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빌리 그레이엄 지음 / 전의우 옮김
청림출판 / 2006년 10월/ 374쪽 / 13,000원
▣ 저자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1918년 11월 7일, 노스캐롤라이나 샬럿에서 태어났다. 17살이 되던 1934년 가을, 당시 순회 전도자였던 모르드개 햄의 설교를 듣던 중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로 결심했으며, 이후 그의 삶은 복음 전도자로서의 준비 단계들을 숨 가쁘게 밟아갔다. 1937년 밥 존스 대학에서 1년 정도 공부하다 그 이듬 해 플로리다 성경대학으로 옮겨 1939년에 졸업했고, 그 해에 남침례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다시 일리노이 휘튼 대학에 입학해 그의 아내 루스를 만났으며, 졸업 후에는 일리노이 웨스턴 스프링즈 제일침례교회 목사로 시무하는 한편 국제 십대 선교회(YFC)에 참가하면서 본격적인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1949년 로스앤젤레스 전도대회를 통해 그는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전도자가 되었으며, 1954년 런던 전도대회 이후에는 일약 세계적인 부흥사로 떠올랐다. 1950년 그가 창설한 빌리 그레이엄 전도협회를 통해 전 세계를 누비며 복음을 전했으며,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비롯해 역대 모든 대통령의 친구가 되기도 했다.
“내 일생의 유일한 목표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만 가능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일평생 외길을 걸어온 빌리 그레이엄은 예수님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는 명령을 문자적으로 실천한 이 시대 최고의 복음 전도자이다. 지금까지 185개국 2억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텔레비전과 위성방송, 비디오, 필름, 인터넷을 통해 그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은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단순 명쾌하고 직설적인 복음, 복음 전도자로서의 흔들림 없는 행보, 흠잡을 데 없는 인품과 투명한 기관 운용 등으로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수십 권의 베스트셀러를 저술한 작가이기도 한 그는 아내 루스와 함께 노스캐롤라이나 몬트리트에 살고 있으며, 슬하에 2남 3녀의 자녀와 19명의 손자를 두었다.
▣ 역자 전의우
연세대학교와 총신대학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역서로 「안식」(IVP), 「영적 도약의 경험」(규장), 「하나님 나는 당신께 누구입니까?」(요단) 등 80여 권이 있다. 「하나님과의 신선한 만남」(요단)으로 1998년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 출판문화상 신앙부문 최우수도서 역자상을 받았다.
▣ Short Summary
‘불확실한 세상에서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50여 년간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한 복음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의 마지막 역작이다.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전해온 저자가 87세를 맞이하여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면서 기록한 글로, 저자의 복음에 대한 확신과 열정, 그리고 복음의 핵심과 메시지를 모은 것이 특징이다. 아울러 시작과 끝이 없이 반복되는 불교 인생관과는 달리 시작과 끝이 분명한 기독교 인생관을 설명하면서 인생에 대한 초연함과 선택에 대한 신중성,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 등을 강조한다.
▣ 차례
1부 여행을 준비하다
환영합니다 / 위대한 설계자 / 위대한 설계 / 뭔가 잘못되었다 /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 새로운 시작 / 자신 있는가? / 방향 돌리기
2부 힘을 비축하다
장거리 여행 준비 / 전쟁터에 서다 / 가이드는 믿을 만한가? / 비상연락망 / 여행의 동반자 / 도우미 등장 / 날마다 조금씩
3부 위기를 만나다
넘어지기 쉬운 존재 / 적과의 동침 / 감정 지키기 / 성품 연마하기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사람이 나를 실망시켜도 / 고통과 슬픔을 만나거든
4부 여행은 계속된다
연료 떨어뜨리지 않기 / 갈림길 / 결혼 로드맵 / 불꽃 간수하기 / 바톤 넘겨주기 / 영향 미치기 / 노년의 전략 / 영광스러운 소망
빌리 그레이엄의 마지막 당부
1부 여행을 준비하다
환영합니다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만일 내가 행하는 길에 형통함을 주실진대…” - 창세기 24:42
삶은 여행이다. 다른 모든 여행처럼, 삶이라는 여행도 시작이 있다. 물론 당신에게는 삶에 관한 선택권이 전혀 없었다. 부모나 피부색이나 인종이나 성에 대해서도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 하나의 여정을 시작한다. 삶의 여정, 인생 여정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여행처럼, 삶의 여정도 끝이 있다. 어느 지혜로운 시인의 말대로,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며, 찾아와서 우리 모두를 공평하게 만든다. 한편 다른 여행들처럼, 삶의 여정에도 과정이 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시간으로, 출생과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여정의 중간 부분도 피할 수 없다.
삶은 여행이다. 때로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버린다. 너무나 바쁘고 눈앞의 관심사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한 발 물러나 여행을 즐기는 여유를 갖지 못한다. 삶은 그저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일 뿐이다. 삶이란 염주알처럼 한 줄에 꿰여 있는 서로 무관한 사건들로,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나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당신은 질병, 경제적 압박, 대인관계 문제, 두려움, 죄책감, 외로움처럼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엄청난 문제에 짓눌려, 삶이란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짐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비극적인 사실은 매년 수천 명의 사람들이 더 이상 삶을 감당할 수 없다고 결정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삶은 여행이다. 지금까지 당신이 누구든, 당신의 삶이 어떠했든, 당신의 남은 삶의 여정은 달라질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삶이 좋은 여정, 즉 우리의 여행 목적을 충실히 성취하는 여정이 될 수 있는가?
첫째, 매우 단순하지만 심오한 것으로, 당신을 삶의 여정 가운데 두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에게서 왔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은 우리 자신을 매순간 그분께 돌려드리는 데서 비롯될 것이다.
