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요약

[스크랩] 심플 라이프(3)

강인철 2009. 9. 11. 11:46

9장 교회와 함께 수행해야 할 단순한 삶

“내 영혼 안에 하나님을 향한 부드러운 호흡이 느껴진다. … 그러면서 내게 강한 열망이 생긴다. 성령의 움직임에 정통한 그 분의 가족들이 돈을 사랑하는 마음과 인간끼리 서로 영광을 구하는 영(靈)에서 구속(救贖)되기를, 그리고 그들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 분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도 임하는 모습을 늘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열망이다.” - John Woolman


개인의 노력도 좋지만 거기에는 언제나 제약이 있다. 혼자서는 불가능하지만 함께 수행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단순성에 대한 현대 교회의 노력에 가장 시급한 필요 중 하나는 교육사역이다. 내면적 단순성과 외면적 단순성의 가장 단순한 진리에 대해서조차 교회는 참담한 무지에 싸여 있다.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복음의 모든 면을 다 전하되 구체적으로 이 시대와 관련된 이슈를 제외한다면 당신은 복음을 전혀 전하지 않는 것이다.”


현대의 상황을 감안할 때 교회 교육사역에서 신중한 주목을 요하는 단순성의 차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우리는 단순성의 내면적 측면과 외면적 측면의 필수적인 연관성을 당당히 가르쳐야 한다. 둘째, 정의(正義)의 성경적․신학적 기초다. 우리는 선지자들의 메시지에 새삼 주목해야 한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선교사명에 관해서다. 우리의 생활방식을 단순화시키는 동인(動因)으로 말하자면 기독교 증인이 전무한 지상의 많은 ‘숨은 문화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명확히 일깨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넷째, 단순성과 평화, 거꾸로 말하면 탐욕과 전쟁의 관계다. 우리의 사치와 부의 축적이 혁명과 폐허의 씨앗을 뿌리고 있지는 않은가? 다섯째, 일(노동)의 교리 또한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일의 목표는 부와 소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공동선을 도모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단순성은 게으름과 일 중독 양 편 다 완강히 거부한다.


교회의 만성적 욕망은 하나님은 언제나 헌금을 더 요구하는 쪽으로 인도하시게 한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이 헌금을 덜 요구하는 쪽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수는 없는 일일까? 기독교 지도자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단 한번이라도 듣고 싶다. 모금 방법도 짚어보자. 필요를 충분히 알렸다면 기독교 모금이 할 일은 그것으로 끝이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령께서 하실 일이다. 액수를 불리는 심리기법을 동원함으로 성령의 사역을 어찌 가로챈단 말인가.


언어의 단순성과 관련하여 나는 교회 건물의 명명 문제 또한 제기하고 싶다. ‘열린 성경’이니 ‘참복음’이니 하는 모든 수식어에는 다른 곳들은 다 ‘닫힌 성경’이고 ‘가짜 복음’이라는 암시가 깔려 있다. 반면 ‘(도로명) 장로교회’나 ‘(지명) 침례교회’ 같은 이름은 우리 교회가 섬기고자 하는 지역에 대한 헌신과 정체감을 갖게 해준다. 나아가 우리의 교제 모임에 붙이는 이름도 조심해야 한다. 이름을 찾기 전에 실체부터 갖추는 것이 좋다. 어떤 사람은 ‘연합의 집’이라는 단체에 속해 있었지만 그 모임은 연합과 전혀 무관했다. 언어의 단순성은 존칭에 관해서도 관련 있다. 랍비(또는 교수나 박사)가 말하면 아무도 반박할 수 없다.(마 23:6~10) 전문 지식과 박사 학위만 살짝 내세우면 대개 모든 토의가 잠잠해진다. 그러나 내가 본 바에 따르면 권위는 존칭과 거의 무관하다. 목사에게 과도한 존칭을 사용하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성도는 사람을 높일 때에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예의는 지키되 과하지 않도록 하라.


교회의 단순성을 다루려면 건물과 건축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심미성과 실용성의 창의적 긴장을 살리기 위해 몇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건물의 기능의 문제이다. 둘째, 건축 사업이 위신을 위한 것인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정직히 살펴야 한다. 셋째, 장인과 기술자를 발굴하자는 것이다. 동료 교인들이 기도하며 정성스레 만들 수 있다. 넷째, 아름다움은 벽돌과 돌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이다. 꽃과 잔디, 나무, 잔잔한 분수가 그렇다. 다섯째, 그 지역의 지리적․문화적 정황에 적합한가를 고려해야 한다.


