖엔 해줄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마에 주사를 놓고 있는 이 아이는 탈수가 너무 심해 가망이 없다고 합니다. 아이를 만지며 나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다신 너를 못 보겠구나. 네 엄마 마음에 비할 순 없겠지만 내 마음도 무척 아프다. 넌 왜 태어났지? 이렇게 갈 거면.' 죽어가는 아이를 내려다보면서도 내 눈에선 눈물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아프리카에 왔을 때는 온 땅을 다 적실 것처럼 눈물이 흘렀는데, 이제는 하도 많은 참상을 보니까 눈물샘마저 다 말라버렸습니다. 대신 목이 우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목 안쪽에서 이상한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습니다.
죽지 말아라, 아이들아
아프가니스탄에 가기 위해 우선 방콕으로 갔고, 방콕 공항에서 세 시간 정도 기다렸다가 파키스탄에 가서 하루 묵은 뒤, 유엔 비행기를 타고 아프가니스탄의 헤라트로 가는 여정입니다. 힌두쿠시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싼 나라 아프가니스탄.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이 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헤라트입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먹는 것은 야생 시금치 같은 것으로, 비가 오지 않아도 자라는 독하디 독한 풀입니다. 먹을 게 없어서 그 풀을 하도 뜯어먹으니까 어른이나 아이나 입 주위가 퍼렇습니다. 풀물이 든 것입니다. 이 풀은 계속 먹으면 심장과 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나중에는 눈까지 멀게 하는 독초라고 합니다. 우리가 먹을 게 없어 쑥만 몇 달 동안 계속 먹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땔감을 구할 수 있으면 그 풀을 삶아서 독을 빼고 먹을 수 있지만, 그것도 안 되니까 생풀을 씹고 있습니다. 이곳에 일주일 안에 식량이 도착하지 않으면 이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을 합치면 당장 15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생풀을 뜯어먹으며 초록색으로 물든 얼굴을 하고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동안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못사는 나라들은 구호의 손길이 많았지만 이 나라는 완전히 사각 지대에 놓인 채로 신음하다가 그나마 미국이 빈 라덴을 추적하는 바람에 이곳에 힘없이 죽어가는 아이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여기 아이들은 낯선 사람을 보면 자꾸 뒷걸음질치거나 숨곤 합니다. 그동안 여러 구호단체들이 다녀간 나라의 아이들과는 다릅니다. 외부인들을 처음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서워합니다. 오라고 손을 벌려도 담 뒤로 숨기 일쑤입니다. 가엽게도 풀을 한 움큼씩 들고서.
낮에는 축축 늘어진 아이들을 안고 오는 엄마들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고 아이들에게 영양죽을 먹였습니다. 아이는 하루쯤 죽을 먹으면 고개를 가누고 기운을 차립니다. 울기도 하면서요. 아이들이 우는 게 나는 좋습니다. 기운이 없으면 울지도 못하니까요.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라, 유서 깊은 실크로드의 나라, 엄청난 양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어 강대국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나라, 신비한 나라. 이곳에 전쟁과 굶주림만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도. 죽지 말아라, 아이들아! 죽음이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죽지 말고 살아 있어다오. 너희들의 까만 눈이 영원히 감긴다고 생각하면 내 가슴이 무너진다. 그 생각만으로도 내 얼굴에 눈물이 흐른다.'
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지구에는 수많은 종족과 인종들이 살고 있습니다. 피부색과 언어, 종교, 출생지에 따라 종족이 구분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들과 다른 또 하나의 종족이 있습니다. 그들은 약자들로만 이루어진, 20세기의 전쟁과 편견이 낳은 새로운 종족입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난민들입니다, 전쟁과 내전, 독재, 굶주림을 피해 조국을 떠나 지구촌 곳곳을 방랑하는 전 세계 난민의 80퍼센트가 여성과 어린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눈앞에 닥친 당장의 위협을 피해 달아난 이 난민들은 굶주림과 전염병, 폭력과 절망이라는 새로운 적과 맞서야 합니다. 국제 사회의 도움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난민은 어딜 가나 죽음을 무릅써야 합니다. 아프리카 지역에 있는 난민촌에서는 강간으로 인해 에이즈 확산이 점점 속도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난민이 된다는 것은 배가 고프며, 옷과 덮을 것이 없고, 누워서 잘 자리가 없고, 병들었으나 치료 받을 수 없고, 배울 수 없고, 어떤 직업도 가질 수 없음을 뜻합니다. 또한 적들의 공격 앞에 속수무책이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사회로부터 소외당함을 뜻합니다. 인류 역사상 유례 없이 세계가 부유해지고, 먼 거리가 하나로 연결되고, 기술이 최고로 발달해 인간의 삶의 조건이 최고로 좋아진 세상이지만 수천만 난민들의 처절한 고통은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나눔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조금만이라도 나누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나는 많은 숫자들을 나열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숫자들이 지루하게 여겨지실지도 모릅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을 직접 눈으로 보여줄 수 없으니까, 길을 헤매며 굶주리는 아이들의 눈동자와 얼굴을 다 표현할 수 없으니까 너무 답답해서 연기자인 내가 이렇게 끝없이 숫자를 열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전 세계를 돌며 만나본 이 아이들과 여인들도 눈동자 속에는 행복에의 갈망이 어려 있었습니다. 삶에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동자 속에 있는 것을 읽어야지, 그들을 숫자로 읽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책을 쓴 나는 더 슬퍼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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