둘째, 그 하나님이 삶의 여정에서 우리와 함께 하길 원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이 진리를 이해하면, 이것은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돕고 싶어 하시기 때문에, 우리 삶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이 우리를 새로운 여정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인생의 어느 순간, 하나님은 우리 여정에 개입하여 그분을 믿고 신뢰하며 새로운 길을 가라고 요구하신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숲으로 하이킹을 가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어느 순간 당신은 갈림길을 만날 것이다. 이 때 당신은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 당신은 세심하게 살피다가 더 넓고 쉬워 보이는 길,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간 것 같은 길을 선택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길을 갔다면 틀림없이 옳은 길일 것이다. 하지만 그 때 한 사람이 다가와 더 좁고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길로 가라고 말한다. “확실한가요?” 당신은 다소 의심스럽다는 듯이 묻는다. “물론이죠. 내가 이 길을 냈으니까요. 당신이 길을 잃지 않도록 내가 직접 목적지까지 함께 가 주겠소.”
그렇다! 새로운 길, 지금까지 걸었던 것과는 다른 길을 선택하라. 이 길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닦아놓으신 길이며, 이 길만이 참 생명으로 인도해준다. 예수께서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새로운 길의 위험을 감수해야 할까? 여기에도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이제까지 온 길은 결코 그 길이 약속한 것을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자기중심적인 부자처럼, “편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하지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선행과 훈련을 통해 구원을 따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자신의 힘으로 천국에 갈 자격을 얻을 만큼 선할 수 없다. 하나님의 기준은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길을 고집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둘째, 하나님의 길은 그분이 약속하시는 것을 언제나 가져다준다. 그러나 오해가 없길 바란다. 이 여정이 항상 쉽고 아무 어려움도 만나지 않으리라는 뜻이 아니다. 때로 고통과 슬픔이 덮쳐와도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체험하며 극복할 수 있는 길이다.
셋째, 하나님의 길은 우리를 집으로 인도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겨우 몇 십 년 살다가 끝나도록 계획된 존재가 아니다. 영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 잠시 여행 온 것일 뿐, 우리의 진짜 집은 천국이다.
당신과 나는 여행 중이다. 여행은 이 땅에서 우리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과연 어떤 여정이 될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당신 손에 있다. 당신은 과거를 바꿀 수 없지만, 하나님의 도움으로 미래는 바꿀 수 있다. 그분은 당신이 이제까지 온 길에서 벗어나 당신의 발을 새로운 길, 그분의 길에 두기 원하신다. 당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맡기고 매일 그분과 함께 걷는 법을 배움으로써 삶의 여정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자, 그럼 이제 여행을 새롭게 시작해보자!
위대한 설계자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 시편 8:1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기 전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결코 알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이 당신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불행히도, 하나님에 관한 대부분의 모색들은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놓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추측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셨을까?
한 가지는 우리 주변의 세계, 그분이 창조하신 세계를 통해서이다. 우리가 찾으려고만 한다면 그분의 ‘발자국’은 어디에나 있다. 별들이 반짝이는 광대한 밤하늘을 보라. 무한한 창조자의 위엄과 능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미경을 통해 물방울을 관찰해보라. 그러면 가장 작은 부분까지 소홀히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관심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자신만 들여다보더라도 하나님의 솜씨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의 창의성, 옳고 그름에 대한 의식, 사랑하고 따질 수 있는 능력,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행 14:17)라고 말한다. 또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롬 1:20)라고도 말한다. 레이저의 공동발명자로 노벨물리학상을 공동수상한 찰스 타운스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우주에 시작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분명합니다. 하나님 없이 그 특별한 사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단순히 발자국을 둘러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하나님을 분명히 보려면 더 많은 게 필요하다. 바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첫째, 한 권의 책, 즉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성경 저자들은 이것을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했다. 성경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저자들이 여러 권으로 기록한 하나의 문학이지만, 각 권의 배후에는 또 다른 저자가 계시다. 바로 하나님의 성령이다. 베드로 사도도 이렇게 썼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
둘째로, 하나님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육체를 입으신 하나님이셨고, 우리는 그분을 통해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분인지 발견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 그분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일 1:14).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첫째,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은 원자나 분자로 이루어진 분이 아니다. 피조 세계의 한 부분도 아니다. 그분은 전혀 다른 영역, 영의 영역에 존재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한 곳에 제한하려 하거나, 당신의 마음에 그분의 상상화를 그리려 하거나, 그분을 한 가지 방식에 제한하려 하지 말라. 그분의 능력이나 위대함이나 사랑이나 지혜를 제한하지 말라. 그것은 진흙 웅덩이를 보고 바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둘째, 하나님은 인격체이시다. 그분은 느끼고, 생각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고, 소망하시며, 결정하시고, 행동하시고, 판단하신다. 그분은 비인격적인 힘이나 에너지, 능력이 아니다. 가장 완벽한 인격체이시다. 그분의 분노조차 의로운 것은, 그분의 분노는 전적으로 악을 향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신 32:4)라고 말한다.
셋째,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롭고 깨끗하시다.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요일 1:15)라고 말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모습을 잠시 보았을 때 그분의 거룩과 자신의 죄악에 압도되었다. 하나님의 거룩을 이해할 때만 우리 죄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죄라는 질병은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로부터 단절시킨다. 하나님의 거룩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거룩은 하나님 성품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넷째, 그러나 하나님이 단지 거룩하기만 하다면, 우리에게는 천국에 대한 소망이나 그분의 축복에 대한 소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운 영이시며 인격체이실 뿐 아니라 사랑이시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리기 원하시는 넷째 정의이다. 이 때문에 모든 게 달라진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고 말한다. 그분의 거룩이 완전하듯이 그분의 사랑도 완전하다.