현대 교회 생활에서 현격히 빠져 있는 것은 아마 ‘장로'(eldering)사역일 것이다. 바울은 에게 해 밀레도 항구에 에베소 장로들을 모아놓고 성령께서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양떼를 잘 돌볼 것을 당부했다(행 20:17~35). 사랑으로 서로를 돌보는 사역은 그때 못지 않게 지금도 중요하다. 기독교적 단순성은 장로사역을 통해 진전된다. 교인수가 상당 규모에 달하면 목사 혼자서 목양사역을 감당할 수는 없다. 해답은 장로 은사를 받은 자들이(공식적으로 그렇게 지명되었는지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감독하며 지혜를 베푸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성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우리는 서로의 도움 없이 단순한 삶에 들어설 수 없다. 우리에게는 통찰력과 분별력을 갖춘 사람들의 기여가 필요하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8:13~14) 현대인의 귀에 얼마나 깜짝 놀랄 만한 원리인가. 한마디로 바울은 기독교 공동체 내의 경제적 균형을 제안하고 있다. 바울은 지금 정확한 평등화를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율법적 조치를 내놓기에는 그의 안에 복음의 자유가 너무 속속들이 배어 있다. 다만 바울은 남들이 어려워 고생하고 있는데 우리만 호의호식할 수 없다는 후한 나눔의 삶을 지적하고 있다.


극단적인 부와 극단적인 가난은 기독교 형제애에 수치가 된다. 기독교계의 불평등은 예증이 필요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에 사는 수백만의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이 의료와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간신히 아사(餓死)를 면하고 있으며, 아사를 면치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치욕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감히 우리가 등 따습고 배부르게 앉아 교회 의자 색깔에 대해 논쟁할 수 있겠는가? 이를 위해 교회에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우리는 교회 자체에 쓰는 돈만큼 남을 위해 쓴다는 목표를 예산정책으로 수립할 수 있다. 둘째, 경제적으로 어려운 특정 교회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셋째, 특별히 한 해를 희년으로 구별하여 특정 사역에 힘닿는 대로 최대한 많은 것을 드릴 수 있다.


10장 세상 변혁을 위한 단순한 삶

“혼잡한 우리 지구에 더 이상 내부 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 Alexander Solzhenitsyn


21세기 현실에서 우리는 세상을 실체 그대로 바라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문제의 어마어마한 규모에 질겁하며,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무력감을 느낄지라도 우리는 자기중심적 지역주의의 유혹에 절대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재림 전에 어차피 있어야 할 일이라는 아전인수격 주장으로 감히 세상의 굶주린 자들이 토해내는 신음소리에 귀를 막아서는 안 된다. 세상은 어떤 곳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아직 듣지 못한 이들이 30억에 달하며 25억이라는 사람들이 문화적으로 현재 기독교 증거사역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으로는 세계복음화라는 만고불변의 지상명령을 절대 성취할 수 없다. 


세상은 어떤 곳인가? 올해 미국에서 출생한 아이 1명이 소비하는 세계 자원은 인도에서 출생한 아이 20명분에 달한다고 한다. 고의적 낭비와 계획적 낭비는 미국 경제의 중요한 측면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먹고 지나치게 사고 지나치게 지으면서 지나치게 많은 유독 폐기물을 지상과 공중에 쏟아내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관련 핵심 이슈를 독특한 시각으로 보면서 지구촌의 난제 해결에 기여한다. 우리는 단지 사실과 숫자와 이슈만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정사(政事)와 권세를 상대하고 있다. 잔인한 독재자들과 불의한 정책과 타락한 제도 이면에 영적 정사와 권세가 있다는 뜻이다. 거꾸로도 사실이다. 제도와 구조는 성령의 능력으로 인간의 삶에 커다란 선과 복을 가져다주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악한 정사와 권세에 대항하여 어린 양의 평화전쟁에 임할 것을 촉구한다. 이 모든 문제의 핵심 이슈가 영적․도덕적인 것임을 알기에 우리는 엄청난 이점을 안고 있다. 우리는 금식기도와 단순성과 복종에서 비롯된 내면의 힘으로 이들에 대항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성경구절을 인용하거나 전통적 의미의 종교적 발언을 하고 다녀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구조악에 맞설 경우 우리는 신령한 자원에서 얻은 능력으로 맞서야 한다. 우리는 범사에 주님의 권세가 통치하기를 기도하며 세계 기아에 대한 국회 청문회에도 나가고 재개발 법안에 대한 지자체 청문회에도 나가야 한다. 우리의 말은 기도의 깊은 저수지에서 나와야 한다. 기도는 우리의 말에 겸손과 권위를 더해준다.