나는 성경을 읽을수록 사랑이 하나님의 최고의 속성이라는 것을 더 깊이 깨닫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실 때마다 그 뒤에는 그분의 완전한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이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창조하시게 했고, 그 사랑이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구속하려고 그분의 아들을 보내시게 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좇으며 우리를 그분에게로 이끈다. 그분의 사랑은 어느 날 우리를 영원히 그분 앞으로 인도할 것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행 31:3).
새로운 시작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 요한계시록 21:5
열일곱 번째 생일 무렵, 나를 예수 그리스도께 드렸던 밤을 지금도 기억한다. 어느 부흥사가 특별히 마련된 임시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집회에 전혀 참석하고 싶지 않았는데 친구의 권유로 마지못해 참석했고, 마침내 부흥사의 메시지가 내 가슴에 꽂혔다. 수천 명이 참석했으며 앞에 앉아 있는 여자의 큰 모자 뒤에 숨어 있었는데도 설교자는 내게 직접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생각해보니, 그 때 성령께서 내 마음에 역사하시면서 내 죄와 내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부흥사가 각자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리도록 초청했을 때, 나는 아주 오랫동안 저항하다가 마침내 앞으로 나갔다. 어떤 사람이 친절하게도 어떻게 그리스도를 내 삶에 영접하는지를 설명해주었으며, 나는 그의 인도를 따라 간단하지만 진실된 헌신의 기도를 드렸다.
집에 돌아와 2층에 있는 내 방으로 들어갔을 때, 내게 뭔가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강한 감정이나 극적인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달빛이 비치는 아버지 농장을 내다보면서 내가 방금 내딛은 걸음을 생각했다. 그 때 나는 평생 처음으로 스스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주님, 오늘밤 제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주님은 아십니다.”
이후로 나는 나의 헌신과 그 헌신의 의미를 아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배우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처음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는 하나님이 매우 가깝게 느껴졌으나 이제는 자신의 믿음이 진짜였는지 의심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리면 분명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 일들이 무엇인지 이해한다면, 사탄이 우리에게 심어주려는 모든 의심을 물리치는 견고한 기초가 선다.
우리 삶을 그리스도께 드릴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첫 번째 선물은 새로운 관계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켰던 한 가지, ‘죄’가 이제 제거되었고,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되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친구요 자녀로 불러주신다. 두 번째 선물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이며, 세 번째 선물은 새로운 가족이 된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나님의 권속이 되는 것이다. 네 번째 선물은 새로운 목적이며, 다섯 번째 선물은 새로운 능력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목적을 주셨지만 새로운 능력이 없이는 결코 그 목적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셩령을 주셨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으리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아닌 것이다.
여섯 번째 선물은 ‘새로운 운명’이다. 회개나 회심은 ‘변화’를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올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운명을 주신다. 전에는 지옥을 향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천국을 향하고 있다. 전에는 영생의 소망이 없었으나 이제는 영생의 소망이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는 말씀처럼 영생은 선물이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이다. 그분은 자신의 피로 우리의 구원을 사셨고 이제 그 구원을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다.
하나님의 풍성한 선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곱 번째 선물을 주신다. 마지막 선물은 ‘새로운 여정’, 즉 그분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때까지 따라갈 전혀 새로운 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의 새로운 여정, 우리의 여생을 인도할 여정이다. 가장 멋진 사실은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행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자신 있는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 디모데후서 1:12
이제 당신은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므로 우리가 그분의 손 안에서 영원히 안전하다는 것을 믿는가? 내 아버지는 오랜 세월 이것을 의심하셨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한동안 치열한 영적 싸움과 영적 탐구를 하신 후에야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리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친밀하심에 대한 아버지의 느낌은 점점 약해졌고, 아버지는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셨다.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셨다. 하나님이 자신을 설교자로 부르고 계신 것 같다고 느꼈으나 그 부름에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졌고 구원마저 잃어버렸다고 느끼셨다.
아버지는 매우 정직한 인품의 소유자로, 결코 복음의 메시지를 의심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교회에 나가셨고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영적 확신이 없으셨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자신의 구원을 완전히 확신하게 되셨다. 그리고 후로는 그 확신을 한 번도 잃지 않으셨다. 이런 경우는 내 아버지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일상생활의 불확실성은 우리의 영적 삶을 침범해서 구원을 의심하게 만든다.
신중한 건축자라면 먼저 기초를 튼튼히 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우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위한 견고한 기초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왜 이것이 중요한가? 하나님이 우리를 어느 정도로 사랑하시는지를 알지 못하면 삶의 여정이 주춤거리고 불확실하며 불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면 우리의 여정은 기쁘고 확실하며 소망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교만하거나 오만하지 않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며, 매일 그분을 겸손히 신뢰한다. 그는 시편 기자처럼 말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시 6:27).
우리가 이생과 내세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는 확실한 기초로서 하나님이 우리 아래 두신 견고한 반석이 셋 있다. 첫째로 하나님의 약속이고,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이며, 셋째는 당신을 붙잡고 있는 하나님의 손이다. 당신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그리스도께서 그 값을 지불하셨으며, 성령께서 당신에게 내적 확신을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값없는 선물인 것이다.
방향 돌리기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 고린도후서 5:15
아기는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우리는 아기가 영원히 아기로 남길 원치 않는다. 이렇게 되면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 이들은 자라고 성숙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비극이다.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훨씬 더 큰 비극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영적 아기로 남아 있도록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영적 성숙이다. 성경은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 3:18)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 전부터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롬 8:29)이다.
그리스도를 닮으려면 일상의 책임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명심하라. 하나님의 뜻은 바로 당신이 있는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점점 더 닮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일상생활을 멀리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셨다. 때로 휴식을 취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일상에서 물러나셨으나 결코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이탈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더 닮아가려면 자기 삶의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께 복종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일단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오면 대개는 우리의 의지가 첫 번째 영적 전투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다스리길 원한다. 다른 누군가에게(심지어 하나님에게라도) 통제권을 넘겨 준다는 것은 우리의 본성에 어긋난다. 하지만 영적 성장에는 지름길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두 길을 동시에 갈 수 없다. 그리스도의 권세에 복종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만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분의 권세를 거부하면 결코 그분을 닮지 못할 것이며, 우리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기쁨도 결코 경험하지 못할 것이고,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쓰임 받는 기쁨도 맛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부정적이기만 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사람들이 예수께 끌린 것은 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던 삶의 질을 그분에게 보았고 자신도 그런 삶을 경험하고 싶어서였다. 그분에게서 기쁨과 평안과 친절을 보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다. 하나님은 이와 동일한 삶의 질을, 예수님의 삶을 우리에게도 주고 싶어 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2:11).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하나님의 뜻은 선하며, 기쁨을 주며, 온전하다. 다른 데 안주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2부 힘을 비축하다
출발 준비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 히브리서 12:1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여정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마라톤’을 하는 주자라고 말한다. 바울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라고 말한 후 여기에 개인적인 해석을 덧붙였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내가 내 몸을 쳐(훈련하여) 복종하게 하노라”(고전 9:23-27). 하나님의 레이스를 하는 주자로서, 바울은 목표에 헌신했을 뿐 아니라 그 목표에 이르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다.
이외에도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은 ‘군사’, ‘형제’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포괄적인 단어는 제자이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첫째로, 배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둘째, 제자는 배우는 자일 뿐 아니라 따르는 자이기도 하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뜻이다.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려 한다. 셋째, 제자는 종이다. 즉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이런 제자인가? 제자가 되고자 헌신하고 훈련되어 있어야만 여정을 위한 준비가 갖춰진 것이다. 제자도는 평생의 헌신이다. 오늘 당신의 삶에서 시작하라.
전쟁터에 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 베드로전서 4:12
그리스도의 삶은 운동장이 아니라 전쟁터에 있다. 1959년 초, 가장 큰 규모의 전도 집회 준비가 거의 끝나갈 때였다. 호주 전역을 도는 대규모 집회였다. 하나님이 호주 복음화의 문을 여셨다는 기대감에 나는 들떠 있었다. 그런데 호주로 떠나기 며칠 전, 시력에 이상이 생긴 게 느껴졌다. 바닥이 튀어나오거나 들어간 것처럼 보였으며, 얼마 후에는 왼쪽 눈에 통증이 심해졌고 양쪽 가장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의사의 진단 결과, 치료를 하지 않을 경우 실명에까지 이를 수 있는 희귀하고 심각한 병이었다. 유일한 치료법은 완전히 쉬는 것이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나님이 집회를 연기하셨을까? 아니면 사탄이 우리를 막으려는 것일까? 아니면 내게 무슨 잘못이 있나?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른다 다만 예상치 못했던 조용한 몇 주의 시간 동안 하나님이 달리 경험하지 못했을 방법으로 나를 준비시키셨다는 것을 알뿐이다. 집회가 연기되자 사람들은 더 뜨겁게 기도하게 되었고, 일정이 변경되었음에도 일단 집회가 시작되자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를 괴롭히는 고난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당신과 나는 이 싸움의 한 부분이다.
이 영적 싸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몇 가지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첫 번째 오류는, 악이 실재가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두 번째 오류는 악은 실재이며 우리는 결코 악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세 번째 오류는 가장 위험하면서 그리스도인조차 깨닫지 못한 채 빠질 수 있는 오류로, 악은 실재하지만 내 자신의 힘으로 악과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죄 앞에서 자신의 철저한 무기력을 깨닫고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대신에, 자신의 힘으로 승리하려고 노력한다.
어떻게 하면 이런 오류에 빠지지 않고 영적 싸움에서 매일 승리할 수 있을까? 영적 승리의 열쇠는 하나님께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 4:7-8). 하지만 의문이 남는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과도 개인적인 관계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기억하면서 날마다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훈련을 하라. 나는 시간을 따로 정하고 매일의 큐티를 통해 성경 읽기와 기도와 묵상이라는 패턴으로 한다.
절대로 잊지 말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야 종결될 보이지 않는 거대한 영적 싸움에 속해 있다. 하지만 어찌할 수 없는 힘에 휘둘리는 무기력한 인질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선택할 수 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올 것인지 아니면 그분에게서 멀어질 것인지를 말이다. 사탄에게 발판을 내주지 말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훈련을 하라. 그분만이 당신의 안전한 요새이시다.
가이드는 믿을 만한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당신의 믿음이 자라 그리스도를 더 닮을 수 있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과 영혼이 성경에 잠기게 하라. 성경은 능력, 즉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머니에 대해 또렷이 기억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좋아하시던 의자에 앉아 닳고닳은 성경을 읽으시던 모습이다.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렇게 하셨는데, 어머니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믿음은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옥토에 심겨질 때 자란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사탄이 달리 믿게 하려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질문은 사탄이 한 것으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말씀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 하시더냐”(창 3:1) 그리고는 더욱 대담해져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그 날 이후로, 사탄의 가장 일관된 전략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 말씀의 진실성과 권위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1949년 여름, 우리 팀은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전체를 대상으로 유례가 없는 가장 집중적인 전도 집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집회가 시작되기 불과 몇 주 전, 나는 신앙의 큰 위기를 겪었다. 내 평생 가장 큰 위기였다. 내가 아주 존경하는 동료 부흥사가 성경에 대한 의심을 표현하면서 내게 “사실을 직시하고” 성경이 영감 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을 버리라고 한 것이다. 그는 말했다. “빌리, 자네는 50년이나 뒤처졌네. 사람들은 더 이상 자네처럼 성경을 영감된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아. 자네의 신앙은 유치하네.”