지금부터 우리는 어린양의 전선 중 단순성 훈련과 연관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슈에 주목하려 한다.


․ 세계복음화

인류가 처한 그 어떤 비참한 곤경보다, 그들이 창조주로부터 분리된 것과 회개와 믿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임할 영원한 죽음이라는 처참한 실체보다 더 극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화 사역에 신속히 헌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변명치 못할 죄를 짓는 것이다. 우리가 좀더 단순한 생활방식에 헌신하기만 한다면 이 새로운 선교각성의 물결에 부응할 경제적 자원은 얼마든지 확보될 수 있다. 선교학자 랄프 윈터는 미국 장로교인들이 장로교 사역자의 평균월급으로 살아간다면 현재 미국 선교비 지출의 3배에 달하는 20억 달러가 마련될 것이라고 말했다. 복음은 인종차별과 민족주의로부터 일체 자유롭다. 우리는 세계 복음을 지닌 세계 시민이다. 우리의 관심은 특정 민족국가의 이기적 이해관계가 아닌 이 땅 모든 백성들의 참된 행복에 있다. 기쁜 소식은 우리의 신실한 삶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가난한 자들에게 우리 마음을 닫는다면 그 분의 사랑을 선포할 수 없다.   


․ 세계기아

우리는 기아의 세계를 잘 모른다. 우리는 지금도 그 광경과 소리를 외면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기아의 끔찍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사실 중증 기아 피해자는 4억 6천만에 달한다. 내일이면 1만 명이 죽는다. 미국 인디애나 주의 1백만 돼지가 지구상의 10억의 인간보다 좋은 집에 살고 있다. 캘커타에만 60만의 영구 노숙자들이 있다. 이 일이 더욱 참혹하고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예방 가능하다는 점 때문이다. 세계기아 전문가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동의하는 사실이거니와 필요한 희생을 감수할 용의만 있다면 우리는 기아를 줄일 수 있다. 우리는 자원이 있다. 기술도 있다. 의지만 있다면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쉽게 될 일은 아니다. 굵직한 장애물이 길을 막는다. 기상 이변은 농경에 치명타를 가하며, 정치 지도자들의 변덕스런 결정이 수백만 인구의 경제 몰락과 기아로 이어질 수 있다. 불의한 사회구조는 세계기아를 영구화한다. 세계 도처에서 힘있는 특권 엘리트층이 토지와 돈과 정치적 결정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조정한다. 인구과잉은 세계 기아의 가장 무서운 적 중 하나이다. 월드비전(World Vision), 월드컨선(World Concern), 식량구호(Food for the Hungry)를 비롯한 기타 많은 기독교 구제기관이 구제하지만 이것으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세계기아에 대처하는 공공정책과 새로운 식량정책이 필요하다. 우리는 세계에 비축된 곡물을 수거하여 비상시 분배할 수 있는 세계식량은행을 지구상 도처에 설립할 것을 유엔에 건의할 필요가 있다. 기아에 대한 유명한 선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35,40) 이 말씀에 담긴 의미는 엄청나다. 예수 그리스도가 굶주리고 계시다는 것이다!