나도 책을 통해 몇몇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이런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후로 성경에 대한 의심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의심은 로스앤젤레스 동쪽에 위치한 산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기간에 해결되었다. 어느 날 밤, 나는 오두막에서 혼자 앉아 성경이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말하는 구절들을 찾아 세밀하게 살펴보았다. 선지자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또한 고고학적 발견들도 성경의 역사적 정확성을 거듭 확인시켜 준다.
하지만 내게 특히 의미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성경관이었다. 그분은 성경을 자주 인용하셨을 뿐 아니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기도하셨다. 그분은 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그렇다면 나도 주님과 같은 성경관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내 나는 달빛 밝은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는 성경을 그루터기에 올려놓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때 정확히 무슨 기도를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것이었다. “주님, 이 책에는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 책에는 제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믿음으로 이것을 당신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지금부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겠습니다.”
무릎을 펴고 일어섰을 때, 몇 달 동안 느끼지 못했던 하나님의 임재가 강하게 느껴졌다. 나의 모든 의문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영적 전투에서 내가 승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후로 두 번 다시 성경의 영감을 의심하지 않았다. 나의 설교는 즉시 새로운 확신으로 넘치기 시작했다. 나는 이것이 3주로 예정된 로스앤젤레스 집회가 9주로 늘어난 이유 중 하나였다고 믿는다.
비상연락망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 요한일서 5:14
기도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나는 장인인 넬슨 벨 박사만큼 바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는 25년간 중국에서 의료 선교사로 섬기면서 매년 수천 명의 환자를 수술했다. 중국 정국이 불안할 때였으므로, 6백 명이 넘는 총상 환자를 치료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미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된 후에도 의사로서 환자를 진료하는 바쁜 생활을 다시 시작했고, 영향력 있는 기독교 잡지 두 곳의 편집자로 일했으며, 교단 지도자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내가 루스와 결혼한 후, 장인은 나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가 되었다. 나는 언제나 그의 지혜로운 조언을 존중했다. 1분 1초를 소중히 여기는 데 그분만큼 훈련되고 헌신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분에 대한 기억 가운데 가장 생생한 것은 항상 기도에 전념하는 모습이다. 그는 매일 새벽 4시 30분이나 5시면 일어나 혼자 서재에서 닳고닳은 성경을 읽고 많은 시간을 기도했다. 이 시간을 생략해버릴 핑계거리는 그분 정도면 수없이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홀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하루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분에게 기도는 하루를 끝내면서 후다닥 해치우는 한두 마디나, 위기에 직면했을 때 급히 내뱉는 말이 아니었다. 그에게 기도는 자신의 모든 삶을 파고드는, 지속적이며 순간순간 이루어지는 실천이었다. 그에게 기도는 기쁨의 체험이요,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는 기회였다.
그렇다면 기도란 무엇인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커뮤니케이션을 포함한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다. 기도가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 되도록 돕기 위해 내게 도움이 되었던 여섯 가지 지침을 제시해보겠다. 첫째, 바른 태도를 가져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둘째,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 셋째, 모든 염려를 내려놓고 기도 가운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라. 넷째,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기도하는 법을 배워라.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한다. 다섯째, 결과에 대해 하나님을 신뢰하라.
장인은 항상 기도 목록을 작성해놓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곤 했다. 그분이 돌아가시고, 아내 루스는 그 기도 목록에서 우리 아이들에 대한 특별하고 구체적인 관심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기도는 장인이 돌아가신 지 5년 후에 응답되었다. 우리의 뜻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따라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마지막으로 여섯째,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워라. 성경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시 37:7)고 말한다. 기도는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지만, 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하시기 위해 침묵 기도를 이용하신다. 그분의 임재에 대한 내적 확신을 주시는 데 그칠 수도 있고, 우리를 구체적인 방향으로 인도하실 수도 있다. 하나님은 당신과의 교제를 원하시고, 당신은 그분이 당신 앞에 두신 삶의 여정에서 그분과의 교제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기도하라.
여행의 동반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마태복음 18:20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을 뿐 아니라 서로에게 속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앞에 두신 길을 혼자 가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와 함께 가는 사람들이 있다. 1959년, 나는 모스크바에 초대된 적이 있는데 소련 정부가 내 설교를 허락하지 않아 순전히 여행자 신분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바짝 긴장한 채로 입국 심사대에서 여권을 제출했다. 여직원은 여권을 유심히 살피더니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위쪽을 가리켰다. 그리스도인의 ‘일방통행’ 표시였다. 무신론이 맹렬한 소련의 한가운데에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자매가 있었다. 며칠 후, 나는 크렘린 성 밖에서 군중들 틈에 끼여 승전기념일 축하 행사를 지켜보았는데, 그 때 한 남자가 가만히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지팡이 끝으로 바닥에 십자가를 그었다. 그도 믿음의 형제였다. 한번은 가랑비를 맞으며 호텔 밖에 서 있는데, 버스에 타고 있던 어떤 여자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김이 서린 유리창에 조심스럽게 십자가를 그었다. 나는 그녀의 제스처를 알아들었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모스크바에서 보았던 세 사람은 다른 신자들과 접촉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암흑시대의 많은 신자들처럼 혼자였을까? 물론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접촉을 갈망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의 믿음을 내게 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께 속해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거의 모든 곳에, 심지어 전혀 뜻밖의 곳에 두셨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자신의 주님과 구주로 따를 것인가는 각자가 개별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개별적인 신자에 불과하지 않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동일한 그룹, 즉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의 부분이기도 하다. 형제나 자매가 나머지 가족과 소원해진다면 뭔가 잘못되었듯이, 그리스도인이 동료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를 거부한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삶의 여정을 함께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가 함께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길 원하신다.
도우미 등장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사도행전 1:8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게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인 속에 직접 거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와 자신의 삶을 드릴 때, 하나님은 실제로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살고, 그리스도를 더 닮아 우리의 여정을 지혜롭게 해나가려면 하나님의 용서와 선, 둘 다 필요하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도 필요하고, 또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시는 일도 필요한 것이다. 성령께서 정말로 우리를 바꾸실 수 있을까?
여러 해 전, 런던의 어느 빈민가에서 자기 교구의 부두 노동자들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목사가 있었다. 부두 노동자들은 중노동에 시달렸고, 감사도 모르고 임금도 형편없었다. 그래서 목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먼저 자신이 이들처럼 되기로 결심했다. 날마다 이들처럼 옷을 입고 줄을 서서 일거리를 기다렸지만, 자기 정체는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마침내 어느 겨울 날, 화물 하역을 맡아 배에서 선착장까지 널빤지로 된 좁은 길을 따라 외발 수레로 짐을 나르던 그는, 그만 세차게 넘어지는 바람에 발을 헛디뎌 차가운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일꾼 하나가 그가 넘어지도록 일부러 널빤지를 겹쳐 놓았던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화를 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화를 억눌렀으며 평안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을 곧바로 느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주위 사람들과 함께 웃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범인은 자신의 짐을 내려놓고 그가 강에서 올라오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를 괴롭혔다가 평안한 반응에 깜짝 놀란 사람은 그 때부터 그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이 한때 존경받는 의사였지만, 술 때문에 의사직과 가족마저 잃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목사는 그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했고, 시간이 흘러 그는 가족과 재결합하고 의사직도 되찾았다.
핵심은 이것이다. 성령께서 목사의 기질을 제어하시고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사랑으로 대신하지 않으셨다면,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성령께서 변화를 일으키셨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을 바꾸려고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한다. 하지만 자기를 개선해 보려는 이들의 시도는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며, 결국 좌절과 절망에 빠지고 만다.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우리가 성령의 힘을 의지하는 대신에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그분의 성령을 주신다.
성경은 성령에 관한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제시한다. 첫째, 성령은 인격체이다. 둘째, 성령은 능력이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전달되는 통로이거나 도구이다. 셋째, 성령은 하나님이다.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시듯 성령도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나 ‘하나님의 영’으로 부르면서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낸다. 성경의 가장 심오한 진리이면서, 우리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진리가 ‘삼위일체’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뚜렷이 다른 세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오신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이것을 가시적으로 설명한다면, 태양은 우주 공간에 있는 하나의 객체이지만 빛과 열도 낸다. 하지만 태양은 여전히 하나다. 물은 고체이거나 액체이거나 기체일 수 있지만 모두 여전히 물이다.
궁극적으로 삼위일체는 우리가 천국의 이편에서는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다. 그러나 우리는 삼위일체로 계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예배한다. 당신은 자신의 힘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고 애쓰고 있는가, 아니면 매일 자신에게 필요한 도움을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가? 그분의 성령을 통해 당신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분 때문에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날마다 조금씩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 베드로후서 3:18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순간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평생이다. 오래 전 일이다. 기술자들이 깊은 협곡에 현수교를 놓을 계획을 세웠는데, 가장 큰 문제는 무거운 강철 케이블을 협곡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헬리콥터가 없었다. 협곡 아래에는 급류가 흐르고 있는데다 거칠고 바위투성이라 배를 띄워 케이블을 옮기는 것은 너무나 위험했다. 그렇다면 방법이 없을까? 기술자들은 협곡 건너편으로 연을 띄웠다. 그리고 연이 반대편까지 날아가자 조심스럽게 땅에 내려앉혔다. 이제 협곡의 양쪽이 가는 연실로 연결되었다. 그들은 이런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했고, 줄은 점점 더 굵어져 로프를 만들 수 있었으며, 마침내 무거운 강철 케이블로 협곡의 양쪽을 이어 다리를 세울 수 있었다. 영적 성장은 이처럼 다리를 놓는 것과 비슷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돌밭이나 가시밭에 떨어진 씨앗처럼 그 말씀이 세상의 염려 때문에 시들거나 질식하게 하지 말고, 대신에 옥토에 심기운 씨앗처럼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 5:22-23). 먼저 이러한 아홉 가지 성품을 이해하고 당신 삶의 일부로 삼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하라.
또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가 어려운 결정에 직면할 때 우리를 인도하신다. 이때, 우리는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순종해야 한다. 나는 내 삶에서 이것을 거듭 경험한다. 때로는 순종이 아주 쉽지만 때로는 무엇이 옳은지를 아는 것조차도 쉽지 않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를 놓고 고민했던 수많은 순간들을 기억한다. 논리만으로는 부족했다.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며 다른 사람들의 경건한 조언을 구할 때에야 마침내 해답이 주어졌고, 우리 안에서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이 그 해답을 확인시켜 주었다.