․ 한없는 욕심

제3세계가 무절제한 성장의 문제로 고생하고 있다면 선진국들은 무절제한 욕망의 문제로 고심하고 있다. 무제한 성장과 팽챙의 개념은 현대인의 의식 속에 깊이 배어 있다. 윌리엄 오펄스(William Ohphuls)는 “성장은 현대사회의 세속 종교다”라고 말했다. 팽창이 무조건 좋다는 개념은 경제학적으로 아담 스미스의 사색적인 연구, 특히 1776년 간행된 그의 『국부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팽창주의 경제는 세상에 대해 네 가지 중대 가정(假定)을 지니고 있다. 첫째, 사욕을 추구하면 반드시 궁극적 공동선(共同善)에 도달한다는 가정이다. 둘째, 천연자원에 거의 제한이 없다. 셋째, 경제적 사욕(私慾) 추구는 부득이 앞으로 태어날 세대들보다 현재 살아 있는 자들에게 더 높은 우선순위를 둔다. 넷째, 지속적 경제 팽창은 본래 선한 것이므로 모든 부정적 부작용은 단순한 외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거대한 산업공해는 불운한 부작용일 뿐 경제이론 자체에 의문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산업 디자이너 브룩스 스티븐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경제 전체가 계획적 노후화에 의존하고 있다.” 밴스 팩카드의 『폐기물 제조자』를 보면 고의적 낭비와 계산적 낭비가 미국 경제의 핵심 요소임을 더할 나위 없이 명백히 알 수 있다. 한 예로 굴지의 한 철강회사에서 개발한 납도금 철강을 쓰면 제품당 단 8센트의 비용만 추가할 경우 자동차 수명이 다할 때까지 쓸 수 있는 소음기를 만들 수 있다. 그런데도 자동차 회사들은 2년마다 갈아야 하는 소음기를 계속 장착하고 있다. 제품의 계획적 노후화로 안 되면 심리적 노후화가 가세한다. 심리적 노후화의 유일한 취지는 기존 물건의 용도가 다하기 전에 새 물건을 사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해마다 신차 모델을 내놓는다는 개념은 자동차 산업의 본산인 디트로이트에서 1920년대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기에 사실상 동일 제품의 끝없는 변형이 가해지고 있다. 우리가 구입할 수 있는 커피의 상표는 551가지나 된다. 샐러드 드레싱의 상표가 무려 177가지, 비누의 상표도 249가지에 달한다. 미국인은 현재 매년 총 3억 4천만 톤의 고체 폐기물을 쏟아내고 있다.


우리의 ‘성장병’이 종식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끝내 우리를 파멸시킬 것이다. 우리는 지구의 놀라운 자원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현행 소비율대로 라면 앞으로 75년 이내에 “세계에서 현재 사용 가능한 금속류 저장량의 절반이 모두 바닥날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이 예측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탐욕적 소비를 억제해야 한다는 점을 아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이유는 과소비는 “우리의 영적 활력을 갉아먹는 암”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의 긍휼에서 심장을 도려낸다. 우리를 물질만능주의자로 전락시킨다. 상처받고 피 흘리는 수많은 인류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한다. 나는 경제학자가 아니다. 성장경제를 이끄는 것도 어렵지만 고의적으로 경제 억제책을 취하면 더 큰 문제가 따른다. 그래서 나는 이 시점에서 기독교계가 경제학과 사회정의에 관한 국제대회로 모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 다국적기업

다국적기업은 좀더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데 최대 걸림돌이며 위험요소이자 동시에 좀더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실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최강의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 다국적기업의 독특성은 웬델 윌키가 말한 ‘하나의 세상’이라는 꿈을 실현할 이데올로기와 기술력을 겸비한 기관이 사상 초유로 등장했다는 데 있다. 다국적기업의 시대가 신제국주의적 지배를 초래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문명 황금기를 불러올 것인가? 아무도 확실히 모른다. 다만 두 가지만은 분명하다. 첫째, 다국적기업은 인류에 무한한 유익을 가져다줄 자원과 조직을 갖추고 있다는 것, 둘째, 다국적기업에 어떤 형태로든 엄격한 책임이 부과되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 변혁을 위한 문제들이 우리의 미약한 능력 바깥의 일이라고 여겨지기 쉬우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많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놓아야 한다. 둘째,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에게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셋째, 우리는 무력하게 착취당하는 자들의 대변자가 될 수 있다. 넷째, 우리는 구제기관의 선행을 후원할 수 있다. 다섯째, 우리는 구제를 넘어서 정치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 여섯째,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필력(筆力)을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강력하고 정직하고 따뜻하게 써야 한다. 일곱째, 사회문제에 기도 사역이 들어가야 한다. 수많은 사회제도에 횡행하는 마귀의 정사와 권세를 물리치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 장의 짤막한 내용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단순성을 실현할 수 있는 다양한 통로의 변죽만 울린 셈이다. 늘 우리 곁에 계시는 스승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생명의 복음을 인간 사회의 모든 제도와 구조에 적용할 길을 우리에게 계속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한다.

출처 : 상운교회
글쓴이 : 강인철목사 원글보기
메모 :