성령 충만은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매일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현실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내가 하나님께 속했으며 그분이 내 앞에 놓인 하루를 알고 계신다는 데 감사하면서 조용히 하루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게 도움이 된다. 그런 후에는 하루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를 사용해주시며 이것을 가로막을지 모르는 모든 죄에서 나를 깨끗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을 신뢰할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나를 채워주시리라고 믿으면서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는다. 나는 그분의 임재를 늘 느끼지는 못하지만 하루가 끝나는 시간이 되면 하루를 되돌아보면서 나와 함께하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3부 위기를 만나다
넘어지기 쉬운 존재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 마태복음 28:41
거센 물결이 탬의 약한 곳을 찾듯이, 문제와 유혹은 우리 삶에서 약한 곳을 찾는다. 댐의 99퍼센트가 견고해도, 1퍼센트가 약하다면 마침내 전체가 붕괴될 수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문제와 유혹은 언제나 우리의 약점을 공격한다. 언제나 그렇다. 삶의 스트레스와 유혹에 약한 이유는 우리가 내적으로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틈이 생긴 댐처럼, 수리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갈 것이다.
궁극적으로 모든 악과 유혹은 우리의 대적 사탄에게서 온다. 사탄은 우리를 직접적으로나 공개적으로 공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성경은 때로 사탄이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후 11:14)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탄은 우리를 어떻게 유혹할까? 사탄은 외부의 압력, 즉 우리 주변의 세상을 이용한다. 성경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경고하면서 이어서 세상적인 태도의 표시들을 열거한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5-16).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또 다른 방법은 우리 내부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육’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육’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대신, 자신의 욕망과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결심을 의미한다. 우리가 몸을 다스리는 대신 도리어 몸이 우리를 다스릴 때가 너무나 많다. 술이나 마약, 정욕의 노예가 되거나, 습관이나 열정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자체로는 반드시 잘못된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삶을 온통 그곳에 집중하면 우상이 되어 버리는 식이다. 성경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고 촉구한다.
유혹을 다루고 이길 수 있는 네 단계가 있다. 첫째, 유혹을 인식하라. 둘째, 유혹이 찾아올 때 유혹을 거부하라. 셋째, 독사나 독약을 다루듯이 유혹에 대처하라. 넷째, 실패할 때 회개하고 즉시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을 구하라. 성경은 이렇게 약속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이것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 약속을 믿어라! 죄를 지었을 때, 변명하거나 무시하거나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 죄를 인정하라. 죄를 회개하라.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을 완전히 용서하셨다는 사실에 기뻐하라.
하나님이 우리 삶에 심길 원하시는 네 가지 성품은 성실과 정직, 정결, 자유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모든 유혹으로부터 자유하길 원하신다.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지 말고, 믿음으로 자신의 마음과 삶을 그리스도께 맡기고 성령께서 당신을 다스리시게 하라. 사탄이 당신을 조금이라도 이기지 못하게 하고,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고린도후서 4:9
“왜” 이것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다. 왜 악이 이렇게 많은가? 왜 죄 없는 아이들이 암이나 학대나 굶주림으로 죽는가? 왜 세상은 자연 재해와 전쟁과 질병으로 고통당하는가? 왜 그렇게 실망스러운 것들이 많은가? 왜 착한 사람들이 고통당하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이 많고 자비하시다면, 왜 가만히 계시는가? 왜?
911 테러가 있은 지 사흘 후, 워싱턴 내셔널 성당에서 열리는 추모 예배에서 메시지를 전해 달라는 대통령의 요청을 받았다. 나는 그 날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 삶에서 하나님이 왜 비극과 고통을 허락하시느냐고 물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저는 사실 그 대답을 제대로 모르고, 제 자신에게조차 만족스러운 답을 주지 못합니다. 저는 다만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며, 그분이 고난 가운데서도 사랑과 자비와 위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순처럼 들리는가? 적어도 유한한 우리의 생각에는 그럴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악은 실재이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도 실재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사랑이 많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신뢰와 믿음으로 그분을 붙잡을 수 있다. 그분은 우리가 어떤 일을 겪을지 아신다.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이 지옥의 고통을 당할 때, 그분도 악의 가장 날카로운 공격을 경험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큰 고난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이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이렇게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그 잔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는가? 거기에는 모든 인류의 모든 죄가 들어 있었다. 모든 살인, 모든 간음, 모든 도적질, 모든 불의, 모든 악한 행동이나 생각, 다시 말해 온 인류가 지은 모든 죄가 그 ‘잔’에 부어졌다. 예수께서 우리가 구원 얻을 다른 길이 없느냐고 아버지께 물으신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길은 없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모든 죄를 자신에게 전가하셨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이 우리 대신에 그분에게 내려질 수 있었다. 예수님의 고난은 단순히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한 인간의 고난에 불과한 게 아니었다. 그분의 가장 큰 고난은 우리가 담당해야 마땅한 죽음과 지옥을 직접 지시고 견디신 영적 고난이었다.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도 결코 평탄하거나 편안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실망, 비극, 슬픔, 실패, 무능력, 질병, 불의, 배척, 고통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 닥칠 것이며, 때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이나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닥칠 것이다.
“주님, 왜죠?” 이런 일들이 닥칠 때 이렇게 묻는 것은 당연하며 잘못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실 것이다(최소한 힌트는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 우리를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삶이 우리에게 등을 돌릴 때 물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가 아니라 “무엇을?”이다. “주님, 내가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이렇게 묻지 못하면 거의 언제나 우리는 잘못된 길을 선택하고, 비통이나 분노나 질투나 복수나 심지어 절망의 반응을 보인다. 이런 반응을 보일 때 우리는 언제나 끔찍한 대가를 지불한다. 언제나 그렇다. 비성경적이며 경건하지 못한 반응은 결코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며, 거의 언제나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자신의 영혼에 독을 끼칠 뿐 아니라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에까지 독을 끼치고 만다. 성경은 이러한 사람에 대해 말한다. “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느니라”(전 5:17).
삶이 우리에게 등을 돌릴 때 바르게 반응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이런 순간들이 우리를 엄습하기 전에 미리 준비해야 한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전 12:1).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 7:24-25).
삶이 우리에게 등을 돌리는 방법 중에, 모두가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게 있다. 실망과 실패이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께 더 가까이 이끄시거나 우리에게 인내와 신뢰를 가르치기 위해 이 둘을 사용하신다. 또한 우리가 다시 그분의 뜻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라고 말한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자신의 계획이 중단되고 자신의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실망과 실패를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며 미래를 그분의 손에 맡기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다. 삶이 당신을 배반할 때, 시편 기자의 기도가 당신의 기도가 되게 하라.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시 25:4).
사람이 나를 실망시켜도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 골로새서 3:12
어떻게 하면 서로 다른 사람과 나라와 인종과 문화가 잘 지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컨퍼런스가 매년 수십 차례 열리지만 마땅한 결과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 성품의 본질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8). 아가페 사랑의 반대는 이기심인데,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채울 때 이기심은 사라진다. 하나님의 우선순위는 그분의 사랑이 당신 삶의 특징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리스도의 삶의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랑은 이를 악물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 닮아가며 우리의 삶을 그분께 드려 그분의 성령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변화시키실 때만 이루어진다. 성경은 “성령의 열매는 사랑”(갈 5:22)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것이 한 번에 한 단계씩 점진적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분이 사랑하시듯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내 뒤에서 나의 거의 모든 삶을 통해 내게 가르치고 계신다.
성경은 우리의 관계를 이끌어주는 일련의 원칙을 제시한다. 암초투성이의 해안을 비추는 등대처럼, 성경의 원칙들은 우리에게 위험을 경고하며, 우리를 안전한 항로로 인도한다. 일곱 가지 원칙을 살펴보자면, 첫째,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사는 것을 당신의 목표로 삼아라. 둘째,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바라는 대로 그들을 대하라. 셋째, 친구들뿐 아니라 원수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 넷째, 당신의 혀를 지키고, 악이 아니라 선을 위해 사용하라. 다섯째, 절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여섯째, 복수를 피할 뿐 아니라 과거의 포로가 되지 말라. 일곱째, 변화를 일으키는 용서의 능력을 실천하라.
고통과 슬픔을 만나거든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 예레미야애가 3:32
고통만큼 인간의 약함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다. 고통은 우리 모두에게 생명이 약한 것이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무엇보다도 고통은, 어느 날 우리 몸이 수명을 다하고 죽어 이생의 삶이 끝나리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이 책을 쓰고 있는 지금, 수 년째 고통이 아내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손자를 위해 그네를 매다가 나무에서 떨어졌을 때부터 엉덩이뼈와 척추의 구조가 조금씩 나빠졌고, 이 때문에 고관절전치환 성형수술 등 여러 수술을 받았지만 걷는 게 점점 힘들어져, 이제 아내는 더 이상 걷지 못하고 침대와 의자에서 하루를 보낸다.
이와 함께 통증이 찾아왔다. 단순히 이따금 욱신거리는 정도의 통증이 아니라 쉬지 않고 계속되고, 때로는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심한 통증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내가 겪고 있는 아픔을 이해하고도 남을 만큼 많은 아픔을 경험했다. 하지만 진통제의 약효가 발휘되길 기다리면서 아내가 이를 악물고 있는 모습을 지켜볼 때면 나 자신이 그렇게 무기력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아내 대신 내가 아파 줄 수 있기를 얼마나 바라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내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아내가 자신의 병에 화를 내거나 낙담하기는커녕 절대로 불평조차 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을 사랑하시며 가까이 계신다는 아내의 강한 믿음과 확신 때문이다. 아내는 어느 때보다 지금 하나님을 더 가까이 느낀다고 말한다. 그것은 진심일 것이다. 시편 기자처럼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시 31:15)라고 솔직하게 말한 것이다.
고통이 찾아올 때, 매일 하나님의 팔을 의지하고 고통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라. 당신의 입술을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와 찬양으로 채우고 당신의 치유를 위해서도 기도하라.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따라서 개입하실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분의 뜻이 당신의 삶에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 그분의 뜻은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때문에 천국의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라. 언젠가 그 고통은 끝날 것이며 당신은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하게 될 것이다.
상실과 슬픔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사 53:3)고 말한다. 건강의 상실, 우정의 상실, 경제적 안정의 상실, 내적 평안의 상실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은 우리의 감정을 슬픔으로 몰아간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는다”(살전 4:13)는 말씀이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슬퍼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에 대해 슬퍼할 때,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약한 믿음의 표시가 아니라 큰 사랑의 표시이다.
나는 슬픔에서 회복되는 것은 순간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슬픔은 갑자기 우리를 찾아오지만 천천히 떠난다. 그러므로 슬픔이 찾아오더라도 놀라지 말라. 당신의 슬픔을 하나님께 맡기고 감사로 덮으라. 그리고 나서 아픔을 당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라. 짐은 서로 나눌수록 가벼우며,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격려할 때 하나님은 당신을 격려하실 것이다. 어떤 친구는, 고통의 순간은 하나님이 우리를 빚기 위해 사용하시는 끌이라고 말했다. 믿음이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환경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삶의 시련과 슬픔 가운데서, 당신의 믿음은 그분께 초점을 맞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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